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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하고 쫀득한 미국사 이야기 - 케네스 C. 데이비스 지음

삼생지연 2021. 1. 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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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하고 쫀득한 미국사 이야기

케네스 C. 데이비스 지음

푸른숲주니어/ 2010 7



1. 멋진 신세계 - 황금 땅을 찾아서


필그림 파더스는 누구일까?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순례 시조). 혹은 줄여서 필그림스라고 하는 사람들은 1620년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신세계로 건너온 영국인 청교도들을 가리킨다. 이들이 정착한 메사추세츠의 플리머스는 뉴잉글랜드 지방 최초의 영구 식민지가 되었다. 청교도의 교리 중 일부는 영국 성공회(영국 국교회)의 교리와 충돌했다. 특히 복잡한 의전과 장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교회를 개혁하길 원했다. 일부 청교도는 단지 영국 성공회를 개혁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아예 영국 성공회와 완전히 갈라서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영국인은 누구든 국교인 영국 성공회를 믿어야 했으며,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국왕인 제임스는 청교도들에게 영국 성공회를 믿거나 영국을 떠나라고 강요했다, 필그림 파더스는 영국을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그들은 일단 네덜란드의 레이덴으로 피신했다가 종교의 자유와 더 나은 삶을 찾아 신세계로 건너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비용을 마련하려고 런던의 한 주식회사와 협상을 벌였다. 102명의 정착민 중 청교도는 35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더 나은 삶이나 모험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었다.


최초의 정착민들을 처음에는 ‘올드 카머스(Old Comers)’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포어파더스(Forefathers, ‘조상’이란 뜻, 그래서 필그림 파더스가 신대륙에 상륙한 날인 1620년 12월 21일을 기념일로 삼고 있다)’로 불렀다. ‘필그림 파더스’로 부르게 된 것은 그들이 도착한 지 200여 년이 지난 뒤부터였다. 필그림 파더스 중 한 명이자 플리머스 식민지의 총독을 지낸 윌리엄 브래드퍼드는 필그림 파더스의 모험 과정을 연대기 형식으로 작성해 귀중한 기록을 남겼는데, 거기서 ‘순례자(Pilgrim)’로서 네덜란드를 떠난 사람들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1820년에 행해진 200주년 기념식에서 웅변가 대니얼 웹스터가 필그림 파더스란 용어를 사용한 뒤, 이 용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메이플라워호에 탔던 사람들이 모두 청교도는 아니었으나, 브래드퍼드가 사용한 ‘순례자’란 용어가 새로운 정착민의 성격을 잘 묘사한 것 같아서 그들을 모두 ‘필그림 파더스’라 부르게 되었다.


2.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설탕과 우표가 미국 독립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식민지 주민을 폭발하게 만든 것은 설탕과 우표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 붙은 세금이었다. 5대호와 미시시피강 주변의 광대한 영토를 놓고 프랑스와 영국이 각자 자국을 지지하는 인디언들과 함께 싸운 프렌치-인디언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은 전쟁에 이기긴 했지만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 같았다. 왕과 의회는 식민지를 지키려고 벌인 전쟁이니만큼 식민지 주민들도 그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764년에 ‘설탕법’을 만들어 식민지에서 수입하는 설탕과 커피, 술을 비롯해 많은 물품에 세금을 매겼다. 이듬해에 만든 ‘인지 세법’은 한술 더 떠, 신문에서부터 카드에 이르기까지 종이에 인쇄된 것에는 모두 세금을 매겼다.


식민지 주민들은 어느 정도 부담을 지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5000킬로미터나 떨어진 영국에서 일방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참을 수가 없었다. 특히 영국 의회에 자신들을 대표하는 사람도 전혀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세금을 내라고 결정한 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부 식민지 주민은 2등 국민으로 대우받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자유의 아들단’이라는 애국 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종이 제품뿐 아니라 모든 영국 제품을 사용하지 말자는 운동을 벌이며 영국에 저항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결국 영국은 1766년에 인지세법을 폐지했지만, 영국의 부당한 처사에 반대하는 활동은 더욱 거세져 갔다.


보스턴 항구가 세상에서 가장 큰 찻주전자가 된 사연은?

1773년 12월, 선동의 대가인 새뮤얼 애덤스는 부자 친구인 존 핸콕과 함께 식민지 주민이 날마다 마시는 차에 붙은 세금과 부당한 판매 방식에 항의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보여 주기로 계획을 세웠다. 차를 가득 실은 영국 배 세 척이 보스턴 항구에 도착하자, 애덤스와 핸콕, 폴 리비어가 주동이 된 100여 명의 보스턴 주민은 모호크족 인디언으로 변장한 뒤 배에 올라 차 상자를 부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 시간 동안 난동을 부리면서 총 342개의 차 상자를 부수어 바다에 던져 버렸다. 많은 보스턴 주민이 몰려와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다.(‘보스턴 차 파티’라고도 부른다) 이 ‘차 파티’는 곧 다른 식민지들로 번져 갔다. 그런데 이 사건은 자유와 독립을 지지하던 애국파(휘그 당원)와 영국 왕에게 충성하던 왕당파(토리 당원) 사이를 확실히 갈라놓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 왕과 의회는 보스턴 차 사건에 크게 분노했다. 의회는 영국에 대한 반발과 저항이 심한 매사추세츠 식민지에 대해 한층 엄격한 법을 시행했다. 식민지 주민이 ‘참을 수 없는 법’이라 부른 이 법에 따라 주민들의 집회가 금지되었고, 식민지 주민은 영국인에게 음식과 주거지를 제공할 의무를 지게 되었으며, 물에 빠진 차를 모두 변상할 때까지 보스턴 항구가 폐쇄되었다. 항구가 폐쇄되자 보스턴 주민들은 대부분 일자리를 잃었다. 게다가 식량이 항구로 들어오지 못해 주민들이 굶주릴 위기에까지 처했다.


‘참을 수 없는 법’은 매사추세츠 식민지에만 적용되었으나, 나머지 12개 식민지 주민들은 자신들도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식민지들은 전에 없이 단결하기 시작했고, 보스턴에 식량과 그 밖의 물품을 보내주었다. 이제 애국파나 왕당파나 독립 전쟁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영국의 조지왕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주사위는 던져졌다. 식민지들은 굴복하든지 승리하든지 선택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3.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미국은 왜 독립 후 11년 동안 대통령을 뽑지 않았을까?

과연 대통령이 필요한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륙 회의 참석자들은 독립을 선언한 뒤, 새로운 국가에는 정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가 거의 독립 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는 주들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합체인 ‘연방’을 만들었다. 1781년에 채택된 연방 헌장에 따르면, 각 주는 연방 정부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대통령이 없었다. 연방 법원도 없었다. 연방 전체를 관리하는 정부 기구는 오직 대륙 회의뿐이었는데, 그마저도 큰 권한이 없었다. 각 주는 자체적으로 법을 만들었고, 심지어 11개 주는 자체 해군을 두었다. 또 각 주마다 고유의 화폐를 발행해 사용했다. 대륙 회의도 자체 통화를 발행했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 사용된 화폐는 무려 14종이나 되었다.


연방 헌장은 왜 폐기되었을까?

1787년 5월 25일, 연방 헌장을 개선하기 위해 로드아일랜드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참석한 대표 55명이 필라델피아에 모였다. 그러나 그들은 연방 헌장을 개선하는 대신에 그것을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기로 결정했다. 연방 헌장은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낳진 못했지만, 미국인에겐 더 강력한 연방 정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런 정부를 만들려고 대표들은 필라델피아에서 무덥고 긴 여름을 보내며 논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미국 정부의 권한과 시민의 권리를 규정한 연방 헌법을 만들어냈다. 연방 헌법은 많은 타협의 산물로 탄생했다. 미국은 다양한 주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국가 연합이었다. 북부 주와 남부 주, 큰 주와 작은 주, 노예 제도가 있는 주와 없는 주 등이 섞여 있었으니, 이해관계가 아주 복잡했다. 일단 논의가 진행되자, 독립을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은 각자가 생각하는 독립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 깨달았다. 누구에게 권한을 주고, 또 얼마나 주어야 할까?


한 사람이 0.6명으로 대우받은 까닭은?

노예인 경우엔 그랬다. 이 기묘한 계산법은 새 정부를 둘러싼 큰 논란거리 중 하나였던 의회의 의석 수 배분 과정에서 나왔다. 큰 주에 의석을 더 많이 주자는 안과 모든 주에 똑같은 수의 의석을 주자는 안을 둘러싸고 큰 논란이 벌어졌다. 큰 주들은 인구 비례에 따라 의석수를 배정하자는 버지니아 안을 선호했다. 반면에 작은 주들은 각 주에 똑같은 의석수를 배정하자는 뉴저지 안을 선호했다. 양측은 서로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그때 코네티컷 주의 로져 셔면이 대타협안(혹은 코네티컷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것은 의회를 상원과 하원의 양원제로 구성하고, 하원은 인구 비례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며, 상원은 각 주마다 대표를 2명을 배정한다는 안이었다.


그러자 인구를 셀 때 노예를 어떻게 취급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떠올랐다. 남부 주들은 헌법이 노예 제도를 금지하거나 제한하는 걸 원치 않았지만, 국회의원의 수를 결정하는 인구에는 노예를 포함시키고 싶어 했다. 헌법이 노예를 무시하길 원하면서도 인구 계산에는 넣어 주길 바라는 건 모순적인 태도였다. 그러나 노예 제도를 폐지한 주들은 남부 주들이 자기 편리에 따라 노예를 무시하기도 하고 인정하기도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많은 타협안이 만들어졌다. 그 중 하나는 하원 의원의 수를 결정할 때 노예를 0.6명으로 계산하기로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구를 셀 때 노예 5명을 3명으로 치는 것이다. 북부 주의 대표들은 이러한 타협안은 받아들였는데, 노예 제도가 곧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타협안을 수용하지 않으면 남부 주들이 헌법을 승인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에, 미국 연방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4. 인간은 커다란 짐승인가, 생각하는 육체인가


남부에서 노예 제도를 계속 유지했던 까닭은?

제헌 위원들이 헌법을 만들 무렵, 노예 제도는 곧 폐지될 것처럼 보였다. 담배 작물이 남부 지역의 토양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더 이상 노예를 써먹을 데가 없을 듯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뉴잉글랜드 지역의 공장들은 목화를 많이 공급받기를 원했지만, 목화를 재배해서 돈을 많이 벌기는 어려웠다. 목화씨를 일일이 손으로 빼내야 하는 등 노동력이 많이 드는 작업이라 수지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 엘리 휘트니가 1793년에 조면기(목화씨를 빼는 기계)를 발명하자, 한 사람이 하루에 목화씨를 빼는 양이 50배로 늘어났다. 목화재배는 한순간에 아주 수지맞는 사업이 되었다. 남부의 농장 주인들은 더 많은 땅과 값싼 노동력을 원하게 되었다. ‘목화왕’이 남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노예 제도는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전성기를 누렸다. 1820년부터 1850년 사이에 남부 지역의 노예 수는 거의 2배인 약 300만 명으로 늘어났다. 노예무역은 1808년에 금지되었지만, 밀수를 통해 들어오는 노예와 노예가 낳은 자식들로 노예 인구는 계속 증가했다.


5.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입니다


남북 전쟁은 정말로 노예제도를 둘러싼 싸움이었을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북부 사람들 중 대다수는 노예 제도 반대론자가 아니었고, 남부 사람들 중 대다수는 노예 소유주가 아니었다. 노예 제도도 큰 쟁점이긴 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오랫동안 농업 중심의 남부와 공업 중심의 북부 사이에서 점점 벌어진 경제적 차이와 생활방식의 차이였다. 북부에서는 공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져 갔고, 많은 사람들이 도시와 공장에서 일했다. 공장 노동자들은 생활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롭게 살았다. 남부에서는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이 권력과 부를 누렸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부와 생활 방식을 지키려고 싸웠다. 그들에게는 임금을 주지 않고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노예가 부의 원천이었다. 그렇지만 가장 큰 원인은 남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북부 사람들이 간섭하는 걸 남부 사람들이 싫어한 데 있었다. 남부 사람들은 각 주가 연방 정부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원한다면 얼마든지 연방을 탈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방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북부 사람들은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다.


노예 해방령으로 노예들은 자유를 찾았을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포고령은 공식적인 발표문이지만, 법은 아니다. 그렇지만 링컨은 전시 군통수권자의 권한으로 노예 해방령을 집행할 수 있었다. 링컨은 노예 제도를 폐지하지 않고서는 연방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해, 1862년 9월에 노예 해방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효력은 1863년 1월 1일부터 발생하도록 했다. 노예 해방령이 적용되는 땅은 반란을 일으킨 남부 지역에 국한되었는데, 그곳에는 북군의 군사력이나 통치력이 미치지 못했으므로 아무 효력이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만약 북군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남부 지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된다는 것이었다.


노예 해방령은 전쟁의 초점을 바꾸어 놓았다. 어떤 면에서는 노예 해방령이 북부 사람들의 사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연방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싸우려 했던 사람들도 노예들이 해방되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길까 봐 열심히 싸우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노예 해방령은 국제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북부가 세계적인 목화 공급원인 남부를 공격하는 것은 목화를 수입하던 유럽 국가들에게는 큰 타격이었기 때문에, 남부 연합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전쟁이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일종의 십자군 전쟁으로 바뀌자, 영국과 프랑스는 개입할 명분이 없어졌다.


6. 젊은이여, 서부로 가라


대륙 횡단 철도는 미국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유니언퍼시픽 회사와 센트럴퍼시픽 회사가 각각 대륙의 양끝에서 건설하던 철도가 1869년에 유타 주의 프로먼토리서밋에서 만나면서 비로소 대륙 횡단 철도가 연결되었다. 이 철도는 미국을 확 바꾸어 놓았다. 철도는 미국 땅에서 들소를 사라지게 했고, 인디언을 보호 구역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역에는 새로운 마을과 도시가 생겨났다. 또 열차 시간을 일치시키기 위해 시간대가 도입되었고, 각 도시의 시간도 이에 맞추었다. 열차는 5개월이 걸리던 여행을 불과 8일로 단축시켜 더 많은 이주민을 대평원 지역으로 몰려가게 만들었다. 뉴스와 농산물, 사람, 상품이 유례없는 속도로 오고 감에 따라 미국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통합되었다.


7. 세계 민주주의를 사수하라


미국은 어쩌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나?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 국민에게 어느 편도 들지 말라고 이야기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러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연합국 편을 들었는데, 1915년에 독일 잠수함이 영국의 정기 여객선 루시타니아호를 격침한 뒤에는 특히 그랬다. 이 사건으로 약 1200명의 승객이 사망했는데, 그중에는 미국인도 128명이나 있었다. 그러자 참전의 목소리가 거세졌지만 대부분의 미국인은 윌슨의 중립정책을 지지했다.


그런데 1917년에 독일 외무 장관 아르투르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에게 보낸 비밀 전보문이 신문에 실렸다. 치머만의 전보에는 독일이 미국의 중립을 유지하도록 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멕시코와 동맹을 맺어 미국을 공격하게 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었다. 그러면 그 대가로 재정적 지원과 함께 미국에 빼앗겼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의 땅을 되돌려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윌슨도 참전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윌슨은 이날 연설로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나중에 윌슨은 측근에게 “오늘 내가 한 연설은 우리 젊은이들의 죽음을 요구하는 메시지였네. 그런데 그런 박수갈채를 받다니 참 묘하군”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집무실로 돌아와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울었다고 한다. 한편 멕시코는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직후에 치머만의 제안을 거부했다. 


미국이 참전할 무렵, 연합국 측은 전쟁 자원이 거의 바닥나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참전은 전쟁의 분위기를 확 바꾸어 놓았다. 동맹국 중 맨 마지막으로 항복한 독일은 1918년 11월11일 오전 11시에 항복했다. 그래서 많은 나라는 11월 11일을 종전 기념일이나 재향 군인의 날(우리나라의 현충일과 비슷한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1920년대를 왜 ‘광란의 시대’라고 부르는 걸까?

1920년대는 이전의 미국 역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특별한 시기였다. 말하자면 현대가 시작된 시기였다. 영화, 라디오, 자동차, 비행기, 재즈 음악이 모두 이 시기에 등장했고, 새로운 소리와 영상, 활동, 기회를 만끽하면서 사람들의 생활 리듬도 폭발적으로 빨라졌다. 경제도 크게 발전했고, 주식시장도 활황을 거듭했고, 많은 미국인이 이전보다 훨씬 풍요로운 삶을 누렸다. 여윳돈과 여가 시간이 더 많이 생기자, 사람들은 놀이 공원을 만들고, 영화관으로 몰려갔다. 테니스와 골프도 치기 시작했고, 프로 스포츠 경기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포츠뿐만 아니라 콘서트, 뉴스, 엔터테인먼트, 광고가 처음으로 라디오를 통해 미국인의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학도 인기가 높았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위대한 개츠비에서 ‘재즈 시대(피츠제럴드가 만들어 낸 용어)’의 파티 분위기를 잘 묘사했고,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내놓았다. 뉴욕 시의 할렘에서는 흑인 문학과 음악, 미술이 활짝 꽃을 피웠는데, 이것을 ‘할렘 르네상스’라 부른다. 


8.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대공황이란 무엇인가?

미국 역사상 최대의 공황인 대공황은 1929년 10월 24일 뉴욕 주식 시장의 대폭락과 함께 전 세계로 확대된 사건이다. 전체 노동 인구 중 4분의 1에 해당하는 1300만 명 이상이 일자리를 잃었다. 일자리가 있는 사람도 급여가 크게 줄었다. 은행이 5,000군데 이상 파산하면서 예금을 했던 사람들의 돈도 증발하고 말았다. 수많은 기업과 공장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지 못해 망했다. 이렇게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제품을 살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고, 공장들은 제품 생산을 더욱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악순환은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사상 최대의 대공황이 일어난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이전의 경기 침체기에는 대부분의 인구가 농촌 지역에 살았던 터라 최소한 농작물을 재배해 먹고살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시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기계가 인력을 대체하면서 공장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기계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변화를 가져왔다. 새로운 장비와 기술은 공장을 더 효율적으로 만들었다. 회사를 더 키우고자 하는 경영자들은 주식, 즉 회사 소유권 중 일부를 팔았다. 그 회사의 실적이 좋으면 주식을 산 주주들은 그만큼 이익을 배당받았다.


1920년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주가가 크게 올랐다. 일부 주식은 며칠 만에 가격이 두 배 혹은 세 배까지 뛰기도 했다. 많은 미국인은 주식 시장의 미래를 아주 밝게 보고 은행에 저축해 둔 돈을 빼내거나, 아니면 대출을 받아 주식을 샀다. 그런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주식에 투자를 하다 보니 주가가 비정상적으로 치솟게 되었다. 주식을 산 사람들은 부자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들의 손에 쥔 재산은 종이에 표시된 금액에 지나지 않았다. 1929년 10월 29일(이날을 ‘검은 화요일’이라 부른다)에 그동안 마냥 부풀어 오르기만 하던 거품이 마침내 터졌다.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갑자지 너도나도 주식을 팔려고 했지만, 사려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모은 저축을 하룻밤에 날리고 빚만 잔뜩 짊어지게 되었다. 1920년대 광란의 파티는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대공황의 원인은 주가 대폭락?

아니다. ‘검은 화요일’의 주가 대폭락은 대공황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을 뿐. 그 원인은 아니었다. 주가 대폭락은 경제가 병들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일 뿐이다. 문제의 원인은 전쟁이 끝나고 경기 호항 때 기업들이 더 큰 공장들을 마구 지으면서 제품을 엄청나게 많이 생산한 데 있었다. 그런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외상으로 제품과 주식을 마구 사들였다. 농민도 제1차 세계 대전 때 식량이 모자라는 유럽 사람들을 먹여 살리느라 생산성을 크게 높여 잉여 농산물을 많이 생산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농산물의 생산량은 줄어들지 않았고, 그러자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많은 농민들이 풍작으로 농산물을 잔뜩 쌓아 두고도 망했다. 농민들은 공장에서 쏟아 내는 제품을 다 사줄 수 없었고, 공장 노동자들은 잉여 농산물을 다 사줄 수 없었다. 이처럼 상황이 심각해져 가는데도 정부는 이러한 경제 상황을 관리하거나 조정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미국의 뉴딜 정책 덕분에 대공황에서 벗어났나?

아니다. 뉴딜은 약 400만 명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자 벌인 여러 가지 사업계획이었다. 그것이 큰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러고 나서도 900만 명이나 되는 실업자가 남아 있었다. 대공황을 끝내려면 뉴딜보다 좀 더 규모가 큰 무엇이 필요했다, 불행하게도 그 구세주는 제2차 세계 대전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에 유럽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은 1941년에 전쟁에 뛰어들었는데, 1943년이 되자 거의 모든 사람이 일자리를 얻었다. 그럴 수밖에. 전쟁기간 중에 미국은 항공기 29만 7000대, 탱크만 8만 6000대, 선박 7만 6000척을 비롯해 그 밖의 차량과 무기, 탄약을 엄청나게 많이 생산했으니까.


9.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960년대 초, 민권 운동가들은 어떤 활동을 펼쳤을까?

1963년에 마틴 루터 킹이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도시”인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열었을 때에 격렬한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시내의 상점들에서 흑백 분리를 폐지하라고 요구하면서 평화롭게 행진을 했지만, 경찰은 곤봉과 개, 최루탄, 물 분사로 맞섰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연행돼 가자, 민권 운동 지도자들은 어린이 지원자들에게 시위를 계속해 달라고 부탁했다. 어린이 수백 명이 용감하게 시위에 나섰지만, 그들 역시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경찰에 끌려갔다. 텔레비전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미국인과 전 세계 사람들은 크게 분노했다. 경찰의 가혹한 진압 작전은 오히려 역효과만 내서, 시위를 멈추게 하기는커녕 시위대에 대한 연민과 지지만 키워주었다.


버밍햄 사태에 자극을 받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모든 공공시설에서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국가적 차원의 공민권법 제정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 법안의 통과를 지원하고자 킹 목사와 민권 운동 지도자들은 워싱턴에서 평화 행진 대회를 열었다. 이 행진에는 전국에서 흑인과 백인 약 25만 명이 참가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파가 모인 민권 운동 행사였다. 그날 행사가 끝날 무렵, 킹 목사는 링컨 기념관 앞의 계단에 서서(링컨이 노예 해방령을 선포한 지 정확하게 100년 뒤였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란 유명한 연설을 했다. 공민권법은 1964년 7월에 통과되었다.


10. 다시 미국의 세기가 시작되다


베트남 전쟁 때 나타난 매파와 비둘기파란?

‘매파’는 전쟁을 지지한 사람들, ‘비둘기파’는 평화를 원한 사람들이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역사상 국민의 지지를 가장 적게 받았고, 국론을 크게 분열시킨 전쟁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지 않고 오래 계속 되자, 비둘기파의 수가 점점 증가했다.


대학들에서 반전 시위가 시작되어 이내 나라 전체로 퍼져 나갔다. 1968년에 베트콩(남베트남에서 북베트남에 동조해 게릴라전을 펼치던 공산주의자들)이 구정 공세를 감행하기 전에는 대부분의 미국인은 존슨 대통령과 전쟁을 지지했다. 구정 공세란 개전 이후 베트콩이 펼친 최대 규모의 공세로, 비록 미군이 베트콩의 공세를 격퇴하긴 했지만, 많은 미국인은 장군들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끝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위대는 “헤이, 헤이, 린든 존슨, 오늘은 얼마나 많은 젊은이를 죽였나요?”라는 구호를 외쳤다.

국내외의 비판과 반대에 부담을 느낀 존슨은 재선에 도전하지 않고, 1969년 1월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그해까지 약 3만 4,000명의 젊은이가 징집을 거부했다. 일부 젊은이는 징집영장을 되돌려 보내거나 불에 태웠다. 징집을 피하려고 캐나다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1970년, 오하이오 주의 켄트 주립 대학교에서 반전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 4명이 주 방위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지자,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은 더욱 거세졌다. 이듬해에 《뉴욕 타임스》는 미국 정부가 베트남과 그 주변국들에 군사적 개입을 계속 확대해 오면서도 몇 년 동안 국민에게 그 사실을 감쪽같이 속여 왔다고 폭로했다. 국방부의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가 알려지자, 반전 여론과 운동이 더욱 거세졌고, 결국 닉슨은 미군을 베트남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냉전을 결국 끝났을까?

그렇다. 1972년에 닉슨이 중국과 소련을 방문하면서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공산주의 국가들 사이의 관계에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닉슨은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소련과 데탕트 시대를 열었다. 데탕트(detente)란 적대 관계에 있던 국가들 사이에 지속되던 긴장이 풀려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을 말한다. 미국은 소련과 관계 개선을 도모하면서 핵무기 감축 협정을 비롯해 여러 가지 협정을 맺었다. 양국은 1972년부터 1979년까지 전략 무기 제한 협정(SALT 1과 SALT 2)을 체결해 핵무기를 실어 보낼 수 있는 탄도 미사일의 수를 제한하기로 합의했다.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중거리 핵전력 조약에 서명함에 따라 군비 경쟁을 줄이는 노력에 또 하나의 중요한 진전이 일어났다. 이는 미국과 소련 양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탄두 장착용 중거리와 단거리 지상 발사 미사일을 모두 폐기하기로 합의한 핵무기 감축 협정이었다.


9 ∙11 테러 때 비행기를 납치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9∙11 테러 직후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고, 수십 개 나라가 미국의 의지에 동참했다. 설득하는 데에는 큰 노력이 필요 없었다. 미국을 방문하거나 미국에서 일하고 있던 자국 시민이 9∙11테러에 희생당한 나라가 80여 개국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9∙11테러 공격을 감행한 테러 단체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였다. 알카에다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선 이슬람 의용군(무자헤딘) 조직에서 생겨났지만, 그 뒤에 걸프 전쟁을 계기로 반미 투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 계열이 속하는 알카에다는 미국의 문화와 가치(자유, 다양성, 현대성, 자기 이익 추구, 정교 분리 둥)가 자신들이 믿는 이념과 충돌하기 때문에 특히 미국을 싫어했다. 미국 정부는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알카에다 조직을 9 ∙11테러 공격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했다. 


미국은 10월 7일 빈 라덴이 아프가니스탄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던 탈레반 정권에 빈 라덴의 신병 인도를 요구했다. 탈레반 정권의 지도자 오마르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자, 미국은 곧 아프가니스탄을 맹렬하게 폭격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의 막강한 화력 앞에 탈레반은 변변한 저항도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탈레반 정권은 축출됐으며, 오마르는 파키스탄 접경지대로 피신했다. 그러나 미국의 침공 이래 5년이 지나도록 미군은 빈 라덴을 잡지 못했으며, 오마르는 건재한 채 오히려 남부에서 탈레반을 재규합하고 있다. 미국이 빈 라덴을 ‘적법한 절차’가 아닌 전쟁으로 죽이려 하고, 무고한 아프간인까지 살상한 점에 대해서는 비판이 일었다. 특히 타국의 집권 세력인 탈레반 정권을 무력으로 무너뜨린 데 대해서는 비판이 거세었다




미국에서 흔히 영웅으로 미화되는 워싱턴과 링컨

루스벨트와 같은 인물들 

역시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다

그들도 때로는 모순으로 가득 찬 말이나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미국사를 읽다 보면

어떤 순간에는 긍지와 찬탄이 쏟아져 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냉소와 역겨움이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이러한 갖가지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애와 모순과 결점을 지닌 이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다는 사실이 매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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