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중책을 맡아 나라를 일으킨 여걸들
대의를 세우고 그 이름을 남기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쥐게 되었으면서도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은 후궁은 사실 그리 많지 않다.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유장(劉莊)의 황후 마(馬)씨가 그 대표적인 사람이다. 후세들이 그녀에게 찬사를 보내는 것은 마씨가 황후로서 공정한 일처리는 물론 태후의 자리에 있을 때 그녀의 세 오빠에게 후작의 작위를 부여하는 것에 강력히 반발하며 유장의 장제(章帝) 유달(劉炟)과 벌인 유명한 작위 파동 때문이다.
황후 마씨는 부풍무릉 사람으로 아버지는 흉노족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운 복파장군 마원(馬援)이다. 그녀가 10살 때 아버지 마원이 남쪽 지방을 정벌하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오빠 마객경과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마씨는 계속되는 집안의 불행으로 어린 나이에 집안일을 짊어지게 되었다.『후한서(後漢書), 10권』마씨는 사촌 오빠였던 마엄의 추천으로 태자 유장의 후궁으로 입궁하게 되었다. 총명한 마씨는 위로는 황후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을 항상 예로써 대하여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서기 57년 유수가 병으로 죽자 유장이 보위를 이었고 마씨도 귀인으로 책봉된다. 당시 마씨는 아이가 없었고, 함께 궁에 들어온 고(賈)씨가 장제가 되는 유달을 낳는다. 유장은 마씨에게 유달의 양육을 맡겨 마씨는 고씨가 낳은 황자를 자신이 낳은 아이보다 더 정성스럽게 양육했다. 서기 60년 마씨는 황태후의 추천으로 황후가 된다. 유장은 비교적 덕망 있는 황제로 평가되며 특히 법제를 강화해 엄격하게 법을 집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엄격한 법 집행으로 감옥이 넘쳐나자 마황후는 여러 차례 유장에게 시정을 요구했다. 그 후 유장은 중요한 정책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마황후와 상의했고 때로는 그녀에게 직접 처리하게 했다. 일을 위임받은 마황후는 매우 공정하게 처리해 명성이 점점 더 높아졌다.
서기 75년 유장이 병으로 죽자 유달이 제위에 오른다. 유장이 법으로 외척의 정치참여를 제한한 것과 달리 유장은 외척이나 환관을 마음대로 중용했다. 76년 유달은 마태후의 오빠 셋을 후작에 봉하고자 했으나 마태후는 강력히 반대했다. 유달은 마태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듭 마료 삼형제의 후작 책봉을 강행했다. 그러나 마태후는 황제에게 “후대에 겸손하다는 명성을 떨치기 위함이 아니라 황제에 의해 외척들이 특혜를 입었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후작책봉에 반대하며 오히려 가뭄으로 치솟는 곡식가격을 먼저 해결하라고 권했다.
4년 후 태평성대가 되자 유달은 외숙부들을 먼저 후작으로 봉하고 마태후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마태후는 유달을 찾아가 크게 화를 내었고 마료 형제들은 작위를 다시 반환했다. 이것이 마태후와 유달 간에 벌어진 유명한 작위 파동이다. 마태후가 친인척을 위해 작은 욕심도 채우지 않은 것과, 특히 형제들에 대한 유달과의 작위 반대일화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여자요순(女中堯舜)으로 불린 송나라 영종의 고(高)황후
‘여자요순(女中堯舜)’으로 불린 송나라 영종(英宗) 조서(趙曙)의 고(高)황후도 외척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그녀는 황후로 있으면서 일절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았다. 그녀의 동생 고사림(高士林)이 내전숭반(內殿崇班)을 오랫동안 역임해 황제가 그의 거처를 궁으로 옮겨주려고 하자 고황후가 “고사림은 조정에 적을 두고 있으며 이미 과분한 은혜를 입었다”며 단호히 반대했다. 고사림 또한 황제인 매형과 누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대의를 중시하며 사욕을 채우지 않는 관리가 되었다.
조서가 즉위 4년째인 서기 1067년 사망하자 장자인 조욱이 보위에 오르고 고씨는 황태후에 봉해졌다. 고태후는 지나치게 관직을 차지한다는 이유를 들어 외척들의 정치참여를 허락하지 않았다. 『송사(宋史), 464권』 또한 친인척들이 자신과의 관계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취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사가들은 그녀가 정치에 참여한 9년 동안을 ‘나라가 청명하고 평안하여 안정적이었다. 참으로 여자요순(女中堯舜)이라 할 만하다’고 찬양하였다.
현명하게 군주를 보좌한 당태종 이세민의 장손(長孫)황후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자신의 통치기간 동안 당나라를 중국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강성한 왕조로 만들었다. 여기엔 이세민 본인의 뛰어난 통치능력 이외에도 황후 장손씨의 내조를 빼놓을 수 없다. 서기 613년 당나라가 아직 세워지기 전, 독서를 좋아하고 예절바르던 13살의 장손씨는 15살의 이세민과 결혼한다. 5년 후, 이연(李淵)이 당나라를 건국하여 이세민이 태왕으로 봉해지자 장손씨도 태왕비에 책봉된다. 이후 장손씨는 이연을 극진하게 모시고 비빈들에게 공손했으며 힘을 다해 내조했다. 『구당서舊唐書, 51권』
이세민은 그의 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제거하는 ‘현무문(玄武門)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데, 장손씨도 직접 그 현장에 나가 남편을 도왔다. 형제들을 축출한 이세민이 아버지 이연을 압박하여 황위를 양위받자 장손씨도 황후에 책봉된다. 장손씨는 이후 10년간 황후의 자리에 있으면서 겉치레를 하지 않고 전권을 휘두르지 않아 이세민의 신뢰를 얻는다. 그녀는 친정식구는 물론 자식들에 대해서도 매우 엄격했다.
장손황후의 오빠 장손무기(長孫無忌)는 이세민과 ‘포의지교(布衣之交)’이자 현무문의 정변 때에는 이세민의 용장이었다. 이세민은 제위에 오르자 장손무기를 요직에 등용하려 했다. 그러나 장손황후는 이를 단호하게 반대했다. 이세민은 장손황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손무기를 좌무후대장군, 사부상서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황후는 오빠를 불러 스스로 사직하도록 했다. 또한 장손황후는 이세민이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쳐 나라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바로 직언을 하여 그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서기 636년, 36세의 장손황후는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세민은 장손황후를 양좌(良佐)로 부르며 슬퍼하였고, 다시는 황후를 책봉하지 않음으로써 그녀에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나타냈다.
섭정을 잘해 ‘여정치가’로 칭송받은 동진의 저태후
동진(東晋)의 강제(康帝) 사마악(司馬岳)의 황후 저산자는 61세까지 6명의 황제를 돌보며 거의 40년을 섭정하였다. 저태후는 중국 역사상 섭정 후비 중 사리판단이 가장 정확했던 여인으로 꼽힌다. 어린 황제가 즉위하거나 왕조에 위기가 닥쳐오면 그녀는 위엄과 명망으로 그 어려움들을 헤쳐 나갔다. 서기 342년, 사마악이 황제에 즉위하자 그녀는 황후로 책봉된다. 사마악이 즉위 2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당시 두 살에 불과했던 큰아들 사마담(司馬聃)이 목제(穆帝)로 즉위한다. 그녀는 섭정을 원치 않았으나 대신들이 저태후에게 섭정을 상주하고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그들의 뜻을 따르게 된다. 저태후는 태극전에 특별히 마련한 흰 비단 휘장 뒤에서 두 살 난 사마담을 가슴에 안고 정사를 돌보았다. 사마담이 15세의 성인이 되자 저태후는 그에게 전권을 돌려주었다. 『진서晋書, 32권』
서기 361년, 19세의 사마담이 병으로 죽자 당시 21세이던 사마비(성제 사마연의 아들)에게 황위를 계승시킨다. 그러나 사마비는 도가사상에 빠져 식사도 거른 채 늘 불로장생 선약(仙藥)만을 복용했고, 결국 재위 4년 만에 약물중독으로 사망한다. 사마비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저태후는 그의 동생 사마혁에게 황위를 계승하게 한다. 그러나 당시 전진(前秦)과 전연(前燕)을 정벌하고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온이 사마혁을 폐위하고 자신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황제를 세우려했다. 아무 준비 없이 무조건 환온을 저지하는 것이 혼란을 초래할 것을 염려한 저태후는 뒤로 한 발 물러나 때를 기다린다. 환온은 사마욱을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했지만 그는 채 2년도 안돼 죽고 사마욱의 13살 난 아들 사마창명이 효무제로 즉위한다. 다행히 환온도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그래서 저태후는 그녀의 마지막 섭정을 하게 된다. 저태후는 2년 후 황제가 다 자랐다는 이유로 사마창명에게 대권을 돌려준다.
저태후의 마지막 섭정 중에 동진은 큰 위기에 봉착한다. 북방의 전진(前秦)왕조가 부견(符堅)의 통치하에 강성해져 줄곧 동진을 노렸던 것이다. 서기 384년, 부견은 보병 60만, 기병 27만을 이끌고 동진을 쳐들어왔다. 이에 저태후는 사안(謝安)을 중용하여 겨우 8만의 병력으로 전진의 군대를 전멸시켰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최대로 일컬어지는 그 유명한 ‘비수(淝水)전투’이다. 비수전투를 승리로 이끈 저태후는 현양전(顯陽殿)에서 숨을 거두었다. 40여 년간을 섭정했던 저태후는 강함과 유연함을 겸비하여 변화에 잘 대처하였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하여 동진의 난관들을 극복했다. 수많은 섭정후비들 중에 저태후의 수완은 남달랐고, 정사를 처리함에 있어 과감하고 생활이 검소하여 후대에 ‘여정치가’로 칭송되었다.
섭정으로 역사의 죄인이 된 자희태후
섭정을 잘해 후대의 칭송을 받는 동진의 저태후와 달리 섭정 후비 중 중국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되는 여인이 있다. 무려 반세기 동안 세 차례의 섭정을 한 청나라 함풍제(咸豊帝) 혁저(奕詝)의 황귀비 예허나라씨는 권력을 독점하다 국권을 상실해 역사의 죄인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자희태후(慈禧太后)라 불리며 흔히 서태후로 알려져 있다.
자희는 보통의 궁녀에 불과했으나 출중한 미모에 노래와 춤에 능해 함풍제 혁저의 총애를 받았고 후에 동치제(同治帝), 광서제(光緖帝) 시절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서기 1851, 혁저가 황제로 즉위해 새 궁녀를 선발할 때 16세의 자희는 원명원을 담당하는 시녀로 뽑힌다. 『청조야사대관(淸朝野史大觀), 1권』 1856년, 자희는 후에 목종(穆宗이 되는 재순(載淳)을 낳아 의귀비(懿貴妃)에 봉해진다. 혁저는 즉위하여 뉴호록(흔히 동태후로 불림)씨를 황후로 책봉했다. 자희는 비록 일생동안 황후는 못되었지만 계략이 출중하고 담력이 높고 권력욕이 강해서 결국 청나라를 50년간이나 통치하는 역사적 인물이 된다.
자희의 정치생활은 혁저가 죽은 후 시작되었다. 서기 1861년, 31세의 혁저는 죽기 전에 5살의 재순을 후계자로 지목하며 재원(載垣) 등 어전대신 8명에게 국정을 도우라고 유언한다. 동치제 재순은 즉위하여 뉴호록씨와 자희를 태후로 존(尊)한다. 그러나 8명의 대신들은 황제의 유언을 받든 고명대신이라는 미명아래 국정을 제멋대로 농단했다. 27세의 자희태후는 혁저의 이복동생인 혁흔에게 비밀서찰을 보내 북경으로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기상(祺祥)정변’을 일으켜 8명의 고명대신 중 3명을 죽이고 나머지 5명은 파면시켜 노역장으로 보냈다. 자희태후는 그해 말 정식으로 뉴호록씨와 함께 섭정을 선포한다. 이것이 그녀의 첫 번째 섭정이다.
6살에 즉위하여 13년째를 맞은 1875년, 재순은 문란한 성생활로 인해 매독에 걸리고 천연두 합병증까지 더해 죽는다. 재순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황위 계승을 놓고 자희태후는 화려한 권모술수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권력을 움켜쥔다. 자희태후는 혁저의 동생 혁현의 4살짜리 아들 재첨을 안고 황제 즉위를 선포하며 두 번째 섭정을 시작한다.
1886년 재첨이 16세의 성인이 되자 스승 옹동화 등은 황제가 친정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재첨은 스승 옹동화의 지지 하에 혁명파인 강유위를 등용하여 정치, 문화, 교육, 재정, 경제, 군사 등 다방면에서 철저한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1898년 자희태후는 개혁세력의 주요 인물을 모두 제거하고, 재첨에게 병에 걸렸다는 조서를 강제로 쓰게 해 그를 유폐시키고 다시는 조정 대사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그녀의 세 번째 섭정이다.
자희태후의 섭정기간 동안 대내적으로는 그녀의 통치에 불만을 느낀 농민들의 봉기가 계속 되었다. 그녀는 태평천국의 난, 염군의 난, 의화단운동 등을 잔인하게 진압한다. 대외적으로는 열강들과 전쟁에 잇따라 패하여 끊임없이 화의를 청한다. <시모노세키조약>, <중러밀약>, <신축(辛丑)조약> 등의 불평등 조약을 맺어 국권을 많이 상실하였다. 이 조약들은 모두 자희태후가 의견을 내고 체결한 것이며, 이로 인해 제국 열강들은 청나라에서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중국 역사상 섭정기간이 가장 길고 권모술수가 능하고 악랄했던 자희태후는 봉건시대가 끝나가는 시기에 등장하여 수많은 백성들에게 고통과 재난을 안겨주었다.
제2장 절세미인이 한순간에 신분이 바뀌어 야심을 품다
비천한 집안 태생의 후비
후궁에서는 궁녀의 지위가 가장 낮다. 신분이 낮고 잡일이나 하는 궁녀들이 후비가 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소, 돼지를 도살하던 백정은 가장 비천한 직업 중 하나였지만 역사상 세 명의 후비가 백정의 딸이었다. 후한(後漢) 영제(靈帝) 유굉(劉宏)의 황후 하(何)씨, 진(晋)나라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의 부인 사구(謝玖), 그리고 유송(劉宋) 명제(明帝) 유욱(劉彧)의 귀비 진묘등(陣妙登)이다.
‘백치황제’로 불린 진나라 사마충의 숙원 사구는 비록 출신이 천하였지만 세상 물정에 밝고 성격이 조용하고 우아한 여자였다. 사구가 입궁할 때 사마충은 아직 황태자였다. 당시 그의 부친인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은 사마충의 지능이 낮아 남녀간의 일을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사구에게 동궁에서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 서기 276년, 사구는 후에 태자가 되는 사마휼(司馬遹)을 낳는다. 서기 290년, 사마염이 병사하자 사마충이 혜제로 즉위한다. 14살의 사마휼은 태자로 책립되었고 사구는 숙원으로 봉해진다. 그리고 왕비 가남풍(賈南風)은 든든한 집안을 배경삼아 황후가 된다.
가남풍은 키도 작고 얼굴도 못생겼을 뿐 아니라 그 마음씨도 음험하고 악랄했다. 가남풍은 딸만 얻고 아들을 낳지는 못했는데 이 때문에 사구를 질투하고 미워했다. 사마휼이 후에 황제에 오를 것이 걱정되어 갖은 방법을 동원해 태자에서 폐위시키려고 했다. 서기 299년 가남풍은 사마휼을 속여 후궁으로 불러들인 뒤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사마충아! 사마충아! 너는 일찍 죽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와 후궁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란 글을 베껴 쓰게 한 뒤 바로 황제인 사마충에게 보냈다. 이에 사마충은 사마휼을 태자에서 폐위시킨다.
권력에 눈이 먼 가남풍은 허창에 감금돼 있던 사마휼을 심복 손려를 이용해 살해하고 만다. 사마휼이 23세에 살해당한 지 얼마 후, 그의 모친 사구 역시 가남풍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리고 1년 후, 이 모든 것이 뒤집힌다. 사마륜(司馬倫: 사마휼의 당할아버지)이 군사를 이끌고 궁에 들어가 가남풍 일당을 모두 주살한 것이다. 사구는 천민출신으로 후궁에 들어와 태자까지 낳으며 출세했지만 궁중의 잔혹한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한 제왕을 섬긴 자매들
금나라의 완안량(完顔亮)은 역사상 가장 악랄한 폭군이다. 정변을 통해 제위를 찬탈한 그는 13년의 재임기간동안 수많은 여자를 강점했고, 그중에는 외손녀를 비롯한 친족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금사(金史), 5권』에 따르면 그는 처녀든 유부녀든 가리지 않고 일단 마음에 드는 여인은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차지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부녀자, 고모, 사촌동생 등 수많은 여인들이 후궁으로 입궁하였다.
완안량의 후비 중에는 세 자매가 있었는데, 바로 귀비(貴妃) 정가(定哥), 여비(麗妃) 석가(石哥), 포로호지(蒲魯胡只)이다. 이 자매들은 이미 결혼하여 남편들이 있었으나 완안량은 그 남편들을 죽이고 이들 자매를 강제로 입궁시켰다. 완안량은 이들 세 자매를 강탈한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경악하게 할 천인공노할 짓을 저질렀다. 자신의 친 사촌누이들인 완안사리고진, 완안여도 자매와 완안포랄, 완안습념 자매를 범한 것이다. 이들 자매 역시 결혼하여 가정이 있었다. 다만 사촌을 후비로 들이면서 그 남편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완안량의 이러한 망나니 생활은 황실 구성원들의 커다란 반감을 샀다. 서기 1161년, 이 폭군이 남쪽의 송나라를 침략하여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자 그의 사촌동생 완안옹(完顔雍)이 신하들에 의해 옹립되어 제위에 오른다. 송나라와 전쟁 중이던 완안량은 적군도 아닌 자신의 부장에게 살해되었다. 완안옹은 그를 평민으로 강등시켜 황제의 예에 따라 장례도 치르지 못하게 했다.
제3장 젊음을 희생시켜 저승의 노리개가 되다
순장되는 후비들
죽은 자를 위해 살아있는 사람을 강제로 순장시키는 것은 노예 사회에서부터 출현한 가장 야만적이고 잔인한 장례제도이다. 생전에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 제왕들은 사후에도 인간세상의 쾌락을 누리기 위해 거대한 규모의 지하궁을 세웠고, 대량의 금은보화뿐만 아니라 황후와 비빈들까지 저승의 노리개로 원했다.
명대에 이르러 순장되는 후비들의 수가 더 많아졌다. 명왕조의 개국황제 태조(太祖) 주원장은 임종 전에 장례용품으로 금과 옥을 쓰지 말 것과 백성들을 어지럽게 하지 말 것을 유언했으나, 그가 죽은 후에 살해되어 순장된 비빈이 46명이 넘었고 궁녀 또한 12명이나 되었다. 명대에 순장된 많은 후비 중에서 성조(成祖) 주체(朱棣)의 여비(麗妃) 한씨는 가장 참혹하게 죽었다. 서기 1409년, 자태가 곱고 퉁소를 잘 불어 주체가 총애했던 현비 권씨가 병으로 죽는다. 그때 후궁에서는 여씨 성을 가진 후비가 조선에서 온 또 다른 여씨 후비에게 의자매를 맺을 것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중국 여씨는 현비가 조선에서 온 여씨에게 독살당했다고 모함한다. 주체는 분노하여 후궁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다. 당시 여비였던 한씨는 옥에 갇혀 사형당할 준비를 하다가 간수의 부주의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지만 주체가 죽자 교살되어 주체의 무덤에 순장되고 만다.
후비가 순장되는 일은 인종 주고치와 선종 주첨기 대에 이르러서도 계속 되지만 그 숫자는 주원장이나 주체에 비해 많이 줄어든다. 주고치를 위해 순장된 비빈은 4명이고, 주첨기 때에는 모두 10명이다. 다음 황제인 영종(英宗) 주기진(朱祁鎭)은 이런 잔혹한 악습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주기진은 임종 전에 “비빈들을 순장시키지 마라”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순장의 악습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후에 다시 부활한다.
순장을 위해 너무 일찍 자살한 후비
몇몇 후비들 중에는 황제의 병세가 위급하면 부군과 같이 묻히기 위해 너무 일찍 자결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죽어가던 황제가 병상을 털고 일어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16국의 하나인 전량(前涼)의 마지막 왕이었던 후주(後主) 장천석(張天錫)의 비(妃)였던 염(閻)씨와 설(薛)씨는 이렇게 서두르는 바람에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 했다.
『진서(晋書), 96』에 따르면 장천석의 후비 염씨와 설씨는 모두 그의 총애를 받았다. 장천석은 병세가 악화되자 자신이 죽은 뒤 두 후비가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까 염려하여 순장하기를 넌지시 암시한다. 장천석의 임종이 가까웠다고 생각한 염씨와 설씨는 같이 자결했다. 그런데 이 두 후비가 죽은 후에 장천석의 병세가 호전될 줄이야! 병석에서 일어난 장천석은 그들을 추모하며 부인의 예로서 장례를 지냈다. 이 두 가련한 여인들은 봉건예법의 애꿎은 피해자가 되어 젊은 나이에 삶을 애석하게 끝냈다.
강요에 못 이겨 자살한 후비
북제(北齊)의 후주 고위(高偉)의 숙비(淑妃) 풍소련(馮小憐)은 황제의 과도한 총애를 받다가 나라가 망하여 결국 자살을 택한 여인이다. 서기 576년, 북주(北周)의 대군이 평양(平壤)에 바싹 접근하여 곧 진주(晋州)를 포위할 태세였다. 진주를 수비하는 장군이 하루 동안 세 번이나 사람을 보내 급박함을 보고했지만 허사였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고위는 풍소련을 데리고 유유자적하게 사냥을 하고 있었다. 고위는 급보를 듣고 되돌아가려 했지만 풍소련은 이에 개의치 않고 사냥을 계속하고 싶어 했고, 그는 결국 그녀의 말에 따랐다.
고위가 풍소련을 데리고 진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북주군에 의해 점령당한 뒤였다. 그러나 고위가 공격을 명하자 병사들은 힘을 내 성의 중요한 요충지를 차지한다. 성을 되찾는 데는 10여 발자국이 남았고 사기가 고조된 병사들은 그 기세로 쳐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고위는 이 장면을 풍소련에게 직접 보여주려고 갑자기 공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북사(北史), 14권』 게다가 풍소련은 몸치장을 하느라 한참을 꾸물거렸다. 북제의 병사들이 공격을 멈추자 북주의 군사들은 재빨리 성벽의 갈라진 틈을 막았고 고위는 진주성을 끝내 되찾지 못했다. 고위는 풍소련을 데리고 청주(淸州)까지 도망쳤지만 결국 북주의 근위대장에게 사로잡혀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서기 578년, 북주의 우문옹(宇文邕)은 고위를 죽인 후 풍소련을 대왕(代王) 우문달(宇文達)에게 시집보낸다. 매혹적이던 풍소련은 곧 우문달의 총애를 받았다. 그녀는 우문달의 총애를 믿고 온갖 방법으로 우문달의 본처인 이씨를 괴롭혔다. 우문달이 모략으로 죽은 후에도 풍소련은 살아남는다. 수나라 문제(文帝) 양견(楊堅)은 풍소련을 우문달의 본처 이씨의 오빠 이순(李詢)에게 하사했고, 그는 갖은 모욕을 다 줌으로써 누이의 원수를 갚아주었다. 게다가 이순의 어머니는 풍소련에게 더 큰 반감을 갖고 있었기에 딸에 대한 보복으로 자살을 강요했다. 결국 풍소련은 후비로 살다가 평민으로 돌아가 처참하게 자신의 일생을 마감했다.
잔인했던 후비1 - 당나라 고종 이치(李治)의 황후 무측천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 무측천은 황제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극악무도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목재상인 집에서 태어난 무측천은 14살 때 이세민에 의해 재인(才人)으로 책봉되었다. 이세민이 세상을 떠나자 26살의 무측천은 출가하여 잠시 감업사의 비구니가 되었다. 그러나 이세민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이치는 감업사로 행렬을 갔다가 무측천을 보고 한눈에 반해 부친의 비(妃)였던 4살 많은 무측천을 불러들여 소의(昭儀)에 봉했다.
궁으로 다시 돌아온 무측천은 점점 악독하게 변해갔다. 당시 궁에서는 이치의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가 황제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다투고 있었다. 서기 665년 무측천은 딸을 낳았는데, 딸을 희생해 황후인 왕씨를 제거한다. 왕황후가 아기를 보러 왔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무측천이 이불을 덮어 자기 딸을 죽였다. 때마침 이치가 찾아왔고, 그가 딸을 보자 갓난아기는 이미 죽어 있었다. 불같이 화를 내는 이치에게 궁녀들이 조금 전에 왕황후가 왔었다고 고했다. 이치는 정황을 살피지도 않고 왕황후를 폐하여 옥에 가두고, 왕황후와 소숙비의 친족들을 모두 귀양 보냈다. 무측천은 이치 몰래 왕황후와 소숙비를 잔혹하게 살해한다.
무측천은 자기 아들인 태자 이홍도 독살하고, 이홍의 동생 이단(예종睿宗)으로 제위를 잇게 했다. 서기 690년 무측천은 결국 아들 이단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하고 국호를 주(周)나라로 바꾼다. 무측천은 당나라의 통치권을 찬탈하여 여황제가 되었지만 항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는 잔인한 관리들을 등용하여 죄 없는 사람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등 강압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구당서(舊唐書), 50권』
잔인했던 후비2 - 요나라 태조의 황후 술률평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의 황후 술률평(述律平)도 권력을 탐하면서 잔인하게 변해갔다. 서기 926년, 거란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건국한 야율아보기가 숨을 거둔다. 당시 47세였던 술률평은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군사와 국사를 장악하였다.『요사遼史, 71권』술률평은 자신의 권위와 지위를 지키기 위해 잠재적 위협요소라고 여긴 사람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황태후의 명으로 야율아보기를 따랐던 장군 100여 명과 그 부인들을 불러 들여 장군들을 모조리 죽였다. 장군들이 죽자 그녀는 시체들에 대고 “선제를 따라가라”며 소리쳤다. 『신오대사新五代史, 74권』 거란의 통일을 위해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장군들은 이렇게 맥없이 몰살당했다.
그녀는 섭정을 하면서 더욱 잔혹하게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들을 처단해갔다. 술률평은 그들을 목협산에 있는 야율아보기의 무덤 지하굴속에 묻었는데 “나를 대신해 지하에서 선왕을 뵙거라”고 비꼬았다고 한다. 한족 출신으로 태조의 총애를 받은 대장 조사온도 목협산으로 보내지게 되었는데 이를 거부했다. 술률평이 “그대는 선왕의 충신인데 어찌하여 죽어 선왕을 보필하지 않는가?”라고 묻자 조사온은 “황후 역시 선황의 총애를 받으셨는데 어찌 따르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되물었다. 순간 흠칫한 술률평은 아들이 어리고 나라에 일이 많아 그리 못하였다며 대신 한 쪽 팔을 잘라 선황에 대한 뜻을 나타내겠다며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한쪽 팔을 잘랐다. 『신오대사新五代史, 74권』조사온은 목숨을 부지했고 술률평은 이때부터 ‘단완황후(斷腕皇后: 손목을 자른 황후)’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술률평은 권력을 위해 자신의 손목을 자르지만 살인마로 후세의 비난을 받는 추악한 여인이 되었다.
제4장 총애를 잃어 냉대를 받으니 붓으로 달랠 수밖에 없구나
못생긴 후비
추하고 못생긴 여인들이 빼어난 미인들을 제치고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녀들 개인이 갖고 있는 특별한 매력 때문이 아니라 권세를 쥐고 있던 아버지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진나라 혜제 사마충의 황후 가남풍, 남송(南宋) 이종(理宗) 조윤(趙昀)의 황후 사도청(謝道淸)은 이런 후비의 대표적 여인이다.
사도청은 피부가 검고 한쪽 눈에도 문제가 있었다. 사도청이 외모에 장애가 있었음에도 궁에 들어가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종(寧宗) 조확(趙擴) 재위시 재상을 역임했던 조부 사심보(謝深甫)의 뒷배경 때문이다. 재상이었던 사심보는 조확의 황후 양씨가 황후로 책봉될 때 뒤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까닭으로 조윤이 즉위하여 태후가 된 양씨는 사심보의 옛 은혜를 갚기 위해 사씨 가문에서 황후를 간택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사도청은 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입궁하게 된다.
서기 1264년, 재위 40년 만에 조윤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양자였던 조기(趙祺)가 황위를 계승하여 사도청을 황태후로 존한다. 그러나 조기가 재위 10년 만에 병사하자 4살 된 그의 아들 조현(趙顯)이 즉위하고 사도청은 태황태후가 돼 대신들의 간청에 따라 섭정을 시작한다. 이미 64세였던 사태후는 섭정에 들어가자 간신배로 유명했던 동생 가사도에게 전권을 맡겼다. 서기 1274년, 가사도가 이끄는 남송군이 원나라에 대패하자 재상들이 그를 엄벌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사태후는 동생을 비호했으나 백성들의 분노가 너무 커 가사도는 장주로 가는 도중 호송을 맡은 군인의 칼에 죽음을 당하였다. 서기 1276년, 원나라 승상 백안(伯顔)에 의해 150여 년을 이어온 남송은 멸망하고 원나라로 교체되었다. 사도청은 원의 수도로 압송돼 수춘군(壽春郡)부인으로 격하되고, 74세의 나이로 객사했다.
음악에 능했던 후비
후비들 중에 어떤 이들은 음악과 기악에 정통했는데, 남당(南唐) 후주(後主) 이욱(李煜)의 황후 주아황(周娥皇)은 음률에 정통한 후비였다. 서기 944년, 서사와 가무 특히 비파에 능했던 19살의 주아황은 황태자 이욱의 눈에 띄어 첩으로 들어간다. 서기 961년, 제위를 계승한 이욱은 주씨를 황후로 세운다. 황제로서의 이욱은 온종일 주색에 빠져 사는 아둔한 군주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서화뿐만 아니라 음악과 시에도 정통했다. 서로 취미가 비슷했던 이욱과 주황은 함께 많은 곡을 창작했다. 『십국춘추(十國春秋), 18권』에 따르면 『요취무파조邀醉舞破調』, 『한내지파조(恨來遲破調)』는 모두 주아황의 작품이라고 한다.
학문과 시에 능했던 반첩여
한나라 성제(成帝) 유오(劉鷔)의 반(班)첩여는 읽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시문을 남겼다. 반첩여의 부친 반황(班况)은 월기교위였고 그의 형제들 또한 학문이 매우 깊었다. 그녀의 외가 증손인 반고(班固)는 바로 『한서(漢書)』를 쓴 역사가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반첩여 또한 그 학문적 수준이 매우 높았다. 기원전 33년, 유오가 제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후궁에 들어간다. 입궁 초 그녀는 후비 중 지위가 낮은 소사(少使)였으나 유오는 책을 많이 읽어 똑똑했던 그녀의 지위를 계속 올려주었다. 『한서漢書, 97권』
세월이 흘러 유오는 아름답고 젊은 조비연(趙飛燕) 자매에 빠져 황후 허씨와 반첩여를 더 이상 거들떠보지 않았다. 기원전 18년, 황제의 총애를 얻은 조비연은 자신의 지위를 더욱 다지기 위해 허황후와 반첩여가 황제를 저주한다고 모함했다. 이 일로 허황후는 폐위되고 반첩여는 모진 추궁을 당한다. 지혜로운 대답으로 가까스로 의심을 벗었으나 언젠가는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한 반첩여는 조비연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태후를 돌보겠다고 청한다. 궁을 떠나며 몸과 마음이 피곤했던 그녀는 <단선가(團扇歌)>를 지었다.
<단선가(團扇歌)>
제나라의 고운 비단을 새롭게 끊어 오니,
곱고 깨끗함이 서리와 눈 같네.
재단하여 부채(홥환선)를 만드니, 둥근 모습 명월과 같네.
님께서 나고 들 때마다 그대를 품었다가
흔들흔들 부치면 시원한 바람이 일어나네.
항상 두려운 건 가을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더위를 쫓으면
대나무 상자 속에 버려져 은정이 끊어지는 것이라네.
후대의 많은 시인들은 이 <단선가>를 차용해 단선을 총애를 잃은 여자로 비유하였다. 기원전 7년, 조비연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유오가 결국 주색에 빠져 인생을 마쳤고, 오랫동안 억압받던 반첩여는 강압으로 유오의 무덤을 지키다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난다. 다만 그녀의 문집 『반첩여집(班婕妤集)』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후비들은 집단 통치의 중요인물이었다.
그녀들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후궁과 왕조,
심지어 한 시대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몇몇 후비는 개인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권력을 총동원했고,
총애를 받으려 서로 질투하고 다투는 문제로
때론 왕조와 그 시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런 현상은 거의 모든 왕조의 후궁에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녀들은 황제를 포함해서
권력의 중심에 서서 권력을
획득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았다.
이는 중국의 봉건제도와 그 시대의 정치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며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봉건시대의 여성의 지위는
남성(남편과 아들)들에 의해 정해졌다.
후비들 또한 마찬가지로 오히려 그녀들은
이 특별한 신분으로 인해 ‘삶’과 ‘죽음’까지도
더욱 남성들과 흥망성쇠의 지배를 받았다.
그 결과 그녀들은 지아비와 자식으로
인해 이름이 빛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지아비로 인해 젊은 나이에
순장되는 등의 고통을 겪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중국 역사의 다양하고
개성 있는 후비들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론 처량하고 슬프고,
때론 강하고 인자하며 뛰어난 품성을 지닌
모습과 때론 악하고 탐욕스럽고 추할만큼
권력을 움켜쥐기 위한 인간들의
적나라한 면들을 보여준다.
봉건사회여성의 다양한 삶을 살펴보면서
21세기 남녀 양성 평등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반추하게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남녀 양성 평등사회라고 여겨지지 않지만 말이다)
'책 > 그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지 上 - 현이섭 지음 (0) | 2021.02.15 |
---|---|
중국사 열전 황제 - 샹관핑 지음 (1) | 2021.02.14 |
김하중의 중국 이야기 1 - 김하중 지음 (1) | 2021.02.12 |
공산당도 팔아먹는 중국재벌 - 미야자키 마사히로 지음 (1) | 2021.02.11 |
중국인, 그들의 마음을 읽다 - 보난자컨설팅· 인이푸 지음 (0) | 2021.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