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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 안병진 지음

삼생지연 2021. 1. 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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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안병진 지음

메디치 / 20167 



1부 문명 전환기의 징후들 : 트럼프, 샌더스, 그리고 오바마


트럼프와 샌더스의 기적 : 동시대 문명에 대한 반작용

“그렇소, 나는 사회주의자요” - 버몬트 주가 낳은 진보 포퓰리스트, 샌더스: 2016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 대선 유세 현장을 찾았다. 이제 대학생이 된 딸은 이번 여정 내내 한국에서 보낸 어린 시절(그룹 빅뱅을 포함하여)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난 전혀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빅뱅의 무대만큼 열정적인 콘서트를 보았다. 바로 2016년 1월 31일 디모인의 그랜드뷰 대학에서 열린 버니 샌더스의 유세 현장이 그것이다. 마침내 샌더스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 그 열기는 하늘을 찔렀다. 현장에 있던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눈앞의 현실이라기보다 마치 영화 「불워스」의 한 장면 같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재선을 앞두고 진보와 보수 양 진영의 눈치를 살피던 한 중도주의자 상원의원이 어느 날 갑자기 진짜배기 진보 정치가로 변신하여 대활약하는 코미디물이다. 암살을 가장한 자살을 염두에 두었던 탓에 거칠 것이 없어진 제이 빌링턴 불워스 상원의원은 정치권의 위선에 관한 비판을 신랄하게 그리고 거침없이 토해낸다. 마치 불워스처럼 유세장의 샌더스는 일부 독점 은행의 국유화 등 도저히 미국 주류 정치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위험천만한 말들을 속사포 랩으로 쏟아냈다. 그때마다 유세장은 청중들의 가슴속에서부터 우러나는 환호로 뒤덮였다. 과거 유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미국이 몇 달 만에 사라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도대체 미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사실 우리가 눈을 감았고 주류 미디어가 외면했을 뿐, 샌더스는 수십 년간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그는 1981년 벌링턴 시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그때부터 주류 언론들은 벌링턴 시를 일명 ‘벌링턴 인민공화국’이라 부르며 붉은 낙인을 찍었다. 그러나 이들이 조소를 보내는 동안에도 그는 진정으로 벌링턴 시민을 위한 민생 정치를 꾸준히 실천해왔다. 그는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시가보다 낮게 주택을 공급하거나 대형 유통 체인에 맞서 소규모 유기농 협동조합을 유지하면서부터 주민들의 인식은 바뀌어갔다. 벌링턴 시민들은 이러한 ‘생활 정치 사회주의’를 통해 자신들의 삶이 개선된 경험을 바탕으로 삼아 샌더스의 강력한 지지층으로 결속되었다. 


“물고문 정도 가지고 되겠냐?” - 뉴욕이 낳은 ‘백만장자 포퓰리스트’: 동구의 슈퍼스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9ㆍ11 테러 직후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아연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고문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방송의 공적 토론의 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의 상식에서는 진보적 논객이라면 당연히 이 이슈 자체를 토론의 대상으로 삼지 말았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이 주제가 토론의 무대에 오르면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처럼 야만 사회로 향하는 문의 봉인이 뜯기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지젝의 불길한 예감은 옳았다. 나는 9ㆍ11 테러가 발생했던 당시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5년 남짓한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미국에서 몇 개월을 보내면서, 나는 내가 과거에 알았던 미국은 이제 사라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9ㆍ11 테러 여파로 2004년 부시가 재선에 성공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유권자들은 노골적으로 인종주의적 편견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 강경 보수주의자들인 네오콘의 손을 들어준 부시조차 이슬람계 이민자들에 대한 관용을 호소했다. 미국인이라면 공적인 장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마지노선이 그들을 자제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공화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트럼프는 이슬람계와 멕시코계 이민자,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노골적으로 막말을 쏟아내고 있다. 


사실 불길한 예감을 가진 이가 지젝만은 아니었다. 한국어로도 번역된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의 저자인 세계적 석학 로버트 라이시 역시 2010년에 불길한 예언을 한 바 있다. 그는 이 책에서 2020년 대선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을 축으로 하는 양당제는 무너진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면서 양당의 후보가 아닌 제3당의 참주 선동가가 대통령이 되어서 미국 역사상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앞서 예견한 라이시조차도 당황할 정도로 지금 미국의 지축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처럼 백만장자 포퓰리스트에게는 사회의 기둥이 흔들리는 시기가 곧 기회의 땅이 된다.


트럼프가 등장하기 전 미국은 이미 1992년에 로스 페로라는 백만장자 포퓰리스트를 통해 기업주의 국가 리더의 모델을 선보인 바 있다. 그는 민주, 공화 양 정당의 정치를 싸잡아 무능하고 자기들의 잇속만 차리는 기득권층으로 매도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집권하면 성공한 기업가로서 효율적으로 국가를 운용하겠노라 약속했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대중의 정치적 반감을 이용한 정치를 ‘반정치의 정치’라 부른다. 트럼프는 로스 페로가 극단적으로 진화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트럼프는 더욱더 포퓰리스트의 본질에 충실하다. 그의 발언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공화당의 전통적 분파처럼 화석 연료에 기반한 경제를 옹호하면서도, 동시에 경영자들의 보수 삭감과 부자 증세를 말하기도 한다. 때때로 트럼프는 샌더스처럼 금권정치를 거부하기도 한다. 트럼프는 후원을 받는 잭 부시나 다른 후보들에게 ‘후원자에 대항하는 발언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던지며, 본인은 자기 돈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반금권정치의 대표 주자라고 주장한다. 백만장자가 반금권정치라니 기괴한 논리이다. 하지만 유권자들에게는 이 논리가 먹힌다.


굳이 트럼프와 그 지지층의 정책 지향성에서 일관성을 찾자면, 기존 공화당 정책 지향의 삼두마차, 즉 문화적 보수주의, 시장주의, 국제 개입주의와는 다소 구별되는 이른바 ‘레드넥(redneck) 보수주의’이다. 레드넥이란 ‘땡볕에 벌개진 목덜미’를 뜻하는 말로, 미국 남부의 백인 하층 노동자를 비하하는 용어이다. 이 레드넥 보수주의자의 핵심적인 심성은 잘나가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자신이 처한 삶의 기반에 대한 불안감이다. 이들의 주된 관심은 히스패닉 등 새로운 이민자층과 국제무역협정 때문에 야기되었다고 믿는 일자리 축소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분노이다. 이들은 미국 우선주의 경향이 매우 강하여 미국의 엘리트들이 다른 나라를 지원하고 지구적 질서를 형성하느라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 부어 자국민의 삶의 질이 악화된다고 믿는다.


대통령 중심주의 대 의회 중심주의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 그렇다면 이러한 샌더스와 트럼프 현상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미국 정치와 경제의 극단적 양극화가 이 강력한 포퓰리스트들을 만들어냈다는 분석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이 이례적인 현상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환경은 주체들이 전략적으로 선택한 결과라는 사실이다. 샌더스와 트럼프 현상의 뿌리는 소위 동시대 문명이라 일컫는 오늘날의 정치 질서에 대한 반작용이자 근대 초기로 돌아가고자 하는 복고적 열망이다. 그런데 나는 이 열망이 미국 리버럴들의 ‘대통령직에 대한 집착’과 공화당의 ‘의회 장악에 대한 집착’이라는 전략적 선택에 대한 반작용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현상이라고 본다. 샌더스는 1%에 대한 99%의 강력한 저항에 의해 탄생한 뉴딜 민주주의 정치 질서로 돌아가고자 한다. 비록 루스벨트의 진보주의가 사회민주주의로까지 발전하지 못한 것을 두고 좌파 일각에서는 비판하고 나섰지만, 이후 트루먼, 케네디, 존슨 등으로 이어지는 뉴딜 민주주의와 시민 민주주의 시기는 미국 리버럴들에게는 영광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1968년 닉슨의 집권 이후 리버럴들은 비록 의회에서는 주도권을 가졌지만 대통령 선거에서는 그리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닉슨의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지미 카터가 잠시 집권했을 뿐, 허버트 험프리(1968년 대선), 조지 맥거번(1972년 대선), 월터 먼데일(1984년 대선), 마이클 듀카키스(1988년 대선) 등 수많은 대선 패배자들을 낳았다.


대선에서 소수당이 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 민주당은 고투했고, 그 과정에서 네오 리버럴 세력들이 탄생했다. 이들이 바로 빌 클린턴, 엘 고어 등으로 대표되는 혁신 세력으로, 이들은 시장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결국 클린턴 등 네오 리버럴들이 선택한 길은 시장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버린 제3의 길이었다. 199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인기를 끈 제3의 길은 정부가 복자 개혁에서 시장의 역동성을 활용하여 진보주의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었다. 결국 클린턴을 필두로 한 네오 리버럴 세력은 이 제3의 길을 통해 과거 운동권 정당을 탈피하고, 훨씬 더 매력적이고 집권 가능한 정당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여기에 과학적 선거 마케팅이 결합하여 민주당은 과학적인 선거 전문가 정당으로 진화한다. 이로써 1992년, 마침내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하던 불임 정당의 시대를 마감한다. 


하지만 이 혁신은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시장에 우호적인 네오 리버럴 진영은 이윤율이 저하된 자본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제조업 중심에서 금융자본주의로 변모해가는 흐름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라구람 라잔이 『폴트 라인』에서 지적하였듯, 2008년 금융위기의 직접적 원인으로 거론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도 결국 그 맹아는 클린턴 시절의 대출 규제 완화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선거 전문가 정당으로의 완성은 민주당의 원래 정신인 운동권 정당의 혼을 잃어버리고, 오직 집권과 지지율 유지에 매달리는 문화를 낳게 된다. 샌더스 등 좌파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비난하지만, 전통적 리버럴들로서는 제조업이 퇴조해가는 자본의 위기를 돌파하고 진보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집권할 수 있도록 고민한 결과였을 뿐이다. 


민주당이 이렇게 동시대 정당으로 진화하는 것에 샌더스보다 먼저 강하게 경고한 첫 번째 주자는 버몬트 주의 하워드 딘 주지사였다. 그는 민주당의 중도적 성향, 선거 전문가 정당 경향에 맞서 진보적인 풀뿌리 시민정치운동을 시도했고, 이는 이후 오바마 열풍의 토대가 된다. 그런데 하워드 딘과 오바마가 풀뿌리 정당으로 민주당을 혁신해야 한다고 이슈를 제기한 정도라면, 샌더스는 아예 미국 민주당의 현대적 진화 자체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샌더스는 20세기 초 뉴딜 민주주의 시대의 정신을 오늘날로 불러오고자 한다. 이는 곧 아르마니 양복을 말쑥이 차려입은 금융 자본가와 선거 전문가의 민주당이 아니라,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 대중과 풀뿌리 운동가들의 진보 정당이다. 


샌더스가 동시대 리버럴들의 대통령직 장악에 대한 강렬한 집착이 불러온 부작용에 대한 좌파의 저항이라면, 트럼프는 우파의 그에 대한 반응이 낳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우파는 리버럴의 대통령 장악에 맞서 자신들의 공고한 성채를 의회에 쌓고자 집착했다. 트럼프 현상은 이 집착이 야기한 부작용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토머스 샬러에 따르면, 공화당은 1994년에 미국과의 계약이라는 기치 아래 강경한 보수주의 아젠다를 내걸고 의회를 장악한다. 일명 ‘깅그리치 혁명’이라 불리는 의회 장악 이래로 공화당은 점차 대선 대신에 의회 중심의 정당, 특히 하원 중심 정당으로 변모하였다. 그런데 이는 우연이 아니라 의원들의 전략적 선택의 결과이다. 


한편 의회를 장악했음에도 대선에서 연이어 패배해 붙임 정당이 되면서 공화당 인사이더들은 2013년에 「성장과 기회 프로젝트」를 발간하여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이 보고서는 대선에서 붙임 정당 이미지를 쇄신하고 주지사 출신의 통합적 리더가 당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주지사들은 깅그리치 하원의장 등 의회 내 강경파와 달리 중도적인 지지층까지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대선 예비경선에서 공화당 주지사들은 대부분 조기에 몰락해버렸다. 


오늘날 리버럴과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조차 통제하기 힘든 샌더스와 트럼프의 등장에 짜증을 내거나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반면에 많은 유권자들은 이 권태로운 동시대 정치에 맞서 리얼한 모습, 진짜 욕망을 드러내는 이들에게 환호성을 지른다. 이 급진적인 샌더스와 트럼프의 복고적 현상의 시대에 중도주의자에 불과한 오바마의 신드롬은 도대체 또 무엇인가? 거대한 전환을 제대로 감지하기 위해서는 레임덕을 불식시킨 오바마 신드롬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레임덕이 없는 대통령? : 오바마의 기사회생

“나는 간디가 아니다” - 오바마의 오판과 추락, 그리고 놀라운 선언: 오바마의 집권 1기는 클린턴의 중도적 관리 노선을 연상시켰다. 이에 반해 국제 노선에서 리버럴들은 오바마에게서 악몽 같은 부시의 모습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오바마는 미국 대통령이 아니라 마치 국제연합(UN) 사무총장 같은 행보를 보였다. 오바마는 지구적 상호 공존ㆍ공영의 레토릭을 실제 기존 적성국과의 수교를 통해 구현하려고 했다. 대표적인 정책이 소위 악의 축인 이란을 대상으로 한 평화번영 정책이다. 그의 다음 행보는 쿠바로 향했고, 역대 어느 대통령도 성공하지 못한 쿠바와의 관계 회복도 임기 말에 가서 성공한다. 이제 이란에 이어 쿠바도 서방의 자본주의적 네트워크에 포함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평화번영 정책의 일부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임기의 대부분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실제로 그는 부시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드론 공격을 늘렸다. 민간인 살상이라는 ‘부수적 피해’를 야기하는 위험천만의 공격 방식을 말이다. 심지어 그는 미국의 민권운동가 앞에서 ‘예방적 검거’의 필요성을 이야기함으로써 마치 부시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이런 충격의 결정판은 적성국가 지도자 암살의 부활이었다. 오바마는 국제법을 어기면서까지 파키스탄 영공을 비밀리에 넘어 오사마 빈 라덴을 암살하고, 그를 아무도 모르게 바다 속에 수장시켰다. 이제 집권 2기를 앞둔 시점에서 진보 아젠다도, 심지어 재선도 물 건너간 것처럼 보였다. 


기사회생 이후 자본과 기술, 리버럴의 놀라운 혁신연합: 이러한 상황에서 오바마의 재선은, 그것도 여유 있는 승리는 이해하기 힘든 기적과도 같았다. 이 예상치 못한 낙승은 오바마 진영의 효과적 선거 전략 및 가공할 만한 기술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들은 당시 선거 구도에 대한 적절한 이해에 기반해 선거 전략을 짰고, 최첨단 기술로 그것을 구현했다. 다시 말해 오바마는 비록 그의 성과에 대해 의문을 느끼는 지지층의 회의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도 극단적으로 복고에 기운 공화당의 과거 지향성을 활용하였다. 그들은 2012년 대선을 ‘과거로의 퇴행 대 미래로의 전진’이라는 적절한 구도로 전개했다. 


위대한 배우의 부활: 왜 여전히 50%가 넘는 미국인들은 임기 말 레임덕 시절에도 오바마에 대해 변함없는 지지를 보낼까? 캠페인 과정에서 오바마의 유세를 본 어느 시민의 다음과 같은 반응은 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오바마에게는 무언가가 있어요. 그가 나의 마음속 깊숙이 파고들었답니다.’ 그런 점에서 오바마의 부활을 단지 정책 아젠다들의 놀라운 혁신으로만 이해한다면 반을 놓치는 셈이다. 우리는 그의 퍼포먼스가 가지는 탁월한 위력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긴 논리적 연설이든, 한 컷의 사진용 미소이든, 퍼포먼스는 상징을 사용하여 설득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오바마는 특히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찔러야 하는 소셜미디어 시대의 소통에 매우 능하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해 논할 때, 흔히 평범한 정치가는 폴 크루그먼의 경제학적 논리나 어떤 현학적인 근거를 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바마는 가치를 담으면서도 트위터 시대의 호흡에 맞게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표현한다. “Go Try!” 굳이 우리말로 풀자면 “너희도 한번 최저임금으로 살아봐라!”라는 뜻의 이 한마디는 고단한 미국 국민들의 가슴에 큰 울림을 준다. 오바마 최고의 퍼포먼스는 단연 ‘어메이징 그레이스’ 연설이다. 


연이은 총기 사망 사건에 분노하고 좌절한 미국인들에게 오바마는 이성주의적 정책 설교 대신에 갈기갈기 찢긴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잠시 침묵의 순간에 이어 놀랍게도 그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음성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추도식에 모인 이들이 함께 합창으로 공명했다. 이 장면은 그 어느 할리우도 영화보다 극적이다. 그리고 오바마의 퍼포먼스에서 풍기는 진한 인간적 매력과 함께 주목할 점은 우아한 태도이다.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우아하고 진중한 오바마의 태도는 그가 펼치는 퍼포먼스의 위력을 배가시킨다. 


아울러 오바마의 매력은 ‘우아함’과 동시에 ‘쿨함’을 동시에 가졌다는 데 있다. 다른 정치가들 같으면 자기 세대의 스티비 원더나 폴 사이먼을 좋아할 나이에 오바마는 제이 지 등 최신 힙합과 랩뮤직의 하위문화를 자신과 자연스럽게 일치시킨다. 결국 오바마의 퍼포먼스는 시대정신에 대한 감각,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 정책적 합리주의, 언어의 명징함, 진정성, 평정성, 유연함, 우아한 매력, 흑인의 리듬감 등이 함께 어우러진 복합 예술이다. 오바마 부활의 배경에는 이러한 예술로서의 정치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바마는 21세기에 부활한 검은 키케로이다. 


2부 미국의 주인은 바뀌기 시작했다


포틀랜드는 미국의 미래다 : 미국 주인의 교체

아래로부터의 변화 - 미국 문명의 새로운 흐름: 앞에서 2016년 대선 현장에서 본 기현상과 중도주의자 오바마의 부활 등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현재 미국은 새로운 문명의 전환기에 처했다는 점을 밝혔다. 제2부에서는 문명의 대전환기를 이끌고 갈 미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걸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주인이 누구인지도 함께 알아보고자 한다. 오바마의 작지만 의미 있는 돌파는 큰 의미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오바마가 이를 가능케 한 이유로 단지 시대에 대한 혜안과 리더십만을 꼽는 것은 너무 협소한 해석이다. 흔히 제도권 정치 내의 역학 관계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정작 그 근저에 흐르는 거대한 강물과 토양의 변화, 즉 사회운동과 삶의 방식의 변화를 놓치기 쉽다. 전자는 월가를 점령하라는 ‘오큐파이 월스트리트’가, 후자는 도시 포틀랜드가 상징적이다. 


지금 미국은 뉴욕,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등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더 나은 삶의 질과 생태 문명을 향한 사회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루어진 각종 사회운동의 입법화 성과는 다른 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결국 이는 연방정부 차원의 입법화를 가능케 하는 토대이자 자극제로 작용한다. 물론 이 확산의 사이클이 연방정부에 도달했을 때 전국적 영향을 주는 법안으로까지 귀결되는 경우는 적다. 왜냐하면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지적한 것처럼, 지금은 강경 보수주의가 주도하는 공화당의 거부권 정치가 의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포위와 교착 상태에서 집권 2기를 맡은 오바마가 주로 택한 전술적 돌파구는 의회를 우회하지만 대신에 적용 범위가 지극히 제한된 행정명령이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 인상 운동의 확산 속에서 그가 겨우 취할 수 있는 조치는 연방정부와 계약을 맺는 외주업체들로 하여금 최저임금을 10달러 10센트로 인상토록 한 행정명령일 뿐이다. 하지만 이렇듯 풀뿌리로부터 불어오는 진보적 요구가 연방정부 차원으로 확산되는 메커니즘은 점진적이지만 진보로 가는 여정임이 틀림없다. 


오늘날 ‘오큐파이 월스트리트’와 ‘포틀랜드’로 상징되는 이 새로운 흐름은 무엇을 지향할까? 기존 미국 문명의 패러다임과 새로운 대안적 문명의 맹아가 대립하는 양상은 전방위적 차원에 걸쳐 있다. 이는 현재적 경제주의 대 미래적 생태주의, 무조건적 성장주의 대 삶이 질을 위한 절제, 법인자본주의 대 사람 중심 경제, 대규모 공장주의 대 네트워크 체제, 개인주의 대 공유와 협력, 전통 가족주의 대 싱글과 동성애 등 다양한 관계의 공존, 백인 중심의 앵글로색슨 문화 대 다양한 소수자의 혼성 문화, 일방주의 대 상호작용, 권력주의 대 영혼과 의미의 정치, 엘리트주의 대 시민참여주의, 기술주의 대 기술과 인간의 공존, 처벌과 낙인주의 대 삶의 활력과 예방, 비인간적 도시 지배 대 도시와 농촌의 지속 가능한 공존, 민족주의 대 세계시민주의 등 다차원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문명의 충돌 : 황혼기 보수주의의 필사적 반격

그람시의 미국 대 토크빌의 미국: 그람시 대 토크빌. 둘 중 누가 오늘날의 미국 사회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관점을 제시하는가? 누군가 미국 사회의 전 영역에서 진보주의적 흐름이 부활한다는 스탠리 그린버그의 테제를 수용한다면 그는 그람시의 관점을 가진 그람시주의자(이탈리아 좌파 이론가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이론을 가진 이)자이다. 이 이론은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진보의 문화적 주도권을 강조하는데, 미국은 이제 동성애 등 많은 영역에서 진보가 문화적 정체성을 주도하는 사회이다.


하지만 과연 이 그람시주의만으로 오늘날의 미국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을까? 미국을 이해하는 데 토크빌의 관점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19세기 프랑스의 귀족 지식인인 토크빌은 미국 시민사회의 평등 지향성만이 아니라 사회의 안정성을 유지해주는 시민종교나 법원 등의 보수적 기제를 동시에 강조한 바 있다. 뉴욕 유학 시절 나는 우연히 허드슨연구소의 선임 연구원인 존 폰테가 쓴 “왜 문화적 전쟁이 존재하는가”라는 에세이를 보고 무릎을 쳤다. 폰테는 이 에세이에서 ‘그람시와 토크빌’이란 키워드로 미국 사회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단일한 국가라기보다는 유엔처럼 다양한 나라들을 포괄하고 있는 것 같은 미국은 그람시와 토크빌을 동시에 불러낼 때 비로소 그 전체상을 균형 있게 바라볼 수 있다. 이를테면 미국인들은 대법원의 동성결혼 합헌 판결에 동의하는 한편, 도덕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한다. 이렇듯 사회적 이슈에 관한 미국인의 양면성은 미묘하게 공존한다. 


그린버그 대 헌팅턴. 그람시주의 경향에 기우는 스탠리 그린버그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동시에 토크빌주의에 경도되는 새뮤얼 헌팅턴도 다시 들춰볼 필요가 있다. 물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헌팅턴의 『문화충돌』은 많은 학자들의 반격을 받으며 그 논리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헌팅턴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핵심 포인트는 여전히 흥미롭고 예리하다. 그는 미국 정체성의 본질이었던 WASP(백인ㆍ앵글로색슨ㆍ프로테스탄트) 문명이 오늘날 이슬람, 중국 등과 경쟁하게 되면서 위협받고 있다고 도발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문명의 충돌』이후에 그는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이란 책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본심을 털어놓는다. 그간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앵글로색슨 정체성이 히스패닉 정체성의 침투와 교란으로 위협받아 미국 자체가 위기에 처했다고 선동한다.

오늘날 이 문명 충돌의 주된 전선이자 인종 정치의 핵심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민’이다. 마리사 아브라자노는 최소한 2012년 하원 선거의 프리즘으로 보면, 이제 이민이 계급, 세대, 성별 지수보다 더 중요한 균열점이 되었다고 선언한 바 있다. 유권자들이 어떻게 투표하고 어떤 정당과 연결되는지를 판단하는 핵심 준거가 계급이 아니라 이민이라는 말이다. 인구 구성의 미래 추세만 놓고 보면 헌팅턴의 히스패닉에 대한 공포를 이해할 수 있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이 「중앙일보」 2015년 12월 15일자에서 잘 요약한 것처럼, 히스패닉 인구는 1970년에 960만 명에서 2014년경에는 5천540만 명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퓨 리서치 센터에 따르면 35년 후에는 1억600만 명으로 늘어날 추세이다. 미국 인구 가운데 3명 중 1명이 히스패닉인 반면에 백인은 50% 아래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인구 숫자는 곧 캠페인을 통한 유권자 등록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누가 미국의 주인이고, 누구를 위해 정책 예산이 배분되어야 하는가를 결정하게 된다. 그러하기에 10년마다 하는 인구센서스 및 그에 따른 재정 배분이나 선거에 모든 정치 세력이 긴장한다. 아직은 히스패닉의 인구 비율이 17.4%에 불과하고 선거에서도 백인층에 비해 정치적 힘이 미약하지만, 막 깨어나고 있는 이 ‘잠자는 거인’이 우뚝 일어서는 순간이 헌팅턴은 두려운 것이다.


트럼프, 크루즈 현상의 비밀과 샌더스 현상의 한계: 한국의 시민들은 “도대체 어떻게 대선 후보가 모든 이민자를 적대시하는 이 극도로 단순한 논리를 펼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한다. 하지만 사실 미국인들의 다수는 이민자와 불법 체류자를 잘 구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미디어의 선정주의적 편견에 쉽게 휘둘리곤 한다. 미국의 미디어가 이러한 단순한 흑백논리를 확산시키는 이유는 이들이 단지 인종주의적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부정적이고 선정적 보도가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극단적 막말을 기이한 인물의 예외적인 돌출 발언이라고만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왜 일부 백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처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계급적 지위를 가진 이 트럼프 회장의 저열한 반이민 선동에 반응하는 걸까? 얼핏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하지만 전통적인 미국 인종 이론에는 이를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들이 이미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데이비드 뢰디거의 ‘심리적 임금 이론’이다. 트럼프는 어마어마한 백만장자이다. 그렇다 해도 과거 이민 초기 시절처럼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거나 일자리를 주선하는 정책을 내놓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반이민 발언들은 하층 백인 지지층들에게 히스패닉, 흑인 등 위계상 더 낮은 계급과 비교하면서 그들의 자존감을 회복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실제 월급봉투라는 물질적 형태가 아닌 심리적 형태의 임금인 셈이다. 사실 트럼프는 ‘레드넥’처럼 잘나가지 못하는 백인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분노의 이유를 발견토록 하고, 자부심을 회복하도록 만든다. 즉 흑인, 히스패닉 등에 대한 분노를 통해 자신이 못사는 이유를 정당화하며 임금이 늘어난 것처럼 위안을 받는다. 


이 인종주의적 심리 임금을 쟁취하게 해주는 분노는 단지 그들이 생각하는 하위 계급인 히스패닉 이민자와 같이 아래로만 향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들은 공화당의 금융 엘리트와 이를 대변하는 정당 간부들에 대해 계급적 분노를 터뜨린다. 서민의 이익과 가치보다는 시장에서 잘나가는 이의 이익을 대변하며 권력 게임에만 몰두하는 그들에 대한 복수로써 ‘레드넥’들은 공화당 인사이더 대신에 트럼프를 선택했다. 이 인종적 적대감과 계급적 분노의 묘한 결합은 트럼프 자신과 그 지지 세력들을 모순적이면서 다양한 세력들의 느슨한 연합으로 만들었다. 트럼프가 상징하는 반이민 이슈에 비해 민주당은 1% 대 99%라는 계급 이슈가 가장 주요한 대립구도처럼 보인다. 샌더스 돌풍은 바로 이 계급적 분노의 운동이다. 하지만 민주당에서도 이번 대선의 궁극적인 승부처이자 균열점은 계급이 아니라 인종과 이민이었음을 샌더스의 경선 패배가 입증했다. 물론 샌더스는 미적지근하게 금융자본과 타협한 힐러리와 달리 1%의 사회를 향해 하이킥을 날렸다. 이로써 호기롭게 힐러리호를 침몰시킬 수도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는 민주당 경선의 결정적 관문인 사우스캐롤라이나 등의 남부 프라이머리에서 힐러리의 높은 벽을 끝내 넘지 못했다. 흑인과 히스패닉 그룹에게 샌더스는 오직 계급 이슈에만 매달린 단일 이슈 후보자였다. 반면에 힐러리는 비록 계급 이슈에서는 지나치게 미온적이었지만 계급과 인종을 결합한 승리 가능한 대안이었던 셈이다. 


결론을 대신하여

2016년 대선과 미국의 미래: 오늘날 미국 문명은 기로에 서 있다. 트럼프 현상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시스템이 망가져가고 있음을 경고하는 위기 신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절망의 겨울이기도 하지만 희망의 봄이기도 하다. 후쿠야마 교수는 얼마 전 미국에 대한 자신의 절망적 전망을 일부 수정하였다. 한때 미국을 ‘거부권 정치’에 발목 잡혀 망해가는 국가라 진단했던 그는 최근 「포린 어페어」 6월 13일자에서 이번 대선에서 다시 희망을 보았다고 썼다. 무기력하게만 보였던 미국 민주주의가 다시 불평등과 경제 침체에 반응하고 사회적 계급이 아젠다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이행기이다. 이번 대선은 그런 점에서 이후 미국의 향배를 좌우할 중대 선거임에 틀림없다. 만약 힐러리가 당선된다면 그녀는 연방정부의 정치적 교착 상태에도 불구하고 오바마에 이어 다양한 점진주의적 개혁에 성공할 것이다. 만약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미국은 과거 조지 부시 시절보다 더한 경착륙이 기다리고 있다. 미국 전역에서, 그리고 새천년 세대를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적 기류와의 충돌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장사꾼인 트럼프는 당선되고 나면 좀 더 현실주의적인 노선을 취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포인트는 공화당과 그 지지기반이 본질적으로는 트럼프스럽다는 점이다. 예비경선 기간에 나온 공화당 후보들은 비록 트럼프만큼 자극적이지 않지만 반이민과 시장주의 경제 노선 등 본질적인 문제에서는 ‘트럼프 라이트’(Trump-lite)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공화당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또 패배한다면 공화당은 심각한 내분에 빠지게 될 것이다. 다시금 혁신을 외치며 대선 집권을 추구하려는 대통령 장악파와 황혼기의 순수성으로 의회 지배를 추구하려는 의회파들 간의 치열한 사상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의회 지배파들이나 강경 보수주의자들은 이번 대선에서 설령 트럼프가 낙마하더라도 제2의 트럼프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 어려울지 모른다. 트럼프는 단지 괴팍한 백만장자의 일탈이 아니라 기존 백인 보수 문명의 황혼기를 청년기로 되돌리고자 한 복고 운동이기 때문이다. 기업국가의 문화적 특성이 있는 미국에서 제2, 제3의 트럼프는 트럼프보다 덜 자극적이고 더 정치적이라면 성공할 수 있다. 


워싱턴에서의 소란스러운 논쟁과 교체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승부는 워싱턴이 아니라 풀뿌리 현장과 시민의 마음속에서 결정될 수 있다. 오바마가 레임덕을 극복하며 부활한 이유의 핵심은 워싱턴 내부에 있지 않다. 바로 미국 전역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문명적 전환과 운동이 오바마를 지탱해주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그랜토리노」의 진정한 교훈은 바로 이 평범한 시민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가, 또 어떻게 일어나게 만드는가에 문제의 열쇠가 있다는 점이다. 그러하기에 지난 수십 년간 문명적 전환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온 로베르토 웅거나 어빈 라슬로 같은 이들이 궁극적인 승부를 시민들 내면의 의식혁명에서 찾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과연 미국의 보통 사람들은 앞으로 어떤 문명을 원할 것인가. 


2016년 대선을 앞두고 미국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주목을 받고 있다

진정한 변화(real change)를 요구하는 

샌더스 열풍이 아래로부터 불었고

여성과 이민자를 배제한 

위대한 미국(great America)을 외치는 

트럼프가 공화당의 대선 후보가 되었다.

 

바다의 움직임을 보기 위해서 

파도가 아닌 바람의 흐름을 살펴야 하듯

대선이라는 상황에서는 

러나는 정치 지형의 변동

이를 추동하는 주도 세력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렇기에 2016년 미국 대선은

 힐러리 대 트럼프의 대결이 아닌

미국 건국 초기의 근대적인 문명의 틀과 

주도 세력이 모두 바뀌는 대전환기로,

문명사적 대전환과 충돌이라는 

프리즘으로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

 

이 책은 미국 문명이 새로운 도전에 

어떻게 적응하며 전 세계적인 리더십을

 유지할지 전망하는 책으로,

미국 정치와 대선의 

관전 포인트가 될 정치 해설서이다

정책이나 정치인이 아닌 

문명의 전환을 논하는 정치학자인 

저자는 앞으로 미국 정치는 산업의 변화,

계급적 관점 그리고 이민자 문제 등을 

두고 보수주의와 리버럴

양측이 각축을 벌이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라 전망한다.

 

저자는 2016년 미국 대선에 앞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공화당

민주당 후보의 개별 정책이나

 선거 퍼포먼스가 아니고

또 이번 대선은 

힐러리 대 트럼프의 대결이 아니라

미국 건국 초기의 근대적인 문명의 틀과

 주도 세력이 모두 바뀌는 

대전환기이라고 주장한다

또 샌더스, 트럼프의 등장은

 그리 급작스러운 것이 아니며,

기적과도 같았던 오바마의 당선과 

오바마 이전 시대의 추이를 살펴보면 

징후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게 된다고 강조한다

즉 미국의 주인은 이미 바뀌고 있었다고 역설한다.

 

한편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은 건국 이후로 

미국 사회의 주류를 구성하던

 백인 중심의 제조업 문명에서 

새천년 세대와 

다인종 연합 세력으로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며,

새천년 세대와 히스패닉,

흑인 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주류 세력은

 풀뿌리 운동과 특유의 진보성을 결합해 

혁명의 진원지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혁명 이후 과거로의 회귀 열풍이 불 듯,

포스트 오바마 시대에 샌더스와 

트럼프는 복고주의 운동의 일환이라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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