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를 신은 마윈
왕리펀, 리샹 지음
36.5 / 2015년 1월
창업의 세계에 뛰어들다 - 하이보번역사부터 차이나옐로우페이지까지
창업 아이템을 선택하다 - 1992년, 최초의 창업, 하이보번역사
1988년, 24세의 마윈은 항저우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항저우 전자공업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마윈의 활약이 대단했기에 학교에서는 부임한 지 5년이 되는 날까지는 사직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5년 계약’을 체결하였다. 항저우 전자공업대학에서 마윈은 영어와 국제 무역을 강의했는데, 주입식 교육을 싫어한 그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지식을 쌓기를 희망했다. 그러다 보니 마윈의 강의실에서는 환한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학생들은 하나같이 마윈의 강의를 좋아했으며, 강의실은 항상 빈자리가 없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시후 근처에 ‘잉글리시 존’을 설치했고, 이는 통ㆍ번역계에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항저우에서는 대외 무역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민간 기업가가 증가하고 있어 통ㆍ번역 서비스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때문에 수많은 기업가들이 그를 찾아와 통ㆍ번역을 부탁하곤 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겸업은 할 수 있어도 전업은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한편 영어 통ㆍ번역을 겸업하면서 마윈은 주변의 수많은 동료나 퇴직 교사들이 하나같이 집에서 한가하게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전문 번역 기구를 설립하여 이들을 채용해야겠다는 발상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1992년, 마윈은 동료들과 함께 하이보번역사를 설립했다. 창업 초기에는 경영에 온갖 어려움이 발생했고, 결국 자금난으로 인해 다른 수입원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생화와 선물용품이 제법 돈이 벌리는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마윈은 조그만 공예품으로 가득한 자루를 메고 항저우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팔았다. 또 1년 넘게 의약품 및 의료기기 외판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소규모 장사를 통해 번 돈으로 마윈은 어렵사리 번역회사를 운영했다.
마윈의 동료들은 돈이 안 되는 번역회사는 포기하고 대신 선물용품 회사를 차리자고 건의했지만 마윈은 단호히 거부했다. 애당초 마윈이 번역회사를 설립하게 된 목적이 돈이 아니라 시장의 수요를 만족시키고 동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회사를 계속 유지해 나가면서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마침내 1995년, 줄곧 적자를 보이던 번역회사가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는 이미 ‘5년 계약’이 만료된 시점이라 마윈은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했고, 이후에 한동안 전적으로 번역회사 운영에 매달렸다. 그러나 회사가 이윤을 내기 시작하면서 점차 제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경영을 다른 동료들에게 맡기고 더는 회사의 구체적인 업무에 관여하지 않고 다른 창업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창업의 방향을 찾다 - 1995년 5월, 차이나옐로우페이지의 성공과 실패
1995년, 항저우는 안후이에서 푸양에 이르는 고속도로를 건설할 계획이었는데, 미국의 한 투자회사도 이 건설 사업에 참여했지만, 이 회사는 사업이 진행되는 1년 동안 계약한 투자금을 지급하지 않고 계속 미루기만 했다. 마윈은 항저우 정부의 위임을 받아 조정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미국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미국에 도착한 그는 해당 미국 회사가 유령회사였고, 애당초 합작할 의사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들의 사기 행각에 마윈을 끌어들이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른 프로젝트를 시찰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간신히 빠져나온 마윈은 문득 회사 동료의 사위인 샘이 시애틀에서 다른 사람과 동업으로 인터넷 회사를 창업했다고 들은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시애틀로 가서 샘의 회사인 VBN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터넷 세계를 목도한다. 당시 인터넷이란 다소 생소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예민한 감각을 지닌 마윈은 이 참신한 아이템이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와 전환점을 가져다줄 것임을 직감했다.
마윈은 그곳에서 누구든지 인터넷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검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중국 관련 소식은 온라인에서 단 한 줄도 검색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런 사실에 마윈은 몹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샘에게 자신도 중국에서 인터넷 사업을 시작하여 하이보번역사를 인터넷에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샘도 기꺼이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리하여 샘이 하이보번역사를 위한 간단한 홈페이지를 만들어 인터넷에 올렸다. 회사 홈페이지를 인터넷에 올린 첫날 서로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다섯 명이 반응을 보였다. 이 사업에 분명 비전이 있을 것임을 직감한 마윈은 VBN과 합작하기로 마음먹었다. VBN이 미국에서 기술을 제공하고 마윈은 중국에서 영업을 하는 방식이었다. 일주일 후 그는 아내 장잉과 상의하여 인터넷 회사를 창업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1995년 5월 9일, 중국의 첫 번째 비즈니스 사이트인 ‘차이나옐로우페이지’가 탄생했다. 차이나옐로우페이지 창립 초기에 마윈이 구상한 사업 모델은 미국 VBN과의 합작이었다. VBN이 서버와 기술을 제공하고 차이나옐로우페이지는 중국 내 기업을 상대로 영업을 하는 형식이었다. 보충설명하면, 마윈이 중국 기업들과 계약을 체결하면 하이보번역사가 이 기업들에 관련된 자료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EMS로 미국에 보내고, 미국에서는 이를 받아 홈페이지를 제작하여 인터넷에 올린 다음, 이를 출력하여 중국으로 보내주는 식이었다. 마윈은 팀원들과 함께 거래를 성사시켜 나갔고, 상황이 조금씩 나아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익을 VBN이 가져가고, 차이나옐로우페이지에 남는 돈은 몇 푼 되지 않았다. 마윈은 점차 독자적으로 홈페이지를 만들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96년, 리치의 합류로 마윈의 이런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바로 이때 차이나옐로우페이지는 최강의 적수인 항저우텔레콤을 만나게 되는데, 항저우텔레콤은 차이나옐로우페이지의 성공을 통해 인터넷 산업의 전망이 밝다고 판단하고 이 시장을 선점하기 시작했다. 경쟁을 시작한 지 약 1년 정도 지난 1996년 3월, 마윈은 협력을 선택하기로 하고 항저우텔레콤과 합자회사를 설립하는데, 항저우텔레콤은 지분의 70퍼센트를 차지했다. 합작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쌍방 간에 의견 충돌이 생겼다. 마윈은 지분이 3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언권이 거의 없었고 떠나기로 결심한다.
창업 팀을 선택하다 - 1997년 12월, 대외경제무역 비즈니스정보센터
1997년 12월, 마윈은 대외경제무역부의 러브콜을 받았다. 중국 국제전자 비즈니스센터(EDI)에 합류하여 정보부 총경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대외경제무역부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착수금 200만 위안과 함께 그의 팀에게 30퍼센트의 지분을 주는 등 대단히 좋은 조건을 제시했다. 이에 마윈은 8명의 팀원들을 데리고 정부 외교 조직에 들어가 중국 전자 비즈니스의 발전을 돕게 된다. 마윈은 1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팀원들과 함께 ‘온라인 광저우수출상품교역회’, ‘온라인 중국상품거래시장’, ‘온라인 중국기술수출교역회’, 그 밖의 중국의 투자 유치 및 대외 무역과 관련된 웹사이트들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다.
마윈이 대외경제무역부에 있을 때 직위는 정보부 총경리였지만, 조직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는 조직 외부의 사람일 뿐이었다. 이익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에서 발언권도 전혀 없었고, 자신과 대외경제무역부 간부들 간에 견해차도 너무 컸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후의 양즈위안이 그에게 야후차이나의 사장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해 왔다. 또 1998년 말, 시나도 거액의 연봉을 제시하면서 마윈에게 함께 일할 것을 제의해 왔다. 하지만 마윈은 이 두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동시에 그는 대외경제무역부에도 사직하고 항저우로 돌아가 인터넷 영역에서 두 번째 독자적 창업을 준비하고자 했다.
마윈은 자신이 항저우에서 함께 데리고 온 사람들인 만큼 가장 먼저 자신의 동료들에게 그런 생각을 알렸다. 그러면서 누구든 대외경제무역부라는 커다란 나무 아래 계속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야후나 시나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원한다면 자신이 직접 추천해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어느 쪽이든 모두 급여가 상당히 높을 것이라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반면 자신과 함께 다시 창업하는 쪽을 선택할 경우에는 한 달 월급이 고작 500위안밖에 안 될 것이고 고달픈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단 몇 분 만에 그들은 모두 마윈과 함께 돌아가 창업하는 쪽을 선택했다.
알리바바, 그 성공의 시작 - 골드만삭스 그리고 손정의
뚜렷한 비전을 확립하라 - 1999년 1월, 호반가든, 알리바바 창립
마윈은 항저우로 돌아온 뒤, 1999년 1월, 팀원들을 집으로 불러 자신의 전자 비즈니스 회사 설립 구상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아주 위대한 일을 할 겁니다. 우리 B2B 회사는 앞으로 인터넷 서비스 모델에 혁명을 가져올 거예요!” 그리고 팀원들에게 앞으로 다 함께 할 일에 관해 설명했다. 마윈과 팀원들은 창업 목표를 확정한 다음,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각자 주머니를 턴 결과 50만 위안이 모였고, 이 돈이 마윈의 두 번째 창업을 위한 초기 자금이 되었다. 자금이 충분치 않다 보니 오피스텔을 임대할 수 없어 호반가든 집 -이 집은 마윈이 대학에 재직할 때 사두었음- 에 사무실을 차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료들은 여기저기 침대가 놓여 있고 잠자리가 펼쳐져 있는 이 집에서 하루에 17~18시간씩 일을 했다. 그리고 6개월 후 마윈과 팀원들은 지금의 알리바바를 만들어 냈다. 마윈이 회사명을 ‘알리바바’로 정한 것은 글로벌 네트워크 회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었다.
자본을 이해하는 인재가 필요하다 - 1999년, 차이충신 알리바바 합류
예일대 법학대학원 석사 출신인 차이충신의 알리바바 합류는 그와 마윈의 협상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마윈은 알리바바에 투자할 벤처캐피털을 찾고 있었고 차이충신은 인베스터에이비를 대표해서 마윈과 투자 협력에 대해 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투자 협력은 결국 무산되었고, 협상 나흘째 되던 날 갑자기 차이충신이 마윈에게 인베스터에이비에서 일할 것이 아니라 알리바바에 들어와 알리바바를 위해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뒤에 차이충신에게 왜 백만 달러의 연봉을 포기하고 월급이 겨우 500위안인 알리바바를 선택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알리바바에게 끌렸던 첫째 이유는 마윈이라는 사람의 카리스마였어요. 둘째 이유는 알리바바가 아주 강력한 팀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었지요.”
2002년, 마윈은 닝보 강연에서 ‘성공은 팀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점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제가 늘 중국 기업들은 팀 정신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는데, 지금의 알리바바가 이를 잘 구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회사의 연설가입니다. 말만 하고 움직이지는 않는 사람이지요. 우리 회사에는 ‘O’ 자가 붙은 네 개의 팀이 있습니다. 우리의 COO인 관밍셩이 우리 회사의 총재를 맡고 있습니다. GE, BTR 등 세계 500대 기업에 드는 회사에서 25년 동안 근무한 바 있는 영국 국적의 홍콩 사람이지요. CFO인 차이충신은 스웨덴의 인베스터에이비에서 투자 업무를 담당했었습니다. 법학 박사로서 캐나다 국적을 가진 타이완 출신 인재지요. CTO인 우죵은 야후의 검색엔진 발명자입니다. 미국 국적을 지닌 상하이 사람이지요. 저는 중국 국적이고 항저우 주민등록증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네 명이 각자 한 부분을 맡고 있고 아주 완벽한 협력을 이루고 있지요. 협력은 팀이 이끌어내는 겁니다.”
투자 유치를 어떻게 취사선택할 것인가 - 1999년 10월, 첫 번째 투자 유치, 골드만삭스
알리바바는 1999년 10월 첫 투자 유치에 성공하기 전까지 서른여덟 곳의 투자기관에서 온 제의를 거절했다. 마윈은 전략적인 투자자를 찾고 싶어 했다. 투자자는 알리바바의 장기적 발전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했고, 수중의 주식을 쉽게 팔아 치우지 않아야 했다. 마윈이 투자자를 까다롭게 고르는 동안 마윈의 요청을 거절하는 투자자들도 끊이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곳은 대부분 마윈을 거절했고, 투자하겠다고 나서는 곳들은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이렇게 투자 유치가 지지부진하던 와중에 차이충신이 우연히 골드만삭스의 오랜 지인을 만나 알리바바에 대한 500만 달러짜리 첫 투자를 성사시켰다.
골드만삭스의 협상 조건은 다소 가혹한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윈이 골드만삭스를 선택한 것은 골드만삭스가 세계 유명 투자은행이라는 점이 알리바바의 향후 투자 유치와 언론에 대한 지명도 측면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또 협상에서 골드만삭스도 알리바바에 대해 장기적 신뢰를 가지고 있음을 내비쳤기 때문이었다. 당시 골드만삭스의 투자금 500만 달러는 알리바바가 창업 초기의 한파를 견디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됐다.
이상적인 투자자란? - 2000년 1월, 소프트뱅크 손정의
알리바바가 첫 투자 유치에 성공한 뒤 얼마간은 자금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때 또 다른 유명한 투자자가 문을 두드렸다. 소프트뱅크의 창업자 손정의였다. 마윈과 손정의의 만남은 1999년 10월 31일에 이루어졌는데, 마윈의 얘기를 6분 정도 듣고 난 뒤 손정의는 알리바바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4,000만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그가 요구한 회사의 지분은 49퍼센트였다.
그리고 20일 뒤에는 마윈이 손정의의 초청을 받아 도쿄로 가서 투자에 관한 협상을 계속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마윈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① 알리바바는 소프트뱅크 한 곳의 투자만 받는다. 다른 투자자가 들어오는 것은 원치 않는다. ② 소프트뱅크는 주주로서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 알리바바의 장기적 계획을 무시해선 안 되고 알리바바의 장기적인 발전을 투자 목적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따라서 손정의는 알리바바의 운영 사항에 대해 지나친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 ③ 손정의가 알리바바의 이사직을 맡는다.’ 결국 손정의가 3,000만 달러를 투자하고 알리바바의 지분 30퍼센트를 확보하는 것으로 협상이 타결되었다. 하지만 이사직 요청은 거절했고 알리바바의 고문만 맡기로 했다.
그런데 항저우로 돌아온 마윈은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아서 무엇에 쓴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소프트뱅크가 알리바바의 지분을 많이 가져가 임원진들의 지분이 희석되면 발언권을 잃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이에 마윈은 곧바로 소프트뱅크와의 재협상에 들어갔다. 마윈은 손정의에게 돈이 너무 많은 것도 어떤 면에서는 안 좋은 일일 수 있으니 투자액을 2,000만 달러로 줄이는 것이 어떠냐고 제의했고, 손정의는 그에 동의했다. 이렇게 하여 결국 2000년 1월, 소프트뱅크와 여섯 개 투자기관이 연합하여 공동으로 알리바바에 2,5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이중 소프트뱅크의 투자분은 당연히 2,000만 달러였다. 참고로 2000년에는 실리콘밸리의 인터넷 거품이 꺼지면서 투자 시장에서 투자를 받는다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총 2,500만 달러라는 투자 유치 덕분에 알리바바는 곧이어 불어닥친 인터넷 한파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성장, 결집 그리고 전진 - 무협 문화에서 활로를 찾다
세(勢)를 만들다 - 2009년 9월, 서호논검, 기업 문화의 조성
창립 초기에 알리바바를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마윈은 인터넷 업계의 뛰어난 인재들을 항저우로 데려다 무협소설의 ‘화산논검’을 모방한 ‘서호논검(西湖論劍)’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호논검’은 IT 업계의 저명인사들을 서호의 호반으로 초청하여 발전을 위한 대계를 함께 의논하는 자리였다. 당시 알리바바는 아직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은 회사였지만, 마윈은 회사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진융(金庸, 김용)을 ‘서호논검’의 진행자로 초청했다. 진융은 명망 있는 무협소설 작가로서 중화권 전체에 그 영향력이 엄청난 사람인데, 마윈은 진융의 팬으로서 어려서부터 진융의 무협소설을 통독해왔다.
2009년 9월 첫 번째 ‘서호논검’ 대회가 항저우에서 개최되었고, 진융 덕분에 마윈이 기획한 ‘서호논검’은 순식간에 권위 있는 행사가 되었다. 이 대담에 참여하기 위해 온 사람들로는 진융을 비롯하여 시나의 왕즈둥과 소후의 장차오양, 왕이의 딩레이, ‘my8848’의 왕쥔타오, 주중 캐나다 대사, 상하이 주재 영국 총영사 외에 50여 명의 다국적 기업 중국 대표들도 있었다. 이후, 중국 IT 업계에서 마윈의 영향력이 한층 공고해졌을 뿐만 아니라, 알리바바의 브랜드 효과 역시 크게 증강되었다.
자신에게 적합한 모델을 찾다 - 2000년 10월, 중국공급상
2000년 10월 초, 알리바바는 ‘중국공급상’이라는 서비스를 내놓았는데, ‘중국공급상’은 알리바바의 제품 중에서도 핵심 제품이다. 이 제품의 목적은 이를 신뢰하고 사용하는 중국의 모든 중소기업이 글로벌 공급 업체가 되어 전 세계 각지의 사람들에게 상품을 사고팔게 하는 것이었다. 덧붙이면, ‘중국공급상’이라는 플랫폼에 제품 정보와 함께 열 장의 제품 사진을 올리면, 알리바바가 이를 유형별로 각기 다른 CD에 수록하여 해외 전시회에 가지고 나가는 방식인데, ‘중국공급상’의 구체적인 서비스 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고객들이 자신의 제품과 기업을 전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고(초급 고정 디스플레이와 고급 다이내믹 디스플레이가 모두 포함됨), 둘째는 고객의 제품을 수집하고 알리바바가 이를 일괄적으로 취합하여 각종 국제 전시회에 참가하는 것이며, 셋째는 외국 바이어들을 응대하는 기본예절과 관련 지식을 교육하는 것이다.
2012년 4분기의 알리바바 재무 보고를 보면, 해외 영업 수입이 9억 4,600만 위안에 달하는데, 그 가운데 ‘중국공급상’의 회원비와 관련 서비스 수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업을 운영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적합한 발전 모델과 비즈니스 모델을 찾는 것인데, 이와 관련하여 마윈은 이렇게 말한다. “모델이 뭘까요? 모델이란 성공의 경험을 추출하여 다른 곳에 그대로 복제할 수 있고 시험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의 인터넷에는 아직 성공 모델이 없습니다. 실패 모델만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세계 최고의 성공 모델이란 것은 없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모델이 있을 뿐이지요.” 바로 ‘중국공급상’이 알리바바의 적합한 모델인 것이다.
강호에 선 알리바바 1 - 타오바오 그리고 즈푸바오
알리바바 생태 시스템의 시작 - 2003년 5월 10일, 호반가든, 타오바오 창업
2003년 4월 14일, 마윈은 팀을 구성하여 C2C 사업(이는 이베이의 전문 분야임)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비밀리에 설립한 C2C 사이트가 바로 타오바오다. ‘타오바오’라는 이름은 알리바바의 한 직원이 제안한 것으로서 구호는 “건졌다! 너무 좋아!”였다. 마윈은 인류가 이미 개성화 시대로 가기 시작한 만큼 전자 비즈니스의 가속화에 따라 제조업의 방향은 이제 소비자에 의해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타오바오를 만들 당시 마윈의 꿈은 타오바오를 중국 최대의 C2C 플랫폼으로 키우는 것이었다. 마침내 2003년 5월 10일, 타오바오가 출시됐다. 라이벌 이베이에 대해 타오바오의 당시 책임자였던 쑨퉁위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이베이가 중국에서 영업을 크게 벌이고 있었던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많은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바로 고객들의 원성이 높았어요. 그리고 이것은 곧 우리의 기회였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약점이 바로 수익 모델을 고집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마윈은 타오바오의 탄생을 발표함과 동시에 향후 3년 동안 타오바오는 수익을 추구하는 정책을 쓰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그렇게 하여 2003년 말까지 알리바바의 회원 수는 271만 명을 넘어섰고 매일 신규 가입자가 6,000여 명씩 늘어섰다. 현재 타오바오는 아시아 최대, 나아가 세계 최대의 C2C 전자상거래 사이트가 되었다. 타오바오의 중국 시장 점유율은 80퍼센트가 넘는다. 2013년 말까지 타오바오에만 적극적인 판매자가 800만 명을 넘어섰고, 적극적인 구매자는 2억 5천만 명이 넘는다. 참고로 2012년 12월 1일, 알리바바 플랫폼의 상품 거래액은 1조 위안을 초과했다.
사업을 보는 눈 - 전략의 선택이 회사의 미래 구조를 결정한다: 사실 회사가 제품을 선택하거나 고객을 선택할 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전략이다. 2003년 4월에 시작한 타오바오의 전략은 현재 알리바바의 판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타오바오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지금의 텐마오(Tmall) 같은 일련의 전자상거래 시스템하의 회사들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즈푸바오(Allipay)도 없었을 것이고, 즈푸바오를 기반으로 하여 탄생한 샤오웨이금융서비스그룹과 차이냐오그룹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에 언급된 일련의 기업들이 알리바바그룹의 가장 핵심적인 서비스 업체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타오바오의 시작은 사실 진정한 알리바바 생태 시스템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당시 마윈은 타오바오 이후의 알리바바에 전자상거래 생태 시스템이 출현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구도는 물론 진행 과정 속에서 서서히 완성된 것이다.
강호에 선 알리바바 2 - 실패, 성공 그리고 좌절
정확한 시기를 포착하라 - 2007년 11월, B2B 상장
2007년 11월 6일 오전 열 시,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 B2B(1688.HK)가 홍콩증권거래소에 성공적으로 상장되었다. 개장 주가는 30홍콩달러로 발행가 13.5홍콩달러에서 122퍼센트 오른 가격이었다. 참고로 알리바바는 기업 공개를 통해 400억 달러 정도를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홍콩에서의 첫 번째 로드쇼에서 이미 360억 달러가 모였다. 그리고 싱가포르로 가서는 자금 조달액이 600억 달러에 달했다. 마지막으로 뉴욕에서의 기업 공개로 자금 조달액은 1,800억 달러가 되었다.
월등히 앞선 배치로 변화를 포용하라 - 2008년, 알리윈을 만들다
2008년 7월 5일은 타오바오를 창립한 지 5주년이 되는 기념일이었다. 이날 마윈은 알리바바그룹의 향후 10년 전략을 수립하고 회사의 위상을 ‘세계 3대 인터넷 회사’에서 ‘세계 최대의 전자상거래 서비스 제공자’로 수정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1년이 지난 2009년 9월 10일, 알리바바는 10주년 기념 만찬을 열었는데, 마윈 회장은 연설에서 자회사 ‘알리윈’의 설립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알리윈’은 알리바바와 타오바오, 즈푸바오, 알리바바 소프트웨어, 야후차이나에 이어 알리바바그룹의 여덟 번째 자회사가 되었다. 그리고 2주 뒤에 알리바바는 두 차례에 걸쳐 현금 5억 4천만 위안을 들여 국내 인터넷 인프라 서비스 제공의 선두 업체인 중국완왕의 중국 내 경영권을 확보했다. 아울러 중소기업과의 협력 관계를 ‘알리바바에서 만나요(Meet at Alibaba)’에서 ‘알리바바에서 일해요(Work at Alibaba)’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가속화한다는 10년 비전 전략을 제시했다. 마윈은 회사의 이러한 변화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meet’은 고객을 한데 모은다는 의미입니다. 댐과 마찬가지죠. 그런데 여기다 물고기를 키우자니 별 재미가 없고 관광업을 하자니 또 수도요금과 전기요금이 많이 들지요. 그래서 ‘만나는 것(meet)’은 돈이 별로 안 됩니다. 반면 ‘일하는 것(work)’은 댐에 수로를 설치해서 물을 가정에서 쓰는 수돗물로 바꾼다는 뜻입니다. 수도회사가 댐보다는 분명 돈을 많이 벌 겁니다. 저는 전자상거래가 모든 중소기업에게 수도꼭지를 트는 것만큼 쉽고 편리해지기를 바랍니다. 이번 변신의 핵심은 보다 전문화된 방향으로 조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2008년 알리바바는 ‘전자상거래 클라우드 컴퓨팅 센터’ 설립을 발표하면서 클라우드는 컴퓨팅 사업을 무엇보다 중요한 위치에 두었다. 클라우드 컴퓨팅은 인터넷 금융 사업 외에 알리바바에 대한 자본 시장의 상상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사업이다. 수많은 중소기업을 위한 클라우드 컴퓨팅 서비스는 바이두 같은 중국의 다른 인터넷 기업에 비해 알리바바가 우위를 가진 데이터 부문과 플랫폼 부문에 적합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폭풍우에 직면한 창업자 - 2010년, 즈푸바오 VIE 사건, 즈푸바오를 접다
2009년, 당시 알리바바의 주요 주주는 마윈을 비롯한 창업 멤버들과 소프트뱅크 그리고 야후 등 셋이었다. 이는 즈푸바오를 이 세 주주가 공동으로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마윈과 즈푸바오 팀이 중앙은행으로부터 ‘제3자 결제 기업 등록’에 대한 통보를 받았을 때, 마윈은 외국 자본이 포함된 회사는 제3자 결제 사업을 하는 데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중앙은행의 문건을 자세히 분석해 본 마윈과 창업 멤버들은 2009년에 100퍼센트 중국 자본의 회사를 하나 설립한 다음, 즈푸바오의 지분 70퍼센트를 이 회사의 명의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2010년 6월, 중앙은행이 반포한 02호 시행령 ‘비금융기관 결제서비스 관리 방법’에는 제3자 결제 기업은 반드시 100퍼센트 중국 자본 기업이어야 하며, 어떠한 외국 자본도 섞여 있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즈푸바오 팀은 시행령이 발표된 지 일주일이 지난 2010년 6월 2일, 남아 있던 즈푸바오의 지분 30퍼센트를 이 중국 자본 회사로 전부 이전시켰다. 그런데 이 중국 자본 회사의 법인은 마윈이었다. 따라서 ‘이론상’으로는 즈푸바오의 자산 전부가 마윈 개인 명의로 가게 된 것이었다. 2010년 이후, 즈푸바오가 새로운 제3자 결제 사업 허가를 받으면서 사업 범위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고 수익성도 대단히 높아졌다. 그러나 즈푸바오의 경영 성공은 오히려 마윈을 곤경에 빠뜨리고 말았다.
마윈이 제3자 결제 허가를 받기 위해 즈푸바오의 지분을 전부 자신의 명의로 이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당시에 마윈이 이런 사실을 이사회에 알리지도 않았고, 이사회의 비준은 더더욱 받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금까지도 이 일에 대한 논쟁은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마윈은 이렇게 말한다. “이사회와 대주주가 동의하지 않았을 때, 저는 CEO로서 국내법과 고객, 그리고 2만 2,000명의 알리바바 직원들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 결정은 완벽하지 않고, 심지어 너무 힘든 결정이긴 했지만 분명 옳은 결정이었습니다.”
마윈의 알리바바에서 모두의 알리바바로 - 상생과 조화를 통한 혁신과 재도약
사회에 대한 경외심 - 2013년 5월, 물류를 세팅하고 ‘차이냐오’를 만들다
2013년 5월 28일 오전 알리바바그룹이 임시로 편성한 ‘중국 스마트 네트워크(CSN)’ 물류시스템이 선전에서 정식으로 가동되었다. 알리바바그룹은 국내 인타이그룹과 푸싱그룹, 푸춘그룹, 순펑, 션통, 위안통, 중통, 윈다 등과 연합하여 ‘차이냐오 네트워크 과학기술 유한공사’라는 이름으로 물류회사를 설립했다. 또한 동시에 회사의 부동산 위치와 발전 전략도 공표했다. ‘차이냐오 네트워크’라는 회사 명칭은 마윈이 직접 선정한 것으로 사업을 하면서 영원히 ‘차이냐오(햇병아리)’의 학습 태도를 유지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미래의 차이냐오 네트워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한 입체적 구조를 갖게 되며 크게 네 단계로 분류된다. 첫째는 최전선에 있는 24시간 전국 도달 신속 배송 물류 네트워크이고, 둘째는 물류 기지 구역과 간선의 충분한 일체화다. 그다음은 가시화된 공급체인 운영 플랫폼이고, 마지막 단계는 대량의 데이터 통계에 근거하여 물류 시스템에 공급체인 예측 및 분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를 향해 - 주식 상장 그리고 그 이후
과거에 감사하고 미래를 경외한다 - 2014년 9월, 미국 상장
2014년 5월 7일, 알리바바그룹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IPO투자설명서를 제출했다. 알리바바그룹의 주요 수입원은 판매자에게 제공하는 인터넷 마케팅 서비스와 거래액에서 일정 비율을 취하는 수수료다. 타오바오는 광고를 판매하거나 검색 키워드의 가격 경쟁을 통해 수입을 얻고, 텐마오몰과 쥐화솬, 수마이통은 업체의 거래액에서 일정 비율로 수수료를 받거나 기술 서비스 비용을 받는 것으로 수입을 조성한다. 또한 1688.com과 알리바바 국제 사이트는 회원비를 받거나 인터넷 마케팅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수입을 얻는다. 플랫폼 모델에 힘입어 플랫폼 거래액이 증가함에 따라 알리바바의 수입 규모도 물이 불어나면 배가 올라가듯이 덩달아 커졌다. 반대로 원가와 비용 비중은 빠르게 감소했고 영업이익률과 순이익률은 급속도로 상승했다.
알리바바그룹의 2013년 영업이익률은 51.2퍼센트였고 순이익률은 43.8퍼센트였다. 매년 50퍼센트 이상의 고속 성장을 계속한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온라인 소매시장은 앞으로 몇 년 동안 계속 성장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현재 온라인 소매가 중국의 전체 소매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9퍼센트에 불과하다. 또한 알리바바 뉴욕 증시 상장은 일반 직원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2014년 5월 7일 새벽, 마윈은 직원 전체에게 내부 메일을 발송했다. 메일에서 그는 이번 상장에 관한 소식을 전하면서 직원들에게 ‘과거에 감사하고 미래를 경외해야’ 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켰다.
“상장이 우리의 목표였던 적은 없습니다. 상장은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중요한 하나의 전략이자 수단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꼭 필요한 주유소입니다. 하지만 우리 알리바바인들은 자본 시장의 거대한 이윤이라는 유혹의 배후에 비할 수 없는 냉혹함과 압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극소수의 특출한 기업만이 자본 시장에서 오래 달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견지해야 할 것들을 견지하고 우리의 의지와 신념을 믿어야만, 무수한 압력과 유혹 속에서 고단한 87년을 견뎌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글로벌 도전에 맞설 수 있는 기업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마윈은 특별히 사원주주제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룹 HR팀이 처리 방안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아주 기쁜 일입니다. 우리도 ‘열심히 생활하고 즐겁게 일한다’는 원칙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자신의 재산을 잘 관리하고 자신과 가족들을 잘 돌보는 동시에 사회적 역할과 자선에도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마윈은 알리바바가 상장된 뒤에도 회사의 명칭과 원칙은 계속 견지해 나갈 것임을 재차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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