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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황하와 장성의 중국사 - 니시노 히로요시 지음

삼생지연 2021. 2. 2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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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황하와 장성의 중국사 니시노 히로요시 지음 북북서 / 2007년 11월

 

1장 작은 말

유럽과는 대조적인 몽골의 말

몽골말, 또는 몽골말 계통의 품종은 모두 몸집이 작다. 우리가 현재 흔히 볼 수 있는 서러브레드종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말이다. 막북 지방에 사는 이민족은 기원전 흉노시대보다 훨씬 이전부터 이런 작은 말을 길러왔고 이것을 타고 생활을 영위했다. 그 무렵 이미 암말에 수탕나귀를 교미시켜 노새를 낳게 하거나, 암컷 노새에 말의 수컷을 교배시켜 변종을 만들어내는 등 가축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배하여 보다 좋은 품종을 만들어내고자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실험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면서도 말을 크게 만들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난 뒤에도 막북 지방의 민족은 말의 대형화를 꾀하지 않았다. 아는 바와 같이, 13세기 칭기즈칸 시대에는 서방 원정을 떠나 정복을 계속해나갔고, 유럽까지 진군하여 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이에 따라 유럽이나 중앙아시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몸집도 크고 균형 잡힌 다리를 가진 빠른 말을 쉽게 손에 넣을 기회를 얻었지만, 근본적으로 말을 바꾼다든가 몽골말의 혈통을 개량한다든가 하는 것은 시도하지 않았다.

 

이것은 유럽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유럽에서는 기원전 17세기 전후의 히타이트나 아시리아 시대부터 말의 대형화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유사 이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사용은 물론 운반, 승용, 경마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말의 대형화가 절실했던 것이다. 그래서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했을 때에는 유럽 사람들 눈에는 쥐 같은 말을 탄 미개인의 무리로 비쳐졌다. 쥐 같은 말이란 통상 말을 깎아내릴 때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왜 막북 지방의 민족은 굳이 작은 말을 고집했을까? 물론 진화나 진보에 무관심했기 때문은 아니다. 또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여긴다든가, 신앙적이라든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다. 유목민의 입장에서나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몸집이 작은 몽골말이 우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풀과 물을 찾아서  

막북 지역에서는 우선 지리적으로나 기후적으로 작은 말이 생존에 유리하다. 유라시아 대륙의 북부에 펼쳐진 스텝 대초원은 기후나 토질 때문에 수목이나 풀이 크게 자라지 못한다. 풀이나 관목이 자라는 것은 비가 많이 내리는 봄에서 여름 사이다. 이른바 하우형(夏雨形) 토지다. 그 외에는 건기라고 하여 건조지대로 바뀌며 풀이 부족해진다. 외몽골의 목초가 가장 풍부할 때는 여름인데, 일 년 중 평균 한 달 남짓한 기간이다. 겨울이 가장 길어서 일 년 중 절반은 겨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여름에 풀을 많이 베어 두었다가 겨울에 가축에게 먹이면 될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착민적인 발상이다. 유목민에게 물으면 그런 방법은 게으른 자의 사고방식이고, 그런 방법으로는 가축 수가 금세 줄어든다고 반박한다. 그들이 구할 수 있는 풀은 짧은 것뿐이어서 베는 것조차 어렵다. 조금씩 풀을 베어 말려두기도 하지만, 이것은 병들거나 어린 가축에게 주기 위한 것이다. 여름에도 외몽골의 하루 평균 기온은 섭씨 10도로 높은 편이 아니라 풀이 별로 자라지 않는다. 연간 평균 기온은 영하 1도이다. 따라서 여름에 초원의 지평선을 바라보면 한 면 가득히 풀이 나 있는 것 같지만 결코 충분하다고 할 수 없고, 끊임없이 풀과 물을 찾아 이동해야 한다.

 

이것이 유목인 것이다. 유목민에게는 사막을 걸어야 하는 날이 많다. 모래사막뿐 아니라 돌사막이라고 불리는, 전혀 풀이 나지 않는 사막도 있다. 고비라 불리는 흙바닥에 콩 크기만 한 작은 돌을 뿌린 것 같은 불모의 지대도 있는데 이 역시 사막이다. 사막을 지나는 동안은 성글게 난 낙타풀이나 관목 따위의 보잘것없는 먹이로 배를 채우며 다음 목초지대를 찾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외몽골의 유목민에게 있어서 풀과 물을 찾기 위한 싸움과 전쟁은 불가피했다. 싸우는 것이 살아남는 수단이었고, 유목민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전쟁을 위한 훈련을 쌓았으며 수렵으로 단련되었다. 스텝지대라 해도 어디에나 풀이 나는 것은 아니고, 풀이 없는 고산지대가 있는가 하면 삼림지대도 있다. 겨울이 오면 몽골말은 발로 눈을 파고 마른 풀을 뜯어먹는다. 양이나 염소는 그럴 힘이 없기 때문에 말 뒤를 따라다니면서 남은 풀을 먹는다. 북방의 말은 일 년 내내 방목을 하는데 겨울 동안 체중이 20~30퍼센트나 줄어든다. 몽골말은 밤낮을 바깥에서, 그것도 영하 50도의 혹한도 견뎌내고 살아남는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몸집이 작은 몽골말이 환경적으로 추운 지방의 유목생활에 적합했던 것이다.

 

기마 군단은 최소설이 합리적이다

서방 원정에 나선 몽골군의 숫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0만 안팎이라는 설과 50만이나 70만이라는 설도 있지만 실제 숫자는 확실치 않다. 20만으로 보는 해석이 많은데, 만약 20만이라고 한다면 병사 한 명당 평균 다섯 필의 말을 끌고 갔다고 쳤을 때 무려 100만 필이나 된다. 스텝지대를 지나 호라즘에 이르러 병사를 나눠 호라즘의 여러 도시를 공략할 때까지 그 많은 말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만큼 원정길에 풀이 많았을까? 오토랄을 비롯한 오아시스 도시를 공략한 뒤에는 인마용 식량을 약탈할 수 있었겠지만, 그 전까지의 원정길은 몹시 험난했을 것이다. 유목을 하러 나온 게 아니라 원정이다보니 휴식을 취할 때마다 말에게 풀을 먹일 수도 없었을 테고, 풀의 양은 일상적인 유목 때보다 두세 배는 더 필요했을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부근의 스텝지대의 풀은 동아시아 쪽의 그것보다 조금 긴 것도 같지만, 스텝지대 전체를 통틀어도 군마 100만 필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옛날부터 물과 풀을 찾아 피나는 싸움을 해온 유목민의 경험에 비춰 봐도, 한 번에 그렇게 많은 말을 데리고 간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한편, 병사의 숫자도 몽골 천호제(千戶制)라는 십진법 군조직의 형태로 봤을 때 부풀려진 감이 없지 않다. 천호제는 몽골의 유명한 군조직 구성법으로 칭기즈칸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병사 10명을 최소 단위로 그 장을 10호장이라 불렀고, 이것을 또 10호 모아서 그 장을 100호장, 또 이것이 10호 모이면 천호장이 되는 것이다. 몽골제국은 이 천호장이 100호 가량 있었다. 그 가운데 에는 제국이 생기기 전에 몽골부족에게 맞서다 정복당해서 나중에 조직에 편입된 타타르 부족, 케레이트 부족, 나아만 부족 등도 포함된다. 하지만 1만 명쯤 되는 친위대 케식은 포함되지 않는 숫자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서방 원정에 나선 몽골군의 숫자는 10만 명 안팎으로 짐작된다. 거의 모든 군사가 원정에 나선다고 해도 일부는 동생의 지휘 하에 본국에 남겨두었을 테고, 금나라나 서하에 대한 경계병도 배치했으니 10만 명이 채 안 되는 군사로 서방원정에 나섰을 것이다. 또 원정군의 규모를 파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변수가 있다. 하나는 몽골군 이외에 속국의 병사를 얼마나 편입시켰는지, 그리고 정복한 곳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전쟁에 활용하는 것이 몽골군의 기본적인 전술이고 보면, 얼마나 많은 포로가 전쟁에 동원되었느냐에 따라 전체 원정군의 규모는 큰 차이가 생길 수 있다. 만약 원정군 규모가 20만에 이르고, 말의 숫자가 스텝지대에서 구할 수 있는 풀의 양을 웃돌았다면 이광리의 원정 때와 같이 굶어죽는 말이 속출했을 것이다.

 

2장 얼어붙은 황하를 말이 건너다 대원정의 빌미

칭기즈칸은 가는 곳마다 나타나는 강을 어떻게 건너고, 또 어떻게 이용했을까? 칭기즈칸의 시대, 서방의 중앙아시아는 호라즘 왕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몽골제국과 호라즘 왕국사이에는 거란족이 세운 서요(西遼)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칭기즈칸은 호라즘 왕국을 공격하기 전에 장군 제베에게 2만의 군사를 주어 이 서요를 멸망시켰다. 칭기즈칸 자신은 십수만 명의 본대를 이끌고 천산산맥 북쪽의 스텝지대를 서진하여 이르티시 강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이때가 1219년 여름의 일이다. 칭기즈칸은 이곳에서 가을이 깊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이 부근은 유라시아 대륙의 스텝 중에서 풀이 비교적 많아 말을 쉬게 하기에 적합했다. 이르티시 강은 알타이 산맥에서 시작되어 북으로 흐르다 오비강과 합류된다. 그리고 10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동결된다. 이 강도 혹한지대에서 북류하기 때문에 얼음이 녹을 때는 남쪽의 상류에서부터 녹기 시작한다. 중국식으로 말하면 무개천(武開川)이 된다. , 이 부근의 강은 사막으로 물이 스며들어 수량은 많지 않고, 계절이나 기후에 따라 물이 바짝 말라붙는 일도 있다. 따라서 말이 힘들지 않게 건널 수 있는 강이다. 호라즘 왕국은 사막 안에 산재하는 오아시스 도시를 지배하에 둔 제국이었다. 왕국의 동쪽 끝에 위치한 도시가 오토랄이다. 바로 이곳에서 오토랄 사건이 일어나서, 칭기즈칸에게 서역정벌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일찍이 한나라 무제가 대완국 원정에 나선 것과 그 경위가 비슷하다. 한 무제의 원정은 무제가 한혈마를 얻기 위해 파견한 통상 사절이 죽임을 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218, 칭기즈칸은 호라즘에서 온 세 명의 상인을 사절로 삼아 호라즘의 왕 무함마드(재위 1200~1220, 정식 이름은 알라 웃딘 무함마드)에게 보냈다. 통상을 위한 사절이었지만, 선물과 함께 귀왕을 내 자식과 같이 생각하고자 한다는 칭기즈칸의 친서가 전해졌다. 이 친서가 무함마드를 화나게 했을 것이다. 자신을 신하 취급하겠다는 의미가 아닌가. 대체 칭기즈칸의 군대는 얼마나 강한가? 무함마드는 불쾌한 얼굴로 물었다. 사절단은 금세 영합하여 대답했다. 호라즘 왕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이미 불꽃이 튀는 것 같은 상황에서 칭기즈칸은 이번에는 450명의 이슬람 상인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호라즘 왕에게 보냈다. 통상을 위한 상품도 잔뜩 짊어지고 가서 힘을 과시할 작정이었다. 사절단이 처음 방문한 오토랄에서 교섭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사절단 쪽에서 보면 오토랄은 호라즘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실다리아 강의 중류에서 하류에 이르는 지점의 동쪽 강변이다. 호라즘 왕 무함마드의 의향이었는지 어떤지는 확실치 않지만, 오토랄의 장관 이날추크가 450명의 사절단을 모두 죽여 버렸고, 말과 낙타를 비롯한 상품도 빼앗아 버렸다. 눈에는 눈, 힘에는 힘이라는 식이었을까? 사절단의 낙타 몰이꾼이 가까스로 도망쳐서 칭기즈칸 앞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그 사람은 일부러 도망가게 한 것이리라.

 

세심한 도하 작전

예를 들어 은천(銀釧)에는 1527년 음력 8월 경술(庚戌)에 소왕자(素王子)가 이끄는 수만의 기마군이 습격해왔다. 명나라 측은 얼음이 단단해졌으니 적이 올 것이다 하고 단단히 방비했지만 돌파당하고 말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점이다. 몽골 측은 황하가 얼기만을 기다렸다가, 처음부터 적의 삼엄한 경계태세를 각오하고 쳐들어왔다. 그런 이유로 얼음이 약해지면 재빨리 물러갔다. 예부터 변방의 민족은 황하의 동결에 관한 꽤 자세한 데이터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루만 오차가 나도 생사가 갈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자로 기록된 자료가 없는 탓에 우리는 모든 것을 중국 측의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들의 움직임은 대략 파악할 수 있다. 극히 용맹 과감하고 습격하는 과정에서는 잔인했지만, 도하 작전에 임해서는 늘 세심했다. 어떤 정보든 간에 다 모으고 나서 실행에 옮기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칭기즈칸의 서방 원정이 성공한 것은 이 습관이 바탕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반년 가까이는 말이 황하의 얼음을 밟고 오르도스로 건너갈 수가 있었다. 황하의 동결은 오래 전부터 오르도스가 이민족과의 치열한 싸움터가 된 이유 중의 하나다.

 

해마다 날씨도 다르다. 북방에서 말을 타고 황하를 건넌 이민족에게 동결기는 유격전과 기동전을 전개하기에 유리하지만, 전투에 지거나 습격에 실패하여 철수할 때 만약 해빙기보다 늦어지면 얼음 위로 건널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오랫동안 오르도스를 점거하지 않는 한, 독 안에 든 쥐가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기동력이 있고 마상 활쏘기에 능하다고는 해도 그들은 늘 소수의 침입자라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만리장성도 마찬가지였다. 후세 사람들은 변방의 이민족이 일단 장성을 넘는 데 성공하면 그걸로 끝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장성을 넘은 뒤에 예상 밖의 반격을 당해 후퇴하려할 때, 만약 장성이 버티고 있으면 역시 독 안에 든 쥐 꼴이 된다. 이를 위해 장성의 70퍼센트는, 특히 오르도스 동쪽 지역은 중요한 장성만이라도 외장성(外庄城)과 내장성(內粧城) 두 겹으로 만들었으며 지금도 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이중으로 된 장성일수록 독 안에 든 쥐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실제로는 두 겹 이상으로 겹겹이 쌓은 곳도 있고, 중요한 지점에는 어김없이 말의 진로를 방해하는 벽이나 도랑을 설치해두었다. 설령 독 안에 든 쥐가 일이 없다 하더라도, 그럴 위험이 크기 때문에 변방의 이민족들이 쉽사리 장성을 넘을 수 없는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북방인은 수전에 약하다

낙양(洛陽), 정주(鄭州) 등 북쪽의 주요 도시는 양자강이 거느리는 여러 도시와 달리 황하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개봉(開封), 제남(濟南) 등의 도시는 황하가 대운하와 이어진 후에야 항구로서 번창했기 때문에 황하 자체의 운항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이다. 황하에는 고저의 차이가 있어 수군(水軍)도 발달하지 못했다. 수군이란, 말 그대로 물 위의 군대라는 뜻으로 해군(海軍)과 같은 말이지만, 여기서는 바다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므로 수군이라고 표현한다. 중국에서 수상전(水上戰)은 대부분 남쪽에서 벌어졌다. 그런 이유로 수상전에 약한 것은 이민족뿐만이 아니었다. 그 밖의 북쪽 사람들도 수상전에 약한 면모를 보였다. 저 유명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이 좋은 예이다. , , 오 세 나라 중에서 북쪽의 황하 중류에 가까운 업() 지방을 근거지로 했던 위나라는 208년 남정(南征)에 나서 강남에서 세력을 넓히던 오나라를 단숨에 치려고 했다. 무려 80만 대군이라고 알려졌지만, 정확한 숫자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위나라 군대는 호북성(湖北省)의 양자강 북쪽, 적벽의 맞은편 강기슭의 오림(烏林)이라는 곳에 진을 쳤다. 강가에 군선을 염주 꿰듯 묶어놓고 정박한 채로 결전의 날을 기다렸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오나라는 촉나라와 연합하여 싸우게 되는데, 가장 세력이 강한 위나라에 대항하여 오와 촉이 연합작전을 편 것이다.

 

양자강에 익숙한 오나라가 계략을 세웠다. 오나라 수군의 지휘관 황개(黃蓋)는 항복할 것이라고 속인 후 오나라 선단을 이끌고 위나라 선단 가까이로 갔다. 오나라 군의 배에는 기름을 먹인 나무 다발을 쌓고 그 위에 천을 덮었다. 그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위나라의 조조는 기뻐하며 오나라의 선단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나라의 선단이 갑자기 덮고 있던 천을 벗겨내는가 싶더니 나무 다발에 불을 붙여 위나라 선단 쪽으로 밀어붙였다. 미리 풍향이 위나라 쪽으로 바뀔 것을 알고 있던 오나라의 계략이 맞아 떨어졌다. 위나라 선단은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고, 게다가 강기슭의 위군 진영에도 옮겨 붙어 큰 혼란이 일어났다. 결국 위나라는 완패했다. 이로 인해 위나라가 천하를 차지하는 일이 크게 늦어졌고, 천하삼분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오나라가 양자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바람을 아군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전투의 결과, 오나라는 강남의 대부분을 확보했고 촉나라의 유비도 파촉(巴蜀)을 얻었다. 물론 위나라의 조조도 남정에 앞서 수군을 훈련시켰다. 하지만 황하에서 훈련을 한 것이 아니라, 근처에 현무지(玄武池)라는 인공호수를 만들어 놓고 경주(輕舟), 즉 작은 배를 띄웠다고 한다. 그런 훈련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이 대목에서 북쪽 사람들의 수상전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일천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3장 그래서 장성이 필요했다

맹강녀의 비극

만리장성에 대한 후세 사람들의 이미지에는 무엇보다도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만리장성 건설에 따른 커다란 희생이며, 또 하나는 그런 희생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족의 침입에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장성 건설에 따른 인적 희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고된 노동에 내몰린 사람들의 3분의 1이 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갈증을 견디지 못해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 수치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물을 찾아볼 수 없는 돌산의 산등성이에 위치한 공사현장에 어느 정도나 마실 물이 제공되었을지, 또 관측에 필요한 물까지 감안하면 그 공급량은 턱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식량 부족이나 고된 노동에 지쳐 목숨을 잃는 것은 그나마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갈증을 못 이겨 죽은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어쩌면 더 참혹한 죽음일지도 모를 일이다. 물을 구하기 쉬운 황하 유역에서도 지하수에 불소 성분이 많아 음료수로 적당하지 않다. 목이 말라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그런 물이라도 벌컥벌컥 들이켰을 것이다. 장성을 쌓는데 끌려가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장성 건축에 얽힌 맹강녀(盟姜女)의 이야기에는 이러한 희생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공감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거의 중국 전역에 걸쳐 전해지는 맹강녀의 이야기는 시대나 장소에 따라 약간 내용이 다르지만, 줄거리 속에 녹아든 백성의 마음은 한가지다.

 

맹강녀 이야기는 진()나라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라에 범기량(範氣量)과 맹강녀라는 젊은 부부가 살았다. 지금의 섬서성에 사는 젊은 부부였다는 설도 있다. 신혼생활의 행복에 푹 빠져있을 때, 남편 범기량이 장성공사에 끌려가게 되었다. 싫든 좋든 가야하는, 말 그대로 강제연행이었다. 범기량이 끌려간 곳은 산해관(山害關)의 공사현장이었다. 일 년을 기다려도 범기량은 돌아오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지자 맹강녀는 남편을 위해 직접 지은 겨울옷을 가지고 공사 현장을 찾아갔다. 머슴과 몸종을 데리고 갔는데, 가는 길에 머슴이 몸종을 죽이고 맹강녀를 덮쳤다. 하지만 정조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맹강녀는 머슴을 죽이고 만다. 그런 고초를 겪으면서 맹강녀는 겨우 산해관에 도착했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죽은 뒤였다. 굶어죽은 것인지, 과로로 죽었는지, 아니면 목이 말라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고, 남편의 시신은 장성 안에 묻혀 있다고 했다. 맹강녀는 장성에 기댄 채 울부짖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갑자기 장성의 일각이 무너지더니 남편의 시신이 나타난다.       

사마천도 공사를 비판하다

장성 건축에 희생된 백성의 원한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여러 가지 형태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맹강녀의 불행한 모습에 자신의 운명을 비쳐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마천은 진나라 때 무리하게 쌓은 장성과 직도(直道)를 직접 돌아보고 그 감상을 이렇게 적었다.

 

그야말로 백성의 괴로움을 무시한 공사로다. 진이 제후를 멸했을 때는 천하의 인심은 아직 불안했고 다친 자들의 상처도 채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명장 몽염은 공사를 멈추게 하는 데 몸을 바치지 않았다. 노역에 내몰린 백성을 구하지 않았고, 늙은이와 고아를 생각하지 않았고, 백성의 화합을 도모하지 않았으며, 제 한 몸을 지키기 위해 시황제에게 아첨하느라 오히려 공사를 권했던 것이다.

 

이 글은 장성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장성이라고 하면 시황제가 만들도록 한 것이고 그 폭정의 상징으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사마천이 믿고 있던 대 흉노전과는 늘 부풀려진 것이었고, 본국의 일방적인 발표뿐이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사마천은 저 강력한 기마군단의 공포를 체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장성의 참된 필요성을 경시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사마천은 장군 몽염이 아첨하느라 장성이나 직도의 공사를 부추겼다고 해석했지만, 그렇게 단언할만한 사실이나 일화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로부터 1,700년이 흐른 뒤, 명나라 때의 순무 왕예나 여자준 (余子俊)이 오르도스 현지에서 장성의 수축을 통절히 상소했다. 장성 건설이 꼭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 묻는 질문에 사령관 진굉도 그 필요성을 인정했다. 또 사마천이 시황제에 대해 쓸 때는, 같은 권력자로서의 한 무제의 모습이 겹쳐 보였을 것이다. 동시대의 한 무제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글 따위는 절대로 쓸 수 없었는데, 사마천은 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궁형(거세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비운의 무장 이능(李陵)을 감싸는 발언을 하여 무제의 화를 돋운 것인데, 사마천 역시 사람인터, 몽염에 대한 비난은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한 것이다.

 

장성 건설에 동원된 민중의 희생을 피하려고 공사를 그만둔다면, 당시 중국 전체 인구의 80퍼센트에 달하는 황하 유역 사람들의 생활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후의 흉노의 침입까지 감안해서 생각해보면, 결국은 농사는커녕 생명과 재산도 다 날리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장성을 건설하면 비록 희생은 크지만 농사와 가족, 그 자손은 구할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즉 장성을 쌓으려면 희생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만들지 않으면 멸망하고 만다. 이것이 장성 건설에 있어 항상 따라다니는 딜레마였다.

 

평화에서 전쟁으로

이사(李斯)가 흉노를 새의 무리에 비유한지 80년이 흘렀다. 그리고 어사 성()이 역시 흉노를 새에 비유한지 65년이 지난 때의 일이다. 기원전 135(건원 6), 흉노가 한나라에 화친을 청하러 왔다. 무제는 어찌해야 할 것인지 신하들에게 물었다. 화친이냐 전쟁이냐, 이것이 세 번째 기로였다. 장군 왕회는 강경론을 쏟아냈다. 흉노와 화친을 맺는다 해도 어차피 몇 년 지나지 않아 약속은 깨질 것이옵니다. 화친을 맺지 말고 단호하게 흉노를 토벌하옵소서. 어사대부 한안국(韓安國)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장성을 나서 천리 저편까지 출격하여 싸우는 것은 우리 군대에게 불리하옵니다. 지금 흉노는 말의 힘을 무기로 삼아 금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마치 새의 무리처럼 이곳저곳을 어지럽히고 있사옵니다.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을 것이옵니다. 설령 흉노의 땅을 빼앗는다 해도 쓸모 있는 땅은 얼마 되지 않고, 그 백성을 지배한다 해도 나라를 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옵니다. 바로 그런 연유로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그들을 정면으로 상대하지 않았사옵니다. 만약 우리가 천리 저편에서 흉노와 싸운다면 이쪽은 인마가 모두 피폐된 상태로 싸울 것이요, 적은 반대로 완전한 상태에서 반격을 할 수 있사옵니다. 강한 화살도 마지막에 떨어질 때는 힘이 약해 천조차 뚫지 못하는 법이옵니다. 거친 돌풍이라도 그 마지막에는 더는 가벼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새털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법이옵니다. 처음에 강하지만 최후에는 힘을 잃는 법이옵니다. 우리는 바로 그 화살이며 바람이옵니다. 따라서 흉노 토벌을 꾀하는 것은 득이 되는 책략이 아니옵고, 화친을 맺는 것보다 나을 바가 없사옵니다. 

 

흉노를 상대로 하여 이를 쫓아가면 말을 타고 간단히 도망쳐버리고, 이쪽이 멈추면 기습해온다. 당황하여 도망치면 어김없이 추격해온다. 그러는 사이에 아군은 피곤해 지쳐 녹초가 되고, 식량도 떨어지고, 마지막에는 몰살당하고 만다. 싸워서는 승산이 없는 것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중국 측 장군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실제로 몇 백 년이 흐른 뒤에도 보병을 주력으로 하여 기마군단을 상대하는 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한안국도 빼어난 현실주의 정치가였다. 흉노에 대해서도 그들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확실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중국 측이 원정에 나설 때는, 이광리가 대완국 공략에 나선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수레를 끄는 치중(輜重)부대까지 포함하는 실로 어마어마한 대군단이 될 수밖에 없다. 흉노의 군단이 거의 빈말인 채로 원정을 나서는 것과 비교하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적군과 아군의 조건을 절대 평가한다면 문제의 화친 전략이야말로 최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장성을 가볍게 여긴 대가

안녹산이 사사명과 난을 일으킨 것은 755년의 일이다. 난은 삽시간에 하북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현종은 난을 피하기 위해 양귀비와 측근들을 데리고 장안을 빠져나갔다. 사천(四川)방면으로 향하다 마외(馬嵬: 지금의 섬서성)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장군들이 이번 난의 원인은 양귀비에게 있다고 추궁하여 현종도 양귀비를 죽이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양귀비는 여자로서 한창 때인 37세였다. 난은 안녹산과 사사명이 일으켰다고 해서 안사(安史)의 난이라 불리는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전투가 계속되는 와중에 안녹산은 실명했고, 종기가 생기는 병증까지 겹쳐 사람 됨됨이마저 버렸다고 한다. 식탐과 비만으로 짐작컨대, 당뇨병을 앓았는지도 모르겠다. 757, 안녹산은 자신의 아들에게 살해당하고, 사사명도 761년에 자신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안사의 난이 완전히 진압된 것은 763년의 일이다. 그 후 당나라는 907년 주전충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나라 왕조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중국은 당나라가 멸망한 뒤 절도사들이 약육강식의 싸움을 벌여 장성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시대를 맞이했다. 이것이 5 10국의 시대이다. 그리고 송나라도 미약하지만 질긴 명맥을 유지해나갔다.

 

하지만 1115년에 여진족은 지금의 중국 동북 지역을 중심으로 금()나라를 세웠다. 사금을 채취할 수 있는 땅이라고 하여 나라 이름을 금이라 했다. 이 금나라는 남쪽의 송나라와 손을 잡고 서쪽에 위치한 몽골리아의 요()나라와 대립했는데, 요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새로 장대한 장성을 쌓았다. 금나라는 약 120년간 존속했는데, 건국을 하자마자 장성을 쌓기 시작했다. 몽골고원과 동북 평원의 경계가 되는 대흥안령산맥(大興安領山脈)의 동쪽에 지금의 흑룡강성 치치하얼 부근에서부터 산맥을 따라 비스듬히 서남쪽으로 향하여 내몽골자치구의 호호트 북서쪽, 명나라 이전에 쌓은 장성과 교차하듯이 이어놓았다. 그 길이가 무려 1,700킬로미터이다. 유럽에서 가장 긴 영국의 하드리아누스는 장성이 117킬로미터이니까 길이 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장성과 병행하여 대흥안령산맥의 서쪽, 외몽골과 내몽골의 경계에서 우리아스타이 근처의 고원을 기점으로 하여 서남쪽으로 뻗은 장성을 쌓았고, 이것은 온데르솜 근처에서 오른쪽의 장성과 합쳤다. , 이 부근은 강수량이 200밀리미터 전후여서 둔전을 경작할 수 없었고,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도 대부분 판축 공법으로 만들어 봉긋 솟은 언덕에 불과하다. 지금도 몽골 고원 특유의 짧은 풀이 자라고 있어 장성의 숨결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1165년에는 70여 곳에 보루를 쌓고 1 3천여 명의 병사를 주둔케 했는데, 항시 주둔하는 것이 어려웠는지 공방의 기록조차 없이 적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다.  

 

장성, 명나라가 청나라에 건네준 선물

그럭저럭 장성을 넘어 중국을 정복한 청나라는 강희제(康熙濟), 옹정제(擁正濟), 건륭제(乾隆濟)의 시대를 맞았다. 이 세 명의 황제는 명군으로 추앙받았는데, 특히 장수했던 강희제(재위 1661~1722)와 건륭제(재위 1735~1795)가 다스렸던 때는 강희건륭시대로 불렸다. 세 명의 황제가 다스린 기간은 무려 134년에 이르는데, 선정을 펼친 덕에 사회는 안정되었고 식량 생산도 크게 늘었다. 이런 경제적인 번영을 바탕으로 인구도 크게 증가하여 국력을 충실히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현명한 대외정책으로 한, 당 시대를 능가하는 사상 최대의 판도를 그려냈다. 막북 지역에 대해서는 친정을 포함하여 수시로 원정에 나서 몽골의 잔존세력을 토벌했는데, 그 결과 북방의 이민족이라고는 갈단이 이끄는 중가르 부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나마 중가르 부도 강희제의 군대에 패하여 쇠퇴일로에 들어섰다. 문화적으로도 깊은 관심을 보여 「강희자전康熙字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사고전서四庫全書」 등을 펴내고 문화 전성기를 열었다. 또한 강희제 때에는 궁중에서 쓰이는 비용이 명대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어 그 검소함을 칭송받기도 했다. 청나라 전반기는 그야말로 좋은 일뿐이었다. 장성이 필요 없게 된 시대라고도 했다.

 

정말 그랬을까? 위에서 살펴본 청나라의 모든 치적은 명나라의 장성이 있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명나라 때 견고한 장성을 쌓지 않았다면, 북방의 이민족은 청나라 때와는 전혀 다른 강력한 이민족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청나라도 전혀 딴판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명의 장성이 있었기 때문에 북방 이민족의 세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습격이 없어졌으며, 그런 탓에 마치 장성의 역할이 끝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한나라도 혜제, 문제, 경제 시절에 참을성을 가지고 화친 정책을 폈을 때가 있었다.

 

도시나 시골 할 것 없이 곳간이 가득 찼고, 그리하여 관청의 창고에는 재물이 남았으며… 나라의 창고에는 곡식이 철철 흘러넘쳤고, 미처 창고 안에 넣지 못한 곡식이 길가에 널려 있었으니, 다 먹어치우기가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풍요로운 시대를 맞기도 했다. 흉노와 사투를 벌인 끝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비참한 처지가 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아닐 수 없다. 북방 이민족의 위협이 사라지고 나면 이렇듯 풍요로운 시대가 가능했던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명의 장성이 없었다면 청나라 왕조도 북쪽의 위협에 시달리다 단명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청은 명나라로부터 장성이라는 이름의 선물을 받아 장수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이면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고 만리장성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여겨온 것은 아닐까? 장성이 이민족에게 몇 번이나 길을 내주었는가하는 역사적 기술만 놓고 쓸데없는 물건이라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무용지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긴 물건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장성이 완수해온 역할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런 평가로는 어떤 역사적 이해도 생겨날 수 없으며, 장성에 잠들어 있는 만골의 넋을 폄훼하는 일이다. 그와는 반대로, 장성이 완수한 역할을 이해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긴 물건으로 보지 않는다면, 아시아의 역사를 읽는 시각은 크게 바뀔 것이며, 보다 복잡하고 풍요로운 진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만리장성을 이루는 돌 한 개 한 개, 벽돌 한 장 한 장의 토혼마저 뜨거운 감정을 뿜어내는 느낌이 든다.

 

황하와 만리장성은 중국의 대표적인 심벌이다.

그러나 ‘황하와 만리장성’만 갖고 중국을 표현하기에는 왠지 부족한,

뭔가 빠뜨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많은 이들이 ‘사람’이 아니겠냐고 답할 것이다.

‘사람’은 영웅과 미녀 그리고 민중이며

그들이 한데 어우러져 정치와 역사

그리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사람이라고 답한 다수파에게

오히려 ‘말’이 아니겠느냐고

뜻밖의 답을 내놓은 것이

이 책의 저자 니시노 히로요시이다.

중국 역사에서 ‘사람’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사람은 주된 존재가 아니라

말의 그늘에 가려진 종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말과 황하와 장성을 테마로

한 독자적인 장면을 담은 중국론이 탄생한 것이다.

이 장면을 연출한 것이 말이었다.

이 장면에서는 황하와 장성은

말이 넘어야 할 장벽으로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만리장성은 왜 필요했을까?

이 문제를 검증하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 요소가 ‘말’과 ‘황하’이다.

예로부터 중국 대륙에서는 중원을 지배하는

왕조와 북방에서 침공해오는

이민족 간에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북방 이민족은 압도적인 기마술로 중원을 유린했으며,

그 침공 시기는 황하가 얼어붙는 계절에 집중되었다.

이 책에서는 여러 시대별 자료를 바탕으로

‘말’과 ‘황하’에 대해 자세하게 검토하고,

장성이 당시 중국 왕조에 있어서 얼마나

큰 버팀목이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만리장성을 마치 왕조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시위성 장벽쯤으로 생각하는

‘장성의 무용론’에 쐐기를 박는 획기적인 논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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