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톺아보기 <49~61>필사2회자
인류가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다른 세계로 용감히 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뒤이어 지구 탐험 사업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는데, 그중에는 중국과 폴리네시아로부터 오는 여행이 있었는가 하면, 또 그곳으로 가는 여행도 있었다. 이 같은 인류 탐험사의 절정은 물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을 시작으로, 그 후 몇 백년 동안 이루어진 항해들이다. 이로써 지구의 지리적 탐사가 완성되었다. 콜럼버스의 첫 항해는 에라토스테네스의 계산과 아주 직접적인 연관이 있었다. 콜럼버스에게는 그가 “인도의 제국들로 가는 사업”이라 이름한 사업 계획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일본과 중국, 인도를 목표로 항해할 때 동쪽으로 아프리카의 해안선을 따라 배를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뱃머리를 돌려 미지의 서쪽 바다로 담대하게 뛰어들자는 것이었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족집게 같은 예견대로, “이베리아 반도에서 인도까지 바다 타고”가는 것이다.
콜럼버스는 고지도를 파는 떠돌이 도붓장수였다. 그는 옛 지리학자들에 관한 서적과 또 그들이 쓴 책들을 열성적으로 읽었다. 그중에는 에라토스테네스, 스트라본,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술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인도로 가는 사업이 성공하려면 그 긴긴 여정에서 배와 사람이 견뎌 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에라토스테네스가 예측한 지구의 크기가 너무 컸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잔꾀를 부려 자기의 계산을 조작했다. 그의 계획을 검토했던 살라망카 대학의 교수들도 콜럼버스의 계산이 거짓이란 점을 제대로 지적했다고 한다. 콜럼버스는 구할 수 있는 책을 다 뒤져, 지구의 둘레로서 그중에서 가장 짧은 것을 택했고, 아시아 대륙은 동쪽으로 가장 긴 것을 찾아낸 다음, 그 수치마저 늘렸던 것이다. 가는 도중에 아메리카 대륙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없었더라면 콜럼버슨ㄴ 쫄딱 망했을 것이다.
지금은 수많은 탐험대가 지구의 구석구석을 이미 다 거쳐 간 후다.
신대륙도, 잃어버린 땅도 지구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간은 지구에서 가장 황량하고 외딴 지역이라도 찾아가서 탐사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그런 악조건의 환경에서도 우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그런 악조건의 환경에서도 우리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됐다. 현대는 인간이 과학 기술을 이용하여 우주로 과감히 나아가 지구 이외의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한 위대한 시대이다. 자신들의 발목을 잡고 놓아 주지 않던 지구의 모습을 지구 바깥에서 내려다본 기쁨은 얼마나 큰가? 지구는 에라토스테네스가 예측한 규모와 모양 바로 그대로였으며, 대륙들의 윤곽선은 옛 지도 제작자들의 능력과 소씨를 새삼스럽게 확인해 주었다. 에라토스테네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지리학자들이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있었다면, 모두 무릎을 치며 좋아하지 않았을까?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약 600년 동안 인류를 우주의 바다로 이끈 지적 모험을 잉태하고 양육한 곳이다. 그러나 그 대리석 도시의 위용과 영광의 흔적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피지배층이 느꼈던 배움에 대한 두려움과 그들이 겪어야 했었던 지배층으로부터의 억압에 대한 반작용의 결과로 옛 알렉산드리아의 영광은 대중의 기억에서 거의 완전히 지워지고 말았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지극히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다. 번성 초기에는 마케도니아 병사가, 좀 후대에 와서는 로마의 병사들이 우글댔다. 알렉산드리아의 전성기에는 이집트의 사제, 그리스의 귀족, 페니키아 선원, 유대인 상인, 인도와 사하라 사막 남쪽의 지방에서 온 아프리카 방문객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 노예 계층의 막대한 인구를 제외하고 - 대체적으로 같이 어울리고 서로를 종중하면서 살았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전 경호원을 시켜 건설한 도시다. 알렉산더 대왕은 외래문화를 존중했고 개방적 성격의 인물로서 지식 추구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주력했다. 전설에 따르면 알렉산더 대왕이 종 모양의 잠수 기구를 타고 홍해 바닷속으로 내려간 세계 최초의 인물이라고 한다. 그 사건의 사실 여부는 여기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탐구 정신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기 수하의 장군들과 병사들이 페르시아 인도의 여인들과 혼인하기를 권장했다. 그는 다른 나라의 신도 존중했으며 이국적이고 기이한 동물들을 수집했다.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코끼리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는 호화롭게 건설된 이 도시가 무역, 문화, 학문에 관한 세계의 중심지가 되기를 원했다. 폭이 30미터나 되는 넓은 도로를 깔고 그 주위는 우아한 건축물과 조각상 등으로 꾸몄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알렉산더 대왕의 기념 묘역과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파로스 등대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제일가는 자랑거리는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과 그 부속 박물관들이었다. 박물관이란 사실 이름을 그대로 옯기면 뮤즈라고 불리던 아홉 여신의 전공 분야에 각각 바쳐진 연구소였다. 그 전설의 도서관은 거의 모두 사라져 버렸고, 오늘날에는 당시 별관에 불과했던 세라피움이라는 축축하고 잊혀진 지하실만 하나 남아있다. 세라피움은 본래 세라피스 신에게 받쳐진 신전이었는데 후대에 지식에 봉헌된 성전으로 바뀐 셈이다. 물질적인 유물로는 썩어 부서져 가는 책꽂이 선반 서너 개가 고작이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에는 지구에서 가장 거대했던 도시의 심장이자 영광이었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설립된 진정한 의미의 연구 현장이었다.
도서관 소속 학자들은 코스모스 전체를 연구했다. 코스모스는 우주의 질서를 뜻하는 그리스 어이며 카오스에 대응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코스모스라는 단어는 만물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내포한다. 그리고 우주가 얼마나 미묘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지고 돌아가는지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이 이 단어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 모여 물리학, 문학, 약학, 천문학, 지리학, 철학, 수학, 생물학, 공학 등을 두루 탐구할 수 있었다, 과학과 학문의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전 세계의 천재들이 몰려와서 함께 용약하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의 모든 지식을 체계적으로 수집하여 집대성하려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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