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형적인 미국인
한스 디터 겔페르트 지음
에코리브르/2003년 3월
머리말
2001년 9월 11일, 과격 이슬람 단체 알 카에다의 테러리스트들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무너뜨리고 워싱턴의 펜타곤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을 때, 미국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독립전쟁 이후 처음으로 적들이 철옹성처럼 안전한 미국이라는 요새를 침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미국인들에게 경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테러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가치 체계를 다지는 초석이 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미국적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에는 미국인의 특징이라 불리는 모든 덕목들뿐 아니라 미국인들의 신화, 약점과 강박관념들조차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사랑, 협동 정신, 낙관주의, 애국심, 거침없는 추진력 등은 그야말로 이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활기를 띠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미국 사람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이 더욱 분명해진다. 즉,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인간을 사랑하는 선의의 미국인들을 좋아하지 않을 뿐더러, 골수에 사무치게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어떤 것에 대해 전형적으로 독일적이다, 영국적이다, 프랑스적이다 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쉽게 수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형적으로 미국적이다 라는 말은 그렇지 않다. 유럽 사람들은 전형적으로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 특정 국민들이 전형적으로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면 여러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미국인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미국인들이 보여주는 집단적인 행동이나 사고에는 그런 전형적인 성향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미국인
누가 진정한 미국인이며 그들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사실 지역이나 민족 분포에서는 미국을 찾을 수 없다.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어느 지역에 살든 그리고 조상이 어디에서 왔든 미국인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특징이 있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는 아주 다양한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미국 사회에서 동질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랍다.
한 국가의 전형적인 특징을 조사하는 것은 드문 일이지만, 미국이 그런 대상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유럽 국가들은 언제든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보기 위해서 또는 이를 거부하고 싶을 때면 과거를 들여다보곤 한다. 그러나 신생국 미국은 신세계에서 하얀 종이와 같은 자화상만을 볼 수 있었다. 그야말로 과거가 하나도 없는 국가였던 셈이다. 다시 말해, 유럽에서는 보수적인 자화상과 개혁적인 자화상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이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미국에서는 하나의 자화상에서 경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한편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일치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 독특하게도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개혁적이다. 이 점이 바로 미국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미국의 신화들
명백한 운명 - 선택받은 민족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북미로 갔던 영국인들은 평화를 사랑하고 권리를 존중하던 청교도들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도착한 땅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정주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청교도들은 그들로부터 땅을 구매해야 했다. 하지만 사유재산이 없는 인디언들에게 땅을 구매할 수는 없었다. 또한 인디언들과 우호조약을 맺어보았지만 조약 체결자가 죽거나 마음이 변하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화를 사랑하는 청교도들은 신대륙을 밟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장했고, 세력을 팽창시키는 정복자가 되고 말았다. 반면 남부에 도착한 식민지 개척자들은 종교적인 이유가 아니라 대농장을 운영해 큰돈을 벌 목적으로 미국에 이주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영국의 지방 귀족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원주민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똑같아진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정당화시켜 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이는 사회화된 사람들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를 내걸고 어떤 일을 하면,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 때문만이 아니라 좀더 고상한 이상을 위해서 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인디언들이 질병과 살을 에는 추위와 싸워가며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날 즈음 생겨난 이 이데올로기는 미국의 신화들을 구성하는 주요 성분이 되었다. 「유나이티드 스테이즈 매거진 & 데모크라틱 리뷰」 지 7/8월호에 존 오설리반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대륙으로 건너와 매년 수백만 명에게 자유롭게 발전할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은 어쩌면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명백한 운명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당시 미국에서 지배적이었던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영토 확장에 명분을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영토 확장을 단순히 땅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을 확대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인들은 인디언들에게 가한 부당한 행동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국가의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는 과거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행동이 옳았다는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 어떤 비판의식도 운명론의 핵심을 이루는 신념을 흔들어놓지는 못하고 있다.
비록 유대인들처럼 자신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미국인들의 무의식은 그 점을 확신하고 있다. 구약성서를 지침으로 하는 청교도들에게 신은 인자하신 분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여호와이다. 만일 그들이 믿는 대로, 이 신이 선택한 미국인들에게 모든 대륙을 지배할 임무를 주었다면, 저주받은 인디언들을 인자하게 다룰 도덕적인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신의 전사이며, 다른 편에서 싸우는 전사는 악의 하인이라고 여긴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 -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
신이라는 이름은 미국의 도처에서 볼 수 있다. 1956년 의회에서 선거 표어로 발표했던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다'라는 표현은 사실 1864년부터 여러 종류의 동전에 새겼다가 나중에는 모든 달러 지폐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표현보다 더 자주 듣고 보는 문장은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이다. 공적인 행사가 있을 때면 늘 이 말로 끝을 장식하는 게 보통이고, 9·11 테러 이후에는 거의 모든 광고판에 이 문장이 등장했다. 전체 미국인의 96퍼센트는 신을 믿거나 신적인 존재를 믿는다. 악마의 존재에 대해 서독 사람 가운데 겨우 18퍼센트가 믿는데 반해, 미국 사람들은 69퍼센트가 믿는다.
유럽 사람들의 눈에는 미국인들의 신앙심이 원시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분별 없는 행동으로 보일 게 분명하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기독교 교리를 일상 생활에 필요한 도덕이나 철학적인 도덕으로 해석해놓았고, 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별다른 문제 없이 잘 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 목사들도 어느덧 생겼다. 그에 반해 미국인의 대다수 - 심지어 지식인들조차 - 는 단순하고 민속적이며 성경을 중시하는 기독교 형태에 만족하며, 교회세를 통해 매월 월급에서 삭감하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낸다. 반면 미국의 학교들이 종교 수업을 금지한 것은 이상해 보인다. 이들은 오랜 기간 논의한 뒤 학교에서 기도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기독교의 상징물도 학교 내에 둘 수 없도록 규정했다. 이렇듯 미국은 교회와 국가를 엄격하게 구분한다. 미국인들이 국가와 국가 시설에 대한 절대적 중립을 고집하는 태도는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그것은 과거를 보면 알 수 있다. 영국 출신의 청교도들이 대주교 윌리엄 로드가 이끌던 영국 국교로부터 압력을 받자 신대륙으로 이주해버린 과거를 생각해 보라. 이때부터 미국의 신교도들은 어떤 교권주의도 증오했다. 이들은 상부로부터 명령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배하는 교구에 속하기를 원해, 다양한 교파들이 수많은 교회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교차들이 공유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근본적인 부분에 한정되어야 하므로, 미국의 신앙에는 애초부터 근본주의 성향이 자리잡게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40퍼센트가 다윈의 진화론을 학교에서 추방하려 하는 창조주의자라는 사실은 미국이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국가인지 의심스럽게 한다. 이러한 근본주의자 중 핵심 인물은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낙태수술을 하는 의사들은 살해 위협까지 받는다.
대중 문화의 모티프들
악과의 투쟁
서부 영화와 괴기 영화는 미국 영화 가운데 가장 특징 있는 장르에 속한다. 이 두 장르는 어느 형태로든 악과 싸우는 것을 다룬다.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악은 소도둑이나 갱 또는 교활한 인디언들이고, 괴기 영화에서는 갑자기 인간 세계에 들어와 세상을 파멸시키려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이다. 사실 괴기 영화의 선구자는 무서운 내용의 소설인데, 이 소설이 나온 곳이 바로 유럽이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악마는 인간적인 면이 있다. 혹은 순전히 악의에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적대적인 힘을 대표한다. 가령 괴테는 악마가 메피스토펠레스 형상을 한 채 악한 역할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역시 신의 도구일 뿐이라고 묘사했다. 사실 독일 문학보다 앵글로색슨 문학에 악마적인 요소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다. 청교도들은 악마를 지옥에 떨어질 숙명을 가진 자로 본다. 미국 영화에 등장하는 악마는 구원받을 길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근절시켜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렇듯 악마와 싸워서 무찔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정치적인 인식을 결정함으로써 가장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다. 미국이 나치스 제국을 악마의 제국이라 보고 이들과 대항해서 싸웠을 때는 나름대로 정당했다. 하지만 훗날 공산주의와 투쟁할 때 그 같은 강박관념으로 인해 미국인들은 현실을 정확하게 볼 수 없었고, 악마를 쫓기 위해 점점 바알세불(히브리어로 악을 쫓기 위해 더 사악한 악을 동원하는 것)과 연합하게 되었다. 미국인들이 악을 의식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는, 1970년대 이래 그 같은 의식이 쇠퇴하자 이를 민족적인 문제로 볼 정도였다는 것에서 잘 나타난다.
조지 W. 부시는 2002년 1월 31일 연두교서에서 북한·이란·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불렀다.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미국이야말로 악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두려운 것은 미국인들은 자신의 이익이나 가치관에 어긋난다고 해서 상대를 악하다고 간주할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도전적인 자극으로서의 대재난
시간적인 간격을 두고 자주 개봉하는 미국의 액션 영화들은 대재난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거나 이를 막는 데 성공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같은 일반적인 모티프에 비하면 악과 싸워 승리하는 주제는 특수한 경우에 속한다. 왜냐하면 자연이 주는 위협에 비한다면 악이 우리에게 주는 위협은 현실적으로 미미하니까 말이다. 미국 영화에 나오는 지진, 토네이도, 해일, 산사태, 난파 등의 대재난은 사람들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기회를 제공한다. 이처럼 긴장된 주제는 유럽의 영화에서도 볼 수 있지만, 미국 영화가 훨씬 자주 다룬다. 이 역시 미국인들이 가진 강박관념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가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상황에 처하면 미국인들은 그들이 지닌 여러 덕목들을 활짝 꽃피울 수 있다. 철저한 계획을 통해 재난을 극복하면 이들은 만족하고, 재난에 처한 사람들이 더 이상 살아날 가능성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면 만족은 정점에 이른다.
미국인들은 삶을 위협하는 대재난에 맞닥뜨리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던 신념을 더욱 믿는 경향이 있다. 즉, 어떤 것도 따지지 않고 팀플레이를 할 준비가 된 전문가들에게 불가능은 없다는 신념이다. 정확한 계산에 의하면 20년 안에 지구에 혜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만일 이 혜성을 떨어지기 전에 발견한다면, 충돌 직전에 첨단 기술을 이용해 그 비행 물체를 파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오직 미국인들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전형적인 재난 영화에서 영웅적인 주인공이 폭발하기 바로 직전에 불행을 막을 수 있는 버튼을 누르듯이 말이다. 미국인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가미카제식 자살 비행이나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저지르는 테러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미국인들에게는 개인이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바로 집단적인 대재난을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동기이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스콧 단장을 포함한 남극 탐험대의 일원인 오츠 단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동상으로 인해 업무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깨달은 오츠는 "잠깐 나갔다 오겠소."라는 말만을 남긴 채 살을 에는 추위 속으로 나가 죽음을 택했다. 미국인들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다르게 행동할 것이다. 비록 발이 꽁꽁 얼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계속 행군하고, 친구들은 그를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만이 어떤 재난을 당하더라도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미국이 보여주는 모순들
폭력과 친절
클린턴 대통령 아저씨, 부탁드릴 게 있답니다. 제발 도시에서 죽는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세요.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고, 저는 누군가 저를 죽일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러니 사람들이 살인을 그만두게 해주세요. 정말 정말 부탁드릴게요. 저는 대통령 아저씨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답니다.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대통령 아저씨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알아요.
- 당신의 친구, 제임스
이 편지는 1994년 4월 29일 뉴올리언스에 사는 아홉 살짜리 제임스 다비가 쓴 것이다. 그는 그 해 5월 8일 지나가는 차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이처럼 섬뜩한 일화로 데이비스 G. 마이어스는 『미국의 패러독스』의 '폭력'이란 장을 시작했다. 어떤 미국인은 폭력이란 애플파이처럼 전형적으로 미국적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력 대신에 유별나게 친절하고 정중한 미국인들을 접한다.
통계를 보면 미국에서 발생하는 살인율은 독일보다 5배 높고, 영국보다 7배가 더 높다. 가장 끔찍한 것은 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특정 연령층이라는 점이다. 25세에서 34세 사이의 남자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가 독일보다 30배 많으며, 영국보다 40배가 더 많다. 폭력이 일어나는 중심지는 흑인들이 거주하는 대도시의 슬럼 지역으로, 흑인은 국민들 가운데 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를 뿐 아니라 범죄로 인해 가장 많이 희생당하기도 한다. 범죄자들은 대부분 아버지가 없는 결손 가정에서 자라나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직업을 가질 가망도 없다. 이들은 범행, 감옥, 출소, 새로운 범행이라는 원을 끝없이 돌다가, 마침내 무기징역이나 사형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높은 범죄율에 대해 흑인의 사회적 환경에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슬럼에 사는 흑인들이라 할지라도 가난한 나라에 사는 국민들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원인들을 살펴보면 두 가지 특수한 미국적 현상으로 좁혀진다. 우선 미국인 2억 5,000만 명 가운데 2억 명이 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권총을 소유하는 것을 신성한 기본권으로 간주할 정도여서, 지금까지 어떤 정권도 무기 소지 제한을 반대하는 전국총기협회를 이기지 못했다. 특수한 미국적인 두 번째 현상 역시 총기 소지와 깊은 관련이 있다.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은 폭력을 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이상적인 남성성을 상징한다. 미국이 서부로 확장하던 시절의 윤리가 아직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즉, 스스로 무기를 들고 자신과 가족을 보호하지 않고 경찰에게 그 과제를 맡기는 남자는 대부분의 미국인들 눈에 겁쟁이나 졸장부로 보인다. 그러나 변경에서 무기로 인디언들을 쫓아낸 개척자들과 달리, 오늘날 자기 방어 준비를 갖춘 용감한 시민들은 오히려 범죄자만 더 늘릴 뿐이다. 미국에서 강도는 집주인이 침대 곁에 권총을 두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무장한 채 침입하고 필요하면 총을 쏜다.
여기에서 역설적인 것은, 그처럼 용감한 시민들은 정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이방인들에게도 독일에서는 감히 경험하지 못할 친절을 베푼다는 것이다. 장소를 불문하고 만일 어떤 관광객들이 잠시 어찌할 바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금세 그를 도와주기 위해 누군가 다가온다. 또는 어떤 사람이 슈퍼마켓에 있는 거대한 선반 앞에 서 있으면 그 앞을 지나갈 때 곧장 사과한다.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이러한 친절과 폭력성도 미국의 역사로부터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변경 지역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친구에게는 친절하게 대했을 것이고, 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개척할 변경이 없지만, 그 당시에 형성된 의식 가운데 몇 가지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섹스광과 정숙한 체하기
2001년 영국의 유명 콘돔 제조업체 듀렉스가 조사하여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 남자들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섹스를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인들이 만든 영화나 잡지, 광고 등을 통해 미국인들을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미국인들이 섹스를 그렇게 많이 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은 다른 민족과 달리 섹스를 그야말로 경제의 한 분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휴 헤프너의 「플레이보이」 잡지와 그가 운영하는 가슴을 노출한 웨이트리스가 서비스하는 버니바만 성적인 자극을 상품화한 것이 아니라, 광고계 전체가 성을 유혹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만일 자유로운 차림으로 해변을 돌아다니는 데 익숙한 독일인 부부나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한 부부가 미국의 해변에서 다섯 살배기 아이를 발가벗겨서 돌아다니게 하면, 놀랍게도 자유의 나라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듣는다. 그것도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모든 미국인들은 내심으로는 정숙한 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공공연하게 시인하며, 이는 청교도의 유산일 것이라고 말한다. 정숙한 체하는 행동은 굳이 성생활에만 한정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은밀한 부분과 관련 있는 모든 것은 늘 금기 사항이다. 미국은 최대한으로 몸을 노출시키는 비키니를 발명한 나라지만, 여성의 음모가 보이는 것은 음란하다고 간주한다. 겨드랑이와 다리에 난 털을 깎는 것 역시 미적인 이유가 아니라 도덕적인 이유이다.
성생활에 대하여 미국인들이 이렇듯 모순적인 견해를 갖게 된 이유는 모순적인 견해 그 자체에 있다. 미국인들은 성적인 활동이 건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반면 통제하기 힘든 충동 세계가 문제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때문에 미국의 부모들은 일찍부터 아이들이 건강한 성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자식이 14세가 되어서도 이성과의 데이트에 관심이 전혀 없다면 부모는 자식이 동성애 성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한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의견을 조사한 결과,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나중에 가서야 너무 이른 섹스 경험을 후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자신과 주변에 정상임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과 성생활 역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분야이고, 쾌락의 뒤에는 항상 실패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미국인들이 보여주는 성생활에 대한 이러한 모순은 청교도 초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교도들은 처음에는 전혀 정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육체적인 욕구를 통해서 악마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인들의 정숙한 체하는 태도가 가장 폭발적으로 표출된 경우는 정치가들이 성적인 스캔들을 일으킬 때다. 미국인들은 기본적으로 정치가들을 불신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도덕적으로 흠이 없기를 기대한다.
미국의 성 문화와 유럽의 성 문화를 그때그때의 특성을 고려하면서 객관적으로 비교해보면, 유럽인들은 섹스를 미적인 문제로 생각하지만 미국인들은 도덕적인 문제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미국의 형법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녀 사이의 아주 은밀한 영역까지 개입해 처벌했다.
미국인의 기질을 형성하고 있는 힘
청교도주의
오늘날까지도 미국식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에 영향을 주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전통은 바로 청교도주의다. 이는 1620년 메이플라워 호 승객들이 북아메리카로 가져왔으며, 그 이후 청교도는 무엇보다 뉴잉글랜드 주들에서 세력을 떨쳤지만 식민지 국가에도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서 청교도란 글자 그대로 청교도 신학만을 일컫는다. 원래는 욕설이었는데, 과격한 신교도들을 통틀어 신교도라고 불렀다.
청교도들은 성경 외에 어떠한 종교적인 권위도 거절하며, 오로지 자신의 양심에만 의지한다. 이처럼 반권위적인 개인주의는 청교도로부터 물려받은 상속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청교도의 유산 중 두 번째 요소는 협동 정신인데, 각 교구가 자율권을 강조함으로써 생겨났다. 어떤 형태든 인간적인 권위를 거부했기 때문에 신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만이 남게 되었고, 청교도들은 이것을 청교도 교리의 핵심으로 여긴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5)에서 자본주의의 등장에 본질적으로 기여한 것은 청교도주의이며, 이것도 이중적인 방식으로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자신들이 선택 받은 자인지 아니면 천벌 받을 사람인지 모르는 채, 청교도들은 경제적인 성공을 선택받은 자라는 표시로 해석했다. 그 때문에 이들은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금욕주의적 삶의 방식을 따랐기 때문에 그 이득을 사치스럽게 소비하지 않고 생산적인 자본으로 바꾸었다.
극단주의자들을 일단 무시하면, 가령 성경의 창세기를 말 그대로 받아들이고 다윈의 진화론을 학교에서 추방하려는 소위 창조주의자들을 무시하면, 전형적으로 미국적인 덕목 가운데 많은 것들이 청교도로부터 나온다. 개인주의, 협동정신, 민주주의적 사고, 도덕주의, 추진력, 경외심, 학문적인 합리주의 등이 오로지 청교도로부터 나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청교도가 장려했거나 강조했던 특성들이다. 부정적인 측면도 있는데, 무엇보다 독선적인 경향이 있는 도덕적 엄격주의와 성 도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청교도로부터 물려받은 유산 가운데 가장 이중적인 것은 믿음과 반대되는 의심에 대해서 미국인들이 지나치게 나쁜 평가를 내린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 자신의 축구 팀, 자신의 국가를 믿는 것은 미국인들에게 너무나 당연하다. 반면 의심, 특히 자신에 대한 의심은 경멸한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생각해보면, 기독교와 같은 팽창적인 종교를 창설한 자들이 겸허한 의심을 갖도록 권장했더라면 더 좋았을지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말해, 신에게로 가는 왕도가 믿음이 아니라 겸허한 의심이라고 설파했더라면 종교로 인해 피를 덜 흘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계몽주의
미국인의 기질을 형성하는 힘 가운데 두 번째로 역사가 긴 이데올로기는 계몽주의다. 이는 청교도주의와 상당히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청교도주의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는 시민들이 해방되었다는 이데올로기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계몽주의로 인해 새롭게 얻은 특성은 정치적인 관용이었다. 미국에서 관용을 대표하는 인물은 단연코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토머스 제퍼슨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헌법 제정에 참여했고 미국의 세 번째 대통령이기도 하다. 그는 죽음에 임박해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며 비석에 새길 문구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세 가지 업적이 새겨지길 원했는데, 그것은 독립선언문의 작성,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조례, 마지막으로 버지니아 대학의 설립이었다. 대통령직을 맡았던 8년과 그 밖의 정치적인 공로는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제퍼슨은 미국인들에게 정치적 계몽주의의 화신으로 보이는 것이다.
동시에 제퍼슨은 청교도와 계몽주의가 미국식으로 결합하면서 생긴 모순을 가장 본보기로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유럽 계몽주의자들의 특징은 의심과 회의라 볼 수 있지만, 미국 계몽주의자들의 특징은 믿음에 있었다. 제퍼슨의 『버지니아 주에 관한 소고』를 인용한 내용을 읽어보면, 왜 조지프 J. 앨리스가 1997년에 쓴 제퍼슨의 전기를 『미국의 스핑크스』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모세가 쓴 글들은 청교도적 고통으로 전율하고 있다. 노예를 거느리면 신에게 벌을 받을 것이라 위협하고 있으나, 정작 이런 위협을 얘기하는 장본인은 노예를 200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제퍼슨은 계몽적인 방법으로 어마어마한 농장을 현대화하려 시도했지만, 이로 인해 점점 무거운 빚에 쪼들렸다. 1814년 영국인들에 의해 불타버린 국회의사당을 재건축할 때, 사람들은 제퍼슨의 도서실에 있는 6,467권의 도서가 기증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제퍼슨은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 이 도서들을 2만 3,950달러를 받고 국가에 팔았다.
미국 대통령들 가운데 그의 이름이 가장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그가 다른 어떤 사람보다 미국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상적인 유물론자였고, 신을 두려워하는 계몽주의자였으며, 자유라는 기본권을 옹호하는 노예 소유자였다.
맺음말
미국의 가장 깊은 뿌리는 영국이라는 모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서부터 청교도주의와 존 로크의 계몽주의적 국가론과 사회론이 나왔으며, 자유와 개인주의에 대한 개념은 물론 정부에 대한 불신도 나왔다. 그러나 영국이 타협을 시스템으로 하는 반면, 미국은 균형을 중시한다. 영국에서도 두 당이 있어 서로 상반되는 입장을 보일 때, 양 진영을 묶어주는 클립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왕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은 수백 년 전부터 타협에 뛰어났다. 그러나 미국은 전혀 다르다. 미국에서는 대립하는 요소들이 훨씬 과격하게 드러나는데, 이는 왕과 같은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을 유지해주는 것은 추상적인 헌법이 아니라 헌법에 규정해놓은 '감시와 균형'이라는 시스템이다. 이는 균형을 유지하는 시스템으로 정치 최상부에서 최말단에 이르기까지 소위 모순들에 균형을 맞춘다.
지난 몇백 년 동안 미국의 전반적인 국내 정치는 늘 비정상이 되어버린 균형을 다시금 확립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때 미국 사람들은 자유, 개인주의, 자기 책임의 측면을 강화시키거나, 혹은 사회 정의, 협동 정신, 국가의 이익이라는 측면을 강화시키곤 했다. 이 모든 것의 기초는 엄격한 권력 분립으로, 세계 어떤 곳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일관성 있게 잘 지켜지고 있다.
미국인들의 사고와 느낌은 두 가지 가장 오래된 뿌리, 즉 청교도주의와 계몽주의로부터 나왔다. 청교도주의에는 이미 계몽주의 성향이 들어 있었고, 계몽주의에는 청교도주의로 급변할 수 있는 성향이 내재해 있었다. 이렇듯 모순적인 것이 주는 긴장으로부터 미국인들은 힘을 얻는다.
이제 미국은 다시금 하나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테러리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과제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타협이 아니라 균형 또는 안정을 원한다. 그런데 상대보다 자신이 우월해야만 확실한 안정이 보장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국은 외교상 우위를 점하려 한다. 하지만 미국의 안정이 위협받는 것은 안정의 무게 중심이 점점 더 외부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균형을 이루어야 할 대상이 자유와 행복의 추구라는 쾌락주의적 유토피아에 맞서 지상에 신의 국가를 세우겠다는 금욕주의적 꿈을 내세우는 수십억 명의 회교도들이라면, 그 결과는 분명 미국 사람들의 내면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면 미국인들의 모순 가운데 어떤 측면이 더 강한지에 따라 사태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계몽주의적 성향이 우세하다면 미국은 자유와 관용이라는 이상을 찬양하면서 '사탕과자'로 적을 이성의 편으로 이끌려 노력할 것이다. 반면 청교도적인 성향이 우세하다면 미국은 도덕적 채찍을 휘두르며 '악의 국가'에 대항하여 십자군전쟁과 같은 '신성한 전쟁'을 치를 것이다. 지금까지는 첫 번째 경향이 항상 우세했다. 하지만 계속 그럴지는 알 수 없다.
'책 > 그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바마 이후 미국의 세계 전략 - 로버트 S. 싱 지음 (3) | 2021.02.01 |
---|---|
미국의 주인이 바뀐다 - 안병진 지음 (2) | 2021.01.31 |
미국을 세운 영웅들 - 도널드 T. 필립스 지음 (5) | 2021.01.29 |
미국의 민주주의 - 알렉시스 드 토크빌 지음 (3) | 2021.01.28 |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 강준만 지음 (1) | 2021.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