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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도 팔아먹는 중국재벌 - 미야자키 마사히로 지음

삼생지연 2021. 2. 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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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도 팔아먹는 중국재벌 미야자키 마사히로 지음/김현영 옮김 도서출판 모색/2004년 10월

 

 

 

1. 거대한 중국의 인맥과 돈줄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은 '붉은 자본가'의 효시가 된 룽이런 전 국가부주석의 장남인 룽즈젠 중신타이푸그룹 - 국무원 직영기업인 CITIC(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의 홀딩컴퍼니 - 회장인데, 포브스에 의하면, 그의 자산은 9 3,400만 달러로 밝혀졌다. 중신타이푸그룹은 정부가 재계의 핵심 기업을 직접 경영하고, '태자당(중국 공산당 간부의 자제를 뜻함)'이 경영 요직을 차지한 정경유착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처럼 이권과 직결되어 있는 태자당은 지주회사를 토대로 하여 상업은행, 보험회사, 증권회사, 신탁회사로 분업 경영을 실시하면서 업무 제휴를 꾀하고 있다.

 

, 자본가가 있어서는 안 되는 사회주의 국가에, 자본주의 체제의 '주주'라는 직업이 존재하는 셈이다. 이 구조는 '공산주의적 구조'가 아닌 '공산당주의적 구조'의 성격을 띠며, 권력 자체가 회사를 운영하므로 까다로운 인()가를 받지 않고도, 돈이 되는 분야로 곧바로 진출할 수 있고, 국가의 지원체제와 국유은행의 금융지원이 있기 때문에 도산할 위험도 없다.

 

한편, 중국 당국은 2003, 중국 유명 브랜드 평가를 발표했는데, 이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브랜드는 장루이민이 이끄는 하이얼이다. 2위는 위시홍타담배유한책임회사의 홍타산이고, 3위는 술 제조회사인 우량예그룹의 우량예이며, 4위는 렌샹그룹의 렌샹인데, 해외에서는 '레노보(Lenovo)'로 알려진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한 컴퓨터 제조회사이다. 5위는 디이자동차, 6위는 TCL, 7위는 창훙전자그룹의 메이더이다. 9위는 칭다오맥주, 10위는 베이징의 옌징맥주다. 가전제품의 경우, 중국의 4대 가전 - 하이얼, 하이신, TCL, 거란스 - 외에 홍콩 화교와 연관이 깊은 캉자그룹, 창홍그룹이 있고, 에어콘에 전문화되어 있는 광둥메이더그룹, 춘란 등이 유명한데, 이 기업들의 공통된 특징은 순수한 민간기업이 아니고, '국유기업 개혁 성공형' 혹은 '지방정부 기업의 개량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하이테크산업이라 해도, 중국 사회에서는 '꽌시(인맥)'의 정도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인맥이 없는 외국기업은 중국에서 사업을 할 때 반드시 벽에 부딪혀, 중국 돈을 대부받을 수 없고, 전력이나 수도공급도 원활하지 않다. 따라서 순수한 민간 경쟁사회가 아직 탄생하지 않은 단계에서 정치가와 접촉하기를 꺼린다면 차라리 사업을 포기하는 편이 낫다.

 

또 중국에서는 일선 관리가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되는 일은 있어도, 거물은 결코 체포되지 않는다. 권력의 대금업자끼리 제멋대로 사업을 하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부동산투기나 주식투기를 하고 때로는 마카오에서 거액을 탕진한다. 이때의 '대금업자'는 권력자의 비호를 얻어 독점으로 권리를 행사하고, 벌어들인 돈의 일부를 권력자에게 상납하고 있다.

 

예를 들면, 덩샤오핑의 차남인 덩즈팡은 현재 주하이에서 부동산투기를 하고 있고, 장쩌민의 두 아들은 통신사업의 이권을 장악했다. 리펑 전 국회의장의 두 아들은 수력발전과 연관된 각종 사업에 얼굴을 내밀고 있다. 청렴결백을 내세운 주룽지 전 총리 경우도, 두 아들이 국제금융 대기업의 간부로 일하고 있다. 이렇게 '태자당'의 화려함을 예증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럼 이제 중국 재벌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자. 공산혁명 직전까지 중국의 상업은 계산이 빠르고, 뱃길 수송의 혜택을 맘껏 누린 저장 상인의 천하였다. 저장 상인은 매우 적극적이어서 앞에 무엇이 있든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곧바로 진격한다. 그 적극성과 강인한 힘은 유대인 사업가조차 무색할 정도다. 또 상하이는 예로부터 중국 전역에서 우수한 인재가 몰려들고, 엘리트가 많은 고장으로, 상하이인은 익숙한 유연성과 세련미, 교묘한 화술, 똑똑한 처세술을 지녔다. 이 때문에 타 지역 사람들은 이들을 질투와 시기의 눈초리로 '하이파' 혹은 '상하이방'이라 하여 미워하고 있다.

 

상하이가 공산당에 함락당한 것은 1949년의 일로, 장제스 정권이 전복하자 국민당을 지지하던 수많은 자본가들이 재산을 들고 대만과 홍콩으로 달아났다. 홍콩으로 달아난 부자들은 곧바로 섬유, 잡화, 해운사업에 진출했고, 혁명 이후에도 상하이에 남아 있던 그룹은 공산당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초를 겪었으나 '개혁, 개방'을 주장한 덩샤오핑이 불사조처럼 복권함과 동시에 이들도 부활했다. 그 전형적인 성공의 예가 류샤오치 일파의 광다은행이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은 1980년대부터 '개혁, 개방'을 지원하는 자본가를 우대하기 시작했는데, 먼저 홍콩 재벌을 향해 대륙으로 들어오라고 유혹했다. '동양의 오나시스' 바오위강 등은 몇 번이나 베이징에 초대를 받았고, 결국 덩샤오핑의 편을 돌면서 '친중파'로 돌아섰는데, 이 바오위강의 전향을 계기로 홍콩 재벌들이 잇달아 대륙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한편, 대만으로 도망간 장제스 지지 그룹들은 우여곡절 끝에 찾아온 해빙기에 떠밀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륙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저장 상인과 쌍벽을 이루는 '커자인'도 눈에 띈다. 결국 오늘날의 중국 경제를 이끌어나가는 기반과 독특한 메커니즘은 바로 역사적 배경과 인맥의 상관도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2. 홍콩이 중국을 삼켰다?

중국의 재벌이라고 하면 예전에는 '홍콩 재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홍콩이 뛰어난 갑부를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세제인데, 법인세 최고세율이 불과 16.5%밖에 되지 않아 갑부가 점점 덩치를 불릴 수 있는 곳이었다. 둘째, 규제 완화와 국제 금융제도의 효과라 할 수 있다. 1960년에 이미 홍콩에서는 '닝보벌'이라는 신흥 재벌이 대두되었다. 후에 해운왕이 된 바오위강은 무역 수단인 선박을 좌지우지했고, 금융을 지배한 영국계 기업을 잠식해 들어갔다.

 

그 뒤 부동산 바람에 편승해 갑부가 된 사람이 바로 리자청이다. 자오저우에서 홍콩으로 도망 온 리자청은 자그맣고 보잘 것 없는 '홍콩플라워'로 시작해 세계 유수의 대재벌로 성장했다. 리자청은 창장실업과 허치슨왐포아를 운영하며, 전력, 통신, 운송, 창고, 부동산 개발 등에 주력하고 있다. 리자청의 장남인 빅터 리는 현재 이 창장실업의 사장인데, 외국 기업 매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리자청은 베이징의 '개혁, 개방' 노선에 적극 동참해, 많은 홍콩 경제인을 이끌고 중국에 부동산 투자를 진행했다. 차남 리처드가 이끄는 PCCW는 신흥 벤처기업이지만, 홍콩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모아 자사보다 훨씬 거대한 C&W(케이블 앤 와이어리스 홍콩)의 매수 전쟁에 뛰어들어 당당히 성공했다.

 

한편 중국권 호텔업계에서 주목받는 것은 역시 말레이시아 화교 궈허녠이 이끄는 궈씨그룹이다. 궈허녠은 말레이시아 출생의 화교다. 부친은 푸젠 성에서 바다를 건너 말레이시아로 이민을 갔고, 조호르바루 근교에서 사탕수수농원을 경영해 큰 성공을 거두어 '아시아의 설탕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설탕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무역업을 시작했고, 1972년에는 싱가포르에도 주식을 상장했다. 이후 홍콩에 상륙해 해운과 은행에도 진출했다. 리자오지 핸더슨랜드 회장도 홍콩 반환 직전까지 홍콩에서 부동산사업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뒤 홍콩에서는 집값 폭락, 월세 폭락으로 부동산 시장이 다소 위축되었으나 홍콩 재벌들의 중국 대륙에 대한 부동산 투자는 예상외로 잘 돌아갔다.

 

중국 경제를 이끌어나가는 산업 가운데 빠질 수 없는 것이 부동산이다. 중국 부동산 산업의 선두에 서서 완커그룹을 이끌어나가는 사람이 왕스다. 참고로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땅은 국가 소유로 개인 소유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토지에 대한 '50년 사용권'을 사고팔 수 있게 하였다. 마침 1989년의 천안문사건을 전후로 홍콩의 부동산 가격이 절정에 달해, 홍콩과 대만 기업은 높은 부동산 가격을 이기지 못해,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했고, 홍콩의 기술자들도 공장을 따라 대륙으로 이동했다. 완커그룹은 당국이 보유한 토지를 매수하여 아파트단지와 공장특별구 등을 지어 성공했다.

 

완커그룹은 세 가지 행운 - 완커그룹의 부동산 개발 과정과 땅값 폭등 순서(선전-샤먼-상하이-베이징)가 일치했다는 점, 때마침 주식 바람이 불어 중국에서 가장 힘들다는 자금조달을 예상 외로 쉽게 받을 수 있었다는 점, '고층'빌딩이 중국인의 사랑을 받았다는 점 - 을 잡아 성공할 수 있었다. 최근 완커그룹은 홍콩 재벌인 화룬그룹의 출자를 얻어 비약에 비약을 되풀이하고 있다.

 

한편 1997년 홍콩 반환을 계기로, 공산당의 입성과 지배를 우려한 홍콩 갑부들은 일제히 캐나다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수법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사업을 보장한다면서 홍콩 재벌을 안심시켰다. 또 언론의 자유도 일단 표면상 보장해주었다. 하지만 그 뒤에서 신문의 광고주와 후원기업에 무언의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기업들은 광고내기를 꺼려했다. 결국 중국 공산당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신문은 홍콩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홍콩을 평화롭게 회수한 중국 정부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주식시장에 대해서는 방임주의로 일관했다. 국제 금융제도도 그대로 남겨두고, 외자계 기업 활동도 규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홍콩을 외자를 쉽게 불러들이는 장치로, 정부 간부들의 자금을 세탁하는 기구로, 부를 통과시킬 목적의 명목회사를 등기하는 장소로 반드시 살려두어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캐나다에서는 반대로 중국인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이민과 함께 흘러들어온 광둥의 마피아가 날뛰어 치안도 나빠졌다. 사실 이러한 사태는 캐나다의 기묘한 과세 체계에서 비롯되었다. 캐나다는 시민권을 취득한 홍콩인들에게 '홍콩에서 벌어들인 소득'에도 세금을 부과했다. 그러자 홍콩 사람들은 약 3년 전부터 힘들게 취득한 캐나다 시민권을 반환하고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참고로, 홍콩은 1980년대 후반부터 공업지대는 폐허로 변했고, 옛 카이탁 공항도 휑하게 건물만 남았다. 또 홍콩 반환 후에는 1 2제도의 희생양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본래 홍콩의 번영을 지탱하던 사업은 금융, 부동산, 서비스업이었는데, 이 금융업조차 일본의 은행과 증권이 일제히 철수하면서 활력을 상실했다. 24만 명도 더 되는 홍콩의 직장인들이 선전이나 광저우에 아파트를 구입하고, 그곳에서 홍콩으로 통근함으로써 홍콩의 땅값도 폭락했다. 하지만 암전 상태에서 다시 불이 들어오듯 홍콩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주요 원인은 얄궂게도 인민폐가 강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홍콩의 실업률은 7.5%를 기록했지만, 도시에는 활기가 일어났다. 특히 토산품 가게와 식당이 바쁘게 움직였다. 중국에서 막대한 관광 인파가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홍콩 재벌은 투자로 사업을 확대하고, 홍콩은 대륙에서 온 관광객들이 뿌린 인민폐와 대륙에서의 투자, 금융으로 먹고 살고 있는 것이다.

 

 

3. 중국, 태풍전야의 긴장감에 휩싸이다

중국 공산당 고급 간부의 아들, , 친척 곧 '특권계층'은 가족을 중심으로 정략결혼을 되풀이하면서, 중국 고대 왕조의 정치 스타일까지 답습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한 집안의 이익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특징이 근대 자본주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임계점에 달한 이후에도 중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지속한다는 예측은 성립하기 힘들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중국에서 사업에 성공하려면 권력과 손을 잡아야 한다. 또 삼국지를 읽어보면 배신, 거짓말, 간언, 허위 보고 등이 중국에서는 거의 다반사다. 이들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유사 이래 수천 년, 중국의 체질은 줄곧 이러했고, 현대 중국인 역시 그대로 전수받았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장쩌민이 '부패 반대 캠페인'을 벌인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목표는 자신의 은인 즉 덩샤오핑의 가족과 공산당 고급 간부의 자제들이 경영하는 기업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부패 사건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중국 경제의 어두운 부분에 빛이 닿으면 얼마나 많은 부정이 천하에 공개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한편 사스 소동을 이겨낸 중국 민중의 의연함도 '무질서'란 측면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다. 2003년 사스 재난은 마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듯했다. 이어서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중국의 4분의 3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세계 언론이 난리를 치는 동안에도 중국인들은 '이 신약은 조류독감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습니다.'라고 하며 가짜 약을 팔아댔다. 서민에게 재난은 돈을 벌 좋은 구실일 뿐이다.

 

이런 서민과는 아예 행동하는 수준이 다른 재벌이 존재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리오바이싱(일반 서민)도 소득이 조금 오르긴 했지만, 부유층의 생활과는 인연이 멀다. 특히 9억에 가까운 농민은 여전히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국무원 빈곤대책 개발반의 루페이제 부반장은 "중국 정부는 현재 2,800만 명의 빈곤층이 있으며, 이 가운데 700만 명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밝혔다.

 

개간보다 전출에 연연하는 까닭은 벽촌의 바싹 마른 땅에 새 도로를 포장하고 전력망을 확충하는 일이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국토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농지는 전 국토의 20%밖에 되지 않는다. 그 좁은 논밭에서 8억 이상의 농민이 서로 다투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말라버린 토지에 집착하지 않고 이동한다. 이것이 한족의 특징이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 이주한 곳의 노동조건이 본래 있던 곳보다 더 열악하고, 주택환경도 좋지 못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들이 받아야 할 재취직비는 지방의 공산당 관료가 제멋대로 독차지해 버린다. 극도로 빈곤한 지역에는 일반 화장실, 수도, 텔레비전도 없다. 한 집에 바지가 한 벌뿐인 농가도 있다. 이렇게 번영의 뒤에서 부패가 진행되고, 빈곤이 확대되면서 근대화의 피해가 사회적 병리로 불거져 나왔다. 현재 중국은 폭풍전야나 다름없다.

 

호적제도도 큰 문제다. 돈을 벌려고 베이징에 들어온 노동자는 2003년 통계상 409만 명이다. 이 가운데 80% 정도가 10대에서 30대의 젊은이다. 직종별로는 음식점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평균 급여는 500위안, 중급 요리사가 800위안 정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호적에 있다. 중국의 호적관리제도는 공산주의혁명 이후인 1958년에 도입되었다. 이 제도에 따르면 도시 거주자와 농촌 거주자가 확연히 구별된다. 지방의 호적으로는 급료도 낮고, 주거지역도 제한을 받는다. 따라서 호적 위조사업이 창궐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도시지역에 노숙자가 늘어 사회 혼란의 원흉이 되고 있다. 최근 중국의 일부 지역(허난 성, 장쑤 성, 충칭 등)에서는 호적관리제도를 개혁하고 있는데, 자연히 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몰려들었고, 기존의 거주자들은 불만의 소리를 높였다. 지금도 중국 전체의 유동인구는 1 3,000만 명 이상이고, 이 가운데 5,000만 명이 임시거주자로 등록되어 있다. 호적이 없는 사람들이 아마 1억 명은 족히 될 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기업가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중국의 신흥재벌 가운데 한 사람인 다우그룹 쑨다우 사장은 베이징대학의 강연에서, 공산당의 농업 정책과 농가에 대한 금융제도를 통렬히 비판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그의 행위를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 규정하고, 그의 은행예금을 동결하고 웹사이트를 폐쇄했다. 중국의 지방신문은 당 간부의 오직 적발에는 열심이지만, 중앙의 정책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비판도 가하지 않는다. 공산당 독재사회에서는 당의 연줄 없이 대성공을 거둔 경우에, 양빈, 저우정이 그랬던 것처럼, 주위에서 압력이 들어와 결국 실각하고 만다. 이것이 바로 공산당주의적 구조이다.

 

 

4. 질주하는 신세대

중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의 신화와 비슷한 성공신화의 전형은 렌샹그룹이다. 이 기업은 본래 중국과학원이 출자한 벤처기업인데, 지금은 컴퓨터업계에서 세계를 석권하고 있는 레노보 컴퓨터의 제조원으로 유명하다. 렌샹그룹은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차이나드림의 꿈과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이후 렌샹과 유사한 벤처기업 - 창청, 팡정, 랑차오 - 이 속속 등장했다. 특히 팡정은 베이징대학이 설립한 벤처기업인데,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시스템 분야에 등장해 단숨에 시장을 석권했다. 창청 컴퓨터는 정부 전자광업부의 왕즈 부국장이 정부의 후원을 얻어 1986년에 설립한 회사다. 특히 왕즈는 한자 입력 소프트웨어(창청 286)를 최초로 개발해 1987년에 수출했다.

 

한편 개혁, 개방의 지각 변동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상하이의 저장 상인인데, 이는 1989년의 천안문 사건 이후, 베이징의 정권을 상하이벌이 장악한 것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주룽지와 후진타오로 대표되는 신 상하이벌은 기존의 권익을 수구파 리평 일파에게서 무리하게 뺏으려 하지도 않았고, 군의 특권도 거둬들이지 않았다. 상하이 사람의 교활함은 적과 정면에서 대결하지 않고 오월 동주식으로 시간을 벌어, 천천히 주위를 포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가장 흥미로운 화제는 역시 하이구이파. 주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벤처 기업가들을 뜻하는 하이구이는 회귀(回歸)와 중국식 발음이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미국식 경영을 익혀 서구 경제학으로 무장했고, MBA를 취득했거나, 기타 박사학위를 딴 지식층인 경우가 많다. 특히 IT, 반도체, 컴퓨터산업을 일으킨 신흥 재벌들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출신자가 많은데, 이들은 감각이 서구적이고 개인주의에 가까우며 능력을 중시하기에 국제 사회와도 잘 맞는다.

 

신흥 재벌로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운영하는 왕이를 창업한 딩레이는 기존 재벌의 선두주자인 룽즈젠을 단번에 능가했는데, 자산은 약 1,000억 엔으로 추정된다. 한편 월가의 최신 금융 노하우를 익히고 중국에 돌아와 신 금융 서비스로 인기몰이를 한 하이구이파의 대표 주자로 안자그룹의 장쉬퉁과 웨이쑹이 있는데, 창업자금도 없는 그들이 처음 시작한 일은 벤처기업, 그것도 벤처캐피털을 모집해서 이를 기반으로 시작한 부동산 금융이었다.

 

한편으로 정부와 손을 잡았으나 실패한 벤처기업도 많다. 부동산 사업에 우후죽순처럼 몰려든 이들 대다수의 기업은 사실 권력자들의 돈줄이나 다름없었다. 권력을 등에 업고 아파트와 빌딩용지를 매입해 온행융자를 받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전매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다. 하지만 이후 이들은 자신의 능력 때문에 성공했다고 믿고, 권력자를 속이고 멋대로 하다가 차츰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나고, 너무 지나치다 싶을 때 일생일대의 막대한 제재를 받기도 했다. 구체적인 사례가 김정일이 북한 신의주의 초대 장관으로 지목한 순간, 공안당국에 체포된 선양 네덜란드촌의 양빈이다.

 

개방의 파도를 타고 중국의 고용 상황은 급격히 달라졌고, 자연히 직업윤리도 변했다. 현재 중국에는 1,838종의 직업이 있고, 날마다 새로운 유형의 직업이 탄생한다. 도시의 화려한 소비가 생활 형태를 변화시켜, 젊은 여성의 인생관이 완전히 달라졌다. 상하이에는 약 10만 명이나 되는 화이트칼라 여성이 존재하는데, 대부분이 독신여성이라고 한다. 이 계층은 왕성하게 소비활동을 하고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낸다. 그러다보니 여성을 겨냥한 여성지, 서적, 여성전용 채널이 잇달아 등장하고, 빈곤에 허덕이는 농촌과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런 신세대에도 좌절은 있다. 중국인은 본래 개성이 강하고 독립정신이 왕성하다. 그런 만큼 일단 기술을 습득하면 소속해 있던 회사를 밥 먹듯이 배신한다. 회사에 대한 귀속의식이 없으니 충성심이 있을 리 만무하다. 이 역시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는 전통 사고방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급료를 한 푼이라도 많이 준다고 하면 다음 날 당장 다른 회사로 출근한다. 그리고 기술을 습득하면 바로 독립한다. 그러나 세상일은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노력 없는 꿈은 환상으로 끝난다. 2, 3의 빌 게이츠가 그렇게 쉽게 나올 리 없는 현실의 혹독함을 몸소 체험하게 될 것이다.

 

 

5. 대만 재벌이 중국 경제에 한몫하다

대만 독립에 반대하고 천수이벤 정권을 뒤흔드는 베이징이지만, 장사라는 측면에서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은 서방 세계의 경제 제재를 받아 심리적, 경제적 불황에 빠졌다. 이때 대담하고 과감하게 중국에 투자한 것이 바로 대만 기업이었다. 이런 대만 재벌과 기업가들의 비즈니스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면이 참으로 많다.

 

좀더 전통적인 시점에서 대만의 실업계를 살펴보자. 대만 플라스틱그룹의 왕융칭 회장은 대만의 마스시타 고노스케로 통한다. 왕융칭은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대만 최고의 그룹을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74, 일찍부터 반도체에 관심을 보인 왕융칭은 IC기반공장을 건설했다. 석유에서 부차적으로 아크릴, 폴리에스테르, 레이온이 생산되기 때문에 화학섬유산업에도 진출했다. 플라스틱사업이 예상을 뛰어넘는 빠른 속도로 확대됨에 따라 왕융칭은 점차 지연과 혈연으로 점철된 경영에 벽을 느끼고, 사재를 털어 차세대를 짊어질 기술자를 육성하고자 밍즈공업전문학교를 세웠다.

 

또 직원들의 실력을 키우려면 철저한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근로 의욕을 불어넣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우수한 성적을 올린 사원에게는 특별 보너스를 주었고, 유능한 사원은 간부로 발탁해 상당한 권한을 손에 쥐어 주었다. 아울러 신입사원들은 왕융칭의 이런 경영방법을 배우기 위해 관리, 영업, 공장, 창고를 순서대로 체험하고, 가오슝을 비롯한 여러 공장을 견학했다. 연수는 혹독한 지옥 훈련을 방불케 했고, 마지막 날에 시험을 쳐서 통과한 사람만 정사원으로 채용했다.

 

그런 왕융칭이 1988, 중국의 푸젠 성에 거대한 공장과 발전소를 짓겠다고 나섰다. 때마침 천안문 사건의 후유증으로 고민하던 베이징은 어두운 이미지를 벗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왕융칭의 투자를 열렬히 환영했다. 정치적으로 대만과 중국의 대립은 계속되었으나 정경분리라는 기치아래, 중국에서 피해를 본 경험이 없는 대만 기업의 대륙진출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대만 언론은 대륙에서 눈물을 흘린 기업을 예로 들면서 왕융칭의 대륙 중시노선은 분별없는 행동이다.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왕융칭은 삼통(무역, 통신, 항로의 자유화를 의미한다)이 대만의 경제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자신의 지론에 따라 중국에 투자한 발전소 공사를 계속 진행시키기 위해 100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대만 최대의 운송회사인 에버그린그룹의 창시자는 장룽파다. 최근 에버그린그룹은 항공노선의 확충에 노력 중인데, 장룽파가 가장 원하던 항로가 바로 대만과 중국의 직항편이다. 장룽파는 앞으로 가장 유망한 항공루트의 거점으로 푸젠 성, 광둥 성, 상하이를 전망하고, 해운 루트의 직행편으로는 다롄과 홍콩이 유력하다고 내다보고 있다.

 

그런데, 대륙으로 진출한 대만 기업에 대해, 처음 약속과 달리 중국 공산당은 다양한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고, 대만독립을 주장하는 기업 간부를 체포하기도 했다. 또 대만 기업들이 중국에 진출해 많은 공장을 지은 결과, 대만 경제에는 큰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안 그래도 공동화를 우려하던 대만에서는, 대륙 투자를 억제하고, 베트남 주변으로 이동처를 변경할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차세대 개발 연구센터도 대만으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중국에서 만드는 막대한 양의 해적판 때문에, 대만으로 개발 거점을 되돌리려는 전력상의 변경이 시도되고 있다. 이제 대만 기업도 중국 대륙에 대한 투자와 공장 이전 전략에 큰 변화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6. 한국, 일본, 중국의 트라이앵글

중국에 진출한 대부분의 일본 기업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새로 고용한 중국 종업원에게 기술을 가르쳐 놓으면 바로 다른 곳으로 이직해버리고, 중국인 종업원의 손님을 대하는 태도도 엉망이다. 또 뇌물을 내놓으라고 야단이고, 만약 이에 응하지 않으면 정치적 압력을 받기 십상이다. 게다가 절대로 달라질 것 같지 않은 반일 정서도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일본 기업은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제휴를 맺을 수 없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등장한 이후, 장쩌민 시대의 노골적인 반일 태도는 좀 수그러들었다. 반성의 계기를 만든 것은 마리청 인민일보 평론가와 스이훙 중국인민대학 교수가 각각 발표한 논문인데, 그 요지는 역사 문제에서 일본에게 가혹한 요구를 할 것이 아니라,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일본과 제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세계 각국이 세계의 공장이라 부르며 대대적으로 투자한 결과, 중국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일본 역시 중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자동차 산업을 살펴보면, 도요타자동차는 텐진 공장에서 T-1을 생산하고 있고, 닛산자동차는 합작기업인 정저우르찬에서 SUV 파라딘을 생산하고 있으며, 미쓰비시자동차는 SUV 챌린저를 베이징에서 생산, 판매할 예정이다. 혼다기연공업은 합작 제조업체인 광저우혼다에서 이미 미니 밴 오딧세이와 하이브리드카 시빅을 생산하고 있다. 최종 주자는 마쓰다며, 현재 포드와 손을 잡고 본격적인 생산체제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국의 도산한 자동차 회사를 중국 기업이 매수하는 대사건도 일어났다. 조흥은행을 비롯한 채권은행들은 쌍용자동차의 주식을 국제 입찰에 부쳤다. 이에 르노, GM 등 여러 회사가 응해왔고, 중국의 란싱그룹이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조흥은행과 란싱그룹은 2004 12월 쌍용자동차를 정식 매수하기로 합의하고, 이미 각서를 조인한 상태다. 하지만 자동차 생산의 가열을 우려한 베이징 정부는 아직 이 매수에 정식 허가를 내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매각에 반대하는 쌍용자동차 노동조합이 각서조인식을 하는 회장에 난입해 반대성명을 외치기도 했다. 한국도 썩 환영하는 눈치는 아니다.

 

한편 한국도 중국 진출을 확대하고 있다. 다롄, 칭다오, 샤먼의 비행장의 무료 카트 광고는 대부분 삼성으로 채워져 있다. 시내의 거대한 광고탑도 삼성이다. 칭다오에서는 공항에서 시내까지 달리다보면 LG, 삼성, 현대의 한국 기업 광고뿐이다. 마치 한국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중국의 반일 감정에 위축된 일본 기업이 많은 분야에서 철수했지만, 한편에서 새로운 수법으로 중국 시장을 노리는 기업도 나타났다. 가전제품 상위권을 달리는 하이얼과 산요전기는 전면적인 타이업(Tie up : 다른 업종들이 상호간 제휴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고 홍보효과를 극대화하는 마케팅)전략을 실시했다. 중국에서는 하이얼의 판매루트에 산요전기의 제품을 실어 보내고, 일본에서는 산요전기의 판매루트에 하이얼의 가전제품을 실어 보낸다.

 

그리고 신닛테쓰(新日鐵)는 상하이의 바오산제철에 자동차강판을 만드는 첨단기술을 공여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중국은 기술이 부족하여 자동차용 특수강판 박판만큼은 아직 생산하지 못해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했다. 일본 철강 산업의 경기 회복은 중국 자동차산업의 영향이 컸다. 그런데 보도에 따르면, 강판 원판과 열연 강판의 일부를 상하이의 바오산제철이 제공하고, 그 대신 신닛테쓰가 용고로와 전로 설비의 조업 노하우, 금속성분 조정 노하우를 지도할 계획이라고 한다. 만약 이 계획대로 자동차 강판기술이 중국에 전해져 2005 5월부터 열연강판의 다음 과정인 냉연강판과 표면처리강판을 연간 170만 톤이나 생산한다면, 싼값을 무기로 한 중국 제품이 세계 시장을 잠식하게 될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기술의 남용이나 상표권 무단사용과 같은 도덕성 문제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해적판은 전 세계 해적 제품의 20%를 차지하고, 해적판 산업의 판매액은 중국 GDP 8%를 차지한다. 해적판을 퇴치하기 위해 공장을 폐쇄하고, 재판을 하고, 또 외국에서 아무리 항의를 한들, 위조 산업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일본 기업뿐 아니라 전 세계의 기업들이 중국의 해적판을 비판하면서 소송을 걸었다. 그러나 중화사상에 젖은 그들은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화약도, 활자판 인쇄도 중국이 발명했으니 특허료를 내야 한다.는 식의 억지를 부린다.

 

하지만 2001년 말, WTO에 가입한 중국은 어느 정도 단속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 결국 발명특허와 저작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단산업을 지키기 위해 일본이 취해야 할 조치는 특허법에 기밀유지의 조항을 넣는 일이다. 미국에서는 방위기술이라 인정된 특허는 공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방어해야할 기술이 술술 빠져나가고 있다. 따라서 일본도 비공개 특허 제도를 만들어 첨단기술의 유출을 막아야 한다.

7. 중국, 세계를 넘보다?

전대미문의 기적과 불행이 동시에 일어나는 나라가 중국이다. 1940년대의 황제였던 장제스가 쑹메이링과 함께 몰두한 재물 축적 방법을 떠올려보라. 장제스가 미국의 은행에 맡긴 개인 예금액은 7억 달러에 달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이 아닌 멸공봉사(滅公奉私)의 정신, 그것이 중국 4,000년 지혜의 바닥에 깔려 있다. 이 체질은 사회주의 체제로 변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2002년 한 해 동안 280억 달러, 2003년에는 310억 달러가 러시아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이렇게 가다가는 1998년에 일어난 경제위기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금융 체계를 유지하기도 힘들다. 중국에서의 자본유출도 러시아와 다르지 않다. 금액도 비슷하다. 전문가들은 해마다 중국에서 사라지는 외화가 280억 달러에서 320억 달러라고 추측한다.

 

한편 중국의 통화정책을 살펴보면, 1990년대 초엽까지 중국에 주재하던 외국인에게는 인민폐가 교부되지 않고, 대신 외화태환권이라는 상당히 이상한 통화가 돌아다녔다. 관광여행 역시 제한된 지역에만 갈 수 있었고, 쇼핑은 지정된 상점에서 외화태환권으로만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1994년에 외화태환권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철폐되었다. 동시에 인민폐는 30% 절하되었다. 그후 마오쩌둥이 새겨진 새 화폐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새 지폐를 발행한 목적은 위조지폐를 방지하고 자국통화의 위신을 세우며, 낡은 지폐와 교환함으로써 통화공급량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현재 중국 국민의 예금액은 22 6,0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그 예금의 행방이다. 중국은 예금이 늘어도 대부가 공정하지 못하고, 그나마 보유한 돈도 홍수처럼 해외로 빠져나간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중국 정부는 1998년에도 4대 은행에 총액 2,700억 위안의 자본투입을 실시했고, 1999년에는 자산관리회사를 각각 설립하게 해, 합계 1 4,000억 위안이나 되는 불량채권을 자산관리회사에 이관했다.

 

나아가 2004년에는 주식제 전환의 시험모델이라고 선전하면서, 중국은행과 중국건설은행의 재무상황에 따라 총액 450억 달러의 자본투입을 결정했다. 동시에 경영, 관리체제의 개선, 내부개혁, 주주총회, 이사회, 감사회 제도를 확립해 적극적으로 투자액을 유치하고 있다. 또한 불량채권의 처리에 대해 관계자의 책임을 묻고 부당행위를 엄격히 단속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 국유은행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한편 미국에서는 중국 때리기를 시작했다. 중국 기업은 싼 임금에 복지와 보험 제도가 없기 때문에 종업원의 복지를 돌보지 않는다. 환경기준도 지키지 않는다. 등 전미 제조업협회와 노동조합이 격한 목소리를 냈다. 의회는 중국제재법을 상정했다. USTR(미국통상대표부)반도체의 세금우대는 불공정하다. WTO에 제소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중국이 자국내 제조업에만 매출에 대한 면세조치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국제 금융업은 값싼 노동력과 인민폐 고정 상장을 바탕으로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내 서열 3위인 뱅크오브아메리카는 광둥 성 광저우에 오퍼레이션 센터를 설립하고, 싱가포르와 홍콩의 기존 거점을 축소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노동임금이 싼 지역으로 사업이 이동하는 현상은 세계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한편, 서구에서는 중국보다 인도를 선택한 기업도 많다. 현재 골드만삭스증권은 250명 규모의 오퍼레이션 센터를 인도의 방갈로르에 개설 중이다. 금융기업의 대이동은 2008년까지 200만 명에 달할 전망이며, 그 가운데 절반은 인도로 향할 것이다.

한편 중국은 에너지 분야에서 국가차원의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일부 석유 프로젝트에서는 타국의 국익과 정면충돌하기도 한다. 중국은 파이프라인을 해저에 매설해 동중국해의 앞바다의 방대한 가스를 상하이로 운반하고 있다. 그런데 일부 해역은 현재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중국이 에너지 분야에 적극적이라는 사실은 다음 사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첫째, 주력 에너지인 석탄 생산이 줄어들고 각지에서 탄광을 폐광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정리해고, 실업, 폭동, 사고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둘째, 원자력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셋째, 1993년에 석유수입국으로 전락한 이후 산유국과 맺은 국교를 중시하고 있다. 특히 중동,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맺은 외교는 원유와 무기원조를 맞교환하고 있다. 넷째, 전략적으로 석유를 비축하기 시작했다. 다섯째, 천연가스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여섯째, 물에 관한 문제다. 수력발전을 위한 산샤 댐 공사, 창장 강물을 베이징과 톈진으로 운반하는 대운하의 건설 등 중국 전역에서 대공사가 진행 중이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자원문제와 관련한 중국 기업의 구조조정과 국유기업의 재편이다. 연안의 해저 유전을 포함한 해양은 CNOOC(중국해양석유총공사), 연해지역의 공업지대는 CNOPEC(중국석유화공총공사)가 종합적인 석유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중서부에서 신장위구르자치구까지는 CNPC(중국석유천연가스총공사)가 담당한다. 이렇듯 중국은 석유회사를 지역과 역할을 분담해서 경쟁 구도를 만들었다. 또 이들 3사는 수많은 자회사를 주식시장에 상장하는 방법으로 자금을 조달하고 있는데, 그 연금술이 정말 국유기업이 맞나?싶을 정도로 교활하고 교묘해서 서방의 대기업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워싱턴포스트지에 중국에 관한 충격적인 기사 - 경제성장이 너무 빨라 전력공급이 따라가지 못한다 - 가 실렸다. 원인은 발전의 80%가 석탄인데, 석탄의 철도운송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장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주민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지역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결국 푸젠 성, 광둥 성, 저장 성, 장쑤 성 등 19개 성에서 전력 배급제도가 부활됐다. 대만과 일본 기업이 몰려 있는 항저우에서는 한 주에 4일만 공장을 가동시킬 수 있고, 생산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간에는 아예 전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1,080억 달러라는 거액을 들여 여기저기에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지만, 적어도 2~3년 동안은 전력 부족 상황이 이어질 전망이라고 한다.

또 중국은 위안화의 환율을 교묘하게 관리하고 있다. 인민폐의 절상에 몰린 중국이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하는 것은 일본의 엔고 실패를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인민폐의 외환율은 시장의 수급을 무시한 정치적 환율이었다. 해외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동안 인위적으로 인민폐를 싸게 설정해 두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2003년 초부터 중국에 인민폐의 절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막다른 길에 처한 중국은 APEC에서 이 압력을 교묘히 빠져나갔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교활하다.

선저우 5호까지 발사하고, 세계 5위의 GDP를 자랑하며, 자동차 생산에서 세계 4위에 오른 중국이건만 통화에서 융통성은 도대체 찾아볼 수가 없다. 인민폐는 경화가 아니다. 이는 중국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다. 베이징의 위정자가 이러한 심리를 방치하고 언제까지 인민폐 절상을 반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민폐 절상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며, 변동환율제로 이행할 날이 멀지 않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만국박람회가 열릴 시기에는 인민폐 역시 국제 수준에 도달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소부터 국제적 위신명예를 주장해온 중국의 국가주의와 완전히 모순된다. 따라서 인민폐 절상은 시간문제라 할 수 있다.

 

유대인을 뛰어넘는 상인기질을 되살려

다각도로 사업을 벌인 결과,

중국은 이제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2003년 중국의 무역 총액은 8,440억 달러로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4위이며,

세계 각지의 외자가 눈사태처럼

중국으로 집중되고 있다.

한편 중국 재벌은 공산주의 사회에서

세계의 자본을 휩쓰는

세계 최초의 실험을 진행 중이다.

그들은 전 세계 경제의 돈줄을 쥐고 있는

거대한 화교자본 네트워크의 한 축을 이루며,

때로는 공산당 정부와 대립하고,

때로는 공산당 정부와 결탁해가며

거대한 부를 축적해가고 있다.

 

이렇게 번영을 누리는 중국 경제를

도대체 누가 움직이고 있는 것일까?

국유기업일까?

국유기업이었으나

개혁에 성공해 민영화로 돌아선

하이얼, TCL, 하시신과 같은 신흥기업일까?

당 간부의 특권이 작용하는

CITIC(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과

같은 독점기업일까?

아니면 자동차, 가전, IT 벤처 등

규제 완화의 파도를 타고 활약하고

있는 외국기업일까?

무엇보다 그 실상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한데,

이 책에서는 그 구체적인 사항을

규명하고자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중국 시장을 무대로 뛰고 있는

기업인들과 관계자들은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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