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세운 영웅들
도널드 T. 필립스 지음
1. 혁명전야
사람들을 미지의 세계로 이끌고 간 지도자들은 항상 시대적 변화의 전령사로 활약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인해 본능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따라서 훌륭한 지도자들은 군중을 선동하기 전에 현재 사건에 관련된 실상을 낱낱이 알리고 나서, 변화를 도모해야 할 명분을 납득시킨다. 변혁을 추진하는 첫 단계는 각성을 제기하는 일이다. 미국을 독립으로 이끈 영웅들이 해낸 일도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이 맨 처음에 한 일은, 자연스러운 절차에 의해서든 의도적이든 필연적이든 간에 자신들의 생각을 알리는 방법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일이었다.
위대한 미국혁명을 주도한 최초의 인물은 사무엘 아담스였다. 보스턴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한 아담스는 완고하고 도덕적인 가풍 속에서 성장했다.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시민이었지만 남다른 정력과 열정을 겸비한 그는 영국의 전제 정치에 반기를 들고 급진파 행동주의를 이끌었다. 그러다 보니 영국군이 보스턴을 포위하기 훨씬 전부터 그는 이미 영국을 반대하는 강력한 세력이었다. 영국이 아메리카 식민지들의 권리를 침해하며 제정한 ‘참을 수 없는 법‘들을 통과시키자 이에 격분하여 ’도덕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몰염치‘라고 영국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영국의 이런 오만 불손한 행위에 대해 복수를 해야 한다고 했다.
오늘날 ‘미국혁명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사무엘 아담스가 혁명에 기여한 가장 큰 업적은 1772년 여름 보스턴 시 회의를 설득하여 영국의 부당한 행위에 대한 정보를 널리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통신 위원회를 조직한 일이다. 통신 위원회의 목적은 ‘식민지의 권리를 선포하고, 이를 위반하는 사례를 낱낱이 기록하여 만천하에 알리자!’는 것이었다. 통신 위원회는 발족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보스턴 팜플릿’으로 알려진 소책자를 발간하여 매사추세츠 곳곳에 배포하였고, 이에 자극을 받은 여러 도시에서 잇따라 자체 통신 위원회를 구성했다. 아담스의 뒤를 이어 미국을 독립으로 이끈 다른 영웅들 역시 ‘보스턴 팸플릿’과 유사한 글들을 발표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우스버지니아에서는 토마스 제퍼슨이 『영국령 아메리카의 권리 개요』를 출판하면서 혁명의 선구자로 나섰다. 이 책에서 제퍼슨은 영국을 통렬히 비판하고, “죠지 3세는 단 한 명의 영국군도 아메리카의 해안에 상륙하게 할 권리가 없다. 영국 왕은 미국의 독점적 지배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아메리카인의 권리를 ‘인류 일반의 권리’라고 설명하면서, “그런 비합법적인 권력을 독점하는 행위는 결국 영국의 권리를 위해서도 위험하다.”고 영국 시민들의 여론에 호소했다.
뉴욕에서는 알렉산더 해밀턴이 영국의 정책을 공박하는 책자를 집필했다. 매사추세츠에서는 사무엘 아담스의 사촌동생인 존 아담스가 노반글러스라는 필명으로 ‘법에 의한 통치와 사람에 의한 통치’라는 제목의 편지들을 『매사추세츠 가제트』에 실었다. 또 필라델피아에서는 토마스 페인이 다수의 사설과 논평 기사를 썼다. 일찍이 남부에서 혁명을 이끈 사람으로는 열광적이라기보다 지적인 사상가였던 토마스 제퍼슨과 버지니아 혁명의 선구자 패트릭 헨리가 있었다. 헨리는 지적인 선동가이며 헌신적인 혁명가로서 가히 ‘남부의 사무엘 아담스’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전쟁 전 10년 동안 패트릭 헨리는 지칠 줄 모르는 목소리로 대영제국에 대항해 반란을 선동했다. 사무엘 아담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대륙회의의 초대 의원이었으며 그의 급진적 사상에 대한 공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1775년 3월 23일, 100여 명의 버지니아 하원의원들이 식민지의 보안 문제와 다음 대륙회의에 참석할 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리치먼드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는 토마스 제퍼슨, 리처드 헨리, 그리고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참석했다.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전쟁의 승리는 강자만의 몫이 아닙니다. 승리는 깨어 있고 적극적이고 용감한 자의 것입니다. 영국은 우리에게 족쇄를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보스턴 평원은 언제 영국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지도 모를 지경입니다! 이에 우리의 형제들이 들고 일어섰습니다! 왜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어야 합니까? 영국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속박의 대가로 얻은 삶이 그리도 소중합니까? 굴종의 대가로 얻은 평화가 그리도 달콤합니까? 오 신이시여!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길을 택하든, 나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하고 절규했다.
그 날 버지니아 의회에서 토했던 헨리의 열변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민병대를 편성하자는 패트릭 헨리의 주장은 13개 식민지 전역에서 혁명 운동가들의 호응을 얻었고, 그의 연설은 독립전쟁 내내 군대를 독려하는 문구로 기억되었으며, 병사들은 웃옷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문구를 쓰기까지 했다. 한편 헨리의 연설에 격분한 영국은 극단의 조치를 취했다. 영국 의회는 ‘통상 제한 및 어로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다. 영국은 이 법을 통해 식민지는 영국 본국 외의 국가들과의 통상을 제한했다. 이제 뉴잉글랜드의 활발한 교역 및 어업은 한층 위협받게 되었다. 새로운 법의 시행에 따른 현실적 피해가 커지자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다.
진정한 리더십은 ‘남에게 명령받고 지시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훌륭한 지도자들은 오히려 큰일을 도모하는 과정의 일부로서 자신들의 공헌이 실제로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스스로를 일개 심부름꾼이 아닌 팀원이라고 생각한다. 미국혁명의 초창기에 아메리카인들은 이유 없이 강압적으로 지배받고 명령과 지시를 받는 데 맞서 저항했다. 기본적인 인권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의 조직에 속한 사람들 역시 강압적인 처사에 대해서는 18세기 아메리카인들과 똑같은 식으로 대응할 것이다.
1775년 말, 영국 의회는 국왕의 요청에 따라 아메리카인 금지법을 발족하여 “세계 각국은 식민지와의 통상을 중단하라!”고 선포했다. 게다가 죠지 왕은 1만8천명의 독일 용병을 고용하여 5만의 병력을 아메리카로 급파하였고 식민지의 항구를 차단하고 선박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영국과 미 대륙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닫기 시작하였다. 아메리카는 정규군도 갖추지 못하고 외국의 원조도 구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합심하여 추구하는 독립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미국 독립혁명의 시기는 팀을 위해 뛰어난 인물들이 요구되는 중대한 역사적 과도기였으며 최고의 지도자적 소양을 갖춘 탁월한 인물이 요구되는 시기였다. 아메리카 13개 주의 연합과 독립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의 막을 연 존 아담스는 버지니아의 죠지 워싱턴을 대륙군의 사령관으로 추천했다. “우리 모두가 추구하고 있는 명분을 위해 필요하다면 내 인생과 재산을 송두리째 바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진심이다.” 이 말은 아담스가 그를 천거하기 3개월 전 워싱턴이 한 말이었다. 죠지 워싱턴은 일찍부터 위험을 불사하는 용감함과 실수를 통해 배우고 최악의 시기를 승리의 기회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불굴의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정직성과 성실, 동정심과 함께 위엄을 겸비한 고매한 인품을 겸하고 있었다.
43세의 워싱턴은 보스턴에 도착한 후 시민군으로 구성된 대륙군을 사열하였다. 대륙군은 형형색색의 사복을 입고 훈련도 게을리 하고 있었으며 한 막사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사병들과 장교들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군대의 기강과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자부심과 결단력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병계획에 따라 들어온 정규군이 아니라 렉싱턴의 경보를 듣고 소총 하나만 달랑 들고 무작정 전쟁터로 달려온 시민들이었고 식량과 의복, 담요, 소총, 총검은 물론 대부분의 군수품을 지원 받을 뚜렷한 대책도 없었다. 게다가 군량을 사고 병사들의 월급을 지불하기 위해 의회가 할당한 자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대다수의 시민군은 단기 보병으로 곧 제대할 사람들이었다. 워싱턴 장군은 이러한 시민군을 제대로 된 군대의 위상을 갖게 하는 거의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에 봉착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 아메리카의 상황은 급진파나 보수파 모두 한치의 양보도 없이 자신들이 내세우는 명분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토마스 페인이라는 한 무명작가의 격려가 아메리카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됨으로써 모든 식민지들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각각의 식민지들을 독립된 주로 인정하는 각 주의 헌법을 채택하게 되었다. 페인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소개장을 가지고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기사들을 쓰는 한편, 자유를 지키기 위한 문학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1775년, 벤자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벤자민 러쉬 박사와 급진파 독립운동가들은 독립 관련 팜플렛을 써 줄 것을 페인에게 부탁하였다. 페인은 곧 이 임무에 착수하여 미국의 독립 전쟁 내내 이들을 격려하고 희망을 불어넣어 준 『상식』과 『미국의 위기』가 출현하였다. 페인은 『상식』을 통해 새롭고 독창적인 정치 사상을 외쳤다. “시민들의 동의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왕정과 의회정치는 결국 위대한 시민 대중을 다스릴 수 없다. 실제로 시민들이 공통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힘을 모은다면 왕이라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시민의 위대한 힘은 사람들의 수가 아니다. 단결에 달려있다.”고 썼다.
또, 그는 타고난 웅변술로써 “인류를 사랑하는 여러분! 전제 정치와 폭정에 대항하여 앞장서십시오. 세계 각국은 전제와 압박으로 핍박받고 있습니다. 자유는 세계 곳곳에서 박해를 받아왔습니다. 망명자들을 받아들이고 인류를 위한 쉼터를 마련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하였다. 토마스 페인의 『상식』은 아메리카 전체에 결단성 있고 자발적인 사상과 행동의 변화를 가져왔고 바야흐로 존 아담스가 최초로 언급한 ‘독립’이라는 단어는 전국 방방곡곡에 메아리쳤다. 페인은 사람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줌으로써 내면의 희망과 염원을 하나로 표출하도록 자극하였던 것이다.
1776년 6월 대륙회의는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작성할 ‘5인 기초 위원회’를 발족했다. ‘5인 기초 위원회’는 벤자민 프랭클린, 존 아담스, 로저 셔만, 뉴욕의 로버트 리빙스턴, 토마스 제퍼슨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기초위원회는 토마스 제퍼슨에게 독립 선언서의 초안을 의뢰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은 작가인 동시에 정치가로써 철학자요 건축가, 그리고 과학자이며 발명가인 동시에 음악가였다.
‘독립선언서’는 『영국령 아메리카의 권리 개요(A Summary View of the Rights of British America)』로 유명해진 제퍼슨에 의해 초안이 잡혔고 1776년 7월 4일 마침내 많은 어려움을 거친 후 대륙회의는 선언서를 공포한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들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평등하며 창조주는 인간에게 결단코 타인에게 빼앗길 수 없는 권리들을 주셨으며 그 가운데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부여되어 있다. 인간은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정부를 조직하였고 따라서 정부의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온다.” 사람들은 ‘독립선언서’를 통해 공동의 대의 명분을 얻었고 또한 선언서는 사람들을 진지한 명분 아래 행동하도록 격려하며 고취시켰다.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선언서는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인류적 선언이 되었던 것이다.
2. 자유를 위하여
1776년 7월 9일 죠지 워싱턴은 존 핸콕으로부터 ‘독립선언서’ 한 부를 전달받았다. 약속된 시간에 대륙군과 민병대의 모든 장교의 사병들은 ‘독립선언서’의 낭독을 들었고 낭독이 끝나자 환호와 박수 갈채를 보내 ‘독립선언서’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보였다. 워싱턴이 병사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은 페인의 『상식』을 낭독했던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워싱턴에게 효율적인 정보전달은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조직에 있어서도 성공의 관건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보의 전달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으로 그의 군사 전략의 기본은 ‘정보를 시기 적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또, 그는 신중하고 실용주의적인 지도자로서 항시 먼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한 뒤 자신의 생각을 말하곤 하였다. 스티븐 R. 코비 역시 “지도자는 진지한 감정 이입의 자세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그리고 나서 자신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듯이 듣지 않고서 자신이 대표하는 사람들의 욕구와 필요, 열망과 기대 등과 같은 다양한 가치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1776년 8월 무려 3만이 넘는 영국군이 뉴욕 항에 집결하였다. 엄청난 영국군의 규모에 아메리카 군은 일단 뒤로 물러섰고 8월 29일 브루클린 고지에서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채 전멸만은 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워싱턴은 맨하탄으로 대규모 퇴각을 단행했다. 1776년의 암울한 시기로 불리는 마지막 석달 간 아메리카 군의 대부분의 요새가 함락되었고 영국의 하우 장군이 뉴저지 트렌턴 근처에 있다는 기별을 들은 의회전체는 부리나케 도망치면서 워싱턴에게 식민지 전 지역에 대한 절대적 지휘권을 위임한다는 내용의 주요 안건을 통과시켰다.
아메리카 혁명의 무거운 짐은 워싱턴장군의 어깨에 지워졌다. 정부는 도망가기에 바빴고 재정적 파국의 위기에 봉착했다. 아메리카 합중국 존재 자체가 흔들거렸고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한 상황이 도래했다. 당초 2만이던 사병은 3500명밖에 남지 않은 채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렇게 절대절명의 시기에도 아메리카의 대의명분을 지탱해 준 두 가지 힘은 워싱턴이 패배를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공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미국의 형세를 역전시키는데 일조한 토마스 페인이었는데 그는 『필라델피아』의 종군기자로 일하면서 점점 더 많은 탈영병들이 진지를 떠나는 모습을 보았고, 소리치고 야유하는 영국군을 뒤로 한 채 모든 배를 힘닿는 대로 끌고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빈틈없는 전략가인 워싱턴의 모습도 보았다. 페인은 낮에는 군대를 따라 다녔고 밤에는 모닥불 옆에 앉아 북통을 책상 삼아 자신의 상념들을 적어 내려갔다. 이렇게 하여 『미국의 위기』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워싱턴은 맨 먼저 그 책을 받고 병사들을 집결시켜 페인의 글을 큰소리로 낭독했다. 페인은 아메리카 군이 100마일에 가까운 거리를 질서 정연하게 퇴각하고 있다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아메리카의 대의는 인내와 강인함으로 이기든지 비겁함과 굴복으로 지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병사들은 새로운 희망에 차서 사기가 치솟았고 계속 복무하고자 했다. 그의 글은 널리 배포되어 많은 병사들이 돌아왔다. 모든 사람들이 절망적으로 여기며 공포와 헛소문들이 난무하며 파국을 치닫는 가운데 페인은 혼자서 미국의 독립정신을 새롭게 한 것이다.
워싱턴은 상황이 허락되는 한 오후 3시에 장교들과 오찬을 같이 하였고 전쟁기간 내내 전쟁터에서 병사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다. 그는 조국의 운명이 바로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1776년 8월 27일 새벽 1시 수천 명의 영국군을 태운 포병대가 킵스만에 상륙하는 위풍당당한 모습은 아메리카 군을 공포에 몰아넣기 충분했고 이에 아메리카 군은 총을 버리고 꽁무니를 빼기에 여념이 없었다. 장교들 역시 사령관의 승인을 기다릴 시기도 없이 황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할렘고지에서 주둔하고 있던 워싱턴 장군은 전속력으로 달려 도망쳐 나오고 있는 수천 명의 병사들에게 “멈춰라. 자리를 지켜라.”고 외쳤다.
하지만 병사들은 그의 명령은 들은 채도 하지 않고 계속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고 애마 오울드 넬슨 위에 올라앉은 워싱턴 홀로 남았다. 영국군 전방 부대가 접근하면서 총을 쏘아대자 그는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두 보좌관이 뛰어가 사령관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고 하우 장군은 아메리카 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아메리카 군은 인류최고의 대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면서 항복을 거부하였다.
1776년 12월 8일 워싱턴에게 기회는 왔다. 독일인 용병부대가 트렌턴 기지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술로 밤을 지새울 것이라는 정보를 접했다. 그는 강을 다시 건너가 과감하게 기습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심하였고 그 날의 일을 이렇게 적고 있었다. “저녁 6시 지독한 추위와 살을 에는 듯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 신발도 없는 병사들에게는 악몽과 같은 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사람도 불평하지 않았다. 군대가 델라웨어 강을 건넜을 때, 총 9시간이 소요되었고 강을 건넜을 때의 그들의 옷과 화약은 모두 젖어 버린 상태였다. 병사들의 맨발에서 터져 나온 핏자국이 꼬리를 물었다. 드디어 공격 명령이 내렸고 2시간도 지나지 않아 아메리카 군의 승리로 전투는 끝이 났다.”
1777년 1월, 프린스턴에서 휴식을 취한 영국장군 콘왈리스는 8천명의 주둔군을 이끌고 트렌턴에 도착했다. 적들이 모두 자고 있는 새벽 1시, 아메리카 군은 대포를 끄는 수레바퀴를 천으로 감싸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적진으로 향하였다. 영국군의 반격에 휴 머시 장군이 쓰러지는 것을 본 아메리카 군이 전의를 잃고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던 워싱턴은 도망치는 병사에게 “물러나지 말라!”고 소리쳤고, 미친듯이 모자를 휘저으며 적의 진지를 향해 말을 몰아갔다. 영국군의 대포소리와 연기로 워싱턴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모두들 장군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고 생각하였을 때 포연이 거치면서 그는 그의 백마 위에 올라 탄 채 우뚝 서 있었다. 상처 하나 입지 않은 그는 병사들에게 “뒤돌아 공격하라.”고 손짓했다. 도망만 치던 병사들은 지휘관의 용맹한 모습을 보고 다시 용기를 얻어 공격하기 시작했고 영국군이 도주하는 가운데 아메리카 군은 8천명 군대의 보급창을 점거하는 짜릿한 쾌거를 맛보았다.
1777년 6월, 파올리에서 아메리카 군은 다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고 그 해 12월19일 아메리카 군은 새로운 야영지에 말 그대로 기어들어 가다시피 하였다. 수천 명이 모자, 코트, 신발은 물론 양말조차 없었다. 처절한 순간이었고 야영 후에는 비를 피할 곳도 먹을 것도 없었다. 처음 몇 달 간은 밀가루 반죽을 불에 구워내기만 한 불 케이크라는 음식을 먹었으나 그 해 겨울 가장 힘든 달에는 불 케이크조차 먹을 수 없었다. 워싱턴은 의회에 군대의 상황을 알리면서 식량지원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어려움에 처한 워싱턴을 지원하기는커녕 끊임없이 흠집을 내며 그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했고 그는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식량과 숙소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병사들의 훈련으로 눈을 돌린 워싱턴은 이 임무를 프러시아 출신 바론 드 스토이벤 남작에게 맡겼다. 스토이벤은 후에 대륙군에 대해 “병사들은 거의 벗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개중에는 벌거숭이도 있을 정도였다. 장교들이 입은 코트는 마구 기워서 형형색색이었고 낡은 담요와 침대커버로 만든 가운을 걸치고 있는 장교들도 보였다.”고 회고했다. 포지 계곡에서 6개월 동안 3천 명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고, 많은 병사들이 동상으로 팔다리를 잃었으며 동료가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3. 승리의 날
1776년 12월, 프랑스와의 동맹조약과 차관, 전쟁에 필요한 선박을 확보하라는 임무를 받고 파리에 부임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프랑스에서 볼 때에 자연스럽고도 진솔하게 말하는 연설가이면서 기품과 위엄을 잃지 않는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프랭클린은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과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이며 철학자였다. 뉴욕 사라토가에서의 큰 승리의 소식을 접한 프랭클린은 즉시 행동을 개시하였고 프랑스 외무장관은 마침내 동맹 문제를 제안해 왔다.
한편, 영국수상 노스 역시 축사를 보내서 프랭클린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프랭클린은 영국대사를 기다리게 하였는데 이는 프랑스의 반응을 알아야했기 때문이었다. 12월 중순, 프랑스는 아메리카와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고 프랭클린은 영국대사에게 아메리카는 완전독립이 아닌 어떤 화해제시에 대해서도 수용할 의사가 없음을 통보하였다. 아메리카와 프랑스의 동맹은 아메리카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영국 내에서는 반전감정을 가진 상류층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하원에서 전쟁반대파를 주도하던 윌리엄 핏은 외쳤다. “당신들은 절대 아메리카를 정복할 수 없어요. 내가 그들이라면 절대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거요. 절대, 절대, 절대로!”
아메리카는 프랑스로부터 엄청난 원조를 받았으나 내내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렸다. 이미 통제가 불가능해진 인플레이션을 비롯해 연방정부와 주 정부 모두가 빚더미 위에 올라앉을 정도의 재정적으로 치명적인 상황에서 1780년, 워싱턴과 그의 군대는 또 한 번의 황량하고 절망적인 겨울을 견뎌내야 했고, 견디다 못해 많은 병사들이 탈영하거나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때로 폭동으로 변했다. 게다가 워싱턴의 지휘와 권한을 빼앗으려는 정치적 시도도 있었다. 이런 어려움 앞에서 죠지 워싱턴의 지도력은 더욱 빛을 발하였다. 워싱턴은 상황이 최악이 될수록 절대 포기하지 않는 쪽을 고수하였다.
1781년, 라파예트는 영국의 콘왈리스가 9500명의 피로에 지친 군대를 이끌고 요크타운 해변에 진주해 있다는 소식을 재빨리 그의 상관에게 전했다. 기회를 포착한 워싱턴은 드디어 8월 19일 군대를 동원하여 요크타운까지의 행군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대단히 공격적인 전투에 착수하는 것이요, 이제까지의 전쟁 기간 중 최초로 그의 모든 역량을 단 한 번에, 한 장소에서 집중시킨 것이었다. 워싱턴은 일생일대, 최대의 위험을 감수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여기서 실패했다면 미국의 독립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워싱턴은 전투의 세부계획을 세우는 데 몰입했다. 식량과 물자도 직접 점검하고 지시하였다. 군대도 3개 부대로 나뉘어졌고 적이 그들의 목적지를 혼동하도록 우회로를 선택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이동은 엄격한 비밀에 부쳤다. 그로부터 나흘 후, 프랑스 제독 브라스는 그라스 제독과 합류하여 콘왈리스를 육상과 해상에서 완전히 포위하였다. 그제야 아메리카 군의 행로를 알게 된 콘왈리스는 어쩔 줄 모른 채 바라보고 있다가 뉴욕의 클린턴 장군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허둥지둥 보냈다. “나를 즉시 구해내지 못한다면 당신은 최악의 상황을 맞을 것이오!”
공격 개시 전, 워싱턴은 모든 장교들을 본부 막사로 초청하였고 장교들은 모두 그의 격려와 악수를 받고 지나갔다. 최초의 공격이 시작되자 어쩔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 처한 콘왈리스는 대화를 요구했고 얼마 후 백기를 든 영국군 협상대표가 워싱턴에게 인도되었다. 콘왈리스는 협상을 통해 24시간의 휴전을 요청했으나 워싱턴은 단 2시간의 휴전을 허용했으며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영국 사령부는 이에 동의, 워싱턴은 모든 병사들을 포로로 할 것을 명령하고 콘왈리스와 영국 장교들은 모두 방면하기 위해 배 한 척을 제공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라파예트가 워싱턴에게 말했다. “장군. 자, 이제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한 달이 지나, 요크타운의 승리가 런던까지 전해지자, 영국수상인 프레데릭 노스는 외쳤다. “오, 신이시여! 이제 모두 끝난 것입니까!.”
4. 혁명 이후
죠지 워싱턴은 아메리카 군의 대부분을 뉴욕의 뉴 버그로 이동시켰고 시민군은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수만 명의 병사들에게는 그들이 받아야 할 연금도 조국으로부터의 위대한 영웅대접도 주어지지 않았다...
1783년 2월4일 죠지 3세는 미국과의 공식적인 적대관계의 종식을 선언했고 4월 15일 미국 연방의회는 파리조약을 비준하였으며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요크타운 전투이후 미국은 1776년 존 아담스가 예견한 바와 같이 끔찍한 투쟁을 하고 있었다. 아담스는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질 독립을 바라보면서 식민지가 종래의 정부로부터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새 정부로 무사하게 이양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일 것이라고 예견했었다.
미국은 분명히 커다란 전환기에 서 있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어렵다고도 볼 수 있는 문제들을 풀기 위해 등장한 두 사람의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바로 제임슨 메디슨과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다. 이들은 미국이 중대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지도자들이 변해야만 하며 연방정부에 헌법 제정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787년 2월 21일 연방의회는 필라델피아에서 76명의 대표 중 56명만이 참석한 회의를 열었다.
메디슨은 매우 치밀하고 집요하며 겸손하기까지 한 인물이었다. 그는 인간 본성을 자세히 살폈고 통치와 정치 이론의 요소에 대해 깊이 사고하였다. 이렇게 관찰과 연구를 통해 얻은 지식과 타고난 재능으로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위대한 성취가 될 미합중국을 위한 강하고 효율적인 국민헌법의 제정을 위해 끝없이 연구하고 준비하고 계획했던 것이다. 그가 마련한 청사진에서 미국 역사상 길이 남을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각각 독립되어 활동하고 견제하도록 만든 삼권분립체계가 제안된 것이다.
국가든 기업이든 오랫동안 지속되기 위해서는 잘 구상된 문화가 필요하다. 즉, 높은 윤리수준, 활기, 에너지, 개방성을 가진 문화, 공정함과 자유가 규범인 문화를 필요로 한다. 미합중국의 헌법은 새로운 나라를 위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였고, 이는 정직과 성실함 그리고 인권을 중요시하는 기관을 마련한 것이다. 헌법을 읽은 토마스 페인은 정치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으며 새로운 사고의 방법이 나타났음을 깨달았고 존 아담스는 ‘세계가 본 적 없는 가장 위대한 국가적인 심사숙고’라고 선언하였다.
미국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미국 독립전쟁 동안 혼란과, 절망, 긴박감을 이겨내고 압도적인 적 앞에서 진정한 리더십을 보여 줌으로써 불가능한 승리를 일구어냈다. 결국 위대한 지도자들은 리더십의 기술과 절차를 육성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현명하고 사려 깊게 구성하였고, 리더십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최종 분석했다. 이것은 먼저 남의 말을 경청하며 타협하고 돌봐주는 한편, 언제나 변화하고 성취해 내는 것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 사람을 존중과 위엄 있는 존재로서 다루고 인식하라.
- 비전을 창출하여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되 동맹과 팀워크로 서로 구속하라.
- 실수에서 배울 것을 찾고 패배하기를 거부하며, 강압하기보다는 영감을 주어라.
역사는 미국의 영웅들이 불굴의 용기로 자신들이 시작한 길을 끝까지 이루어낸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장래 세대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미루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 기세를 더할 때 그들이 보여준 리더십은 인간의 어두운 본성마저도 포괄하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또한 전략적으로 미래의 지도자들을 육성시킴으로써 그들이 쟁취한 자유의 횃불을 성공적으로 다음세대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미국의 개혁기에 독립을 가져오게 한 위대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진정한 영웅들이 있었으니 바로 모든 사람들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들, 가족, 재산, 건강, 미래, 평화 그리고 생명의 위협조차 뛰어넘으며 헐벗음과 굶주림, 심한 고통과 난관을 감수한 채 참담한 상황에서도 충실함과 대의에 대한 헌신을 잃지 않으며 고결한 용기를 지닌 수많은 병사들이다. 이들은 오직 인류와 국가의 대의를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기꺼이 지불하였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과 정신에서 참다운 영웅의 흔적을 수세기가 지난 후인 지금까지도 역력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메리카혁명은 진정한 리더십을
보여 준 역사상 가장 걸출한
지도자들을 배출한 시기였다.
아메리카 독립혁명을
이끈 이 걸출하고 위대한 자질의 지도자들로는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메이슨,
죠지 워싱턴,
존 아담스와 토마스 페인 등을
열거할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성실성과 용기,
높은 도덕적 가치관을 가진 인물들로
의로운 일을 행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면과
고매한 인품을 겸하고 있으며,
엄청난 역량,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을 가지고
평생토록 배우며 성취를
향한 불굴의 용기를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격변의 시기에 출현한
미국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군중 속에서 일어나 민중을 이끌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능력,
지식, 탁월한 역량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맡았고
국가의 요구에 부응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이전 그리고 이후로도 인류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존재해야 할
참된 리더십의 모습을
이들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생생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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