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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움직이는 10인의 CEO - 홍하상 지음

삼생지연 2021. 2. 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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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움직이는 10인의 CEO 홍하상 지음 /국일증권경제연구소/2002년 3월

1장 중국의 IBM, 롄샹(聯想)의 양위안칭(楊元慶)과 류촨즈(柳傳志)

중국인들은 롄샹을 가리켜 중국의 IBM' 혹은 중국의 자존심이라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롄샹은 중국 최대의 컴퓨터 제조회사로서 서버, 마더보드와 같은 주변기기에서부터 정보 서비스, 소프트웨어 운영, 시스템 통합 및 전자상거래, 노트북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컴퓨터 관련 상품을 제조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 명성답게 롄샹은 2000년도에 262만 대의 컴퓨터를 생산, 284억 위안( 4 5,000억 원)의 매출액을 올리며 중국 컴퓨터업계에서 1위를 기록하였다.

 

양위안칭의 등극

2001 4 20. 중국의 IBM이라는 롄샹집단유한공사에 약관 37세의 청년 양위안칭이 총재로 취임했다. 양위안칭의 등극은 중국 IT 업계에서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양위안칭이 1989년 롄샹에 입사한 후 불과 5년만에 마케팅 담당 사장에 취임하였고 1998년 부총재의 자리까지 오르자 머지않아 그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업계는 전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험 부족을 우려하여 IT 산업의 원조라 불리는 류촨즈 총재가 향후 몇 년간은 롄샹의 경영을 이끌어가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류촨즈 총재는 불과 57세로 경륜과 체력이 모두 절정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류촨즈 총재는 급변하는 IT시장에는 좀더 젊은 사람이 경영을 책임져야 한다., IT기술을 따라잡기에는 너무 늙었다. ,롄샹의 3/4은 양위안칭의 노력이다.라며 전격 사퇴를 선언하고, 양위안칭을 후임 총재로 지명했다.

 

앞으로 롄샹의 경쟁 상대는 IBM, 마이크로소프트, 컴팩 등이 될 것이다. 취임 연설에서 그가 던진 이 말은 롄샹이 본격적으로 세계 시장 공략에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이 말에 IBM이나 휴렛패커드,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들은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휴렛패커드와 IBM을 중국 시장에서 각각 3, 4위로 밀어낸 장본인이 바로 양위안칭이기 때문이다.

 

중국 최초의 컴퓨터 개발

1989년 롄샹은 중국 최초로 286 컴퓨터를 출시했다. 오늘날 롄샹의 영문상호인 레전드 홀딩(Legend Holdings)'의 유래가 된 286 컴퓨터 레전드 PC는 출시되자마자 중국 컴퓨터 시장의 80%를 장악하며  단숨에 천하통일을 이루었다. 그러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90년 중국 정부는 컴퓨터 기술의 개발이라는 목표 아래 선진국의 컴퓨터 메이커에 대한 시장 개방을 선언했다. 복잡한 회사 설립절차를 간소화시키고 관세를 대폭 인하하는 특혜도 주었다. 그러자 미국의 IBM이나 델, 에이서, 컴팩 등이 대거 중국에 상륙하여 신생 기업인 롄샹과는 비교도 안 되는 신기술과 마케팅 전략으로 중국 시장을 공략했다. 1990, 결국 개방 첫 해에 롄샹이 개발한 레전드 286 컴퓨터 IBM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 에이서, 컴팩 등이 중국 시장을 점령해 버렸다.

 

1994 3, 롄샹그룹은 컴퓨터 부문을 따로 떼어 독립법인을 만들면서 초대 사장으로 양위안칭을 전격 발탁했는데 그를 발탁한 사람은 역시 그룹 총재인 류촨즈였다. 양위안칭은 사장으로 취임한 후 외국 제품에 대항할 수 있는 기술과 제품 개발에 힘썼다. 그 결과 양위안칭은 중국 시장에 보급형 PC E 시리즈를 내놓았고, 1995 11월에는 중국 최초로 펜티엄 기종을 개발, 출시했다. 그러나 롄샹의 PC 제품은 완전히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이미 세계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PC에 비해 한 세대 늦은 제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양위안칭은 제품의 성능을 해외 대기업 제품과 동일하게 올려놓은 뒤 시장 탈환을 위해 할인 판매작전을 폈다. 업계에서는 롄샹의 저가 판매전략을 자살행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96년까지 시장점유율이 6.9%였던 롄샹은 1997년 들어 10.7%로 시장점유율이 상승하면서 결국 1위 자리를 탈환했다.

 

롄샹의 고속성장 비결

첫째, 롄샹의 기업경영은 미국이나 유럽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다. 모든 사업은 철저하게 수익을 목표로 전개하고 있다. 둘째, 정부 역시 국유 첨단기술업체로서 롄샹에 대한 자금대출이나 세금우대 등 자국산업 보호를 위해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셋째, 중국과학원이 대주주이기는 하지만 경영, 인사, 재무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넷째, 롄샹은 인재를 중시한다. 롄샹은 학력보다는 능력 위주로 직원을 채용하며, 승진 및 처우에 있어서 파격적인 전략을 시행하고 있다. 다섯째, 롄샹은 젊은 회사다. 양위안칭 회장 자신이 30대이기도 하지만 평소에도 늘 젊은 경영을 외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회사 자체가 젊다. 직원들의 평균연령은 28, 임원의 평균연령도 35세 이하이다. 여섯째, 인사고과는 상사는 물론 부하직원에게까지 평가를 받는다. 일곱째, 롄샹은 이런 실적 위주의 경영 특징 외에 기술개발도 첨단을 달리고 있다.

 

 

2장 가전업계의 황제, 하이얼(海爾) 그룹의 장뤼민(張瑞敏)

하이얼 그룹은 중국공산당 정부가 WTO 가입을 앞두고 벤치마킹 대상 제1호로 꼽은 업체였다. 2000 11 6인민일보WTO 가입을 앞두고 격렬해질 국제 경쟁에 대비해 기업의 경쟁력을 기르기 위해 하이얼의 선진 경험을 학습하자는 사설을 실을 정도였다. 그만큼 하이얼의 경영방식이 앞서 있다는 얘기다. 하이얼을 성공으로 이끈 총재 장뤼민은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품질만이 경쟁력이다 

1984년 장뤼민의 나이 35세 때 공산당 정부는 그를 칭다오 냉장고라는 회사의 공장장으로 승진 발령했다. 그가 부임한 칭다오 냉장고는 독일에서 출자한 소규모 회사였는데 이익은커녕 147만 위안이나 되는 빚을 안고 있는 그야말로 형편없는 회사였다. 이 회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제품의 품질에 있었다. 그래서인지 칭다오 냉장고에 부임한 후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불량 냉장고 깨부수기였다. 완제품 냉장고를 하나씩 점검하고 불량품으로 판명된 냉장고를 모두 골라내 공장 앞마당에 쌓아 놓고, 전 직원이 보는 가운데 해머를 들고 직접 깨부쉈다. 그날 그가 깨버린 냉장고는 모두 76대였다.

 

그는 우선 1등품으로 판정 받지 못한 냉장고는 모두 소각하도록 회사 규정 자체를 바꿨으며, 불량품을 생산한 직원과 책임자는 피해액을 월급에서 공제하도록 했다. 또한 종업원에게 월급을 주는 것은 공장장도 아니고 사장도 아니며, 공산당 정부도 아닌 소비자라고 강조했다. 싼티에(철밥통, 철봉급, 철의자)에 익숙해 있던 중국 인민들은 자신의 봉급이 공산당 정부, 즉 나라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지 소비자가 준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소비자가 봉급을 준다는 장뤼민의 생각은 자본주의적 발상으로 공산당 치하의 국유 기업 경영자로서는 감히 하기 힘든 발상이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어디에서부터 출발된 것일까.

誠眞到永遠(성실과 진실을 영원토록 이어나간다). 그의 경영철학이다. 다분히 유교적인 그의 이런 생각은 그가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출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공자의 유교정신과 노자, 장자의 철학인 노장지도(老莊之道)를 경영에 접목시켰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즉 유학이 가르치는 윤리, 도덕의 정신이야말로 기업경영의 결정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이얼의 시스템 성공요인

하이얼은 지금 세계 500대 기업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브랜드 인지도는 이제 GE나 필립스와 같은 다국적 기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2000년 매출은 406억 위안으로 지난 1984 348만 위안의 매출에 비하면 1 1,600배의 초고속 성장이다. 현재 하이얼은 160개국에 제품을 판매하고 있고, 62개의 해외 판매거점과 3 8,000여 개의 영업망을 깔아 놓았다. 그렇다면 하이얼의 고속성장의 배경은 무엇인가.

 

첫째, OEC관리법이다. OECOverall Every Control and Clear의 약자로 그 내용은 일사일필 일청일고(日事日畢 日淸日高)이다. 그날 업무는 그날 완성하고, 마무리는 깨끗하게 하며 매일매일 점진적 성장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둘째, PDCA 시스템이다. Plan, Do, Check, Action의 약자로 계획을 세워서 일하고, 점검한 후 시장에 내보낸다는 뜻이다. 셋째, 80:20 원칙과 삼보법(三步法)이다. 80:20 원칙은 제품이나 공정에서 하자가 있어서 문제점이 발생하면 해당 라인 관리자가 80%를 책임져야 하며, 실무자는 20%를 책임져야 한다는 방식이다. 삼보법은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긴급조치 -> 과도기조치 -> 근본조치라는 3단계 과정을 밟아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같은 문제가 반복적으로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넷째, 승진은 공개경쟁으로 급여는 실적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 다섯째, 아이디어를 봉급에 반영한다. 여섯째, 속도전 개념을 도입한다. 즉 스피드 경영을 중시한다.

 

 

3장 여류불패, 우스훙(吳士宏) TCL 그룹

2000 8, 중국의 TC 그룹은 자사 TCL 이동통신의 핸드폰 광고모델로 한국의 톱 탤런트 김희선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모델료는 1,000만 위안(16억 원).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지만 김희선이 한류의 대표주자로 중국 청소년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서 과감한 투자를 한 것이다. TCL 이동통신은 그들의 예상대로 한국의 톱 탤런트 김희선을 모델로 내세운 이후 판매가 급상승, 2000년도에 겨우 3억 위안이던 휴대폰의 매출액이 그 네 배인 12억 위안으로 껑충 뛰었다.

 

중졸 간호사 출신의 우스훙

현재 TCL 그룹의 총재는 리둥성이다. 리둥성 역시 중국 재계에서는 기린아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1981년 리둥성은 광둥지역이 개방특구로 지정되자 광둥성 후이저우에 TV 부품 생산업체인 TTK 가전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전기·전자·컴퓨터 부품을 생산했다. 그러다가 1996년 홍콩의 중견 TV 업체인 루스공사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완제품 TV 생산에 들어갔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IT 분야에 본격적으로 투신하기로 결심, TCL 컴퓨터공사를 설립했다. 이때 컴퓨터 생산과 판매를 위해 중국 IBM 총재를 지낸 여류 경영인 우스훙을 전격 스카우트하게 된다.

 

우스훙의 지난 반생은 인간 승리의 드라마 그 자체였다. 중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그녀의 첫 직업은 간호보조사였지만 그녀의 타고난 배짱과 기지는 결코 간호보조사라는 직업에 만족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서른이 되던 해 대학학력인정시험에 도전, 합격했다. 그때 마침 미국의 IBM이 중국에 진출했는데 그녀는 남몰래 익힌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IBM에 입성하게 된다. 처음에 그녀는 타자 비서로 발령 받았지만 낮은 학력 때문에 잡급직 사원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그녀는 영업사원의 업무를 눈여겨보면서 밤을 새워 컴퓨터에 대해 공부했고, 불과 1년만에 컴퓨터와 영업의 기본 원리를 터득했다. 어느 날 회사에 홍콩 연수생 선발을 위한 컴퓨터 시험 공고가 붙었는데 결국 그녀는 홍콩 연수생의 일원으로 뽑혔고 연수가 끝나자 회사는 그녀를 영업사원으로 승진시켰다. 타고난 기지와 배짱으로 그녀는 어느 부서에서든 최고의 영업실적을 올렸다. 철저한 실적주의인 미국 회사의 경영방식은 학력에 관계없이 오로지 실적을 기준으로 그녀를 진급시켰다. 과히 파격 질주에 파격 승진의 연속이었다. 입사 9년 후 그녀는 화난지구 총경리(사장)가 되었다. 이때 얻은 별명이 남천왕(南天王)이다. 중국 남쪽에서는 당할 자가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그녀는 당당히 IBM 중국 본사의 사장까지 승진했다. 그녀의 나이 39세 때의 일이다.

 

1998 2, 마이크로소프트 사는 우스훙을 전격 스카우트했다. 직책은 마이크로소프트 중국 본사 사장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로 이적한 우스훙은 그곳에서도 역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마이크로소프트의 1년치 영업실적을 단 6개월만에 달성해 냈다. 빌 게이츠는 이 여걸을 만나고 싶어 미국 본사에서 중국까지 날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해야 할까. 그녀에게 인생 최대의 불운이 찾아왔다. 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그녀는 마이크로소프트에 사표를 냈다. 그러나 그녀의 투혼은 실로 놀라웠다. 1년만에 백혈병을 이겨낸 것이다. 

 

1999 10, 그녀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있던 TCL 그룹의 총재 리둥성은 그녀를 TCL 정보통신 회장으로 스카우트했다. 리둥성은 전통적인 가전제품 생산만을 가지고 기업을 운영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판단, 인터넷 접속 서비스 업체로 전환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도 정보통신업체에서 마지막 승부를 걸겠다는 각오로 스카우트에 응했다.

 

취임 3개월 후인 2000년 초 그녀는 리둥성 총재에게 비밀 보고서를 올렸다. 우리 그룹에서 내가 할 일은 자원과 전략을 결합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전략적 결합의 목표는 제품과 조직운용을 모두 정보화하는 것이다. TCL에게 IT는 산업이자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 보고대로 그녀는 자원과 전략의 결합을 실행해 나갔다. 그 결과물이 이자자(億家家 : www.ejiaejia.com)라는 사이트의 개통이었다. 이자자는 말 그대로 풀이하면 억 개의 가정을 연결시키는 집이다. 즉 전체 중국을 하나의 플랫폼으로 연결하겠다는 시도였다. 그 슬로건인 텐디런쟈(天地人家)가 의미하는 것처럼 정보화 물류시스템의 디()와 가정용 디지털 제품인 런자(人家)를 인터넷 네트워크인 텐()으로 묶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 TCL의 모든 제품은 인터넷상에 판매정보가 올려지고, 판매까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우스훙은 TCL 그룹의 간부들로부터 상당한 견제를 받고 있다. 1999년부터 본격화된 중국의 전자상거래 사업이 2001년이 되면서 실패한 것으로 가닥이 잡히면서 전자상거래 업체의 총수들이 상당수 낙마하고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2001 9월에는 우스훙의 방출설까지 떠돌았다. 그러나 2001 10 30일자 인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스훙은 이제 물은 호수로 변하고 있다. 대세는 되돌릴 수 없다.며 자신의 사임설을 일축했다. 오히려 정보통신 사업에서 실패하면 자살하겠다고 강조하면서 비장한 각오를 불태우고 있다.

 

 

4장 베이다팡정(北大方正)의 대부 왕쉬안(王選)

베이다팡정은 중국 최초의 벤처기업이다. 소프트웨어와 주변기기로 중국을 평정한 기업이고, 특히 한자문자 처리기술, 지문정보 인식기술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선두업체로 꼽힌다. 과학기술과 문명창조라는 회사의 사훈처럼 이 회사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소프트웨어 개발과 시스템 통합 면에서 막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또 인터넷 업계의 정보 시스템 통합 영역이나 은행, 보안, 세무, 증권업의 대형 정보 시스템, 인터넷 접속설비에 필요한 시설 생산에서도 발군이다. 본래 이 회사는 주종목인 인쇄기술 소프트웨어로 중국 천하를 평정했다. 매일 400만 부 이상을 발행한다는 인민일보의 편집, 조판, 인쇄 시스템에 대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회사가 바로 베이다팡정이다.

 

1988 1 10일 저녁 웨이밍 호반. 왕쉬안은 그 호수의 한쪽에 있는 정원에서 연회를 열고 있었다. 초대받은 손님은 국가경제위원회 인쇄장비 조정조의 부조장인 선충캉이었다. 어느 정도 연회가 무르익자 왕쉬안은 선충캉에게 앞으로 베이징대학이 직접 생산단위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발명한 한자 레이저 시스템을 베이징대학이 직접 생산해 판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선충캉은 그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이에 왕쉬안은 베이징대학 학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고 베이징대학은 지금까지 왕쉬안이 취득한 특허를 그의 주도하에 새로 설립하는 베이징대학 신기술공사에 양도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얼마 후 베이징대학이 40만 위안, 베이징시 하이뎬구 지방정부가 420만 위안을 투자하면서 베이다팡정이 설립됐다. 오늘날 중관춘에 있는 하이테크 기업 롄샹, 쓰퉁, 베이다팡정은 모두 이런 과정을 밟고 탄생한 세계적인 기업들이다. 

 

인민일보의 부편집장은 왕쉬안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중국의 대표적인 작가 노신은 평생 밤낮을 가리지 않고 로봇처럼 글을 썼지만 그의 작품이 인쇄된 책은 500만 자 정도이다. 작품은 물론 일기, 편지 등을 모두 합쳐도 그렇다. 그러나 요즘의 30, 40대 작가들은 2,000만 자나 되는 작품의 책을 가지고 있어도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현대의 작가들이 많은 분량의 작품을 가지게 된 것은 왕쉬안이 개발한 베이다팡정의 레이저 인쇄 시스템 때문이다. 왕쉬안이 중국의 활판 역사를 바꾸고 중국의 문화를 진일보시켰다는 극찬이었다.

 

 

5장 중국의 실리콘밸리, 중관춘(中關村) 촌장 돤융지(段永基)

중국의 실리콘밸리, 중국의 첨단 하이테크기업 8,600개가 모여 있는 중관춘의 촌장 돤융지. 중국 최고 벤처기업단지 촌장인 그의 공식 직함은 중국 최대 민영 IT 업체인 쓰퉁(四通)집단공사의 회장 겸 베이징 중관춘 과학기술발전공사 총경리이다. 그가 중관춘을 책임지게 된 것은 롄샹의 총재인 류촨즈와 더불어 지난 1985년 중관춘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관춘은 흙먼지 날리던 시골이었다. 그러던 것이 롄샹의 류촨즈, 쓰퉁의 돤융지가 중관춘에 뛰어들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자 중국 당국은 1988년 이곳을 중국 최초의 첨단기술개발지구로 지정했다. 그 후 중관춘은 10년간에 걸쳐 꾸준히 발전했고, 오늘날 중국 최대의 IT 산업의 메카로 자리잡았다. 이런 발전은 근처에 중국 최고의 명문 베이징대학교와 칭화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큰 원동력이 되었다.

 

양통양해의 시대를 넘어

중국의 하이테크 산업은 양통양해(兩通兩海)가 지배했다. 양통이란 쓰퉁(四通)과 신퉁(信通), 양해는 커하이(科海)와 징하이(京海)를 말한다. 이들 회사는 1980년대 초반에 설립되어 중국의 하이테크 산업을 초창기부터 이끌어 왔다. 그러나 신퉁은 2001년 사장이 밀수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면서 파산해 버렸고, 커하이와 징하이는 지금도 남아 있지만 신생 기업에 밀려 미미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결국 양통양해 중에서는 쓰퉁만이 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양통양해는 중국 IT 천재들에게는 무한한 희망이었고 등불이었다. 양통양해가 이끌어 온 1980년대 때문에 중국에서는 IT 산업 진출을 꿈꾸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중관춘으로 몰려들었다. 결국 그들이 자라 오늘날 중국 IT 산업을 이끌고 있다. 말하자면 소후닷컴의 장차오양이나 8848닷컴의 왕쥔타오, 왕이닷컴의 딩레이와 같은 30대의 젊은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돤융지는 중국 민영 기업 발전 모델을 개척한 최초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베이징 첨단기술지구인 중관춘에서 사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중관춘 발전에도 적잖은 관심을 두고 있다. 중국 정부도 중관춘을 중국 최고의 창업연구센터 및 인큐베이터로 키우기 위해 각종 세금우대 정책과 금융지원 정책을 내놓고 있다. 장쩌민 주석은 중관춘을 10년 내에 대만의 신주단지, 말레이시아의 MSC단지를 따라잡고, 2020년에는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능가하는 단지로 만들겠다고 천명했다. 바야흐로 중관춘이 국가의 중점 사업 단위로 부상한 것이다.

 

중국의 지도세력은 장쩌민-주룽지를 중심으로 한 개혁개방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보수세력 역시 만만치 않다. 보수세력의 정점에 리펑 총리가 있고 그 뒤에는 군부를 비롯한 보수 관료세력들이 버티고 있다. 더구나 약 4,000명에 달하는 혁명 2세대의 자식들인 태자당도 문제다. 이런 복잡한 구도 속에서 태자당도 아닌 중국의 기업가 돤융지가 경제개혁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생각대로 중국정부 당국이 기업가의 공산당 가입을 허용하고, 중국 기업에 가하는 제재를 해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만일 그의 구상이 이루어진다면 중국은 또 하나의 새로운 변혁을 맞게 될 것이다. 지금 그는 중차대한 모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6장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의 룽이런(榮毅仁)

중국에서 가장 부자는 누구일까. 중국인들은 중국의 최고 부자로 룽이런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른바 붉은 자본가로 불리는 룽이런의 집안은 해마다 중국 부호 명단 발표에서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1999년에도 포브스는 중국 최고의 부자로 역시 룽이런을 꼽았다. 당시 그의 자산은 19억 달러였다. 2000년에 들어서도 룽이런과 그의 아들 래리룽이 소유한 재산은 19억 달러로 중국에서는 가장 돈이 많은 집안으로 손꼽혔다. 그는 중국 제일의 부자이기도 하지만 관운도 좋아서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중국 정부의 부주석(부통령)까지 지냈다.

 

룽이런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중국투자신탁그룹의 총자산은 2000 12월 현재 3,576억 위안이다. 산하에 38개의 자회사와 700개의 방계회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홍콩, 미국, 캐나다, 도쿄, 뉴욕, 프랑크푸르트, 호주, 뉴질랜드, 네덜란드에 현지 법인을 거느리고 있는 국제적인 그룹 회사다. 주력 기업인 국제투자신탁의 금융투자와 알선 외에 건설, 인공위성, 자동차, 백화점, 섬유업 등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그룹이다.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는 태자당의 집합소

홍콩의 중국국제투자신탁이 중국 정부의 금융 대외 창구로서 세계적인 대기업의 반열에 오른 것은 룽이런 가문의 기업경영 노하우 덕분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중국국제투자신탁은 형식적으로는 지금도 국무원 산하의 기업이다. 업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일부 현역 공무원이나 군인을 소속기관의 직위를 유지한 채 중국국제투자신탁의 직원으로 임명하기도 한다. 또 하나는 중국 정부 당국의 절묘한 최고경영진의 배합이다. 상하이의 민족자본가 롱씨 가문과 고관의 아들인 왕쥔의 결합을 통해 전문경영인과 권력자가 만나 외부의 간섭을 배격한 채 경영에 성공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물론 이것은 긍정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고, 부정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특수 권력층의 편파적인 인사라고도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성공비결은 사업 영역의 적절한 확장과 전문가 그룹의 충원이다. 중국국제투자신탁이 정부의 특혜를 받으면서 큰 것은 사실이지만 특혜를 받은 모든 기업이 성공한 것은 아니므로 중국국제투자신탁의 성공이 반드시 특혜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현재 중국국제투자신탁은 투자금융기관으로서 거의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며 해외의 투자자들을 중국으로 불러들이는 데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또 회사 자체도 기술거래를 포함해서 증권이나 생명공학 등 중국 내에서 아직 생소한 분야에서도 철저한 준비를 통해 이윤을 창출해 내고 있다. 필요한 전문가는 과감하게 외부에서 채용하기도 하고 칭화대학 안에 있는 연구소를 적극 활용하기도 한다. 현재 중국국제신탁은 세계화의 조기 추진에 주력하고 있다. 창업 초기부터 룽씨 가문의 화교 인맥을 통해 세계적으로 방대한 비즈니스망을 활용하기도 한 것처럼 중국이 고도성장을 추진하면서 필요한 해외 투자를 증가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7장 컬러TV의 대명사, 창훙(長虹) 그룹의 니룬펑(倪潤峰) 총재

2001 6 9, 중국의 WTO 가입이 확정되던 날 밤, 중국 내륙의 쓰촨성(四川省)에 있는 창훙 그룹의 경영진은 팔을 걷어붙이고 밤늦게까지 난상토론을 벌였다. 회의 주재자는 창훙 그룹의 니룬펑 회장이었다. 토론내용은 중국의 WTO 가입으로 야기된 무한경쟁의 시대에 앞으로 창훙이 어떻게 하면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문어발식의 다양한 상품군을 정리하고 오직 컬러 TV 한 품목에만 전력투구해 최고의 기술력을 보유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급성장하는 프로젝션 TV 시장에서 다시 한 번 옛 영화를 되찾자는 전략을 수입하는 것으로 난상토론을 끝냈다. 그 날 이후 창훙은 고화질 TV 징셴왕 프로젝션의 개발에 전념했고, 3개월 후인 2001 9월에 중국 정부의 기술검정을 통과한 후 곧바로 제품을 출시했다.

 

징셴왕 프로젝션 TV의 가격은 16,000 위안( 256만 원)이었다. 이는 외국의 차세대 제품보다 4,0008,000 위안(64112만 원) 싼 가격이었다. 징셴왕은 이렇게 파격적인 가격을 내세워 소니, 도시바, 삼성, LG 등 외국 브랜드가 독점하고 있던 프로젝션 TV 시장의 10%를 순식간에 잠식해 버렸다. 그 날 이후 고화질 TV 징셴왕 프로젝션은 중국인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제1품목으로 떠올랐다. 

 

2001년 중국 기업과 외국 기업은 모두 디지털 가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정보화 기술과 제품을 시장에 선보이고 있다. 중국 기업으로는 창훙이 프로젝션 TV, TCL HDTV, 하이얼이 네트워크 가전, 하이신이 인터넷 TV, 외국 기업으로는 LG전자가 네트워크 가전, 삼성전자가 벽걸이 TV, 파나소닉이 지능형 가전, 지멘스가 기능형 주택 TV를 각각 출시했거나 출시할 예정이다. 다국적 기업들은 중국 시장이 단순 저가 제품에서 고가 제품, 다기능 제품으로 이동 중이라고 판단, 완제품은 물론 중국기업이 아직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한 핵심 분야를 선점하여 시장을 미리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창훙도 기존의 컬러 TV 이외에 프로젝션 TV 등 고기술 TV 시장에서 우위를 선점한 후 120만 대의 에어컨과 오디오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고 하는 등 종합가전 업체로의 도약을 적극 추진 중에 있다.

 

2002 1 29일 창훙은 놀랄만한 새 계획을 발표했다. 중국 최대의 컴퓨터 생산업체인 롄샹과 다방면에 걸친 합작을 통해 정보가전업에 진출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롄샹의 양위안칭 회장과 창훙의 니룬펑 회장이 합의한 결과에 따르면 조만간 양사는 연구개발과 생산능력을 효율적으로 결합하여 디지털 가전 시리즈 제품을 출시할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발표되지 않았지만 전형적인 IT 기업과 전통 가전 업체 간의 결합에 따라 첨단 신기술 제품이 등장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8장 기술개발에 앞장선 춘란(春蘭) 그룹의 타오젠싱(陶建幸)

춘란 그룹은 중국 굴지의 에어컨 생산회사이자 오토바이 생산회사로서 2000년도 매출은 200억 위안(3 2,000억 원) 정도이지만 중국이 세계 최대의 오토바이, 에어컨, 냉장고 생산국이라는 것에 비춰볼 때 향후 발전 가능성이 큰 회사에 속한다. 현재 이 회사 대표는 타오젠싱인데 지난 1985년에 공장장으로 처음 이 회사에 부임한 이후 구멍가게에 불과했던 춘란 그룹을 세계적인 에어컨 회사로 성장시킨 장본인이다.

 

타오젠싱은 1985년 만년적자에 시달리던 타이저우 냉기기설비공장으로 부임하라는 당의 명령을 받았다. 타오젠싱이 부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48개나 되는 생산제품 중에 경쟁력 없는 이앙기, 농기계 등 42가지는 생산을 완전히 중단시키고, 에어컨 한 가지만 집중 육성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당시 춘란공사의 에어컨의 판매는 중국의 23개 사 제품 중에서 끝에서 세 번째였다. 하지만 그가 에어콘을 주력 생산제품으로 결정한 것은 치밀한 시장조사의 결과였다. 시장조사 결과는 에어콘, 그 중에서도 벽걸이형 에어컨이 가장 전망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는 벽걸이형 에어컨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그는 우선 외국산 벽걸이 에어컨 중에서 명품만을 사다가 분해해서 그 구조를 살펴보고 생산에 사용된 부품과 기술을 연구했다. 1년간의 연구 끝에 중국에서 최초로 7,000W용 벽걸이형 에어컨이 생산되었다.

 

중국에서 벽걸이형 에어컨이 자체 생산되자 중국 시장의 상당 부분을 점유하고 있던 일본 회사들은 중국 제품보다 한발 앞선 속도변환식 에어컨을 중국 시장에 상륙시켰다. 결국 성능이 월등히 좋은 신제품이 출시되자 춘란의 에어컨은 판매가 급속히 떨어졌다. 타오젠싱은 다시 속도변환식 일제 에어컨을 사다가 뜯어보고 동일한 기술의 제품을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생각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자 타오젠싱은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일본에 기술자를 파견했지만 일본 기업들은 주변기술만 가르쳐 줄 뿐 핵심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은 일체 사양했다. 결국 자체적인 기술개발에 착수, 2년 여만에 신제품을 내놓았다.  

 

경쟁력 있는 상품이 나오자 타오젠싱은 매출신장을 위한 활동에 나섰다. 처음에 시작한 것은 351운동이었다. 즉 처음엔 3,000만 위안을 목표로 삼고, 그 이듬해엔 5,000만 위안 그 이듬해엔 1억 위안을 돌파하는 계획을 세우고, 판매를 독려했다. 351운동의 목표가 달성되자 이번에는 135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즉 첫 해엔 1억 위안을 매출 목표로 잡고 그 다음 번에는 3억 위안, 그 다음에는 5억 위안 등으로 잡아서 매출을 신장시켰다. 결국 이 회사는 그가 부임한 이듬해인 1986년의 매출 천만 위안 규모에서 1990년에는 1 2,000만 위안(184억 원)을 돌파하면서 중국 에어컨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春蘭公司也是一個學習公司, 勤於思考的公司, 不斷創新的公司(배우는 회사, 일하면서 생각하는 회사,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회사) 춘란그룹의 공장 내부에 걸려 있는 현수막이다. 그만큼 기술개발에 힘쓰자는 말이다. 1997, 춘란그룹의 연구소는 무려 21층 빌딩에 4만 평방미터로 확장되고 석·박사급 연구원만 수백 명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연구소로 발전했다. 또 기술 습득과 이전을 위해 상하이 기술대학과 산학협동 체제를 구축하였고, 회사 내에 자동제어공학과와 전자공학부 등 15개 과의 학사과정은 물론 석사과정과 5개의 박사과정을 개설해 놓고 있다. 이러한 기술개발 노력에 힘입어 나온 상품이 2002 1월에 출시된 무소음 에어컨과 무소음 세탁기, 온도통제 냉장고(액정모니터를 이용해 냉장고의 온도를 자유자재로 맞출 수 있음), 무불소 냉장고(환경친화 상품) 등이다.

 

 

9장 메추리로 일어선 시왕(希望) 그룹의 류융싱(劉永行)

2000년도 중국에는 사영 기업 수가 176여 만 개, 종업원 수는 2,000만 명이 넘으며 개인이 하는 가게도 3,000만 개가 넘는다. 사영 기업이란 말 그대로 개인이 운영하는 기업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본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지만 1979년 개혁 개방 이후 이 원칙은 무너졌다. 물론 중국은 아직도 대부분의 기업이 국영 기업이거나 향진(鄕鎭) 기업이다. 중국의 176만 개 사영 기업 중에서 최고의 기업은 어디일까. 중국인들은 시왕 그룹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브스 2001 11 17일자에서 류융옌, 류융싱, 류융메이, 류융하오 4형제를 중국 최대의 갑부로 선정했다. 그들의 총재산은 10억 달러였다. 대대로 내려오는 중국의 전통적인 부자였던 중국투자신탁의 룽이런 가문을 제친 것이다. 중국의 13억 인민은 류융싱 형제의 최고 갑부 등극에 찬사를 보냈다. 중국 내륙 쓰촨성의 가난한 농가 출신이라는 것이 중국의 서민에게 희망을 듬뿍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컴퓨터와 같은 첨단제조업도 아니고, 부동산업도 아닌 그야말로 순수한 제조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더욱 희망을 주었다. 이제 류융싱, 류융하오 형제는 중국 최고의 갑부이자 시왕 그룹의 총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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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융싱 회장은 입버릇처럼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주어진다.고 말한다. 그들은 한때 중국 내의 돼지사료 시장 탈환을 위해 태국 굴지의 사료 그룹인 샤로엔 폭핸드 그룹과 일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당시 류융하오는 경쟁자가 있어야 사업하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결국 태국의 샤로엔 폭핸드 그룹은 시왕 그룹으로 인해 중국 내에서는 더 이상 시장 수요를 확대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2001 6월 중국의 WTO 가입으로 이제 중국의 사료 시장도 개방되었다. 그러나 시왕 그룹의 총수인 류융싱은 오히려 자신만만하다. WTO 가입은 우리에게 기회다. 경쟁력 있는 민영 기업에게 더욱 넓은 활동공간을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민생 은행을 사들인 것도 민영 기업의 발전을 위한 것이다.

 

손목시계 네 개와 자전거 네 대로 시작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어선 시왕 그룹의 네 형제들. 그러나 이들 형제는 아직도 무섭게 자신의 일에 매진하고 있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가난 때문에 신발을 신어 본 기억이 없어서인지 이들 네 형제는 지금까지 술과 담배를 일체 입에 대지 않는 근검한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10장 중국의 철강왕, 상하이바오강(寶鋼) 그룹의 쉬다취안(徐大銓)

세계철강협회는 2000년도 세계 철강회사들의 생산능력과 기술 수준, 원가계산 등 약 200여 개의 항목으로 경쟁력을 평가했는데 1위는 한국의 포항제철, 2위가 일본의 신일본제철, 3위가 바로 바오강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연간생산량 200만 톤의 군소업체에 불과했던 바오강이 2001년에는 그 10배인 2,000만 톤의 생산능력을 보이면서 드디어 세계 유수의 철강회사 대열에 낀 것이다.

2001 3, 바오강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세계 랭킹 22위의 서우다오제철, 25위의 우한제철과 앞으로 원료구매 단계부터 신제품 개발, 가격조정 등의 분야에서 상호공동 보조를 취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서우다오제철과 우한제철은 바오강과 더불어 중국에서 2, 3위에 랭크되어 있는 빅3 회사다. 이 빅3가 상호협력하겠다는 발표를 내놓자 세계 철강업계는 긴장했다. 궁극적으로 이 빅3가 합쳐질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계의 철강회사들이 중국 빅3 철강회사의 공동전선과 향후 통합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 긴장하는 것은 가뜩이나 어려운 철강 경기에 중국 상위 3개 사의 통합으로 연간생산량 3,000만 톤 규모의 세계 최대의 철강회사가 탄생하면 낮은 인건비로 인해 다시 한 번 무한 판매경쟁에 돌입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2001 11 28, 쉬다취안 회장은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제야금전람회에 참석했다. 그는 연설에서 WTO 가입 이후 중국 강재(鋼材) 시장의 경쟁은 세계 각국 기업의 참여로 본격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의 WTO 가입으로 한국과 일본의 강재가 대량으로 중국에 들어왔지만 비관세 장벽의 철폐로 인해 거꾸로 중국의 강재도 수출할 길이 열렸다는 점을 강조했다. 비록 안방 시장은 내주었지만 반대로 바오강이 세계 시장으로 본격 진출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발언이었다.

문제는 중국 철강업체들의 국제 경쟁력이다. 쉬다취안을 비롯한 중국철강협회 관계자들은 중국 당국에 대해 총량 규제, 구조조정 등을 하루 빨리 서둘러서 종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국가가 각 철강회사들의 생산량을 조정·감독하고, 1,042개의 군소업체가 난립해서는 밀려오는 외국의 대기업과 세계 시장의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급변하는 세계 철강 시장의 환경에 비해 중국 당국의 대응속도가 너무 늦다는 업계의 반발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리고 쉬다취안은 향후 고부가 제품의 비율을 높여 업계의 국제 경쟁력을 증강하겠다는 의사를 내놓기도 했다. 실제로 바오강은 고부가 제품인 스테인레스강의 생산을 위해 일본의 닛신제강과 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 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중국 정부가 1,042개나 되는 철강회사들을 4개의 대집단으로 묶겠다는 내부 방침은 바로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국 철강회사들의 기술력이다. 아직 중국 철강회사들은 세계 첨단 철강회사들과 견주어 볼 때 기술력이 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에 국제철강협회가 내놓은 세계 철강회사 경쟁력 순위에서 바오강이 포철과 신일본제철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바오강의 성장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는 것을 입증한다. 중국 철강산업을 사실상 이끌어가고 있는 쉬다취안 회장이 앞으로 어떤 전략으로 중국 철강산업을 궤도에 올려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오늘날 중국은 TV, 냉장고, 에어컨, 가스렌지,

철강, 세탁기, 신발, 섬유 등 460개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제품들이 세계 1위에 오르게 된 것은

중국공산당 정부의 노력이 아니라

바로 해당 기업을 중국식 경영철학으로

이끌어온 기업인들의 노력 때문이다.

중국 경제를 아는 해법은 간단하다.

중국의 기업을 이끌어 온 기업인들의 경력과 경영방식,

시장 개척에 대한 노하우를 분석하면 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홍하상은 지난 5년간 중국 현지를

직접 취재하면서 중국 경제발전에 대한

해답을 이들 기업인들로부터 찾았다.

그는 중국의 북부 선양에서부터

다롄, 톈진, 베이징, 칭다오, 항저우, 쑤저우,

사오싱, 상하이, 홍콩, 마카오에 이르는 연안 개방도시를

모두 방문했으며,

때로는 내륙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기업과 기업인들을 취재했다.

이 책은 그간 그가 발로 뛰어 분석한

중국 기업인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이다.

중국과의 무역이나 사업을 하는

기업인들은 물론 우리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미래의 대국 중국을 이해하려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길러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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