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3년 9월
프런티어 문화
철도는 어떻게 공간을 살해했는가? 대륙횡단철도의 건설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 1825년 9월 27일은 세계 최초의 기차가 출현한 날이다. 그날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이 손수 제작한 화물 전용 증기기관차 로코모션(Locomotion)호가 약 40킬로미터 구간을 시속 7~13킬로미터로 달렸다. 아버지의 작업을 이어받아 아들 로버트 스티븐슨이 기차를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철도는 1830년 9월 15일에 운행을 개시했다. 이날 스티븐슨의 로켓호가 승객 36명을 태우고 항구도시 리버풀과 면화도시 맨체스터 사이 50킬로미터를 시속 46.8킬로미터로 달렸다.
바로 그해에 미국에선 뉴욕 출신의 기술자이자 사업가였던 피터 쿠퍼가 톰 섬(Tom Thumb)이라는 운송기관을 개발했다. 톰 섬은 볼티모어-오하이오 구간을 시속 28.8킬로미터로 달리는 데 성공했다. 지금 기준으론 매우 느린 속도지만, 터덜거리는 마차 속도에 익숙해 있던 미국인들에게 이 속도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1843년 열차를 타본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 무시무시한 전율과 전례 없는 공포감이 엄습했다”고 경탄하면서, 철도를 화약과 인쇄술 이래로 “인류에게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고, 삶의 색채와 형태를 바꿔놓은 숙명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시작은 영국이 빨랐지만, 철도의 성장 속도는 미국이 영국을 앞질렀다. 1861년 남북전쟁 발발 시엔 약 4만 8,280킬로미터에 이르렀는데 이는 영국철도 길이의 3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앤드루 잭슨이 1829년 대통령 취임식을 위해 마차로 한 달 동안 달려야 했던 테네시 내쉬빌-워싱턴 구간을 1860년대엔 철도로 단 3일이면 주파할 수 있게 되었다. 전선도 철도와 손에 손을 잡고 같이 발달했다. 1860년 약 8만 467킬로미터의 전선이 미국 대부분 지역을 연결했다.
1861년 3월에 출범한 링컨 행정부는 철도 건설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1862년 7월 1일 전쟁 중임에도 상원과 하원은 태평양철도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가설되는 철로 주변 약 60미터의 땅이 철도회사에 무상으로 주어졌는데, 이렇게 해서 무상 제공된 토지는 1억 에이커가 넘었다. 1억 에이커는 한반도 면적의 1.8배에 이른다. 또한 철도회사를 동시에 부동산회사로 만들어준 법이었다. 의회가 대륙횡단철도 노선을 승인하고 재정 지원을 한 지 7년 만인 1869년 5월 10일 드디어 대륙횡단철도가 완성되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전 미국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독립기념관의 종을 울려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했으며, 워싱턴 D.C.의 《이브닝 스타》는 사설에서 “오늘은 현재와 미래에 이 나라와 인류에 미칠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금세기에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라고 했다.
부정부패로 얼룩진 철도 건설: 대륙횡단철도의 길이는 약 3,069킬로미터였다. 이후 철도 노선은 극적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1880년에는 14만 9,000킬로미터로, 1900년에는 30만 9,000킬로미터로 급성장했다. 그런데 철도는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등 소수의 재벌에 의해 장악되었고 대륙횡단철도 건설 사업 자체도 부정부패의 복마전이었다. 부정부패는 철도 건설 공사 수주 단계에서부터 이루어졌다. 정치인ㆍ관료는 뇌물을 받고 계약액을 부풀리게 해주었고, 기업은 뇌물이라는 ‘껌값’을 주고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방식을 썼다. 기업들은 주가조작까지 저질러 추가 수입을 얻었다. 또 도시들은 철도가 자기 구역을 통과하도록 뇌물을 먹였다.
역사가 헨리 애덤스는 1870년에 쓴 글에서 철도회사 소유주들의 부정부패를 겨냥해 “이들 근대의 권세가는 전쟁을 선포하고 평화를 협상하고 의회와 법, 자주 국가를 자신들의 뜻에 순종하도록 만들었다”며 “기업은 민주주의의 해악”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하워드 민즈는 “위대한 업적은 반드시 위대하거나 도덕적인 행위의 소산은 아니더라도 위대한 발상의 소산이다. 미국은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한 사람들이 국가로부터 뜯어먹은 것의 수천 배를 돌려받았다”고 말한다.
개통 이후 승객들은 곳곳마다 정류장을 거치면서도 7일 만에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왕복할 수 있게 되었다. 철도 건설 과정에서 노동자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 또한 환호 속에 묻히고 말았다. 동부철도 건설은 대부분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서부철도는 대부분 중국인 노동자들이 건설했다. 당시 구인광고에 자주 등장했던 “아일랜드인은 뽑지 않음”이라는 문구가 말해주듯이, 가톨릭교도가 대부분인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의 주류인 프로테스탄트 백인들의 차별에 시달렸기에 철도 건설 노동 외엔 달리 일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찌 중국인들이 받은 차별에 비교할 수 있으랴. 센트럴퍼시픽 철도회사가 인력난을 해결하기 위해 중국 광둥(廣東) 지방에서 수입한 노동자 1만 4,000여 명이 서부철도 건설에 투입되었다. 이들 중 수많은 이가 작업 중 목숨을 잃어가면서 대륙횡단철도의 역사적 개통을 가능케 한 것이었지만, 일부 백인들은 이들에게 감사하기는커녕 이들을 증오했다. 극심한 인종차별주의로 중국인 살해가 자주 저질러졌다.
1877년 경기 침체로 직원 해고, 임금 삭감, 임금 체불 등이 잇따르자 철도 노동자들은 대규모 파업을 감행해 전국 철도화물열차 절반가량의 운행을 중단시켰다. 이에 미국 정부는 강력 대응하고 나섰다. 파업이 끝났을 때 100명이 사망했고, 1만 명이 감옥에 갔다.
악당과 천사의 이미지: 노동자들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경제학자 헨리 조지다. 그는 철도회사들이 농민들을 총으로 위협해 본래 살던 곳에서 쫓아내는 현실을 보면서 철도회사를 비롯한 재벌들을 ‘노상강도’라고 비난했으며, 철도회사에 투자하는 중산층의 욕심도 꾸짖었다.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부추기는 동시에 그것에 편승한 대기업들, 특히 철도회사들의 횡포는 극에 이르렀다. 이들은 각 주 정부의 관리, 판사, 변호사, 목사, 언론인들에게 무임승차권을 제공하는 등 엘리트 포섭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893년 공황’이 시작되면서 6개월 이내에 8,000개 이상의 기업, 156개 철도회사, 400개 은행이 문을 닫았으며, 노동력의 20퍼센트 정도인 100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그런 상황에서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의 생사의 문제가 되었기에, 그해에 전투적인 성격의 미국철도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해고의 위협과 더불어 철도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악한 것도 노조 결성의 주요 이유가 되었다. 특히 보일러 폭발 사고로 매년 화부 수천 명이 죽거나 불구가 되었다. 철도 건설도 여전히 무시무시한 작업이었다(1890년에서 1917년까지 노동자 7만 2,000명이 철로에서 사망했고, 200만 명이 부상을 당했다. 기관차고와 정비소에선 15만 8,000명이 사망했다).
이후 철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가열차게 전개되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900년 미국 철도는 32만 킬로미터로 전 유럽의 철도망을 합한 것보다 길었지만, 20세기엔 철도회사들의 오만과 탐욕에 치명타를 가할 적이 나타났으니 그게 바로 자동차다. 많은 사람이 철도는 악덕 자본가가 운영하는 악당의 도구라고 보았지만, 자동차는 그 반대 이미지를 풍겼다. 자동차업계는 이 이미지를 부각하는 데에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정부정책에도 반영되어 ‘철도엔 규제, 자동차는 지원’이라는 원칙이 자리 잡았다. 이는 다른 나라들의 철도정책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은 것이었다. 영국과 캐나다는 공영, 다른 유럽 국가들은 국영으로 간 반면, 미국은 모든 걸 민영화했다가 그 부작용에 된통 당한 뒤 그걸 바로잡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자동차라는 대안으로 복수한 꼴이었다.
20세기 중반 세 차례(1944년, 1956년, 1968년)에 걸쳐 ‘연방 고속도로법’이 제정되었는데, 대중 교통시설인 철도 건설에 투입된 예산은 도로건설 예산의 1퍼센트에 불과했다. 아니, 기차는 ‘대중 교통’이라는 타이틀마저 자동차에 빼앗겨버리고 말았다. 철도는 초기엔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연결의 기술’로 여겨졌지만, ‘연결’보다는 ‘분리’를 기조로 삼는 자동차가 공간 파괴의 패권을 차지함으로써 철도는 단지 ‘연결’을 회고하는 ‘낭만’의 영역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자동차 공화국
포드는 어떻게 마르크스를 쫓아냈는가? 헨리 포드의 ‘자동차 혁명’
20세기 소비자 혁명의 씨앗이자 견인차: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1914년 1월 5일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하루 9시간에서 8시간으로 줄이고 하루 최저 임금을 5달러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동종업계의 평균 임금은 2.34달러였으니, 노동자들에게 통상 임금의 2배에 해당하는 일당을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이직률이 매우 높아지자 내린 조치였는데, 이 발표가 있던 날 포드 공장의 문 앞에 노동자 1만 명이 몰려들었다. 노동자들은 환호했지만, 기업계는 경악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경제적 범죄’라고 비난했으며, 보수 우파는 포드를 사회주의자로 몰아붙였다. 지금도 자주 거론되는 이 에피소드와 관련해서 포드는 ‘창조경제의 원조’라는 말까지 나온다. 2009년 4월 미국 포트폴리오닷컴은 경영대학원 교수들과의 협의를 통해 ‘가치창출과 파괴, 혁신, 경영기술’ 등을 고려해 ‘미 역사상 최고의 최고경영자(CEO)’ 랭킹을 20위까지 매겼는데, 이 조사에서 1위로 뽑힌 인물도 포드였다.
이상한 일이다. 포드는 천하에 아무도 못 말리는 고집불통으로 변화를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GM에 자동차업계의 패권을 내주고 파산의 위기에 내몰렸던 실패한 경영자가 아닌가. 빌 게이츠는 포드처럼 실패한 경영자가 되지 않겠다는 뜻으로 자신의 집무실에 포드의 사진을 걸어놓았다지 않는가. 그런데 왜 아직도 많은 경영 전문가가 포드를 위대한 경영자 반열의 수위에 올려놓는 걸까? 그의 이름에서 비롯된 포디즘(Fordism)이라는 단어에서 그 답을 찾는 게 좋을 것 같다. 포드는 일개 기업 차원에서 볼 인물이 아니라 체제 차원의 변혁을 촉발한 인물이며, 러시아혁명(1917년)으로 고조된 사회주의 열기를 봉쇄하면서 미국 자본주의를 유지ㆍ발전시킨 패러다임 메이커였다. 그런 관점에서 포드자동차라고 하는 기업의 쇠락은 너무도 사소한 일이라고 보는 건 아닐까?
포디즘은 이동형 일관 작업 공정의 도입과 노동자들에게 단순화된 임무를 할당하는 노동통제로 경제적 효율성을 극대화해 표준화된 제품을 대량 생산하고 대량 소비하게끔 하는 축적 체제를 일컫는 말이다. 포디즘은 전 산업 분야에 걸쳐 도입됨으로써 ‘20세기 소비자 혁명’의 씨앗이자 견인차가 되었다. 포디즘으로 대량 생산 체제가 작동함에 따라 광고를 중심으로 소비자를 양산하는 체제가 구축되었고, 이에 따라 대중의 정체성 변화가 일어났다. 진보적 관점에선 포디즘의 생산 측면, 즉 비인간적인 노동 방식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으나, 포드의 비전은 ‘복지 자본주의’까지 나아가는 원대한 것이었다. 포드는 이익공유제(profit-sharing)를 통해 노동자들이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일당 5달러’라는 파격 조치도 바로 그런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노동자들에게도 자동차를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포드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1910년대에 어느 노동조합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들에게 왜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일한다는 사람은 25퍼센트에 불과하고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사람은 10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동차를 사기 위해 일한다는 사람은 무려 65퍼센트에 달한다.” 포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1919년에는 6달러로, 1929년에는 9달러로 인상했다. 그래서 신입사원 뽑는다는 공고만 나가면 회사 앞은 지원자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또한 포드는 흑인, 여성, 전과자, 장애인 고용에 앞장섰다. 포드 공장에선 늘 다른 자동차 회사의 공장에서 일하는 흑인의 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흑인이 일했으며, 1919년 4만 4,569명에 달하는 전체 인력 중에서 9,563명이 장애인이었다. 또 400~600명에 이르는 전과자들까지 고용했다. 포드에겐 인도주의자라는 찬사가 쏟아졌지만, 포드는 “인도주의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철학인 ‘자력갱생’을 역설했다.
포드는 인도주의자가 아니라 온정주의자였다. 그는 노동자들을 가부장적 가족관계의 모델에 따라 보호ㆍ규제하는 온정주의(paternalism)를 광범위하게 실시했는데, 이를 전담하는 부서까지 두었다. 이익공유제의 참가 자격 조건을 심사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노동자들의 과도한 음주와 도박을 엄격히 규제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포드의 온정주의는 철저한 반(反)노동조합 정책으로 귀결되었다. 노조 활동가들이 고용을 늘리기 위해 생산성 향상을 방해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고 본 포드는 노조파괴 전문 요원들을 고용해 노조 활동을 원천 봉쇄했다. 생산성이 올라 번영을 누리게 되면 결국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포드는 제1차 세계대전에도 격렬하게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전쟁은 어리석고 무서운 낭비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포드는 노조도 그런 ‘낭비’로 간주했지만, 결국 대세에 굴복해 1941년 6월에서야 노조를 수용했다.
“포드자동차를 사주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을래요”: 포드는 1918년 공화당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미시간 주에서 민주당 후보로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5,000표 미만의 차이로 낙선했지만, 전국적으론 큰 인기를 누려 1920년 대선 출마를 요청하는 지지자들의 압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1924년 포드 T모델의 생산이 200만 대를 돌파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고, 1924년에도 포드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대중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그는 ‘제2의 링컨’, ‘노동자의 위대한 해방자’로 여겨진 가운데 여론조사에서 현직 대통령을 압도하는 정치적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포드는 금주법을 강화하는 것을 조건으로 캘빈 쿨리지 대통령의 재선을 지지함으로써 대선엔 출마하지 않았다.
1925년 포드 T모델은 전 세계 승용차의 절반을 차지하는 표준 자동차가 되었으며, 자동차 산업은 미국 최대의 산업이 되었다. 그해 독일에선 야코프 발허의 『포드냐 마르크스냐(Ford oder Marx)』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사회주의자들에게 미국의 자동차 문화는 점점 더 열악해지는 노동조건과 그에 따라 고도로 발전하는 무자비한 자본주의를 대변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매력적이면서도 그만큼 위험한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포드자동차는 노동운동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노동자들은 중고차라도 몹시 갖고 싶어 했으며 일단 차를 갖게 되면 노조 모임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자동차 열광은 거의 전염병처럼 미국 사회를 덮쳤다. <포드자동차를 사주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을래요(You Can’t Afford to Marry Me If You Can’t Afford a Ford)>나 <뷰익을 타고 신혼여행 가요(Take Me on a Buick Honeymoon)>는 CM송이 아니라 1920년대 중반의 인기 가요였다.
1927년 12월 A형 포드자동차가 선을 보였을 때 모든 신문의 제1면은 온통 A형 포드자동차 뉴스로 가득 찼다. A형 포드자동차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광적이었다. 100만 명이 이 차를 보기 위해 뉴욕에 있는 포드 본사로 몰려들었다. 거리에 이 차가 나타나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주문이 폭주했다.
그러나 영원한 승자는 없는 법이다. 포드는 1920년대 말 GM에 추월당하고 말았다. GM이 전략적으로 차종을 다양화하고 디자인에 신경을 쓴 반면 포드는 미련할 정도로 가격과 기능에만 집착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포드도 자신의 그런 생각이 시류에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그건 그의 어찌할 수 없는 신념이었다. 포드는 “변화는 진보가 아니다. 도처에서 새것에 대한 열광이 진보의 정신과 혼동되고 있다”고 불평했지만, 새것을 진보로 여기는 미국인들의 습속을 어찌 바꿀 수 있었으랴.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동차를 사야 한다”: 미국에서 마르크스를 쫓아낸 포드의 ‘자동차 혁명’은 1930년대 유럽에선 이른바 ‘자동차 파시즘’의 형태로 나타났다. 포드를 영웅으로 숭배했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1934년 자동차가 ‘특권계급의 독점물’인 현실을 비판하면서 국민이라면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국민차(Volkswagen)’를 생산하겠다고 선언했다. 1938년 최초의 국민차인 폭스바겐38이 출시되자, 히틀러는 ‘강함과 기쁨의 차’ 저축 운동을 통해 모든 노동자가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게끔 하겠다고 장담함으로써 독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도 누구나 자동차를 소유할 수 있다는 꿈을 판매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히틀러만 포드를 숭배한 건 아니었다. 포드는 전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공산주의자들까지 포드에 주목했다. 포드는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의 영웅이기도 했다. 1920~1930년대에 소련은 포디즘을 적극 수용해 소련 산업화에 적용했다. 포디즘이 이념의 좌우를 뛰어넘어 유럽인들을 매료시킨 핵심은 포디즘이 경제, 사회, 심지어 인간 퍼스낼러티까지 엄격한 기술적 합리성의 기준에 종속시킴으로써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잔재들을 일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1936년 크라이슬러에 밀려 업계 3위로 떨어진 포드자동차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시장점유율이 60퍼센트에서 20퍼센트로 떨어진 반면 경쟁사인 GM은 12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상승했다. 포드자동차가 전쟁 중 매월 1,000만 달러의 적자를 보자, 루스벨트 행정부는 전쟁물자 조달을 위해 포드를 국유화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기도 했다. 1945년 헨리 포드의 손자인 포드 2세가 사장에 취임하면서 새로운 경영전략을 펼친 결과 포드자동차는 좀 나아지기 시작했지만, 그마저 GM의 지원 덕분이었다. 포드자동차가 망하면 정부가 인수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1947년 4월 7일 포드가 사망함으로써 포드자동차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1950년대부터는 GM의 시대였고, GM은 명실상부한 미국의 ‘국민기업’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 포드의 이름은 그의 사후, 더욱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역사학자 더글러스 브링클리는 포드가 비전과 리더십에서 탁월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포드는 전례와 전통에 사로잡힌 산업계에서 상상력이 흘러넘치는 독보적인 미래주의자였으며, 자신의 비전을 위해 실패나 파산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자동차는 동서로 약 4,300킬로미터, 남북으로 약 3,000킬로미터나 되는 거대한 대지를 장악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미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 자유를 ‘자율(autonomy)’과 ‘이동성(mobility)’의 개념으로 파악해왔으며, 이는 곧 자동차(auto-mobile)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포드는 T모델의 가격을 인하하면서 “자동차를 사기 위해 부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동차를 사야 한다”고 선전했다. 이 선전 구호가 시사하듯이, 미국에서 자동차는 ‘자유 이데올로기’와 ‘개인주의’뿐만 아니라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자 실체이기도 했다.
1906년 경제학자인 베르너 좀바르트가 “왜 미국에는 사회주의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 이후 수많은 답이 제시되었지만,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미국인의 높은 이동성이다. 물리적 이동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동성까지 구현하고 상징하는 자동차는 계급 중심의 연대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역사가들은 포드를 미국 자본주의를 지킨 수호자로 여기고 있다. 적어도 미국의 이데올로기 연구는 자동차 연구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건 아닐까?
인종의 문화정치학
왜 버락 오바마는 혼혈인이 아닌 흑인인가? ‘한 방울 원칙’의 문화정치학
남아메리카의 ‘피부색주의’: 2013년 2월 17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와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가 플로리다 주의 플로리디언 골프ㆍ요트 클럽에서 함께 골프를 쳤다. 오바마와 우즈는 한 팀을 이루어 골프장 소유주인 짐 크레인, 미 무역대표부 대표 론 커크를 상대로 18홀을 돌며 내기를 했는데, 오바마-우즈 팀이 이겨 15달러를 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외신을 접하면서 내기 골프를 좋아하는 한국의 골프 애호가들은 이런 생각을 했음 직하다. “겨우 15달러? 보는 눈이 있어서 일부러 내기 액수를 적게 했나?” 그러나 미국의 인종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오바마와 우즈의 인종 정체성에 새삼 관심을 기울였을 수도 있겠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오바마는 케냐 출신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 주 출신 백인 어머니, 우즈는 흑인ㆍ백인ㆍ인디언ㆍ중국인 피가 섞인 아버지와 태국인ㆍ백인ㆍ중국인 피가 섞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 그런데 왜 미국인들은 그들을 흑인이라고 하는가? 백인에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간주하는 이른바 ‘한 방울 원칙(one-drop rule)’ 때문이다. 왜 이런 이상한 원칙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기로 하자.
대항해 시대가 열린 15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수백 년 동안 유럽과 미국을 먹여 살린 거대한 무역망이 형성되는데, 그건 바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유럽을 연결한 삼각무역, 즉 노예무역이다. 포르투갈이 처음으로 아프리카 흑인을 상품으로 삼은 건 1444년이었으며, 콜럼버스가 첫 항해를 개시한 지 꼭 10년째 되던 해인 1501년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가 서인도제도에 도착했다. 1600년까지 40만 명을 넘지 않았던 아메리카 지역의 흑인 노예는 삼각무역으로 급증하기 시작했다.
중남미의 유럽 이주민들은 10 대 1의 비율로 남성이 다수였기 때문에, 원주민 인디오 여자와의 성적 접촉이 많았고 이에 따라 혼혈인 ‘메스티소(mestizo)’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스페인어로 혼혈인이라는 뜻을 가진 메스티소는 오늘날에도 중남미를 대표하는 인종인데, 모든 혼혈을 통칭하여 메스티소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좀 더 세분화해서 나누기도 한다. 백인과 흑인 간의 혼혈인은 물라토(mulatto), 인디언과 흑인 간의 혼혈인은 잠보(zambo)라고 한다.
위계질서의 원리는 피부색주의(Pigmentocracy)였다. 혼혈이라도 이들의 지위는 유럽인과 닮았느냐 인디오와 닮았느냐 하는 신체의 유사성 정도에 따라 결정되었다. 스페인인과 거의 흡사한 외모인 메스티소는 스페인인과 다름없이 인정받고 대접받을 수 있었던 반면, 인디오를 닮은 메스티소는 인디오로 간주됨과 동시에 인디오에게 부과한 납세와 부역의 의무를 져야 했다. 17세기 들어 새로운 혼혈이 생겨나면서 이를 부르는 용어도 양산되었다. 스페인인과 물라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리스코’, 스페인인과 모리스코 사이의 아이는 ‘알비노’, 알비노와 스페인인 사이의 아이는 ‘토르나트라스’, 스페인인과 토르나트라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텐테 엔 엘 아이레’라고 불렀다.
‘혼혈 억제 정책’과 ‘흑백 결혼 금지법’: 이런 식으로 인종 간 분류는 계속 세분화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1821년경엔 100개 이상 혼혈 분류법이 존재했다. 이처럼 너무도 복잡해져 외모에 대한 판단을 통해 위계질서를 세우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여기에다 재산이라고 하는 새로운 계급 기준이 등장함으로써 피부색주의는 더욱 복잡해졌지만, 인종은 여전히 경제적인 기회를 포착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북아메리카에서는 독립 이전부터 강력한 혼혈 억제 정책을 폈다. 1691년 버지니아 의회는 백인과 흑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15년 전인 1676년 버지니아에서 일어난 냇 베이컨의 반란에 대한 백인들의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만들어진 법이었다.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의 친척인 냇 베이컨은 젊은 농장주로 버지니아의 진취적인 지배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영국에서 이주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베이컨은 버지니아 총독인 윌리엄 버클리와 그의 추종자들이 독점하고 있던 인디언과의 교역에서 배제되자 이들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시 버지니아는 인디언 서스쿼해녹족과 산발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베이컨은 자신의 농장 관리인이 살해되자 버클리의 인디언 정책이 온건하다고 비난했다. 이런 갈등이 계기가 되어 베이컨은 지지자 2,000명을 이끌고 북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최초의 민중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명분은 버클리의 인디언 정책과 더불어 부당한 세금 징수, 측근의 고위직 기용, 부정부패에 대한 저항이었다. 영국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소규모 함대까지 파견했으나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베이컨은 이질로 사망하고 말았다. 반란군 잔당들은 체포되었고 23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이 반란은 인디언들에 대한 개척자들의 증오와 대지주에 대한 서민들의 분노가 한데 뒤섞인 것이었지만, 버지니아의 지배자들에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들이 가장 두렵게 생각한 것은 반란군의 인적 구성, 즉 백인 계약하인(indentured servants), 흑인 노예, 흑인 자유민 세력의 규합이었다. 계약하인은 주인이 아메리카로 가는 경비, 음식, 숙소를 제공해주는 대신에 정해진 기간(주로 4~5년) 동안 하인으로 봉사하는 제도였다. 인덴처(indenture)는 톱니꼴의 절취선이 있는 날인증서를 말하는 것으로, 대개 종이 1장에 2부 이상의 문서를 작성한 다음 톱니꼴 절취선을 따라 자른 후 당사자들이 각각 1부씩 보관하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대부분의 계약하인들은 자발적으로 식민지에 왔으나, 1617년부터 영국 정부는 수 척의 배에 죄수들을 싣고 와서 그들을 하인으로 팔아넘겼다. 고아, 부랑자, 빈민들을 비롯하여 1650년대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전쟁에서 잡은 포로도 이주시켰다. 더구나 탐욕스러운 투기꾼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도 있었다. 17세기 말에 이르면 식민지 계약하인의 수가 식민지 인구 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아진다. 계약하인들은 주로 남자였는데, 이들은 식민지에서 결혼을 하거나 연애 상대를 찾기 어려웠다. 마땅한 백인 여성이 없었으므로 이들은 흑인 여성에게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백인 지배자들은 이를 불길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베이컨의 반란 때 하층 백인과 흑인이 손을 잡았는데, 흑백 간 결혼이 많아진다면 그들의 결합은 더욱 공고해지고 반란의 가능성도 높아지는 게 아닌가. 이런 두려움 끝에 내놓은 게 바로 흑백 결혼 금지법이다.
다른 식민지들도 사정은 비슷했기에, 메릴랜드(1692년)를 비롯한 다른 식민지들도 흑백 결혼 금지법을 제정했다. 이 전통은 독립 이후는 물론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한 방울 원칙’은 아직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혼혈인이라도 흑인 피가 8분의 1 이하면 백인으로 간주하는 게 일반적인 관례였다. 남북전쟁(1861~1865) 직후 남부에 거센 역풍(backlash)이 몰아닥쳐 교묘한 방법으로 흑인의 참정권을 다시 박탈하고 흑인과 백인을 분리시키는 수많은 흑인차별법이 제정되었을 때도 ‘한 방울 원칙’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생학과 혁신주의의 잘못된 만남: ‘한 방울 원칙’은 20세기에 등장했다. 1910년 테네시ㆍ루이지애나, 1911년 텍사스ㆍ아칸소, 1917년 미시시피, 1923년 노스캐롤라이나, 1924년 버지니아, 1927년 앨러배머ㆍ조지아, 1931년 오클라호마 주가 ‘한 방울 원칙’을 법으로 명문화했다. 왜 시대를 역행해 이 시기에 ‘한 방울 원칙’이 입법화되었을까? 20세기 초 미국을 강타한 ‘우생학 열풍’ 때문이었다. 영국의 유전학자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이 1865년 탄생시킨 우생학은 미국에서 1880년대에 새로운 과학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더니, 20세기 들어서 혁신주의 물결을 타고 사회에 실제로 적용되었다. ‘우생학과 혁신주의의 잘못된 만남’이었다. 1907년 인디애나 주가 제정한 거세법(단종법)이 규정한 유전적 질환에는 정신박약ㆍ간질ㆍ정신분열ㆍ범죄 성향ㆍ성 문란ㆍ음주벽ㆍ장님까지 포함되었으며, 각 마을에서 ‘왕따’를 당하던 빈민 가정은 언제든 경찰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고 수용소로 보내질 수 있었다. 이런 거세법은 1914년까지 15개 주, 1931년에는 30개 주에서 시행된다.
우생학의 신봉자였던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는 유색인종의 높은 출생률에 주목하면서 산아제한을 옹호하는 중산층이 ‘인종 자살’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는 “언젠가 우리는, 좋은 형질을 가진 시민은 자신의 좋은 혈통을 후대 세상에 남기는 일이 가장 중요한 피할 수 없는 의무이며, 나쁜 형질을 가진 시민이 후손을 통하여 나쁜 혈통을 이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뉴욕 사교계 명사였던 매디슨 그랜트는 1916년에 출간한 『위대한 인종의 쇠망(The Passing of the Great Race)』에서 이민족 간의 결혼을 우려하면서 미국인의 ‘잡종화’를 경고했다. 1917년과 1924년에 제정된 이민제한법은 이러한 형태의 잡종화를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우생학은 와스프(WASP, WhiteAnglo-SaxonProtestant: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 미국 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계층)의 배타적 결속을 강화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 방울 원칙’은 바로 이런 시대적 광풍에 편승해 입법화된 것이다. ‘한 방울 원칙’을 방법론적 지침으로 삼은 흑백 결혼 금지법은 1967년 연방대법원의 위헌 판결로 사라지지만 (이때까지 16개 주에서 시행하고 있었다.) ‘한 방울 원칙’의 사회문화적 힘은 지금도 건재하다. 역설이지만, 20세기 중반 민권운동을 할 때에 흑인들이 정치적 힘을 키우기 위해 한 방울이라도 흑인 피를 가진 사람은 흑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한 방울 원칙’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오늘날 미국에서 인종적 순수성을 말한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유전학적으로 흑인 58퍼센트가 적어도 12.5퍼센트의 백인 피를 갖고 있으며, 백인 30퍼센트가 2.3퍼센트의 흑인 피를 갖고 있다. 여론조사에서 인종 간 결혼 찬성률도 1958년엔 4퍼센트에 불과하던 것이 1968년 20퍼센트, 1978년 36퍼센트, 1991년 48퍼센트, 2002년 65퍼센트, 2007년 77퍼센트, 2011년 86퍼센트로 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사회문화적으로 혼혈인을 흑인으로 부르는 ‘한 방울 원칙’은 건재할까? 그것은 당위와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이다. 그 누구도 드러내놓고 인종 간 결혼에 반대한다고 말은 못 하지만, 백인들은 여전히 인종 간 결혼을 꺼린다. 2010년 기준으로 백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한 백인 여성은 전체의 2.1퍼센트, 백인 남성은 2.3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혼혈이지만 피부색주의에 따라 중남미에선 백인으로 통하는 사람들은 미국에 와서 거의 예외 없이 깜짝 놀란다. 미국에선 흑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백인의 피 한 방울이 피부를 밝게 해 사람을 백인으로 만든다”는 반대 이론이 통용되는 브라질에서 흑인과 유색 혼혈인은 전체 인구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지만, 인구조사에서 자신을 흑인이라고 답하는 사람은 5퍼센트에 불과하다.
미국의 혼혈인들은 ‘한 방울 원칙’을 체념하듯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가끔 항변하는 유명 인사들도 있다. 타이거 우즈는 캐블리내시언(Cablinasian: Caucasian, Black, American Indian, Asian)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면서 자신은 혼혈인인데도 흑인으로 분류되는 것은 이상하다며 항의했지만, 감히 ‘한 방울 원칙’의 벽을 넘어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인종적 정체성 문제로 상처를 많이 입은 가수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는 데뷔한 후에도 그 문제로 시달려야 했다.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백인이고 아버지는 아프리카계 베네수엘라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혼혈이기에 그녀는 자신을 ‘혼혈’이라고 했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이런 압박에 못 이겨 또는 이런 압박을 조롱하기 위해 그녀는 결국 자신을 흑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런 쓰레기 같은 논쟁에서 해방되었다.
‘한 방울 원칙’은 사라지는 게 옳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브라질식’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인종 간 결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부모의 인종 중 낮은 쪽 지위를 물려받는 것을 하이포디센트(hypodescent), 높은 쪽 지위를 물려받는 것을 하이퍼디센트(hyperdescent)라고 하는데, 둘 다 인종차별을 전제로 한 개념임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이퍼디센트를 취하는 브라질도 ‘인종차별 없는 나라’로 알려진 신화와는 달리 정치경제적으론 철저하게 ‘백인 지배 사회’가 아닌가.
최종 해법은 아닐망정, 결국 경제적 권력의 집중을 막고 빈부 양극화를 개선하는 게 인종문제 해결의 현실적 해법일 수 있다.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어느 나라에서든 성공한 유색인의 다수가 인종차별에 대해선 비판적 자세를 취하면서도 아내는 백인을 취하는 걸 ‘위선’이라고 비판할 게 아니라, 그 숨은 뜻을 슬기롭게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미국에서 교도소 수감자 중 백인은 백인 인구 106명당 1명꼴인 반면 흑인은 흑인 인구 14명당 1명꼴인 이유의 대부분도 ‘경제’에서 찾는 게 옳지 않을까?
인류 역사 이래로 지금의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은 없었다.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어느 한 권력체가 전 세계를 그토록 압도적으로
그리고 안정적으로 지배한 것은
유사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프랑스 외무장관(1997~2002년)이었던
위베르 베드린(Hubert Védrine)은 1992년 이후 미국을
규정하는 ‘초강대국(superpower)’이라는
표현이 더 이상 적합하지 않다며,
‘초초강대국(hyper-power)’이라는 표현을 썼다.
‘거대한 괴수’의 성장 과정은 빨랐기에 더욱 놀랍다.
미국은 신생국가로서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압축성장을 기록했다.
어느 정도였던가?
역사가 대니얼 부어스틴(Daniel J. Boorstin)은
“이 신생국 미국은 유럽이 2,000년 동안
경험했던 역사를 한두 세기로 압축시켜놓았다”고 말한다.
매우 빠른 속도로 ‘거대한 괴수’가 된
미국의 힘은 어디서 훔친 게 아니다.
아니 훔칠 수도 없다.
미국 스스로 만든 것이다.
미국이 무언가를 훔쳤다면
그건 바로 사람의 마음이다.
청춘남녀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 훔치기’처럼 미국은 세계인의 마음을 훔쳤다.
세계를 제패한 미국 대중문화도
세계인의 마음을 훔친 셈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미국을 향해
거대한 이민의 물결을 이룬 사람들의 마음이다.
미국이 이룩한 초고속 압축성장의
비밀은 끊임없는 인구의 유입이었다.
자신이 살던 나라의 탄압을 피해,
또는 그 나라에 불만을 품거나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민들 중엔
세계 최고급 인력이 수두룩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의 미국을 만든 1등 공신 중의 1명은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다.
1933년 그의 집권 이후 유대인 탄압을
예감한 유대인 과학자ㆍ지식인들의
엑소더스(exodus)가 일어났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미국으로 탈출했다.
예컨대, 1933~1941년 사이에
물리학자만 100명 이상이 미국으로 왔는데,
이는 독일 물리학자의 25퍼센트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유출이었다.
그래서 ‘거대한 괴수’는 무죄란 말인가?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미(反美)의 물결은
단지 오해이거나 시기심의 발로에 불과한 것이란 말인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반미의 근거가 되는,
미국이 저지른 죄악의 정체를
제대로 보는 것도 필요하다.
미국의 최대 죄악은 ‘사이즈’다.
양적 사이즈인 동시에 질적 사이즈다.
미국보다 양적 사이즈가 큰 나라는 여럿이지만,
미국 정도의 양적 사이즈와
더불어 세계 최고 수준의 질적 사이즈를
동시에 갖춘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사이즈가 그 자체로서 죄악이라는 건
거대 기업들의 독과점이 잘 말해준다.
독과점의 폐해는 꼭 악의(惡意)에서 나오는 건 아니다.
거대 사이즈를 유지하기 위한 내부 논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미국은 ‘초초강대국’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욕먹을 게 많다.
그러나 동시에 ‘초초강대국’이라서 '
배울 것도 많다.
저자는 미국을 실용적으로,
쿨하게 볼 것을 제안한다.
그런 자세는 미국을 보는 저자의 기본적인 시각이며,
이 책의 기조이기도 하다.
‘반미냐 친미냐’의 이분법으로 보자면,
이 책엔 반미적인 글도 있고
친미적인 글도 있지만,
제발 그런 조잡한 이분법 좀 버리자는 게
이 책의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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