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그외

<책그림> 데이비드 브룩스 - 두 번째 산

삼생지연 2020. 11. 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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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두 번째 산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두번째 산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첫 번째 산만 오르면서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 생각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고개를 들어 묻습니다.

'이게 내가 바라던 전부인가?'

그리곤 두 번째 산이 저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기적인 충동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보다 뛰어나고 싶은 욕구,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구,

재산, 권력, 지위를 갖고자 하는 욕구가

넘쳐 흐르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자유는

최고의 가치로 자리 잡았습니다.

남에게 방해를 주지 않는다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자유다'라는 문화는 개인주의로 이어졌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죠.

초개인주의 사회 속에서 개인들은 외로워졌습니다.

서로에게서 느끼는 애착은 느슨해졌교,

결속은 끊어졌습니다.

초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인간은 자유로워졌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회적인 고립, 불신, 양극화,

치솟는 자살률, 정신 건강 문제, 연대감의 상실, 대의의 소멸,

세상은 성인이 된 학생에게

자유라는 빈 상자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

"인생의 목적은 자유로워지는 거야.

우리는 너에게 어떤 짐도 지우지 않을 거야

또 무엇을 하라는 말도 하지 않을 거야.

너의 자유를 마음껏 즐겨봐."


듣고 있던 학생은 빈 상자를 내려놓습니다.

학생은 이미 자유 속에서 익사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가 찾고자 한 것은 방향이었습니다.

'무엇을 위한 자유이죠?

어떤 길로 가야 할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죠?'


이번에 세상은 학생에게

가능성이라는 또 하나의 빈 상자를 건네주며 말합니다.


"너의 미래는 무한해!

너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위험을 감수해봐.

큰 꿈을 꾸어 봐!"


학생은 이 상자 역시 내려놓습니다.

자기 인생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미래가 무한하다는 말이 무슨 도움이 될까요.


학생은 묻습니다.


'무엇에다 나 자신을 온전하게 던질 수 있을까요?

어떤 대의가 나를 움직이게 하고

인생의 의미와 방향성을 제시할까요?'


이에 세상은 자율성이라는 가장 속이 빈 상자를 건넵니다.


"너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해.

가치관을 설정하는 것도 너의 몫이야,"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느 누구도

너에게 말해줄 수 없어."

"네가 사랑하는 것을 해"


언제부턴가 학생은 깨닫습니다.

세상이 주는 대답이 자신을 더 힘겹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학생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오면서

자신이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산을 찾아냅니다.


그 첫 번째 산에서 학생은 특정한 인생 과업을 수행합니다.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재능을 연마하고,

확고한 자아를 세우며,

자신의 족적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렇게 첫 번째 산을 오르다가

문득 공허함, 외로움, 무기력이 찾아옵니다.

오직 나를 위해 사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자유가 아니라

헌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됩니다.

자아를 초월하고자 하는 열망이

내 속 어딘가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아'하고 알게 됩니다.

첫 번째 산이 알고 보니 내 산이 아니었구나.

이 산다 더 큰 또 다른 산이 저기 있구나.

저 산이 바로 내산이다!

두 번째 산에서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다음 네 가지에 헌신합니다.

- 소명으로서의 직업

- 배우자와 가족

- 철학이나 신앙

- 공동체

이 네 가지에 헌신하면서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고, 진정한 기쁨을 얻습니다.

결혼은 다른 사람과 만날 자유를 내려놓고,

단 한 사람에게 헌신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위해 선택의 자유를 기꺼이 포기하면서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일입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이 이 관계에서 나옵니다.

배우자는 앞으로의 삶의 방향이 되어주고 의미가 되어주죠.

직업도 마찾가지입니다.

돈벌이로서의 일이 아니라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찾을 때

우리는 헌신하게 됩니다.

남은 인생을 이 일을 위해,

이 일이 가져다 주는 가치를 위해,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이 얻는 기쁨을 위해

살겠다고 맹세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신앙에서 인생의 의미를 구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공동체의 발견에 자신의 인생을 겁니다.

이런한 헌신은 더 높은 차원의 자유로 나아가게 해줍니다.

낮은 차원의 자유는 어떤 것에서 벗어나는 자유입니다.

반면 높은 차원의 자유는 어떤 것으로 향하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구속과 제한을 포함하죠.

만일 당신이 진정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피아노 위의 자유를 얻고 싶다면

몇 해간 피아노 앞에 자신을 묶어 두고

연습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루 종일 빈둥거리거나

파괴적인 여러 욕구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묶어둬야 할 것입니다.

자유를 포기하면서, 우리는 더 큰 자유를 얻게 됩니다.

두 번째 산에 있는 당신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당신이 스스로를 묶는 사슬, 헌신에 있습니다.

데이비드 브룩스는 책<두 번째 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헌신은 당신에게 정체성을 가져다준다.

헌신은 우리의 눈을 반짝이게 해주는 대화 주제이다.

헌신은 인생에 불변성과 일관성을 가져다준다.

"잘 살아가는 인생은

자유로운 선택에서 달콤한 강제로 

넘어가는 여정이다."

두 번째 산은 첫 번째 산의 반대가 아닙니다.

이 산에 오른다고 해서

첫 번째 산을 내팽개친다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산에 오르는 것은 첫 번째 산에 오르는 것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여정입니다.

첫 번째 산을 오르다가 벽에 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 두 번째 산에 오르는 것이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입니다.

헌신하는 사람은 단지 일자리가 아니라 천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에게 어떤 사람이 유리할까?'라는 계약 같은 결혼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 살고 죽겠다는 서약 결혼을 합니다.

그저 이런저런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조를 위해 살아갑니다.

그저 어떤 마을에 사는 게 아니라

공동체 건설에 이바지합니다.

텅 빈 자유에 취해

그저 손 쉬운 흥분 거리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은

언젠가 인생의 공허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초개인주의 문화에 취해

경제적 이득과 사회적 지위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만났을 때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내 자유를 기꺼이 내줄 무언가를 찾아야 합니다.

내가 헌신할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찾아야 합니다.

평생을 헌신할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철학이나 신앙, 공동체도 좋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요?

그대에게 두 번째 산은 어디에 있나요?



책그림 동영사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eJInbnDMt0w&t=304s


구독을 하고 있다가

영상이 오르지 않아 근황이 궁금했다가

<책그림>이 올린 영상을 보며


꽃들에게 희망을...

과 같은 결을 품고 있는 내용에 한달전에 구매했었다.


물론 소명이 작을 수도 있다

단지 아이들의 편의나 희망을 위해 직업을 가져 돈을 벌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믿고 행하는 바가 같지 않다면

우리는 나이와 상관없이 산을 오를 이유를 모른채

애벌레처럼 기둥에 붙어있거나

떨어질 것이고

오른다 하더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기둥을 만날 것이다.

돈을 버는 이유가

단지 돈을 버는 것에 의미를 둔다면

직장을 구하는 이유가

단지 먹고 살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언젠가는 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그 덧없는 이유나 의미로 인해 눈감았던

신념이 ....불끈 튀어나오게 된다.

이럴려고 산것인가?

제발 나 자신을 세상의 소모품으로 취급하지 말자

내 산을 오르자


고치를 만들고 실을 토해내며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감당하며

묵묵히 그 속에서 날개를 만들자

평범한 날개라도

펴고 두번째 산을 오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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