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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읽어주는 남자 - 박근형 지음

삼생지연 2021. 3. 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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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읽어주는 남자 박근형 지음 명진출판 / 2010년 6월

 

 

새로운 프레임으로 들여다보기

 

중국인은 시공간 개념이 우리와 다르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시공간 개념: 한국인과 중국인은 시공간 개념이 다르다. 달라도 아주 확실하게 다르다. 서울에서 일 년 동안 교환교수로 근무하던 중국인 선생님이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 중문과 학생들과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교수님, 내일은 뭐 하실 거예요? 내일은 오랜만에 부산에 있는 친구를 만나서 차 한잔 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바로 서울로 돌아오려고요. 친구와 차 한잔 하려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다 온다고? 우리나라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없지는 않겠지만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교수님, 그럼 내일 뭐 타고 부산에 가실 거예요? 고속버스 타고 갔다 오려고요. 그러자 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다. 버스 타면 피곤하니까 비행기 타고 다녀오세요. , 그보다는 KTX가 낫겠네요. 학생이 그렇게 말하자, 그 중국인 교수님은 빙그레 웃었다. 왜 그랬을까? 중국인에게 하루 동안 서울과 부산을 버스로 왕복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상하이에서 우루무치까지 72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사흘이나 걸리는 시간이다. 또 우루무치에서 카슈가르까지 48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이틀이 걸리는 건 대단한 일이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대한민국의 96배이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중국이 한국의 30배 정도 넓어 보이지만, 수학적으로 계산하면 중국 땅은 대한민국의 96배이다.

 

관광차 한국에 한 번 다녀왔다는 중국인을 만났더니 이렇게 말했다. 우리 중국은 너희보다 100배는 더 넓어. 우리 입장에서 기분은 나쁘지만 사실이다. 기차를 타고 만주벌판을 한번 달려보면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큰 우물 안의 개구리들: 땅덩어리가 넓고 인구는 가장 많다! 이것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인구가 워낙 많으니까 그 안에 별의별 사람들이 존재한다. 비율로 따지면 작은 숫자이지만, 절대수로 따지면 많은 인재들이 나온다. 바로 이들이 중국을 움직인다. 그리고 13억 인구는 곧 넓은 시장을 의미한다. 그래서 1978년 이후 중국 정부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을 때 다른 나라의 자본을 쉽게 끌어들일 수 있었다.

 

13억 명에게 손수건 하나씩만 팔아도 그 이윤이 얼마야? 사실 이것은 단순한 계산이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외국 상인들이 적지 않았다. 지구 안에서만 보면, 중국이라는 곳은 분명히 땅이 넓고 사람이 많은 곳이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대단히 매력적인 시장이다. 중국인 스스로도 우리나라는 넓다고 생각한다. 이 말 자체는 맞지만, 바로 이것이 함정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너희는 큰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이야.

 

우물이 너무 넓어서 그 속에 사는 개구리는 우물이 아니라 바다에 살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넓어도 우물은 우물일 뿐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중국인은 자기 나라가 넓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만족하며 사는 편이다. 그래서 중국인 중에는 평생 한 번도 바다를 직접 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자기가 속한 성()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하고 살다 죽는 사람도 많다. 사실 중국인은 바다를 모른다. 산둥 성, 푸젠 성, 광둥 성 사람이라도 어부가 아니면 바다를 잘 모른다. 그래서 이들은 명태와 고등어도 구분하지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생선을 본 적도 없고 먹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밀물과 썰물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자기 나라가 너무 크니까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이전에 비해 외국에 드나드는 중국인이 많아졌지만, 인구 전체의 비율을 보면 적은 숫자에 해당한다.

 

중국은 땅이 넓지만 정작 중국인들은 참으로 비좁게 산다. 중국 면적이 대한민국의 96배인 만큼 인구도 우리보다 20배 가량인 13억 명이 넘는다. 실제 인구는 15억 명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게다가 중국을 절반으로 나눴을 때 서쪽 지역은 사람이 살기 힘든 환경이 대부분이다. 그곳은 물이 없는 초원이거나 사막 또는 고산지대이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무리 넓어도 실제 적정 인구가 2,000만 명인 것처럼, 중국의 서쪽 지역은 사람이 많지 않다. 내몽골 역시 사람이 별로 없다. 이렇게 따지면 전 국토의 40퍼센트를 제외한 60퍼센트의 면적에서 13억의 인구가 살아야 한다. 중국이 넓은 나라인 것은 맞지만, 인구와 면적 비율로 따져보면 좁은 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인 1898, 우리나라 총 인구수는 520만 명이었다. 이 인구가 남북한 합친 면적에서 살았으니까,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국이 비좁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면적의 절대적 수치는 크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인구수를 따져보면 결코 땅덩어리 넓은 나라라고 자랑할 일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중국인들은 좁은 공간에 잘 적응하고 산다.

 

냉철함은 없으나 자존심이 강한 중국 젊은이들

 

소수민족의 정체성이 사라진다: 중국에서 텔레비전을 틀면 이런 말이 많이 나온다.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우리 중화인민공화국은……. 56개 다민족 국가. 56개의 다른 민족이 모였지만, 우리 모두 중화민족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것도 함정이다. 중국인의 92퍼센트가 한족이기 때문이다. 다른 55개 민족은 들러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의 정치체제가 확실하게 증명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조는 모든 것이 이중구조이다. 예를 들어 시마다 시장이 있다. 그러나 실권은 시의 당위원회 서기가 갖고 있다. 자치구도 마찬가지다.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지역을 ○○민족자치구라 말하고, 자치구보다 작은 지역은 ○○민족자치주라고 말한다. 티베트는 티베트 민족자치구이고, 조선족은 조선족 민족자치주이다.

 

자치구에도 주석이 있는데, 주석 자리는 모두 소수민족이 차지한다. 그러나 실권은 자치구의 당위원회 서기에게 있으며, 이 서기라는 직책은 반드시 한족이 맡는다. 절대로 해당 소수민족에게 서기 자리를 주지 않는다. 나는 중국의 한족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56개 민족이 평등하다면, 왜 티베트 사람은 국가주석이 될 수 없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될 수 없죠? 중화인민공화국의 성격에 대해 엄밀히 말하자면 결코 다민족이 평등한 나라가 아니다. 중국은 92퍼센트의 한족이 8퍼센트의 소수민족을 지배하는 나라이다. 또한 8퍼센트의 소수민족에게는 결코 힘을 나눠주지도, 실어주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소수민족의 젊은이들은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한 채 한족에 동화되고 있다.

사실 나는 그들에게 많이 실망했다. 특히 공부하는 젊은 지식인들이 냉철함이 결여된 주관적 사고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이런 주관적 사고를 가진 젊은이들이 많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이런 젊은이들이 많으면 그 나라의 미래는 밝지 않다.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이런 젊은이들이 많으면 그 나라의 미래는 밝지 않다. 젊은이들이 냉철해야 그 나라의 미래는 비전이 있다. 오늘날 세계무대 속에서 예전과 달리 점점 구겨지고 있는 일본을 보라.

 

인문학적 프레임으로 본 중국 경제

 

누구든지 먼저 부자가 돼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공산주의 이론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경제문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산당군이 국민당군을 대륙에서 몰아냈다.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피난을 갔고,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남겨둔 채 중국은 공산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1949 10 1,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탄생했다. 이 시점부터 마오쩌둥이 중국 전체를 이끌었다. 마오쩌둥은 뛰어난 시인이면서 역사학자이고, 사상가이자 병법의 대가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천재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몽상가였다는 점이다. 그는 공산주의 사상만 있으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천재성은 있으나 몽상가였던 한 지도자의 망상이 결국 나라 전체를 지옥으로 빠뜨린 것이다.

 

그는 인민들에게 공산주의 사상투쟁을 부추겼다. 공산주의 사상이 확실한지의 여부가 살면서 가장 중요한 가치 기준이었다. 그 기준에 의해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는 풍토를 조장했으며, 그 결과 매일 인민재판이 벌어졌다. 공산주의 사상이 확실하지 않으면 지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었다. 그 결과 중국 농촌은 기존의 경제력을 거의 상실했다. 생각해보라. 노동을 통해 생산물을 얻어내야만 경제적 토대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해야 할 사람들이 사상투쟁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경제적 토대가 무너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들 근로의욕도 없고 생산성도 없었다.

 

그렇다고 도시의 경제력이 유지되었던 것도 아니었다. 도시에서도 사상투쟁은 계속되었다. 기존의 사업가들도 공산주의 사상이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인민재판에 넘겨졌다. 구타 끝에 죽는 사람도 많았고, 수치심을 못 이긴 수많은 자본가들은 자살을 선택했다. 이렇게 도시에서도 기존의 경제력은 활력을 잃었다. 1952년까지 중국은 이렇게 돌아갔다. 일종의 사상 청소 기간이었던 셈이다. 1953~1957년에 제1 5개년 경제계획을 실행했고 이것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그 이유는 공산당이 강력한 통제경제를 실행했고, 인민공화국 수립 직전에 중국의 서기경제가 너무 엉망이어서 목표수치를 낮게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농민들을은 공산주의 이념에 합당한 합작사라는 협동조합 형태로 재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순차적으로 실행되었다.

 

첫 단계는 호조조였다. 농촌을 6~7가구로 묶어 농기구와 가축을 공동으로 출자하고 공동으로 노동하는 방식이었다. 이 호조조를 어느 정도 정착시킨 뒤 그것을 조금 더 발전시킨 형태가 초급합작사였다. 농촌을 30~50가구로 묶어 농기구와 가축을 공동출자하고 공동노동을 하는 생산방식이었다. 각 농가는 토지도 이 합작사에 출자했지만, 헌납한 경지에 대한 권리는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섞여 있는 계약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합작사는 초급 형태이다. 이제 공산주의적 요소가 강한 고급 형태로 나가는 순서를 밟아야 한다. 1955년부터 중국 정부는 토지별 배당을 줄이고 노동 배당을 늘리기 시작했다. 이제 기존에 얼마나 많은 땅을 갖고 있었는지에 상관없이 200~300가구를 묶어 같이 노동해서 할당량을 채우고, 합작사에 저축도 한 뒤에 자기 몫을 가져가는 방식이다. 이것이 고급합작사이다. 그러나 고급합작사도 자본주의 요소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 농민은 자신이 합작사에 헌납한 토지에 대한 법적인 권리를 가질 수 있었고, 개인이 이용할 수 있는 자류지(自留地)도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바로 이 자류지 개념이다. 사람은 결국 이기적인 동물이다. 공동으로 경작하는 땅보다 자기 땅에서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다. 고급합작사는 자류지가 합작사 전체토지의 5퍼센트를 넘을 수 없도록 규정했지만, 농민들은 자류지에서 더 열심히 일했다.

 

도시에서는 기존 노동자와 지식인들을 단위(單位)로 묶었다. 단위라는 말은 한국어와 중국어가 한자는 같지만 뜻이 다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하는데, 중국어에서 단위는 육아와 의료 및 기본적인 사회보장까지 모두 책임지는 직장을 뜻한다. 농민들은 자류지에 곡물보다 몇 배 비싸게 팔 수 있는 채소를 재배했다. 1956년 농촌 수입의 무려 20~30퍼센트가 이 자류지에서 나왔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통계조사가 나왔다. 중국농민들은 모든 돼지 가운데 83퍼센트를 자류지에서 나오는 채소의 잉여수익으로 사료와 채소 찌꺼기를 구입해서 사육했다. 닭과 오리도 마찬가지였다. 가축은 다시 귀중한 거름을 생산해서 자류지의 과일과 채소 수확량을 더욱 늘려줬다. 1956년과 1957년에 농민들은 1950년대 초반보다 더 잘 먹고 잘살 수 있었다. 도시에 사는 공업노동자들은 자류지에서 생산한 돼지와 닭, 오리, 달걀 들을 사먹었다. 전체 생산량은 늘어났고 사람들의 생활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는 공산당 정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정부가 나서서 농촌에 사적 생산을 증가시키게 되었고, 그 결과 새로운 부자 농업인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 사는 세상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악착같이 잘 잡아서 뭔가 이뤄내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중국의 농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악착스런 사람들이 기회를 잡으며 치고 올라와서 부유한 농민계급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계급을 없애자는 것이 공산주의혁명이었는데, 농촌에서 새로운 부유계급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냥 놔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중국 정부는 대응책을 만들었다. 그것이 인민공사(人民公社)였다.

 

중국 전역에 있는 합작사 740만 개를 인민공사 2 6,000개로 통합했다. 인민공사는 모든 농민이 군대식으로 움직이고, 농촌 여성들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키는 조직이기도 했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조금이나마 갖고 있는 고급합작사를 극복한 진정한 공산주의 농촌조직으로, 자류지도 없고 평균 5,000가구를 묶어 공동생산과 공동분배를 했다. 구성원들 전원이 공공식당에서 무료로 식사하고 공업, 농업, 상업, 학교, 군대가 하나인 공산주의 공동체, 이것이 인민공사이다.

 

강철 만들기 운동으로 경제는 더 피폐해지고: 그런데 곧 만화책에서나 일어날 법한 사태가 벌어졌다. 바로 대연강철이라는 사건이다. 1958 8월에 중공중앙(중국공산당 핵심 세력들)은 베이다이허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개최하고,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가 전 당과 전 인민에게 강철 1,070만 톤 생산을 위해 분투할 것을 호소한다는 회의공보(會義公報)를 발표했다. 이 공보를 통해 1958년에 철강 생산량을 1957(553만 톤)의 두 배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목표가 매우 비현실적인 수라는 것이다. 회의가 있기 전, 중국이 그해에 생산한 철강은 450만 톤에 불과했다. 이는 앞으로 4개월 이내에 철강 620만 톤을 생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중국 전역에서 전 인민 강철 만들기 열기가 퍼질 수밖에 없었다. 1958 7월 말 시점에 강철을 만드는 노동력은 몇 십만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8월 말쯤 몇 백만 명으로 불어나더니 9월 말에 5,000만 명으로 늘어났고, 10월 말엔 6,000만 명, 1958년 말에는 무료 9,000만 명이 강철 만들기 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용광로도 늘어났다. 소형 용광로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7월에 3만개였던 것이 10월 말엔 몇 백만 개에 이를 지경이었다. 또 제철용 초탄이 부족해서 일반 석탄으로 대체했고, 일반 석탄이 부족해지자 나무를 베어 불을 지폈다. 고품질 철광석이 부족해 저품질 철광석으로 대체했고, 저품질 철광석마저 부족해지자 집에서 쓰는 철기그릇까지 다 쏟아부었다.

 

그 결과 1958년 겨울에 중국은 강철 1,108만 톤과 생철 1,369만 톤을 생산해 목표 초과달성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그처럼 무지막지한 생산운동의 대가는 엄청났다. 강철 1,108만 톤 중에서 800톤만 합격품이고 나머지는 불합격이었다. 생철 1,369만 톤 중에선 아무 쓸모 없는 토철이 무려 416만 톤을 차지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한 사태는 강철 만들기 운동에 참여한 수천만 명이 별 생각 없이 전국의 숲을 마구 없앴고, 이로 인해 어마어마한 생태계 파괴가 일어났다. 오늘날 중국 사막화 현상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그들이 대연강철이라고 부르는 무식한 강철 만들기 운동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자신의 몽상을 계속 밀고 나간 것이다. 그의 생각이 옳다면 이제 공산주의에 가장 알맞은 인민공사로 전국 농촌을 통합했으니 엄청난 실적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 반대였다. 현실에서는 공산국가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노동의욕이 떨어지고 생산량은 더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간부들은 늘 목표치보다 초과달성했다고 보고했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사상이 부족한 사람으로 찍히고, 그 결과 숙청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인민공사로 형태를 바꾸고 난 이후 농촌의 생산량이 2, 10, 심지어 수십 배 늘어났다는 놀라운 보고가 중앙정부로 계속 들어왔다. 심지어 공산당 간부들도 이게 말이 되나? 하는 의심을 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도 바른 말을 하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1958~1960년에는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이 있었다, 오늘날 중국 정부는 1959~1961년을 3년 자연재해(自然災害)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3년 동안 중국에는 큰 자연재해가 없었다. 이 비극의 원인은 인재(人災)였다.

 

비극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대연강철 기간 동안 농민들은 농사를 못 지었다. 이제 자류지도 없어졌기 때문에 노동의욕도 모두 떨어졌다. 소출이 급감하고 인민이 굶어죽는다. 노동력이 감소한 만큼 소출은 더욱 줄어든다. 더욱 많은 사람이 굶어죽는다. 그런데 간부는 자기가 살기 위해서 목표량을 초과달성했다고 계속 허위보고를 한다.

 

아무리 허위보고라 해도 실물과 통계균형을 어느 정도 맞춰야 한다. 게다가 허위보고를 하는 만큼 세금으로 바쳐야 하는 공출량도 늘어난다. 따라서 간부들은 농민들이 먹어야 할 식량까지 모조리 가져가버린다. 그래서 더욱 많은 농민들이 굶어죽는다. 결국 참지 못한 농민들이 인민공사를 탈출했지만 군인들에게 잡혀서 사살되었다. 농촌은 점점 황폐화되고 외국에서 식량을 수입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도시인들의 배급량도 줄어들고 더욱 많은 사람이 굶어죽는다.

몽상가 마오쩌둥이 저지른 일 수습하기: 그 이후 최고 권력자 마오쩌둥의 권력은 약화되고, 1962년부터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천윈 등 당의 중심세력들이 실물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 기본적인 건설투자 항목을 3분의 2 이상 삭제하고, 중공업 생산품 계획지표를 5~20퍼센트로 삭감했다.

 

1962 8월에 덩샤오핑은 반동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명예를 최대한 회복해주었는데, 그 수가 무려 600만 명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개혁이 포산도호였다. 이것은 인민공사라는 간판을 유지하되, 집단생산이 아니라 각 농가가 농업생산을 책임지면서 초과분은 그 농가 소유가 되도록 해주는 제도이다. 덩샤오핑은 이 제도를 찬성하며 그가 즐겨하는 말을 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

 

1962년부터 중국 경제는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여전히 몽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사상과 완전히 다른 정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개혁파들의 힘을 완전히 눌러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몽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결국 그 최고점에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 일어났다. 마오쩌둥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년 동안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학생들에게 모든 요괴가 변한 것을 일소하라!고 교시했다. 모든 옛날 것들을 다 부숴야 한다고 꼬드겼다. 그리고는 완벽하게 공포 분위기를 만들어 자기의 정적들을 모두 숙청했다. 그뿐 아니라 기존의 모든 문화유산을 최대한 파괴했다. 이처럼 경직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학생이 선생님을 구타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동으로 고발하는 풍토가 만들어졌다. 친구끼리 마음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고, 전 인민의 인성이 완전히 파탄나 버렸다. 그러니 경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조금 회복되던 거시경제가 완전히 침체기로 빠져버렸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죽었다. 이제 살아남은 지도자들 중에서 누군가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중국을 이끌어야 했다. 덩샤오핑이 그 임무를 맡았다. 그는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였다.

 

덩샤오핑은 1977 7월 제10기 당중앙위원회 제3회 총회에서 당의 실세로 떠올랐다. 1978 12월의 제11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을 결정했고, 1980년에 이미 늙은 자신을 대신해 개혁개방 실무를 주도할 젊은 인재를 기용했다. 이들이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이었다.

 

이제 더 이상 나빠질 수가 없을 정도로 파탄이 나버린 중국 경제를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산당 정권에 위협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자본주의 국가로 탈바꿈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덩샤오핑은 선부론을 내세웠다. 정부에서 밀어줄테니 누구든 상관없이 일단 자유롭게 부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 선부론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이 경제특구였다. 경제특구라는 아이디어는 현재 국가부주석인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덩샤오핑에게 건의한 것이다.

 

지금 중국은 자본이 없으니까 외국자본을 최대한 끌어들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외국자본가들에게 많은 혜택과 자유를 주는 특정지역이 필요합니다. 이런 지역을 우선 만드는 게 급합니다. 경제특구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처음에 네 곳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가 홍콩 옆에 붙어 있는 진흙뻘의 어촌, 바로 선전이었다.

 

 

부자는 되었지만 불안한 부자가 되었다

 

경제특구 실험의 성공: 1979년과 1980년에 지도자 덩샤오핑이 누구든지 먼저 부자가 돼라고 했던 것은 사실상 동쪽 연해 지방이 먼저 부유해진다는 것을 뜻했다. 중국은 서쪽으로 갈수록 물류비가 올라가기 때문에 외국자본 입장에선 동쪽의 항구도시가 매력적이었다. 선전은 홍콩 바로 옆에 있으므로 외국 회사와 기업가들이 쉽게 몰려왔다. 투자액도 늘어났다.

 

광저우는 특히 영국인에게 친숙한 도시이다. 영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끌고 들어온 유럽자본이 이곳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중국인이 외국 회사에 들어가면 일반 노동자의 세 배 이상의 임금을 받으니까 이것만으로도 부자가 되는 것이다. 돈이 많은 만큼 소비를 많이 하니까 그 지역 상권이 활발하게 움직이게 된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세금이 늘어나고, 이 늘어난 세금으로 각종 공공사업을 일으켜서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다.

 

이런 과정에서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해서 성공하면 이들이 부자가 되고, 또 그 회사는 더 많은 인력을 고용한다. 그러면 이들이 소비를 하고, 소비가 생산을 촉진한다. 외국으로 수출하는 만큼 달러가 늘어나고, 이렇게 벌어들인 돈이 또 중국경제를 빠르게 발전시킨다. 이런 과정에 20년 동안 이어졌다.

 

1979년과 1980년에 가장 먼저 부자가 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당 고위간부의 자녀나 혹은 그들의 인척이었다. 중국은 관치금융이니까, 높으신 분이 은행장에게 전화 한 통화만 하면 큰돈도 쉽게 대출되었다. 아무개에게 대출해줘! 공산당이 금융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이자까지 쳐서 돌려받는다는 보장도 없다. 또 이들은 공산당의 보호를 받으며 공장을 운영하거나 각종 사업을 한다. 자본가의 재산을 최대한 몰수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공산당이 이제 스스로 부자가 되는 방법을 찾아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이러니 중국의 개혁개방은 처음부터 부정부패라는 폭탄을 안고 출발한 셈이다.

 

물론 당원이 아니면서 장사를 시작한 사람도 많았다. 중국 전역에서 이런 사람이 많이 나왔는데, 그중에서 상하이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들은 도대체 무슨 밑천이 있어서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은행에서 대출도 받을 수 없었는데 말이다.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이전부터 돈을 많이 다루던 상하이 상인들은 엄청난 변화의 시간을 겪으면서 돈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재산을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 돈을 제대로 활용할 기회가 온 것이다. 상하이 상인들은 시장에서 채소장사나 고기장사를 했고, 식당을 차리거나 각종 일용잡화를 파는 가게를 열었다. 그러한 근본 원인은 정부가 인민을 통제하지 않고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상하이는 100년 전부터 이미 국제적인 도시였다. 개혁개방과 더불어 다시 활기가 넘치고 다른 지방보다 외국자본이 많이 들어오니까 경제가 빨리 발전하는 것이 당연했다.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이므로 당연히 외국자본이 많이 들어와서 상하이만큼 빠르지는 않지만 경제가 계속 발전했다. 한편 해외 화교자본도 중국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해외 화교자본 역시 중국 경제를 빠른 속도로 성장하게 해준 원동력이었다. 우리나라에 있는 화교의 대부분이 산둥성 출신인데, 이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다른 나라 화교는 대부분 광둥 성 출신이거나 푸젠 성 출신이다. 이 화교자본도 지금은 중국 전역으로 스며들었다. 선부론에 힘입은 개혁개방이 동쪽 연해지방을 빠른 속도로 부유하게 만들면서 중국의 모든 도시에서 부자들이 늘어났다. 그렇다면 농민들은 어떻게 변했을까? 우선 인민공사가 사라졌다. 이제 정부에 내야 하는 할당량만 채우면 나머지는 자기몫이 되는 것이다. 이전과는 달리 농민들은 자기 땅에서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도시로 나가 공사현장에서 일하면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날씨나 자연재해 등으로 소득이 불안정한 농사와 달리 꾸준히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도시의 노동자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끼지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호적을 도시로 옮기는 것은 매우 어렵다. 물론 도시로 나가 임의로 살 수는 있었다. 우선 어떻게든 도시로 나가서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것이다. 이들을 민공이라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아들은 도시에서 노동하고, 번 돈의 일부를 시골집에 보낸다. 그러면 시골집의 경제형편이 조금씩 나아진다. 

 

4퍼센트의 나라, 5,000만 명만 부자다: 개발독재 체제의 가장 큰 장점은 빨리 성장한다는 것이다. 중국 경제는 매년 8퍼센트 성장을 유지하는 고속성장이다. 지금 중국은 세계의 공장을 넘어 세계의 기업이 되고 있다. 중국 제품이 없으면 전 세계인이 정상적인 소비생활을 못할 정도이다.

 

2009년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무료 2 4,000억 달러이다. 지금도 중국인은 8억 인민이라는 말을 하는데, 중국 농민수를 가리키는 이 8억에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뜻도 들어 있다. 그러므로 13억 시장은 허수이다. 실제 구매력이 있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수의 부자를 보통 5,000만 명으로 본다. 우리나라 인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강남 부자들처럼 잘살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이것만으로도 대단히 매력적인 시장이다. 이 사람들은 외국 여행도 손쉽게 한다. 이제 우리나라 백화점들의 큰손이 일본인에서 중국인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2009년 국내 소비를 살펴봐도 중국은 경제대국이다. 1위안을 170원으로 잡아보자. 중국은 영화 관람에 62억 위안을 썼고, 복권 판매액은 756억 위안으로 전년 대비 25퍼센트 증가했으며, 네티즌은 3 8,400만 명이다. 온라인 주식거래가 67퍼센트 늘었고, 인터넷 은행거래가 62.3퍼센트 늘었으며, 온라인게임 시장규모가 256억 위안이다.

 

전 세계 휴대전화 생산대수가 12억 대인데, 6억 대를 중국에서 생산했다. 상하이와 선전에 있는 중국 증권시장은 시가총액이 3 5,700억 달러로 세계 2위였다. 홍콩까지 포함해서 주가를 통한 자금조달 규모는 520억 달러로 세계 1위이다. 또한 자동차 판매 대수가 1,365만 대로 세계 1위이다. 1,000만 위안 이상 사유재산을 갖고 있는 부호가 82 5,000명인데, 그중 5,100명은 1억 위안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한 대에 2,000만 달러가 넘는 개인용 비행기가 열다섯 대나 팔렸다.

 

공산당 덕분에 부자가 된 5,000만 명은 자기 재산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변화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공산당을 욕하면서도 공산당을 지지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분열에 대한 공포 때문에 공산당을 욕하면서 공산당을 지지한다. 나와 친해진 베이징의 한 지식인은 자기 나라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냉소적으로 평가했다.

 

농촌에 사는 8억 이상의 보통 중국인은 밥 먹고 배부르면 사회에 불만이 없어. 지금 중국 경제는 잘나가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잔치가 없고, 세상에 오직 성장만 하는 거시경제는 있을 수 없다. 산에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고, 비행기가 이륙하면 결국 착륙해야 한다. 문제는 부드럽게 착륙할 것인가, 부서지면서 착륙할 것인가이다. 지금 중국 경제가 망가지면 세계 경제가 망가진다. 그래서 전 세계 경제학자가 중국을 주시하고 있다. 그만큼 중국 경제는 불안요소가 많다.

 

한국인과 중국인이 서로 하게!

 

한국인과 중국인은 서로 싫어해봐야 손해다

 

싫어할 자유가 점점 없어진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다른 언어와 사회구조 속에 살면서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아시아권에 속해 있는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베트남은 서로 역사 속에서 이리저리 얽혀 있는 사이다. 그래서 사실 서로를 하게 보기 어려운 사이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조그만 사건 하나만 터져도 진실보다는 호불호(好不好)의 감정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재는 글로벌 시대이다. 어떤 한 나라를 싫어한다고 해서 내가 살기 편해지는 시대가 아니다. 지구인들은 이제 서로를 싫어할 자유가 점점 없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서로의 돈주머니, 즉 자신의 지갑이 모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래에셋 펀드에 가입한 직장인들이 많다. 미래에셋은 우리나라 펀드 투자의 대표선수 격이다. 잘하니 못하니 말도 많지만, 그래도 여전히 시장의 강자이다. 그런데 미래에셋 펀드는 중국 투자에 가장 비중을 많이 두고 그다음이 브라질이라고 한다. 그 회사 회장이 최근에 이렇게 표현했다.

 

중국을 세계의 공장이라 부르면서 위험하게 보는 것은 경제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없는 것이다. 중국은 20세기 100여 년을 제외하고는 당나라 때부터 세계 GDP 3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13억 명의 인구를 바탕으로 강력한 리더십이 발휘될 것이다. 중국이 거품만 잘 잡는다면, 전 세계에서 장기적으로 중국만한 시장이 없다. 임금이 올라가고 중산층이 확대되면서 소비 비중이 상당히 커지고 있다.

 

위안화 절상은 점진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중국 정부는 어떤 정책이든 급진적인 정책을 쓰지 않는다. 또한 브라질도 중국의 영향을 받는다. 브라질 자원의 수요처가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과 성장 기회가 같다. 이제 한국인은 중국인들이 마음에 안 들어도 중국을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잘되길 바라야 한다. 그들과 우리의 경제가 이렇게 깊게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중국에 대한 인문학적 프레임을 통해

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 책의 효용가치는 두 가지이다. 

첫째, 앞으로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꿈꾸는 분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것.

둘째, 앞으로 세계무대에서 우리와 지속적으로

부딪치게 될 중국인들이 도대체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인지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중국은 한국에게 어떤 존재인가?

한 줄로 정리할 수 있다.

중국은 이웃나라이고,

친구이자 적이다.

한국과 중국은 형제가 아니다.

한국의 형제는 몽골과 터키이다.

이 부분에서 중국인들은 크게 오해하고 있다.

중국은 단지 우리의 이웃나라이지 형제국이 아니다.

어떤 이웃이든 이웃과는 사이 좋게 지내는 게 속이 편하다.

이웃과 사이가 나쁘면 편할 수가 없다.

 

지금 중국은 강대국이 되었다.

세계무대 속의 경제강국이고,

군사대국이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들은 중국과 중국인을 조용하고

세심하게 관찰하고 분석해야 한다.

그들의 존재가 우리나라와 민족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을 알기 위해선 눈에 보이는

표피적인 것에만 매달려선 안 된다.

그들의 집단 무의식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중국인들이 한국인과 확실히 다른 점은

역사에 대한 기억과 집단 무의식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와 확연히 다른 점이다.

경상도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신라가 존재할까?

전라도에 사는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백제가 존재할까?

그런데 중국인은 다르다.

현재의 행정구역과는 별개로 지금도

산둥(山東)지방을 ‘노(魯)나라’라고 하기도 하고,

‘제(薺)나라’라고 하기도 한다.

쓰촨지방을 파촉(巴蜀)이라 부르기도 한다.

춘추전국시대가 몇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대에 버젓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멋진 존재였고

잘나가던 때의 기억만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행하고 칙칙했던 시대에 대한

것은 별로 기억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들만의 보편적이지 않은 세계관이 만들어지고,

그 세계관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앞으로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앞으로 가장 매력적인 시장이겠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게 중국이다.

중국은 우리에게

어떤 위협적인 존재가 될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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