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그외

스테파노 만쿠소, 알레산드라 비올라 -매혹하는 식물의 뇌

삼생지연 2020. 11. 18. 23:00
728x90


매혹하는 식물의 뇌

스테파노 만쿠소, 알레산드라 비올라 지음

행성B이오스 / 20165




수십 년 전 식물실험에서 발견된 엄청난 과학적 사실들이 오늘날 동물실험에서 확인되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식물계에 한정된다’고 무시당하거나 과소평가되어 왔던 기본적인 생명현상들이 동물계에서도 발견되는 순간 갑자기 유명세를 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레고르 요한 멘델이 완두콩을 이용하여 수행한 실험만 해도 그렇다. 이 실험은 유전학의 효시였지만, 멘델의 결론은 동물실험을 통해 최초의 유전학 붐이 시작되기 전까지 40년간 거의 완전히 무시되었다. 바버라 매클린톡에게 1983년 노벨상을 안겨준 유전체 불안정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매클린톡이 실험을 통해 반대증거를 내놓을 때까지 과학계를 지배하던 통념은 ‘유전체는 고정되어 있으며 생물의 일생 동안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전체의 안정성은 아무도 넘보지 못하던 과학계의 도그마였다. 하지만 1940년대에 행한 일련의 옥수수실험을 통해 매클린톡은 유전체의 안정성이 신성불가침한 원칙이 아님을 입증했다. 

매클린톡은 매우 중요한 발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그마치 4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노벨상을 받았다. 그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그건 그녀의 결론이 식물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학계의 정통이론과 배치되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과학계에서 따돌림을 받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와 실시된 동물실험에서 동일한 결론이 나오자, 그제야 노벨생리의학상을 단독 수상하며 공로를 인정받았다. 

식물에서 발견된 것이 나중에 동물에서 재발견되어 뒤늦게 중요성을 인정받은 사례는 또 있다. 

세포의 발견이 그랬고, ‘RNA 간섭(RNA interference, RNAi)’도 그랬다. 

RNAi는 2006년 앤드루 파이어와 크레이그 C. 멜로에게 노벨상을 안겨줬지만, 사실은 그보다 20년 전 리처드 요르겐센이 페츄니아라는 식물에서 발견했던 것이다. 파이어와 멜로는 요르겐센의 발견을 동물에서 재발견한 것뿐이다. 하지만 매클린톡의 경우와는 달리 요르겐센은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례들이 있지만 기본적인 스토리는 같다. 식물은 동물에 밀려 언제나 찬밥신세를 면치 못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윤리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든가 동물과 생리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식물을 실험에 사용한다.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식물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물은 늘 과소평가되고 가장 열등한 생물로 간주되어 왔다. 심지어 객관성을 중시하는 과학에서조차 식물은 동물에 부당하게 종속되어 왔다. 이러한 종속의 사슬이 끊어지는 날, 과학자들은 식물과 동물의 유사점보다는 차이점에 더 주목하게 되고 식물을 새롭고 매력적인 연구대상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식물과 인간 중 누가 더 중요할까? 판단을 하기가 어렵다면 이 질문에 대답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알려주겠다. 그것은 바로 식물 또는 인간이 사라지는 각각의 경우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만약 식물이 내일 당장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인간은 몇 주, 길어야 몇 달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모든 고등생물이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인간이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몇 년 후 식물들이 인간의 거주지를 접수할 것이며, 1세기 안에 모든 문명이 식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어떤가, 이 정도면 식물과 인간 중 누가 더 중요한지 판가름 난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전, 사람들은 지구가 온 우주의 중심이며, 모든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다. 이것은 철저히 인간중심주의적 생각으로, 대중의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데 수 세기가 걸렸다. 그러나 생물학적 인식에 관한 한, 사람들은 아직도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인간이 가장 중요한 생물이며,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한마디로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라는 것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 얼마나 흥미롭고 가슴 뿌듯한 생각인가! 

하지만 인간의 상황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지구의 바이오매스에서 식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99.5~99.9%라고 한다. 즉, 지구상에 사는 생물의 무게가 모두 100그램이라면, 식물의 무게는 99.5~99.9그램이나 나가는 셈이다. 거꾸로 말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무게를 다 합해도 0.1그램에서 0.5그램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인간이 나무를 마구 베어내고 있지만 식물은 여전히 생명체의 왕좌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우리가 지구상에 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식물 덕분이니 우리는 이 사실에 무척 감사해야 한다. 

식물은 먹이사슬의 맨 아래에 위치해 있다. 우리가 먹는 것은 모두 식물이거나, 식물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모든 식물을 다 먹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칼로리 섭취를 위해 주로 먹는 식물은 사탕수수, 옥수수, 쌀, 밀, 감자, 콩이다. 전 세계 사람들은 그 밖에도 몇 가지 식물을 더 먹는데, 이것을 총칭하여 식용식물이라고 부른다. 식용식물은 인간에게 매우 특별한 생물이다. 식물을 재배하는 것은 동물을 사육하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당신은 인간이 먹는 고기가 거의 전적으로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에 집중되어 있는 이유를 아는가? 사자, 영양, 늑대, 곰, 뱀을 주식으로 하는 문화권이 없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이들 짐승의 고기도 소고기나 닭고기에 못지않게 맛있는데도 말이다. 그건 가축화된 동물이 사육하기 쉽기 때문이다. 곰은 고기는 매우 맛있지만 사육하기가 어렵다. 이와 마찬가지로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데 용이한 식물은 몇 가지 안 된다. 식용식물은 많지만 그중 대부분은 진화해 온 방식이 특이해서 상업적으로 재배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경작하기 어려운 식물은 호랑이나 곰 같은 야생동물들과 마찬가지다. 


이와 반대로 개와 비슷한 식물들도 있다. 개는 늑대로부터 진화했지만 자기들끼리 생활하는 것보다 인간과 더불어 사는 것이 더 쉽고 편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랜 진화과정을 통해 인간과 개 사이에는 완벽하고 만족스러운 공생관계가 형성되었다. 인간은 개에게 먹이와 잠자리를 제공하고, 개는 그 대가로 인간을 보호하고 수행했다. 어떤 식물들은 말하자면 개와 비슷한 진화전략을 택했다. 인간에게 먹을 것을 제공하는 대신 해충으로부터 보호받고 영양분을 제공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지구 전체에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식물은 인간에게 식량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산소도 있다. 우리가 들이마시는 산소는 모두 식물들이 생성한 것이며, 공기 중에 산소가 없으면 우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 중 상당 부분이 식물에서 유래한다. 우리는 식물이 지난 수천 년 동안 에너지를 제공해준 것에 감사해야 한다. 


지구상에서 사용가능한 에너지 중 상당량은 까마득히 먼 옛날 태양에너지가 화학에너지로 전환된 다음 식물 속에 축적된 것이다. 태양에너지가 화학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을 광합성이라고 하는데, 햇빛과 이산화탄소를 원료로 하여, 고에너지 분자를 만든다. 그리고 몇 단계의 변화과정을 거쳐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가 생성된다. 사실 인간이 사용하는 에너지는 거의 모두 식물에서 나온 것이다. 실질적으로 말해서 화석연료는 태양에너지가 지하에 축적된 것에 불과하며, 그 에너지는 다양한 지질 시대 동안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생물권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일부에서는 화석연료를 광물이라고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화석연료는 유기퇴적물이다. 


식량과 산소와 에너지에 이어, 마지막으로 의약품이 있다. 사실상 모든 의약품은 식물이 직접 생산한 분자이거나 식물의 화합물에서 힌트를 얻어 인간이 합성한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나라에서 식물은 기본이고 필수불가결한 의약품 원료로 사용된다. 또한 식물 자체가 심신건강에 이로운 경우도 있다. 식물이 산소를 생성하고 이산화탄소와 공해물질을 흡수하며 기후를 조절한다는 것은 예로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식물은 다른 방법으로도 인간의 건강과 복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한다. 즉, 식물이 인간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 경감, 주의력 향상, 치유촉진 효과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식물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지고 긴장이 완화되는 경우가 있다. 병원에서 창가에 누워 창밖의 식물을 내다볼 수 있는 환자들은 진통제 사용량이 감소하며 입원기간이 단축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북유럽의 병원들이 조경에 신경을 쓰고 환자들의 휴식공간에 꽃과 관상수들을 심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보스턴 소아병원과 메릴랜드 대학교 부설 재활의학 연구소가 이 움직임에 동참하여 환자와 방문객들에게 정원을 개방하고 있다. 또한 일리노이 대학교 연구진은 식물이 집중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그들이 발표한 논문에 의하면 창밖으로 건물이 내다보이는 교실과 식물이 내려다보이는 건물에서 시험을 치른 경우, 식물이 내다보이는 교실에서 시험을 치른 학생들의 성적이 더 높게 나왔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연구진에 의하면 초등학교 학생들의 경우에도 식물이 집중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더욱이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에서는 사고도 줄어들며 녹지공간이 풍부한 지역에서는 자살과 폭력사건 발생률도 감소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식물은 우리 기분, 집중력, 학습, 심신건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식물은 장기 임무를 수행하는 우주비행사들에도 도움이 되는데, 이는 단지 식물이 식량원이기 때문이 아니라 긴장완화 효과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국제 우주정거장에는 ‘베지’라고 불리는 재배시스템을 마련해놓고 로메인 상추를 재배하기도 했다. 식물이 심신건강에 긍정적 효과를 보이는 과학적, 의학적 이유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려면 과거로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우리의 DNA 속에는 식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메시지가 아로새겨져 있는 듯하다. 




식물을 구성하는 여러 부위들은 서로 의사소통을 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다. 식물은 자신이 보유한 감각을 이용하여 환경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며 주변정세를 파악하고 행동방침을 정한다. 이 과정에서 식물은 수십 가지의 변수를 측정하고 수많은 데이터를 처리한다. 그러나 컴퓨터와는 달리 식물에게는 정보를 수집하는 것보다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예컨대 식물의 뿌리가 인근의 토양에 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탐지했거나 식물의 잎이 초식동물의 침략을 알아차렸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다른 부위에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 정보전달이 지연되면 식물 전체의 생명이 위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정보전달 과정을 과연 의사소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먼저 의사소통의 개념부터 정의해보기로 하자. 흔히 의사소통이라고 하면, 전송자가 수령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전송자와 수령자라는 의사소통의 두 당사자가 각각 상이한 생물체 안에 존재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은 없다. 


무릇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의사소통은 필수적이다. 의사소통은 위험을 회피하게 해주고 경험을 축적하게 해주며, 자신의 몸 상태와 환경 여건을 파악하게 해준다. 식물이 이런 중요한 메커니즘을 보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뇌가 없어서 곤란할 거라고? 사실, 뇌는 내부적인 의사소통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곧 알게 되겠지만 식물은 내부적 의사소통의 달인이다. 물론 식물의 경우 외견상 의사소통이 불가능해 보이는 기술적 장벽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식물은 전기신호를 전문적으로 전달하는 생물학적 구조체, 즉 신경을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동물들은 전기신호를 이용하여 말단에서 중추신경으로 정보를 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물에게 메시지 전달의 중요성과 시급성은 동물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뿌리에서 올라오는 정보는 잎에서 오는 정보만큼이나 식물에게 긴요하며, 식물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이 정보를 다른 부위에 신속히 전달해야 한다. 몸의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식물은 수압과 화학은 물론 전기신호까지도 이용한다. 식물은 이를 바탕으로 세 가지 독립된 시스템(① 관다발계, ②기공, ③ 누출사고)을 가동하는데, 이 시스템들은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힘을 합쳐, 짧게는 몇 밀리미터에서 길게는 수십 미터에 걸친 장단거리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시스템의 작동을 간단히 살펴보자.


① 관다발계: 우리는 식물에게는 신경체계가 없다고 들어왔다. 식물이 신경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면 신호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식물은 매우 기능적인 해법을 고안해냈다. 즉, 하나의 세포에서 다른 세포로 신호를 전달할 때는 세포벽에 뚫린 원형질연락사라는 구멍을 이용하고, 먼 거리(예를 들어 뿌리에서 잎까지)로 신호를 보낼 때는 관다발계를 이용한다. 식물은 심장이 없지만 동물의 혈관계와 비슷한 관다발계를 보유하고 있다. 관다발계는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물질을 수송하는 유압시스템으로, 중앙펌프, 즉 심장이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우리의 혈관계와 동일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관다발계를 통해 전기신호는 마치 전도액으로 가득 찬 튜브를 통과하는 것처럼 부드럽고 신속하게 이동한다. 이렇게 해서 잎은 뿌리에서 보내온 메시지를 받아들여 적절한 행동을 취하게 된다. 


② 기공: 기공은 잎의 안쪽 표면에 존재하는 특별한 구조체로 피부의 모공과 마찬가지로 외계와 의사소통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기공의 입구에는 두 개의 공변세포가 자리 잡고 있는데 공변세포는 수분과 빛의 상태를 고려하여 기공의 개폐를 조절한다. 모든 식물들은 커다란 딜레마를 해결해야 한다. 기공을 열면 광합성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포도당을 얻을 수 있지만 많은 수분을 잃게 된다. 반대로 기공을 닫으면 수분을 유지할 수 있지만 광합성을 포기해야 한다. 결국 식물은 지혜롭게도 ‘당분 생산’과 ‘수분 유지’라는 두 가지 절박한 과제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점을 찾는다. 예를 들어 키가 큰 참나무에서 뿌리가 갑자기 주변에 수분이 부족한 상황을 감지했을 경우 이 긴급 상황을 신속하게 잎에 알려 광합성 작용을 중지하도록 해야 한다. 이때 식물은 가장 빠른 전기신호로 기공 폐쇄를 재촉하는 동시에 보다 완벽한 정보를 담은 화학∙호르몬 신호를 보낸다. 


③ 누출사고: 식물의 가지, 잎, 꽃 등을 따거나 꺾으면 손상된 부위에서 액체가 흘러나온다. 이처럼 식물조직의 일부가 손상되면 내부의 유압시스템이 고장 난다. 그러면 손상부위에서는 액체를 방출하여 그곳에서 유출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식물 전체에 알린다. 경고 메시지를 받은 식물은 즉시 손상된 위치를 파악하여 그 부분에 흉터를 형성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식물의 세 가지 신호전달시스템은 상호보완하며 다양한 정보를 전달하여 식물의 생명과 평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식물은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식물의 내부 의사소통 경로는 동물과 완전히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동물은 중앙집권화된 뇌를 보유하고 있어서 모든 신호들이 그곳으로 집중되지만 식물은 특유의 모듈성과 반복성 덕분에 여러 개의 데이터처리센터를 이용하여 매우 다른 종류의 신호들을 처리할 수 있다. 인간은 다리에서 손이나 입으로 직접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으나 식물은 하나의 뿌리나 잎에서 다른 뿌리나 잎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분산지능을 보유하고 있다. 


식물의 언어는 수천 가지의 화학분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분자들은 다양한 종류의 정보를 담은 채 공기나 물을 통해 퍼져나간다. 이러한 분자들의 방출은 마치 인간이 분절화된 소리를 내는 것처럼 식물이 선호하는 의사소통방법이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언어 이외에 제스처, 얼굴표정, 태도, 몸짓 등으로도 의사소통을 한다. 이 같은 의사소통 체계는 종마다 다르지만, 많은 동물들, 특히 고등동물들 사이에 존재한다. 


식물들도 신체언어, 즉 신체접촉, 위치선정, 제스처 등을 통해 이웃들과 의사소통을 한다. 신체접촉은 뿌리를 통해 이루어지지만, 때로는 지상부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위치선정은 ‘그늘탈출’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인데, 식물들은 햇빛을 받기 위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다양한 자세를 취한다. 제스처를 이용한 의사소통의 예는 ‘수관기피’다. 수관기피란 나무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더라도 서로의 수관(樹冠, 나무의 가지와 잎이 달려 있는 부분으로 원 몸통에서 나온 줄기)을 건드리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그러나 수관 기피는 모든 식물에서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수관이 서로 뒤엉켜도 개의치 않지만 참나무과, 소나무과, 도금양과 식물 등은 매우 내성적이어서 서로 몸이 닿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웃의 잎들과는 물론 자기 자신의 잎끼리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불필요한 접촉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결벽증이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이유와 과정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모종의 신호를 전달하여 자신의 위치를 상대방에게 알리고, 일종의 영토분점을 통해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 초식동물과 식물 간의 생존을 건 전쟁은 무려 4억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왔다. 초식동물 중에서 식물에게 가장 중요한 그룹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곤충이다. 곤충들에게 식물은 지상낙원이다. 그들은 식물에서 다양한 서식지와 생태적 틈새를 발견하며, 풍부한 식량도 얻는다. 식물과 곤충 간의 끊임없는 갈등은 양쪽 모두에게 엄청난 선택압으로 작용하여, 그들의 형질을 결정함과 동시에 시간적  공간적 분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곤충의 공격과 그로 인한 손상에 대처하기 위해, 식물은 일련의 방어전략을 개발해 왔다. 식물은 그저 멍하니 당하고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새롭고 효과적인 공격방법을 고안해 온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무한 군비경쟁으로, 식물과 초식동물의 공진화를 초래했다. 식물과 초식동물은 영원한 맞수로, 오랜 세월 동안 맞닥뜨려지는 과정에서 서로를 잘 알고 있다. 


혹시 샐러드의 포장에서 ‘병충해종합관리(Integrated Pest Management; IPM)’라는 문구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IPM이란 채소를 재배할 때 살충제 대신 해충의 천적을 이용하여 살충제 사용을 줄이는 방법을 말한다. 채소밭에 살충제를 뿌리는 대신 초식곤충의 천적을 살포하면, 초식곤충이 천적에게 잡아먹히거나 최소한 채소 곁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된다. 비록 천적의 개체수를 적정수준으로 조절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IPM은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원리를 이용한 매우 영리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방법은 다른 말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많은 식물들은 인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스스로 이이제이의 원리를 깨쳐 널리 사용하고 있다. 그들은 초식곤충의 천적을 휘발성 화학물질로 꾀어 보디가드로 이용하는데, 이런 수법은 에너지를 별로 소비하지 않고도 탁월한 효과를 얻는다. 이이제이 전략을 구사하는 대표적인 식물은 리마콩이다. 리마콩은 점박이응애의 공격을 받으면, 휘발성 화학물질의 혼합물을 분비하여 칠레이리응애를 불러들인다. 칠레이리응애는 육식성 진드기로, 점박이응애와 같은 초식성 진드기를 잡아먹어 이내 씨를 말려 버린다. 적의 공격을 인식하고, 그 천적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리마콩의 행동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옥수수, 토마토, 담배 등도 이러한 방법으로 해충을 퇴치한다. 


동물과 인간의 경우 뇌는 지능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식물은 뇌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식물은 뇌가 없으니 지능이 없다고 해야 할까? 식물의 지능을 논하기 전에 분명히 해둘 것이 하나 있다. 동물의 뇌는 스스로 지능을 발휘할까? 즉, 동물의 뇌는 신체에서 분리되어도 여전히 기능을 유지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의 뇌는 그 자체로서는 위장보다 결코 더 똑똑하지 않다. 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우리의 인지기능과 신체기능은 분리되어 있어서 뇌가 지능적으로 반응하려면 다른 부분에서 입력된 정보가 꼭 필요하다. 이에 반해 식물의 경우에는 인지기능과 신체기능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세포 안에 존재한다. 식물은 모듈 구조를 진화시켜 모든 기능을 개별 장기에 집중시키지 않고 전신에 분산시켰다. 이것이 식물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기본전략이다. 왜냐하면 식물은 고착생활을 하기 때문에 초식동물 포식자의 공격에 취약하므로 신체의 상당 부분을 잃더라도 목숨을 유지할 방법은 모듈화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뇌가 없는 식물이 어떻게 지능적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식물의 뿌리를 자세히 살펴보자. 다윈은 일찍이 식물의 뿌리가 의사결정과 통제능력을 보유했음을 간파했다. 뿌리의 말단, 즉 근단은 뿌리의 성장을 지휘하며, 수분∙산소∙영양소의 탐색 임무를 수행한다. 근단은 토양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복잡한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물을 흡수하려면 아래로 내려가야 하지만 신선한 공기를 흡입하려면 위로 올라가야 한다. 따라서 뿌리는 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며 때로는 상반된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표적을 향해 뻗어나가는 동안 장애물을 만나거나 기생충과 같은 적을 만나면 우회하거나 돌파하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또한 뿌리의 국지적인 요구사항과 식물 전체의 요구사항이 다른 경우에는 타협과 조정도 필요하다. 이처럼 식물의 삶은 복잡하고 어려운 의사결정의 연속이며 잘못된 결정을 내릴 경우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 근단은 뿌리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생장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감각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동물의 뇌신경과 유사한 전기신호를 발생시킨다. 



매우 작은 식물조차 무려 1,500만 개 이상의 근단을 갖고 있으며 나무의 경우에는 아마도 수억 개의 근단을 보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근단들은 각각이 하나의 데이터처리센터이고 이 데이터처리센터들이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따라서 한 식물의 근단들을 다룰 때는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로 간주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근단들이 도대체 어떻게 단체행동을 하는 것일까? 근단의 단체행동을 이해하려면 인터넷을 생각하면 된다. 인터넷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네트워크다. 


매우 복잡한 계산을 수행하기 위해 컴퓨터는 수십 년간 두 가지 방향으로 진보해왔다. 한편에서는 짧은 시간에 엄청난 양의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강력한 메가컴퓨터가 개발되었다. 2012년 이후 가동되고 있는 IBM의 세쿼이아 컴퓨터는 67억 명의 사람들이 하루 24시간씩 320년간 수행할 수 있는 계산을 단 한 시간 만에 뚝딱 해치운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터넷 같은 컴퓨터 네트워크가 보유한 무한한 계산능력을 활용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이처럼 상반되는 두 가지 전략은 생물의 진화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생물은 계산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한편에서는 세쿼이아를 방불케 하는 커다란 고성능 뇌를 진화시키고, 다른 한편에서는 분산지능을 진화시켰다. 인간을 비롯한 척추동물은 전자에 해당되고, 식물과 곤충은 후자에 해당된다. 


계산속도 면에서는 슈퍼컴퓨터가 컴퓨터 네트워크를 능가하지만, 네트워크의 안정성이라는 장점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인터넷의 효시로 알려진 아르파넷(ARPANET)은 미 국방부 고등연구계획국에 의해 최초로 개발되었는데, 대규모 핵공격을 견뎌내기 위해 모듈식으로 설계되었다. 즉,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컴퓨터들이 대부분 파괴되더라도, 네트워크가 궤멸되지 않고 데이터를 계속 전송할 수 있다는 것이 아르파넷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식물 역시 마찬가지로 수백만 개의 근단이 네트워크를 형성하므로 주요부분이 파괴되거나 포식자에게 먹히더라도 네트워크는 와해되지 않는다. 개별 근단의 계산능력은 미약하지만, 다른 근단들과 합세하여 비범한 능력을 발휘한다. 마치 미천한 개미들이 다른 개미들과 힘을 합쳐, 자연계에서 가장 복잡하고 구조화된 사회를 형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식물의 근단을 개미와 같은 곤충의 군집이라고 상상해보자. 개미들은 서로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화학신호를 통해 일사불란하게 행동한다. 혹시 식물의 뿌리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을까? 식물은 화학분자를 만들어내고 이용하는 데 일가견이 있어서, 다양한 화학분자를 생성하여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한다. 따라서 식물의 지하부가 지상부와 마찬가지로 화학신호를 방출하여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또 다른 가설로, 몇 가지 가능성들을 살펴보면 근단은 전자기장에 매우 민감하므로, 이웃의 근단들이 만들어내는 전자기장을 감지하여 단체행동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또는 모든 뿌리들이 성장할 때는 세포벽이 파열되면서 ‘찰칵’ 비슷한 소리가 나는데, 다른 뿌리의 근단들이 이 소리를 감지하여 단체행동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생물학자들은 이 소리를 소위 ‘짠돌이 신호’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에너지를 전혀 소비하지 않으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전통과 선입관에 사로잡힌 나머지 식물의 지능을 도외시해 왔다. 그러나 식물의 지능을 연구하면 생각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 즉, 우리 자신의 가치관과 외계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낯선 생명체를 전혀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탐구해 왔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언젠가 우리가 외계 생명체와 맞닥뜨리는 날이 온다고 생각해보자. 의사소통은 고사하고 그들을 알아볼 수나 있을까?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와 다른 지능을 상상하지 못하고 ‘외계의 지적 생명’보다는 ‘인간과 비슷한 지능을 가진 생명체’들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만약 외계에 지적 생명체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들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부터 진화했을 것이다. 그들의 화학은 우리와 완전히 다를 것이고, 우리가 아는 환경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조건을 가진 행성에서 진화한 지적 생명체가 우리와 똑같은 의사소통 수단을 사용할 리 만무하다. 

식물은 우리와 다른 시스템을 이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 그들의 의사소통 방법은 매우 효과적이고 정보 전달에 최적화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식물들이 그 방법을 사용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와 진화사의 상당부분을 공유하고, 똑같은 세포구조를 보유하며, 똑같은 환경 속에서 살고 있는 식물과 생물들의 지능도 알아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수로 외계인의 지능을 알아본단 말인가? 우리가 식물의 지능을 낯설어하는 것은, 식물의 행동이 우리보다 느리고, 폐, 신장, 위장 등의 개별 장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식물은 우리와 신체적∙유전적으로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우리와 매우 가까우므로, 지능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나아가 수억 광년 떨어진 별에서 태어나 진화했을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연구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가 얼마나 식물에 알지 못하는지...

그리고 식물을 등한시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우주를 탐험하고 민간 우주선을 띄우면서도

그 수많은 세월동안 지구의 육상환경을 지배했던 식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지구의 바이오매스에서 99%가 식물이지만

인간의 오만함으로 식물의 뛰어난 지능을 무시하고 있다고 저자는 열변을 토한다.

식물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보다 훨씬 더 천천히 흐르는 것도 인간의 인식을 가로막는데 한몫을 했다

책 <코끼리의 시간, 쥐의 시간>을 읽으며 그래도 조금은 폭이 넓게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이 얼만나 심장이 현혹되어 식물을 외면했는지 알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다

또한 같은 과학자라 하더라도

동물학자와 식물학자의 차별이 극심하다는 것과

우리의 연구가 바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크기의 생물학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큰것은 아름답다고

발 밑에 수놓아진 별처럼 빛나는 식물들을 외면한채...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