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부자 척 피니
코너 오클리어리 지음
물푸레 / 2008년 2월
1부 성공하기까지
1931년 4월 23일 찰스 피니는 뉴저지주 엘리자베스 타운십 엘모라 마을의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는 보험회사에서 일했고, 어머니 메들린은 간호사였다. 피니에게는 누나 알린과 여동생 우르술라가 있었다. 피니의 부모는 가난했지만 다른 이들을 돕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피니는 그런 부모님을 보면서 자랐다. 열 살이 되면서부터 피니는 벌써 돈 버는 일에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크리스마스카드를 집집마다 다니면서 파는 것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집배원을 도와 편지를 부치거나, 이웃 사람들의 눈을 치우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골프장 캐디를 하거나 해변 산책로에서 파라솔을 빌려주면서 용돈을 벌었다.
1948년 6월 학교를 졸업한 그는 17세의 나이에 미국 공군에 지원했다. 일본에 배치된 그는 이때 처음으로 미국을 벗어나 보았다. 군대에서 사람들은 그를 척이라고 불렀다. 피니는 1952년 공군을 제대하고 군인장학금으로 코넬 대학교 호텔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모두 뭔가를 배우고 세계를 탐험하고 돈을 벌려는 욕망이 강했다. 그는 학교에서도 기업가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기숙사 주변에서 팔기 시작한 것이었다. 얼마 후 피니는 친구들 사이에 샌드위치맨으로 통했다.
1956년 코넬을 졸업한 피니는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다. 1959년 프랑스 남부 그로노블 대학에 입학했다가 돈을 벌 기회를 찾아 남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지중해 연안 빌프랑슈에서 미 해군장교들의 자녀를 위한 여름캠프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피니는 휴가를 맞아 빌프랑슈로 왔던 프랑스계 알제리 의사 나니노스를 만났다. 당시 파리 소르본 대학생이었던 나니노스의 딸 다니엘은 잘생긴 미국인 지도교사가 친절하면서도 엄격하게 아이들을 대하는 것을 보고 꽤나 놀랐다. 발랄한 프랑스계 알제리 여학생과 26세의 아일랜드계 미국인 청년은 이렇게 만나 사랑을 싹틔웠다.
여름캠프가 끝나갈 즈음 피니는 밥 에드몬즈라는 영국남자를 만났다. 그는 지중해 주변 항구에서 미 해군을 상대로 면세 주류 사업을 시작할 참이었다. 에드몬즈는 피니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지중해의 미 6함대에는 50척의 배가 있었고 해군은 1년에 3번 교대되었다. 사병들의 저축액은 많았기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갈 때 술을 5팩까지 살 여유가 있었다. 유럽에서 면세로 구입하면 배송료까지 해도 미국의 1/3 가격이었다. 피니와 에드몬즈는 배로 가서 병사들에게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앤트워프에 있는 도매점에서 미국 항구로 가는 배에 술을 싣도록 조처했다. 물건 값을 미리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자본도 필요 없었다.
미 6함대가 바르셀로나로 떠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스페인에 도착한 피니는 코넬 동문인 밥 밀러가 바르셀로나의 리츠 호텔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찾아갔다. 이 만남으로 전 세계 기업 역사에 엄청난 수익을 기록한 동업이 시작되었다. 피니와 밀러는 빌프랑슈를 근거지로 삼고 미국 해병들에게 술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차를 몰고 함대가 정박해 있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들을 찾아다녔다. 주류 사업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두 사람은 품목을 확대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유럽 각지에서 온 상인들과 경쟁하면서 향수, 카메라, 라디오, 옷 등 온갖 물건을 팔았다. 주문과 돈이 쌓여갔고 두 사람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현금과 수표를 주머니에 꽉꽉 채웠다.
사업을 하느라 정신없었지만 피니는 빌프랑슈 해변에서 다니엘을 처음 만난 이후 1년 만에 다시 만났다. 1959년 10월 파리에서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리히텐슈타인의 호텔에 머물면서 투어리스츠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 간판을 내걸었다. 얼마 후 피니는 두 사람의 코넬 졸업생을 사업에 끌어들였다. 독일에서 군 복무를 하고 제대한 리 스털링과 제7함대에서 중위로 근무하던 제프 말스테드였다. 스털링은 유럽에서, 말스테드는 아시아에서 피니를 도와 미군들을 상대로 자동차와 술을 면세로 팔았다.
어느 날 피니는 듀티 프리 쇼퍼즈(Duty Free Shoppers)라는 회사를 알게 되었다. 미국인 관광객에게 면세 물건을 파는 회사였는데 경영이 어려워 폐업 직전이었다. 1961년 피니는 듀티 프리 쇼퍼즈를 인수하고 홍콩과 호놀룰루 공항에서 면세 사업을 시작하였다. 1964년 중반까지 투어리스츠 인터내셔널은 27개국에서 운영되었고 직원도 200명에 이르렀다. 그 해 9월 피니를 비롯한 네 명의 코넬대 동창생이 모였다. 여기서 피니는 회사를 능률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동업자 각각에게 임무를 할당했다. 밀러는 극동, 말스테드는 북아메리카, 스털링은 유럽을 맡기로 하였다. 피니는 세 사람의 보고를 통합, 조정하고 방침을 결정하는 일을 맡았다.
공동 설립자인 피니와 밀러는 회사 지분을 어떤 식으로 배분해야 할지도 결정했다. 두 사람이 각각 38.75%씩 갖고, 말스테드는 12.5%, 스털링은 10%를 받았다. 그들은 영국 회계원인 데스먼드 번을 고용하여 회계를 맡기고, 세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변호사인 하비 데일과 토니 필라로에게 자문을 구했다. 하비 데일은 네 명의 코넬 졸업생들이 직면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회사를 운영하는 방식은 법 위반의 소지가 다분해서 어쩌면 구속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또 다른 인물이 회사로 들어왔다. 알란 파커라는 회계사였다.
1965년 여름 피니와 밀러는 거센 폭풍우를 만났다. 캐나다 국경에서의 주류 면세사업을 제한하는 미국 정부의 조치, 아시아에서의 자동차 독점 판매의 종말, 지중해와 캐나다 국경에서의 무자비한 경쟁자들, 모든 것들이 잘못된 회계와 과도한 낭비와 합쳐져 환상을 좇는 지도자를 가진 기업이 어떻게 침몰하는지의 전형을 보여 주었다. 회사가 파산 위기에 몰리자 말스테드와 스털링이 지분 22.5%를 남기고 회사를 떠났다. 피니와 밀러는 알란 파커에게 지분의 20%를 주고 토니 필라로에게 2.5%를 주기로 하였다. 자동차 사업과 주류 사업이 무너지면서 피니와 밀러는 투어리스츠 인터내셔널의 이름도 내렸다. 이젠 홍콩과 호놀룰루 공항의 소매사업으로 규모가 축소되었으므로 파산한 회사에서 구입한 이름을 쓰기로 하였다. 이후로 그들은 듀티 프리 쇼퍼즈, 즉 DFS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1966년 하와이에 일본인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호놀룰루 면세점 사업은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회사를 파산으로 몰고 갔던 위기가 해결된 것이다. 자신감을 얻은 피니는 1967년 면세점 허가를 3년 더 연장하기 위해 100만 달러를 입찰가로 지불했다. 그리고 1969년 호놀룰루 시내에 면세점을 열었다. 피니는 일본인 관광객을 시내 면세점으로 끌어들이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했다. 그는 프랑스 카뮈사와 장기 외상거래를 하면서 꼬냑을 팔고, 니나리치의 향수를 저가에 공급받아 팔면서 막대한 마진을 남겼다. 1980년대 회사가 절정기를 맞으면서 네 명의 주주는 1년에 평균 5천만 달러의 배당금을 받을 수 있었다. 세계적 규모로 봤을 때 이는 소매업의 혁명이었다. “우리는 전 세계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격을 결정하고 독점 판매를 했죠.” 피니는 말했다.
피니가 호놀룰루 공항에서 큰돈을 벌고 있을 때 홍콩 공항 터미널의 면세점 관리는 지역 사정에 밝은 회계사 존 몬테이로가 맡았다. 하와이와 마찬가지로 홍콩 공항에도 1964년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들이 밀려들었다. 몬테이로는 늘어가는 수요를 처리하기 위해 시내에 큰 매장을 열었다. 홍콩에서 DFS는 술과 담배뿐 아니라 모든 물건이 면세라고 생각하는 관광객들에게 온갖 종류의 고가 사치품들을 팔았다. 몬테이로와 피니는 여행사들과의 긴밀한 제휴관계와 일본인 관광객의 쇼핑 행태를 연구함으로써 면세 매장에서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1969년 피니는 DFS가 앵커리지 공항에서 면세 상품을 팔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현금이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은 하와이와 홍콩뿐 아니라 유럽과 미국 본토로도 향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중간 기착하는 알래스카 매장은 문을 열자마자 호황을 누렸다. 또한 피니는 1970년 6900만 달러의 입찰가에 하와이 매장의 허가 기한을 연장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3년 동안 하와이를 방문한 일본인 해외 여행객들의 숫자는 320만 명에 달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피니는 앞으로 일본인들이 갈만한 여행지로 괌과 사이판에 주목하고 이곳에 여러 개의 매장을 열었다. 대형 호텔들이 괌과 사이판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일본인 관광객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다.
이처럼 급격하게 확장을 하던 시기에 DFS는 캐나다의 토론토 공항,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 공항과 오클랜드 공항에 면세점을 열었고, 샌프란시스코와 LA 시내에 외국인 여행객을 위한 상점을 열었다. 1968~1974년 월스트리트의 평균 주식은 70% 하락했지만, 같은 기간 DFS의 배당금은 1년에 몇 백 %씩 올라갔다. 피니, 밀러, 파커, 필라로는 모두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
2부 익명 뒤로 숨다
동업자들과의 관계에서 피니는 필라로를 근면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파커를 유능한 회계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밀러와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홍콩을 벗어나서 사업을 한 지 4년쯤 지나자 피니는 DFS와 별도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만큼의 자금을 모았다. 그리고 동업자들에게 회사를 관리하는 일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1971년 임원 회의에서 피니는 필라로에게 최고경영자 자리를 제안했다. 대신 자신은 전체적인 전략을 마련하는 일에 회사 소유주로서 여전히 관여하고, 매장 입찰 때도 함께하기로 하였다.
피니는 독자적으로 투자할 기회를 찾기 위해 남태평양 타히티에 바이마 센터라는 주상복합 시설을 세웠다. 바이마 센터는 프랑스 향수를 취급하는 면세점 운영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1976년 하와이에서 34개의 종합 소매상을 가진 회사를 인수했다. 다음 해 피니는 자신이 투자한 사업들을 하나의 지주회사로 모으기 위해 조지 파커를 끌어들였다. 두 사람은 세금이 없는 버뮤다에 제너럴 애틀랜틱 그룹 유한회사(GAGL: General Atlantic Group Limited)를 설립했다. GAGL은 빠르게 성장했다. 1~2년이 지나자 전 세계에 걸쳐 투자한 회사가 20여 곳이 넘었다. 그러던 중에도 DFS에서 나오는 배당금은 점점 많아졌다. 개별 사업체에서도 현금이 들어왔으므로, 피니는 1980년 뉴욕에 자본투자회사를 만들고 제너럴 애틀랜틱사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 전 세계의 부동산, 소프트웨어, 석유와 가스 같은 사업에 투자했다.
어디에 있든 피니는 조깅하는 것을 좋아했다. 1979년 피니는 하와이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피니가 꽤 건강하긴 했어도 경사가 심한 코스와 높은 기온은 힘에 부쳤다. 결국 결승선 근처까지 와서 쓰러지고 말았다. 병원에서 의사는 피니가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말했다. 그 후로 피니는 그 일에 대해 가능하면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죽음을 경험한 그날의 사건으로 피니는 막연하게나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동안 모아 놓은 재산을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부자가 되어가면서 피니는 돈의 일부를 기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이 2억 5천만 달러에 이르던 1970년대에 변호사 하비 데일과 함께 제대로 된 자선사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데일은 피니가 사업적 성공을 즐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돈이 자선사업에 쓰이는 일에 대한 책임도 지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일은 피니에게 기부에 관한 책을 소개하였다. 피니는 카네기의 에세이 『부(wealth)』를 몇 번이나 읽었다. 부를 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학이나 도서관처럼 ‘꿈을 가진 사람들이 딛고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카네기는 결론지었다. 또한 카네기는 “부자는 과시나 허영을 멀리하고 검소하고 소박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이러한 카네기의 주장은 피니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피니는 무슨 일이든 익명으로 하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자신의 기부를 떠벌이고 싶지 않았다. 둘째는 자신과 같은 곳에 기부하려는 다른 기부자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거액을 기부하려면 신중하게 장소를 선택해 재단을 설립해야 했다. 데일은 여러 군데를 고려한 끝에 버뮤다로 결정했다. 세금이 없었고 재단 공개를 요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피니는 데일에게 DFS의 지분, 사업체, 투자금 등 모든 것을 재단에 넣겠다는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많은 돈을 쓰면서 살아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내게는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겁니다.”
이로써 애틀랜틱 재단은 500만 달러의 최초 자금을 가지고 1982년 3월 설립되었다. 재단은 전 세계의 가난과 고통을 줄이고, 교육을 증진하며, 건강과 같은 대의를 위해 활동하고, 어린이와 젊은이와 노인을 돕고, 국제적인 정의 실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목표를 선언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보여준 본보기와 뉴저지 노동자 가정에서 자라며 배운 나눔의 문화, 어린 시절의 이웃과 친구에게서 멀어지지 않고자 하는 소망, 타인에 대한 친절함과 배려,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성향으로 인해 피니의 결정이 이루어졌다.
애틀랜틱 재단은 1982년 설립된 이후 순조롭게 운영되었다. 피니는 재단을 통해 1500만 달러를 기부했고, 그중 1400만 달러는 코넬 대학으로 갔다. 코넬은 피니에게 최고 대학의 교육과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과 진실한 친구들을 준 곳이었다. 1984년 11월 피니는 전 재산을 재단에 양도했다. 바하마의 법률 사무실에서 몇 번 펜을 휘두르는 것으로 53세의 척 피니는 억만장자의 자리에서 내려와 500만 달러의 순자산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나중에 그는 이런 농담을 하였다. “어떻게 백만장자가 되냐고요? 먼저 억만장자가 되세요!” 피니의 기부는 단일 기부로는 엄청난 액수인 5~10억 달러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는 모건 스탠리 같은 대규모 투자은행의 자본과 맞먹는 액수였다.
애틀랜틱 재단의 회장 임무를 맡은 데일은 피니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재단 활동에 관한 엄격한 규칙을 만들었다. 기부는 익명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기부를 받은 사람은 그 돈이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야 했다. 기부를 받는 사람들은 비밀 엄수 합의문에 서명해야 했다. 만약 그들이 애틀랜틱 재단이나 피니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되고 그 내용을 공개한다면 더 이상 기부를 받을 수 없었다. 애틀랜틱 재단은 세계에서 가장 큰 비밀을 간직한 재단이 되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피니는 조상의 땅인 아일랜드에 도움을 주고 싶어했다. 피니는 당시 기부 문화라는 것이 없었던 아일랜드 대학들의 상황을 살폈다. 모두 얼마 안 되는 정부 지원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시설확장이나 최신 시설 설비가 여의치 않았다. 피니는 이들 대학에 기숙사 건립과 도서관 수리 그리고 중요한 사업과 연구 프로그램을 위한 기금을 내 놓았다. 아일랜드에 있는 7개 대학과 북아일랜드에 있는 2개 대학이 애틀랜틱 재단의 기부를 받았는데, 그 총액은 수억 달러에 이르렀다. 덕분에 아일랜드 고등교육 체계는 1990년대 후반 켈트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아일랜드 경제 발전에 대비할 졸업생과 연구자들을 배출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갖추었다.
3부 결별
1990년대 초 걸프전으로 인해 DFS에서 받는 애틀랜틱 재단의 현금 배당이 줄어드는 고통스런 경험을 한 피니는 회사 지분을 매각해 확실한 자선사업의 기반을 마련할 결심을 했다. 마침 파리에 있는 루이뷔통 모엣 헤네시의 최고 경영자 아르노가 DFS 인수를 제안했다. 아르노는 피니를 비롯한 네 명의 공동 소유자들이 가진 DFS의 지분가치를 40억 달러로 평가했다. 피니와 파커는 지분을 아르노에게 팔기를 원했지만 필라로와 밀러는 이를 반대하였다.
1996년 10월 피니와 파커 두 사람만 그들의 지분을 루이뷔통에 매각하는 계약에 서명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밀러는 두 사람을 “반평생을 함께해 온 동업자들을 냉대했다”며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리고 3주 후 밀러와 필라로가 도전장을 냈다. 그들은 피니와 파커가 DFS 지분 매각을 한 것은 동업자간의 협약(담당 변호사 아이어 밀스타인)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지분 매각 중단을 위한 법적 조치를 취했다. 2개월 동안 변호사들을 동원한 양 측의 치열한 공방 끝에 ‘매각 가능’이라는 밀스타인의 결정이 내려졌다. 피니는 아르노에게 매각 대금 16억 2750만 달러를 받았고 알란 파커는 8억 4천만 달러를 받았다.
얼마 안 가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필라로가 자신의 지분을 아르노에게 매각하기로 한 것이다. 필라로는 아르노가 자신을 골칫거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지분 매각을 막기 위해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시인했다. 한편 밀러는 자신의 지분 38.75%에 대한 가격을 높여 달라고 아르노에게 요구했지만 루이뷔통 회장은 이를 거절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밀러가 최대주주인 아르노와 공개적으로 불화를 겪으면서 불만을 품은 소액주주로 남았다고 보도했다.
피니와 밀러의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둘 사이의 분열은 밀러에게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다. “1996년 이래로 피니를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협력 관계든 어느 단계에서는 깨지게 되어 있죠. 비틀즈도 그랬잖아요. 루이뷔통은 피니와 파커에게 가장 좋은 가격으로 지분을 샀어요. 그 두 사람이 그렇게 해서 받은 돈에 만족한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나는 DFS를 정말 사랑합니다.” 한편 파커는 그들이 결정적인 선택을 한 것은 DFS에 침체기가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낸 피니의 통찰력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루이뷔통은 1997년부터 약 5천 명을 해고했습니다. 그런 일은 엄청난 불행이며, 특히 우리처럼 너그러웠던 사람에게는 더 그랬을 것입니다. 피니가 그런 일을 겪어야 했다면 엄청난 충격을 받았겠죠.”
DFS 매각 이후 피니와 파커는 그들이 받은 돈 일부를 면세점에 장기 근무한 2400명의 직원들에게 보내기로 했다. 이를 위해 피니는 2600만 달러, 파커는 1350만 달러를 내 놓았다. 동봉한 편지에서 피니는 ‘우리의 선의와 존경과 감사를 전하기 위한’ 선물로 돈을 보낸다고 말했다. 그것은 기업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배려 깊은 행동이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직원들은 두 사람 앞으로 수백 통의 감사편지를 보냈다.
4부 기부
피니가 재단 소유의 DFS 지분을 매각했다는 것은 익명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가 면세제국의 지분을 자선재단에 양도했다는 내용으로 법원에 제출한 서류는 언론에 공개될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재산을 기부한 피니가 DFS 지분 매각으로 생긴 16억 달러까지 기부하면서 재단은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다. 더 이상 사람들의 관심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97년 1월 13일 애틀랜틱 재단은 재단 공개 전략을 가동했다. 피니는 사전에 약속한 대로 《뉴욕 타임스》에 전화를 걸었다. 그는 기자에게 비밀을 세상에 공개할 준비가 되었으며 자신은 비즈니스 잡지들이 보도하듯 억만장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오래 전에 DFS 지분과 사업체를 비롯한 모든 재산을 버뮤다에 본부를 둔 자선재단에 기부했다고 설명했다. 이제 남은 피니의 재산은 200만 달러가 되지 않았다. 지난 15년 동안 피니는 전 세계에 6억 달러를 기부했고 이제 나머지 재산(35억 달러)의 기부에 착수할 계획이었다. 그는 기자에게 말했다. “내게 충분한 돈이 있지만 그 돈은 내 삶을 움직이지 못하죠. 한 번에 두 켤레의 신발을 신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다음날 재단에 관련된 내용이 발표되었다. ‘피니가 아무도 모르게 6억 달러를 기부했다’는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기사는 지난 15년 동안 뉴저지 출신의 사업가가 대학과 의료센터 등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기부했지만 그 사실은 철저하게 비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수혜자들은 기부자가 누구인지 몰랐다고 보도했다. 재단을 공개하는 날 하비 데일은 보고서를 언론에 보냈다. 수상한 목적으로 버뮤다에 재단을 설립했다는 의심을 없애기 위한 보고서였다. 여기서 하비 데일은 피니 재단의 이사회가 미국 자선사업과 교육기관에 관련된 저명인사로 구성되었음을 밝혔다. 또한 재단이 1982년부터 6억 1천만 달러를 기부했으며 그중 2억 9100만 달러는 고등교육에, 8900만 달러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 4800만 달러는 비영리 부문에, 2350만 달러는 고령자와 건강 분야에 기부했음을 밝혔다. 최대 단일 수혜자는 코넬 대학이었다.
피니는 여러 나라로 기부를 확대하면서 한편으로 아일랜드에서 원대한 계획을 펼칠 준비를 했다. 정부가 상상할 수 없는 규모로 대학원 연구과정에 기금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미래에 아일랜드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에 투자를 해야 했는데도 대학원 연구과정에 대한 아일랜드 정부의 지원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애틀랜틱 재단은 역사상 처음으로 정부와 직접 협상으로 벌여 재단이 7500만 아일랜드 파운드(미 달러 1억 2500만)를 기부할 테니 아일랜드 정부도 똑같은 액수를 내놓을 수 있는지를 물었다.
교육부 고위 관리인 패니 맥도너의 노력으로 아일랜드 정부 내에서 그 문제가 논의되었다. 하지만 7500만 아일랜드 파운드라는 유례없는 액수 앞에서 재경부 관리들이 시간을 끌었다. 계속 지체가 되자 피니는 총리 버티 아헌을 만나 중요한 교육 사업을 추진하려 하지만 애틀랜틱이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없음을 밝혔다. 1998년 11월 10일 애틀랜틱 재단은 최후통첩을 보냈다. 패니 맥도너가 재경부에 급박한 상황을 전했고, 11월 13일 재경부의 답변 서류가 도착했다. 애틀랜틱이 지원하는 금액에 맞추어 아일랜드 정부가 7500만 파운드를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더블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버티 아헌은 새로운 실험실, 컴퓨터와 학습장비, 도서관 등을 지원하는 1억 5천만 아일랜드 파운드 연구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그는 애틀랜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기금의 반은 대학에서 조성한 개인 기금으로 충당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일랜드 정부는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2002년 11월 새 교육부 장관이 모든 연구 기금 지원을 중지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몇 달 동안 중지 상태가 계속되자 애틀랜틱 이사들이 더블린으로 총리를 만나러 갔다. “그날 총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죠. ‘정부쪽에서 일을 진지하게 추진할 생각이 없다면 우리도 철수하겠다’고 선포했죠.”
그날의 회의는 비밀리에 진행되었지만 다음날 《아이리시 타임즈》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억만장자 찰스 피니가 버티 아헌을 만나 정부가 연구기금 중지를 철회하지 않는다면 개인기금 지원도 힘들어질 것임을 경고했다는 내용이었다. 정보의 출처는 총리였다. 그런 식으로 교육부 장관을 압박한 것이었다. 5주 후에 중지는 끝났다. 애틀랜틱이 계획한 프로그램은 아일랜드의 연구기금 지원에 비약적인 변화를 이루어냈다. 트리니티 대학 총장을 역임한 애틀랜틱 재단의 이사 톰 미첼은 말한다. “그 일은 피니가 남긴 최대의 유산이었습니다. 그 일은 재단이 어떻게 정부와 협력하고 정부와 함께 정책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아주 중요한 방식으로 사회 변화를 이루어낸 거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면서 애틀랜틱 재단은 익명의 기부를 마침내 포기했다. “익명의 기부는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우리가 익명과 동일 인물이 되어 버렸어요.” 피니는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던 겁니다.” 애틀랜틱 재단은 지금까지 익명으로 약 2900건의 기부를 했으며 기부액이 25억 달러에 이른다고 밝혔다. 앞으로 재단에서 하는 모든 기부는 기록으로 남길 계획이었다. 애틀랜틱은 가장 비밀스런 자선단체에서 이제는 가장 투명한 자선단체가 되었다.
익명을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재단의 미래와 관련되어 있었다. 피니는 몇 년 동안 햄릿처럼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로 고심했다. 피니의 법률고문은 재단을 지속시키고 싶어했다. 하지만 피니는 영속적인 재단을 만들자는 주장에 설득당하지 않았다.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재산을 가치 있는 일에 써야 하는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문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1년 애틀랜틱의 최고경영자 자리를 물려받은 존 힐리는 재단이 15년 이내에 기금을 전부 기부할 생각이며 이에 대해 공통의 합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5년 내에 기금을 다 기부하려고 한다면 애틀랜틱은 해당 기간 동안 72~75억 달러를 기부해야 했다.
월스트리트에서 기술주 주가가 상승함에 따라 애틀랜틱의 자산도 크게 증가했다. 힐리가 회장직을 맡고 나서 애틀랜틱의 자산 가치는 35억 달러가 되었다. 피니와 그의 투자가들은 미다스의 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손대는 것은 무엇이든 황금으로 변하는 듯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그들은 미다스와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이렇게 많은 금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이사들은 빠르면 2016년까지 사업을 정리하기로 확실하게 결론 내렸다. “마지막으로 그 결정에 서명한 사람은 피니였습니다.” 힐리는 말했다. 일단 결정이 되면 피니는 엄청난 열정으로 일을 추진했다. “내가 주머니에 10달러를 가지고 있는데, 그걸 가지고 오늘 뭔가를 한다면 10달러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오늘 기부하는 돈은 내일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 돈의 5%를 주는 것은 그렇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피니는 그가 공감하는 게일인의 속담 하나를 들려주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2003년 3월 애틀랜틱은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었다. 전략 검토 결과 애틀랜틱이 활동해왔던 16개 분야를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고등교육, 비영리 부문, 자선단체에 대해 더 이상 무제한적 기금지원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 대신 앞으로는 네 개의 전략적 영역 즉 고령문제, 불우한 어린이와 청소년, 인류 건강, 화해와 인권에 주력하기로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니는 시민사회를 탄탄하게 하는 진보적인 단체에 점점 많은 지원을 했다. 애틀랜틱은 국제사면위원회, 휴먼 라이트 퍼스트, 휴먼 라이트 워치 등과 같은 단체에 지원을 했으며, 2005년 18세 미만 미성년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헌법에 의해 금해야 한다고 미 연방 대법원을 설득하는 주장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피니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가족들을 위해 근사한 저택 몇 채를 샀지만 거기서 살려고 하지는 않는다. 검소하게 살지만 이따금씩 5성급 리조트에 머물기도 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담배 소매업을 했지만 담배 피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고가의 소비재를 팔아 재산을 모았지만 소비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크리스마스를 싫어한다. 피니의 삶에서 가장 큰 모순은 돈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피니는 돈 버는 것을 좋아했지만 돈을 소유하지는 않았다. 피니의 목표는 사업에서 성공하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다른 이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그 돈을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성공을 평가한다.
피니는 시대에 앞서 있었다. 재산을 기부하고, 그 돈이 좋은 곳에 쓰이는지 직접 살피고, 애틀랜틱 재단을 정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살아 있는 동안의 기부 옹호자로 자신의 흔적을 확실히 남겼다. 최근에 살아 있는 동안의 기부에 동조하는 중요한 지지자들이 생겼다. 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 멜린다는 역사상 최대 규모 재단인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워렌 버핏은 그 재단에 310억 달러를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이들 세 사람은 전 세계의 건강과 교육 발달을 촉진하기 위해 재단의 마지막 이사가 죽는 시점을 50년으로 보고 그 이전에 모든 자산을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피니는 “부자란 허영을 멀리하며 검소하고 소박한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앤드류 카네기의 가르침을 따르고 살았다. 그가 그렇게 살아 온 이유는 부를 누리는 자격에 대한 그의 태도로 설명할 수 있다. 부의 상징물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피니는 부를 쌓으면 다른 사람보다 근사하게 보일 거라는 유혹을 없애 버렸다. 피니는 돈을 버는 뛰어난 능력도 하찮게 여기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보다 더 큰 행운을 가졌습니다.” 피니는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동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는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사람의 가면을 벗길 뿐이다.’ 그 가면 아래 야구 모자를 쓰고 있는 엘모라(피니의 고향 마을 이름)의 아이 하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5년간 4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돈을 남몰래 기부하면서도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철저히 비밀을 지켜온
미국의 가장 위대한 자선사업가 척 피니의
‘많은 부자들이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삶’을 그린 책이다.
피니는 이코노미 클래스로 여행을 하며
25달러(14,000원)짜리 플라스틱 시계를 차고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검소한 사람이다.
뉴저지주 아일랜드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카드 판매, 골프장 캐디 등 소년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자수성가한 그는,
1950년대 지중해 항구에서 미국 선원들에게
면세 술을 파는 일을 시작으로
세계적인 소매 면세점 듀티 프리 쇼퍼스(DFS)를 창업하여
‘면세점 신화’를 만들어 가며 큰돈을 벌었다.
1984년, 피니는 아무도 모르게 자선재단을 세우고
부인과 자녀들 몫으로 얼마간의 돈만 남기고
자신의 재산은 모두 넘겼다.
자선재단을 통해 미국은 물론 아일랜드,
베트남, 태국, 남아공, 쿠바에 이르는
세계 여러 곳의 보다 나은 삶과
질병 퇴치, 인권과 사회 발전을 위해 많은 돈을 기부했지만,
엄격하게 비밀엄수라는 조건을 달았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또한 앞으로 생기는 재산도 모두 자선재단에 넘기기로 해,
한동안 억만장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억만장자가 아니었다.
그가 ‘빈손의 억만장자’라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책은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 재산을 좋은 곳에 써야하는 도덕적 의무를 지닌다’는
믿음을 갖고 평생을 살아온
척 피니의 이야기를 솔직하면서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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