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제왕으로 기록된 황후_ 서한의 여후(呂后)
여치(呂雉, 기원전 291년~기원전 180년)는 고황후, 고후, 여후라고도 불리며 이름은 치(雉), 자는 아후(亞後)로서 서한(西漢)을 건국한 고조 유방의 황후이다. 젊은 시절 여치는 아버지 여태공을 따라 원수를 피해 패현으로 왔다. 여후에 관한 고사를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여후가 잘못을 저질렀으며 유방이나 척희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이라는 경기장에서는 항상 남성에게 유리한 규칙이 적용된다. 역사는 남성 승리자에게는 ‘지혜’라는 영광의 관을 부여하며 그들의 수단보다는 성공을 더 부각시킨다. 이와 달리 여성 승리자에게는 항상 ‘잔인’이라는 꼬리표를 단다. 여후는 중국이 봉건사회에 진입한 이후 등장한 첫 번째 여성 집권자이다. 한대(漢代)도 조대(朝代)와 같이 부계사회였지만 모계사회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여후를 제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양한(兩漢: 중국의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을 통틀어 이르는 말) 시기에 집권한 황제들도 여전히 태후들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경제(漢景帝)의 어머니인 두태후(豆太后)는 경제를 종용해 자신의 아들 양왕(梁王) 유영(孺嬰)을 보위에 올리려 했으나, 이후 관도공주(官途公主)의 개입으로 결국 경제는 태자 유영을 폐위시키고 유철(有鐵)을 황태자로 책봉한다. 이후 황제로 등극한 유철이 바로 역사상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한무제(韓無帝)이다. 한무제는 집권 초기 10년 동안은 할머니 두태후와 어머니 왕태후(王太后)의 간섭 아래에 있었다. 그때의 경험을 평생 잊지 못한 무제는 죽기 직전,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구과부인(毬果婦人)을 죽여버렸다.
이후 동한(東漢)시대로 접어들면서 모후들의 권력행사는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황태후들로는 장제 두태후, 화희 등태후, 안사 염태후, 순열 양태후, 환사 두태후, 영사 하태후 등이 있고, 그중에서도 화제(和劑)의 황후인 등수(燈穗)가 가장 유명하다. 한대 여성들은 이후 다른 어떤 시대의 여성들도 가지지 못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태후로서 나랏일에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영역에 세력을 뻗쳤다. 그녀들의 힘을 짐작할 만한 첫 번째 근거로는 호칭을 들 수 있다. 당시 많은 황족이 자신의 어머니 성씨에 따라서 불렀는데, 이는 이후 조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한나라만의 독특한 관습이다. 두 번째 근거로는 작위를 들 수 있다. 한대의 많은 여성은 제후로 봉해지면서 그에 걸맞은 작위와 봉읍을 가졌다. 예를 들면 한고조 유방은 형의 부인에게 음안후(音安候)라는 작위를 내렸고, 뒤이어 권력을 잡은 여후는 소하의 부인을 찬후(贊後)에, 번쾌의 아내인 여수를 임광후(任光後)에 봉했다. 또 한문제(寒門帝)때는 제후 왕녀들에게 2,000호(戶)규모의 읍을 하사하기도 했다.
세 번째 근거로는 건축물을 꼽을 수 있다. 몇 년 전, 고고학자들은 장락궁에서 출토된 벽화 속의 방이 모두 붉은색 바닥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는 보통, 규모가 큰 집의 바닥을 붉은색으로 칠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듯 진(溱)의 함양궁(檻羊宮) 1호 궁전과 3호 궁전의 주전(主前)바닥은 모두 붉은색이다. 한나라도 진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해 진시황이 그랬던 것처럼 황제 정도의 특별한 사람들만 붉은색 바닥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붉은 바닥이 황제가 머물던 미앙궁에서만 발견된 것이 아니라 태후의 거처인 장락궁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를 보면 현대 여성들의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한대에는 이후 다른 시대와는 달리 여성의 재혼문제에 개방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한문제의 어머니 박희와 한무제의 어머니 왕희(王喜)처럼 재혼한 몸으로 당당하게 국모(國母)의 자리에까지 오른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결혼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재상 진평의 부인으로, 진평이 그녀의 다섯 번째 남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후세 사람들이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전진을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여인_ 동한의 등수(鄧綏)
재능 있는 여인 반소(反蘇)가 『한서(漢書)』를 쓰기 위해 황가의 동관 장서각에서 자료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당시 황제인 동한 화제 유조에게 청했더니 황제가 그녀를 불렀다. 당시 화제는 서로 시기 질투하던 황후 음(陰)씨와 비빈들의 다툼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서』를 집필 중인 반소가 여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관한 책인 『여계(女誡)』도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것이다. 반소를 불러 책의 줄거리를 들은 화제는 후궁들이 이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는다면 자신도 편히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황제 앞에 선 반소는 마지못해 『여계』를 가르치러 입궁하겠다고 대답했지만 내키지는 않았다. 반소는 명문가 출신이었는데, 서한 성제 때 유명했던 반첩여가 바로 그녀의 고모할머니였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역사학자 반표(反表)이고, 역사학자 반고와 붓을 던지고 군대로 달려간 명장 반초를 오빠로 두었다.『한서』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반표와 반고가 차례로 죽자 반서가 『한서』를 완성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당시에는 여성이 역사서를 쓴 적이 없었을 뿐더러 그녀가 쓰려는 것은 과거의 역사가 아닌 당대 왕조 한의 역사였다.
음황후와 등수는 사실 친척관계이다. 음황후는 광무제 유수의 황후인 음려화(陰呂化)일가였는데, 등수의 어머니가 바로 음려화 황후의 5촌 조카딸이었다. 그리고 등수의 조부는 동한 개국 공신인 태부(太傅) 등우이고 아버지는 등훈이었다. 광무제 유수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음려화를 만났는데, 첫눈에 반해 “음려화를 부인으로 맞이한다면 황제 자리에 오른 것만큼 기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해 음려화는 뛰어난 미모와 온순한 성격으로 호족 출신의 황후 곽성통(郭聖統)을 밀어내고 당당히 입궁하여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화제 유조의 황후 음씨와 귀인 등수도 모두 음려화의 빼어난 미모를 물려받은 덕분에 총애를 받고 있었다. 동갑이었던 음씨와 등수는 화제가 열네 살이 되던 해 모두 태자비 후보에 올랐다. 그런데 갑자기 등수의 아버지가 병으로 죽어 등수는 부친상을 지내고 나서 3년 후에 다시 입궁했다. 등수가 자리를 비운 3년 동안 음씨는 뛰어난 미모와 재능으로 화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친척 등수의 미모와 실력도 자신과 견주어 결코 손색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던 음씨는 등수가 다시 궁으로 돌아온다면 분명 자신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음 씨 일가들은 안팎으로 힘을 써 등수가 입궁하기 전에 음 씨를 황후로 만들었다. 이 일은 등수는 물론이고 등씨 일가에게도 큰 타격이었다. 후한의 역사 기록에 등수가 입궁하던 모습을 “그녀의 뛰어난 미모는 좌중을 압도했고 모든 사람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했다”라고 할 만큼 등수의 미모는 음향후보다도 월등히 뛰어났다.
그래서 등수의 입궁에 음황후가 느끼는 부담은 상당했다. 게다가 등수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지혜로웠다. 여섯 살 때 사서(史書)를 읽기 시작하여 열두 살 때는 『시경(詩經)』과 『논어(論語)』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이처럼 등수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형제들과 함께 학술적인 지식에 관해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등수가 바느질하기 등 보통 여자아이들이 배워야 할 것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자 그녀의 어머니는 볼멘소리로 “여자 박사라도 되려는 것이냐?”라며 불평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등수를 보통 여자아이로 대하지 않던 아버지 등훈은 딸과 함께 사회정세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등수는 비록 음황후보다 3년 늦게 입궁했지만 음황후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강했다. 게다가 등수가 입궁하기 직전, 등씨 가족은 등수에 관한 심상치 않은 소문을 들었다. 그 소문이란 등수가 맨 처음 입궁하려 했을 때 이상한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그녀가 손으로 하늘을 어루만지다 고개를 들고 푸른 하늘에서 내리는 젖을 마셨다는 것이다. 이 꿈은 ‘하늘을 만지는 꿈을 꾼 요(堯)임금이 제왕의 자리에 올랐고 상(商)나라를 세운 탕(湯) 임금 또한 하늘에 올라가 음식 먹는 꿈을 꾼 뒤에 그렇게 되었으니, 이 꿈은 제왕이 될 조짐을 보이는 꿈이다’라고 해석되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관상가를 데려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여줬는데 그 관상가는 또한 “탕 임금처럼 천하를 다스릴 상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이러한 꿈 해석들은 옛날부터 모두 출세한 사람들이 나중에 자기 입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하지만 입궁 전에 등수의 숙부 등해가 그녀에게 은밀히 말했다. “1,000명의 목숨을 구한 사람의 자손은 크게 된다는 말이 있다. 너의 아버지(등훈)는 과거 석구(石臼)강을 막아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다. 그러니 하늘에서 분명 우리 가문에 복을 내려 줄 것이다. 게다가 너의 조부(등우)께서 일찍이 ‘나는 단 한 사람이라도 함부로 죽인 것이 없다. 그러니 내 후손 중 뛰어난 자가 날 것이다’라고 말하셨다. 그녀는 ‘가문을 높일 인물’, ‘제왕의 자리에 오를 상’에 대한 의무감도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받은 가족들의 사랑과 뛰어난 글 솜씨가 만들어 낸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 나라의 국모 자리에 오르겠다는 당찬 꿈을 가진 그녀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입궁을 준비하고 있을 때, 별안간 부친상을 당해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했다. 3년을 꼬박 채우고 다시 입궁할 준비를 할 때는 이미 황후 자리에 음황후가 앉아 있었다. 등수가 죽고 난 뒤 안제는 집정 능력이 부족해 환관들에게 권력을 내주고 염후(念後)의 섭정까지 받게 된다. 밖으로는 대신이 죽임을 당하고 안으로는 태자가 폐위되면서 동한 왕조는 순식간에 멸망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등수의 업적이 더욱 빛을 발한다. 그녀는 동한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적 업적과 명성을 가진 최고의 황태후가 되었다.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여인_ 당대 무측천(武則天)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624년~705년)이 죽은 뒤 남긴 것은 글자 없는 비석이었다. 자신에 대해 한마디도 남기지 않은 그녀는 후세에 무수히 많은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큰 업적을 남긴 여러 황제를 능가할 정도였다. 무측천은 당고조 무덕 7년(624년)에 형주(刑誅) 도독(道獨) 무사화(武士化)와 수나라 종실 출신인 양씨의 딸로 태어났다. 열네 살이던 무측천은 집안 배경과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궁녀로 선발되었다. 입궁하여 당태종의 재인(才人)이 된 무측천은 그에게 직접 미랑이라는 이름까지 하사받았다. 하지만 무미랑이라고 불리기 이전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신당서(新唐書)』의 ‘측천황후 본기’에는 무씨휘후라 적혀 있지만 『신당서』의 ‘지제이십칠지리일(志第二十七地理一)’에는 또 화주, 화음 두 지역의 무측천이 섭정하던 수공년에 피휘(왕이나 높은 이의 이름에 사용된 것은 피한다는 뜻)하여 이름을 바꾸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보면 아마도 그녀의 본명은 무화후가 아닐까 짐작되는데, 사내 이름 같은 이 이름은 아버지 무사확이 남자아이 옷을 입혀 그녀를 키웠다는 이야기와도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그녀는 황제가 된 후에 자신의 이름을 ‘높이 떠있는 해와 달처럼 세상을 비춘다’는 뜻을 가진 조(組)자로 바꾸었다. 측천이란 두 글자는 아들 이현이 그녀에게 ‘측천대성황후(測天大成皇后)’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나온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가장 마지막에 불리던 이름에 따라 그녀를 ‘무측천(武測天)’이라 불렀다.
무측천은 든든한 집안 배경과 아름다운 외모 덕분에 입궁하자마자 당태종에게 이름을 하사받는 영광을 누렸다. 출발은 누구보다도 멋졌지만 이후 12년이란 긴긴 세월동안 당태종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녀는 줄곧 ‘재인’의 신분에 머물러야 했다. 반면 무측천보다 두 살 어린 재인 서혜는 그녀와 비슷한 시기에 입궁했지만 줄곧 신분 상승하여 재인, 첩여(捷女), 충용(充用)을 거쳐 마침내 비(妃)의 자리까지 올랐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당시 유명했던 ‘사자총사건’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태종에게는 사자총이라고 불리던 명마가 한 필 있었는데, 성질이 워낙 난폭하여 그 말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당태종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무측천은 서슴지 않고 말했다. “채찍과 철퇴, 비수만 있으면 소첩이 그 말을 다룰 수 있습니다. 말이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철퇴로 머리를 후려치고 그래도 난동을 피우면 비수로 저 놈의 목을 따 버리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당태종은 “의지가 매우 훌륭하구나”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당시 겨우 십대였던 어린 소녀는 그 말에 담긴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태종은 그녀의 용감함을 칭찬하긴 했지만 여성스럽지 못한 그녀에게 전혀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직접 무측천의 이름을 미랑으로 바꾼 것도 남자 이름 같은 그녀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당태종은 서혜처럼 조용하고 여성스러운 사람을 더 좋아했는데, 무측천은 지나치리만큼 활발하고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후세 사람들의 글을 보면 서혜는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자제력이 뛰어나 유가에서 말하는 모범적인 여성이었다고 묘사되어 있다.
지혜롭고 총명했던 서혜가 당태종에게 고구려 정벌과 궁의 대대적인 수리를 간언하던 모습은 장손황후(長孫皇后)와 매우 흡사하다. 장손황후는 일생 수많은 여인을 거느린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여인이다. 당태종은 장손황후가 세상을 떠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녀와 닮은 서혜를 다시 얻었다. 이를 보면 당태종은 장손황후를 대신할 사람을 찾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서혜가 황제의 총애 속에 있을 때 무측천은 오랫동안 후궁전에서 외롭게 지내야했다. 보는 눈이 제각각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측천은 아버지 당태종에게는 사랑을 받지 못했지만 아들 이치(理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장손황후의 셋째아들인 이치는 두 형인 태자 이승건과 위왕 이태가 태자 자리를 놓고 다투다 둘 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어부지리로 태자가 된 인물이다. 이치는 처음부터 태자 교육을 받으며 자라지 않은 데다 이미 위로 강력한 두 형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성격이 우유부단했다. 아버지 당태종은 이러한 이치가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당시 무측천보다 네 살 어렸던 이치는 자신보다 어린 태자비 왕(王)씨와 처첩 여럿을 이미 거느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있던 여인들과 달리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성격이 강한 미인 무측천을 만나자마자 곧바로 그녀의 매력에 빠졌다. 또 하나, 이치의 입장에서는 아버지 곁에서 시중들던 사람과 가깝게 지내면 늘그막에 자주 변덕 부리던 아버지의 의중과 기분을 미리 파악하여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당시 무측천은 죄책감과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이 ‘금지된 사랑’에 저주를 퍼붓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는 훗날 그 사랑에 감사했을 것이다. 힘든 시기에 ‘금지된 사랑’이 오히려 이치로 하여금 다른 여인들보다 무측천에게 더 많은 사랑을 느끼게 만들었다. 갖지 못하는 것에 더 마음이 가듯, 가질 수 없었기에 무측천에 대한 마음이 더 컸다.
황제 못지않은 권세를 누린 여인_ 북송의 유아(劉娥)
사람들이 송진종의 황후 유아(儒雅, 969년(?)~1033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녀가 ‘아들을 훔쳐 태자로 삼았다’는 민간 전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녀는 일찍이 역사상 ‘송대 무측천’이라고 불리면서 왜곡된 이미지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은 인물이다. 솔직히 역사적 전설이 완전히 불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실이 아닌 부분은 상당히 많다.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잇던 고아에서 한 나라의 국모가 되고 다시 수렴청정을 하다 용포를 걸치게 되기까지 유아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황후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역대 황후 중에서 출신이 가장 비천하고 가난하며 심지어 의문점투성이인 사람이다. 그녀는 존귀한 신분에까지 올랐지만 혈육 하나 없이 일생을 고독하게 보냈다. 하지만 그녀는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수렴청정의 제도를 확립한 황태후였다. 그녀로 인해 송 황조에서 수렴청정을 한 황태후는 자그마치 여덟 명에 달했다. 유아 이전 태후들의 시호는 모두 두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황 무측천을 본떠 황후의 시호를 네 자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무측천 다음으로 용포를 입은 유일한 여인이다. 유아는 한대 여후, 당대 무측천과 함께 3대 여주(女主)로 일컬어지며 무측천의 재능과 흉악함을 모두 지닌 송대 여성 권력가였다. 청대 자희(自熙: 서태후)는 그녀를 매우 존경하여 『송대장전 황후고사』를 참조하여 자신의 모든 수렴청정 체제를 수립하라는 분부를 내리기도 했다.
유아의 일생은 크게 15년씩 네 번으로 나눌 수 있다. 첫 15년은 그녀가 민간에서 고아로 힘들게 생활하던 시기이고, 두 번째는 그녀가 조항(條項)의 첩으로 잠시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다가 내내 숨어 지내며 두려움에 떨던 시기다. 세 번째 15년은 송진종의 총비였던 시절이고, 네 번째 15년은 권력을 손에 넣고 황후와 황태후로 살던 때이다. 983년, 즉 송태종 태평흥국 8년에 태종 조광의는 모든 황자들을 왕으로 봉하고 각자의 영지를 다스리도록 명했다. 그때 열여섯 살이던 셋째 아들 조항도 한왕(韓王)으로 봉해졌다. 궁을 나온 한왕은 마치 새장에서 빠져나온 새처럼 자유롭게 살았는데, 그때 평생 사랑하게 될 여인을 만난다. 그 여인이 바로 촉중(促中)에서 피난온 평민 유아였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유아는 공미(塨美)라고 불리던 은 세공장이와 함께 지냈지만, 이후 황실에서는 유아가 명문가 출생이라고 기록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의 본적은 태원(太原)이고 조부 유연경은 오십대국의 후진, 후한 때 유효위 대장군을 지냈고 부친 유통관은 호첩부 지휘사를 지냈으며 어머니 방씨 역시 명문가 출신이라고 한다. 심지어 어머니가 자신의 품으로 달이 떨어지는 꿈을 꾸고 그녀를 임신했다는 등 그녀가 태어날 때 좋은 징조가 수없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아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줄곧 가족을 찾지 못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피난 중에 부모를 잃은 고아였을 것이다. 송태조가 후촉을 멸망시킨 이후로 촉나라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봉기했는데, 이때 전쟁과 난리통 속에서 유아가 가족을 잃은 듯하다.
어린 유아는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에 오늘날의 북과 비슷한 악기인 도고를 치는 기술을 배웠다. 당시 보기 드문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유아는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 아름답고 총명했던 유아는 우연한 기회에 평복을 입고 저잣거리로 나온 조항의 눈길을 사로잡으면서 조항의 곁에서 지내게 됐다. 어린 남녀가 첫사랑에 빠지면 결코 갈라놓을 수 없을 만큼 열정적이지 않던가? 하지만 이처럼 신분 차이가 크게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은 대개 주위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우선 두 사람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조항의 유모인 진국부인이 태종에게 이 사실을 고자질했다. 마침 아들을 명문가의 규수와 결혼시키려고 준비하던 송태종 조광의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크게 노하며 왕부(王府)에서 유아를 쫓아내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조항이 유아를 자신의 심복인 장기의 집에 숨겨두면서, 그녀는 그렇게 10여 년을 숨어 지냈다. 이제 막 행복하고 아름다운 나날을 맛본 어린 소녀에게 이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으며 이때의 생활은 그녀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곧바로 조항은 조광의의 뜻을 받들어 대장군 반미의 딸 반씨를 아내로 맞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억지로 갈라선 조항이 왕비 반씨에게 모든 화풀이를 하는 바람에 반씨는 시집오자마자 냉대를 받았다. 게다가 아버지 반미마저 북벌에 패해 큰 벌을 받으면서 친정의 세력이 기울기 시작하자 그녀의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결국 반씨는 시집 온지 몇 년 만에 우울증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만약 외부에서 정치적 기후에 변화가 없었다면 유아는 평생 숨어 지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황제의 숨겨둔 첩으로 살다 죽는다 해도 결코 억울한 삶은 아니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해주었다. 중국 역사상 두 번째 여황제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만약 유아가 무측천처럼 여든한 살까지 살았다면 아니면 10년을, 5년을 더 살았다면 분명 정확한 대답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유아는 무측천을 제외하고 용포를 걸친 유일한 여인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용포를 걸친 여인은 이 두 사람뿐이다.
가장 오래 살아남아 권력을 누린 황후_ 청의 박이제길특(博爾濟吉特) 씨
1625년, 즉 명 천계(天戒) 5년에 한 몽골 소녀가 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오늘날의 심양시(心梁市)인 성경(星鏡)에 도착했다. 그녀는 당시 후금의 칸(만주어로 군주라는 뜻)인 노이합적(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황태극의 부인이 되었다. 이 소녀는 몽골 과이심패륵(科李心敗勒) 채상(採桑)의 막내딸로 성은 박이제글특(博爾濟吉特)이고 이름은 포목포태(浦木浦太, 1613~1687년)였고 훗날 대청효장문황태후(大靑孝長文皇太后)라고 불린 인물이다. 당시 머나먼 대 명나라 황궁에서는 황제 주유교(舟遊敎)가 어화원(漁火原)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목공일에 빠져있자 태감 위충현이 조정을 좌지우지하며 나라를 몰락의 길로 이끌고 있었다. 그날의 혼례식이 자금성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신부 포목포태는 열세 살, 신랑 황태극은 서른네 살이었다. 황태극에게는 철철(鐵鐵)이라는 정부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조카가 바로 포목포태였다. 그녀의 고모도 11년 전에 똑같은 과정을 거쳐 똑같은 장소에서 혼례를 올렸다. 철철도 포목포태와 마찬가지로 과이심에서 출발하여 성경까지 와 당시 젊은 황태극에게 시집을 갔다. 정치적 동맹이었던 후금과 몽골의 과이심 부족에게 혼인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이 혼인으로 인해 후금의 다음 칸은 현 과이심 부족장의 외손자가 될 것이고, 이 혈연관계야말로 두 부족 간의 가장 믿을 만한 계약서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대비인 철철은 황태극에게 시집온 지 11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낳지 못했다. 황태극은 철철과 결혼하기 전에도 이미 수많은 처첩과 자녀를 거느리고 있었다. 계비(繼妃) 오랍나랍(吳拉羅拉) 씨가 장자 호격과 둘째 낙격 그리고 장녀를 낳았고, 원비 뉴호록 씨는 셋째 낙박회를 낳았다. 하지만 이 아들 중에는 몽고 박이제길특 씨의 외손은 없었다. 두 부족의 연맹관계가 시작만 하고 결실을 이루지 못하자 사람들은 몹시 불안해했다.
철철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녀가 황태극에게 시집온 지 11년 동안 그녀뿐만 아니라 그 어떤 처첩들도 황태극의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 말이다. 세 아들은 모두 철철이 시집오기 전에 태어난 아들들이었다. 거의 11년 동안 황태극이 동분서주하며 정복전쟁을 펼치느라 처첩들은 임신할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과이심 부족은 마음을 졸였고 심지어 철철도 근심으로 마음의병까지 얻었다. 그녀는 자신이 이미 나이가 들어 아이를 낳지 못할까 봐 몹시 걱정했다. 당시 노이 합적이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사패륵(賜牌勒)황태극이 칸의 지위를 이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황태극도 이를 적극 고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부인 철철은 친정인 몽골 과이심 부족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적극적으로 황태극을 도왔다. 철철이 황태극에게 시집온 지 11년, 발등에 불이 떨어진 철철과 오빠 채상은 계책을 논의한 끝에 과이심 부족의 또 다른 박이제길특 씨, 즉 채상의 딸 포목포태를 후금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마음이 급한 과이심 부족의 상황과 더불어 노이합적과 황태극의 입장에서도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 데 과이심 부족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혼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 후금은 혼례를 하러 오는 신부에게 특별대우를 했다. 황태극이 직접 나가 신부를 맞이했으며 심지어 황제 노이합적이 친히 자신의 모든 비와 패륵을 거느리고 성의 10리 밖까지 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어린 포목포태는 고모에게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그녀가 성경으로 시집온 1년 동안 황태극이 성경에 머무르자 대복진 철철이 드디어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딸을 순산한 철철은 자신감을 회복하여 매우 기뻐했다. 이때 후금은 정권교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 다음해, 즉 천명 11년(1626년)에 노이합적이 세상을 떠나자 다른 패륵(만주어로 부족장이라는 뜻)들과 연합한 황태극은 대비 아파해(牙婆海)를 압박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칸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게 되자 철철과 포목포태에게 아들을 낳는 일은 더욱 시급해졌다.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마음먹은 대로만 이루어지던가? 고모와 조카 두 사람이 줄곧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았으니 모두 딸이었다. 포목포태가 황태극에게 시집온 이후로 9년 동안 철철과 포목포태는 모두 각각 세 딸을 낳았다. 반면, 이때 서비(西費) 안찰(按擦) 씨는 넷째 아들 엽포서(燁布緖)를, 측비(側費) 엽혁나랍(燁革羅拉)씨는 다섯째 아들 석색(石色)을 낳았다. 칸이 된 황태극이 영토를 넓히면 넓힐수록 그의 후궁들도 점점 더 많아졌다. 이는 자녀를 낳아줄 여인들이 더욱 많아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황태극은 보통 한 부족을 멸망시키면 그 부족의 비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는데, 이렇게 후궁이 된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철철의 지위도 점점 더 흔들렸다. 이때 포목포태의 오빠 오극선(五極善)이 또 다시 황태극에게 과이심 부족의 세 번째 여인을 보냈는데, 그녀는 바로 포목포태의 언니 해란주(蟹卵主)이다. 과이심에서 더 이상 보낼 미인이 없었던 모양이다. 당시 해란주는 이미 스물여섯으로 한 번 결혼했던 사람이다. 과이심 부족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됐다. 따라서 어리기만 하고 매력 없는 풋내기 대신 성숙한 미인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포목포태는 75세까지 살다가 강희 26년(1687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강희제가 나라를 일으키고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 손자 덕분에 높은 직분으로 존숭되어 황태극, 다이곤, 순치제 및 강희제가 세운 공훈과 업적을 자신에게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수명이 해란주, 철철, 동악비, 다이곤, 순치와 같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그녀의 이름은 역사 속에 묻혔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살아있을 때만 해도 포목포태는 그들을 이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모두 제치고 그녀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끝까지 살아남은 것이 곧 영원한 승리인 셈이다. 청태종 황태극의 장비인 효장문황태후 박이제길특 씨 포목포태는 살아서 명성을 남기고 죽은 뒤에는 추모되었으니, 분명 미소를 지으며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중국 마지막 대권을 거머쥔 황후_ 청의 엽혁나랍(葉赫那拉) 씨
1900년 8월 4일, 8개국 연합군이 북경성을 공격해오자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황태후 자희(1835년~1908년)는 광서제(光緖濟)를 데리고 급히 달아났다. 그해가 경자년(更子年)이었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이를 경자지변(更子地變)이라고 한다. 조금씩 저물어 가던 자금성을 뒤돌아보면서 자희 태후 엽혁나랍씨는 통한의 눈물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니! 40여 년간 모든 것을 장악했던 자희는 줄곧 운명의 신이 자신의 편이라 여겼다. 하지만 오늘 그녀는 일생의 전환점을 맞게 됐다. 48년 전, 엽혁나랍 씨는 열일곱의 나이로 함풍제(咸豊濟)가 등극한 이듬해에 팔기(八旗)의 수녀(修女: 황제의 후궁이 되기 위해 궁에서 온 사람)로 뽑혀 자금성으로 들어왔다. 자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아버지 혜정(惠政)이 안휘(安揮)의 영지(領地) 태광도(太光度)를 지내며 5품 관직에 있었기 때문에 수녀의 품계를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열여덟 살 이하로 나이 제한이 있었는데 마침 그해 자희는 열일곱 살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던 그녀는 궁에 들어오자마자 난귀인(難句人)에 봉해졌다. 그녀는 궁에 있는 수많은 미인 중 가장 아름답지도 않았으며 가장 총애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많은 후비 중에서 하늘의 사랑을 독차지한 사람이었다. 그녀만 유일하게 함풍제의 아들을 낳은 것이다. 함풍제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말이다. 그녀는 곧바로 의비(懿妃), 의귀비(懿貴妃)로 신분 상승하여 후궁전에서 황후 다음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다. 이 아들이 후궁전의 평범한 여인이었던 자희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함풍제가 붕어하자 그녀는 아들 덕분에 신분이 높아지면서 성모황태후(聖母皇太后)로 봉해져 역사의 무대에 오르게 된다. 그녀를 바치고 있던 아들은 그녀가 정치라는 이 거대한 흐름을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자희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함풍제가 죽었을 때, 국토의 반은 태평천국군(太平天國軍)이 점령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도 산산조각 나서 나라가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당시 영프 연합군이 북경성을 점거해 자금성과 원명원을 파괴하자 함풍제는 급히 열하(裂罅)로 몸을 피했다. 그곳에서 병을 얻은 함풍제는 여섯 살 난 어린 아들과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만을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자희는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위로는 자안(慈顔)이, 아래로는 숙순(淑順)을 중심으로 하는 고명대신 여덟 명이 모든 권한을 쥐고 조정에 버티고 있었다. 또 황휘 경쟁에서 함풍제에게 진 공친왕(工親王) 혁흔이 북경에 남아 외교업무를 담당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당시 스물일곱이던 자희는 조정에 나선 경험도, 정사를 돌본 경험도 없었기에 누구에게도 경계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야심가였던 그녀는 아들을 낳은 순간부터 몰래 앞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함풍제가 새로운 미인들에 빠져있을 때 그녀는 책을 읽으며 정무에 관심을 기울였다. 말년에 건강이 나빠진 함풍제는 모든 외교업무를 숙순에게 넘겨주면서 궁 안의 상주문을 살펴보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이를 기회로 삼은 의귀비 자희는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그를 대신해 상주문을 검토하는 일을 했다. 함풍제는 여인이 남자처럼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상주문을 검토하는 모습을 아주 흥미롭게 지켜봤을 것이다. 품위있는 표정에 온몸에서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모습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이처럼 함풍제가 자희를 총애했기 때문에 상주문 처리를 맡긴 것이다. 얼마 후 함풍제가 자희의 새로운 매력에 싫증내고 다른 여인들을 더 총애하긴 했지만, 익숙해진 탓에 줄곧 자희에게 상주문 처리를 맡겼다. 나라가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상주문은 하나같이 함풍제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내용들뿐이었다. 그는 눈앞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황권을 신하들에게 넘겨줄 수도 없는 일, 게다가 황후도 이 일을 맡아보려 하지 않았고 궁의 규율에 따라 태감에게 정사를 보게 할 수 없었다.
『홍루몽』에 심취했던 자희는 그녀가 있던 궁정의 벽을 모두 홍루몽에 나오는 장면으로 그려 넣었다. 그녀는 『홍루몽』을 수없이 반복해 보면서도 『홍루몽』속에 예견된 그녀의 일생을 알지 못했다. “빙산 위에 한 마리 암 봉황이 있었다. 그것은 구름이 갈라지면서 말세로부터 온 평범한 새로 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따르고 두 번째는 호령하다가 세 번째는 사람에게 잡혀 나무가 되어 결국 금릉(今陵)을 보고 울부짖으니 이는 더욱 애통하도다.” 자희는 처음에는 함풍제를 따랐고 두 번째는 동치제와 광서제를 호령하다가 결국 빙산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니 재능이 있어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녀는 평생 동안 대 청왕조에 겨우 남아있던 약간의 기운마저 탕진해 버리고 대 청나라를 빈털터리로 남겨 놓았다. 그녀가 죽은 지 4년째 되던 해(1912년)에 손중산(孫中産)이 남경에서 임시 대통령이 되면서 청왕조는 멸망했다. 남경의 과거 이름이 금릉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죽고 나서도 모든 일은 끝나지 않았다. 자희는 죽으면서 수많은 금은보화와 함께 묻혔는데 이는 그녀가 저세상에 가서도 태후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었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지 19년이 되던 해, 침릉에 있던 금은보화는 모두 그것을 탐내던 군벌 손전영(損田英)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대포를 이용해 그녀의 무덤을 파헤쳐 자희가 생전에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모든 금은보화를 남김없이 가져갔다. 심지어 살아생전에 가장 존귀했던 그녀의 몸도 마치 시든 나무토막처럼 구석에 내팽개쳐졌고 반란군들은 서슴없이 이를 짓밟았다. 그리고 썩어 문드러진 시체는 흙이 되어 바람에 날아갔다. 사라진 그녀의 이름, 사라진 그녀의 나라처럼 말이다.
지앙성난의 글은 지극히 객관적이다.
물론 그녀의 무협소설은 훌륭하지만,
나는 역사를 다룬 그녀의 작품이 가장 좋다.
이는 내가 역사 분야의 글을 특히 좋아해서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풀어놓는 능력이 상당한
그녀는 그동안 역사 속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다.
나는 『서시입오(序詩入吳)』에서 그녀의 글을 처음 접했는데,
역사적 사실이 거의 완벽하게 짜여 있던 걸로 기억한다.
게다가 역사서 속에서 등한시된 여성을 아주 예리하게 묘사한
그녀의 글에서는 여성작가 특유의 섬세함이 묻어났다.
그녀의 글을 한참 읽어 내려간 나는 놀라움을 느끼며
글 속의 생기발랄하고 아름다운 여성들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래서 지앙성난의 다른 글들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글을 찾아냈다.
특히 『중국을 뒤흔든 여인들』은
지앙성난이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이다.
어떤 친구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인생에서
커다란 취미라고 말한다.
좋은 이야기는 다양한 줄거리로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거기에 권모술수, 욕망, 여인의 미모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손색이 없다.
역사상 전기적인 여인들,
특히 궁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천하의 권력을
거머쥔 여성들은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사실 중국 역사상 정권을 장악한
태후들의 이야기는 이미 많이 쓰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로,
작가들은 만족할지 몰라도
독자들은 한숨쉬게 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그러한 글들은 보고 또 보아도
항상 어딘가 잘못된 느낌이 든다.
지앙성난의 글 속에 나오는 전기적 여성들을
보고 나서야 나는 단번에
모든 것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여성이었지만 결코 여성의 감정을 가질 수 없었던
그들이 작가 덕분에 이 책에서 부활했다.
역사서를 펼쳐보면 역사적 사실은
종종 가공된 이야기보다 더 극적이며
사람들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자가 생긴 이후로
전 세계는 모두 남성이 주도해왔기 때문에
역사의 기록에서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니 세상에 자신의 기록을
선명하게 남긴 여성도 별로 없다.
극소수의 몇몇 여성만 뚜렷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으며,
나아가 천하를 거머쥐었다.
흔히 여성의 마음은
깊은 바다 속의 바늘과 같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 여성은 남성과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처리해왔지만,
아직도 남성은 그 속에 담긴 여성의
세심한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물며 1,100년 전, 권모술수의 복잡한 상황 속에 놓였던
여성의 생각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많은 문학 작품에 영향을
미친 황태후들은 남성들의 눈에 ‘화근’으로 비추어졌다.
하지만 그녀들을 남성의 시각으로 가늠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을뿐더러 재미도 없고 답답한 일이다.
그녀들에 관한 기록 역시 떠들썩하게
웃고 즐긴 정도에 불과하다.
마침 지앙성난의 노력이 있어
나는 여성의 역사를 담은 진정한 글을 만나게 되었다.
『중국을 뒤흔든 여인들』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지앙성난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축하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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