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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지 上 - 현이섭 지음

삼생지연 2021. 2. 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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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지 上 현이섭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7 년 6 월

 

혁명전야

 

반항아 마오쩌둥

마오쩌둥(毛澤東)은 청나라 말엽인 1893년에 후난선 샹탄현 사오산충에서 농민인 아버지 마오순성(毛順生)과 어머니 원치메이(文七妹)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오는 4세 때부터 둘째 외삼촌의 사숙에서청강생으로 가범잠언3자경 같은 책들의 글을 줄줄 외워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9세 때 마오는 외가에서 사오산으로 돌아와 6군데의 사숙에서 논어맹자 등 사서오경의 유학 경전을 배웠다. 또한 좌전, 춘추, 사기, 강목, 일지록 등 고전을 읽었다. 삼국지연의, 수호지, 손자병법 등의 역사소설도 즐겨 보았다.

 

마오가 17세 되던 1910년 봄, 창사에서 기민폭동이 일어났다. 놀란 청나라 정부는 영국,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등의 국가와 함께 10여 척의 군함을 끌고 와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큰 충격을 받은 마오는 폭압 통치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깊이 새겼고, 훗날 이 사건이 자신의 생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회상했다. 마오는 이 시기에 사오산충에 돌아온 개화사상가 리수칭을 만났다. 그 뒤 마오는 고향을 떠나 동산서원으로 갔고, 여기서 신학문을 배울 수 있었다. 학교 쪽은 마오의 뛰어난 능력을 아껴 큰 도시로 나가 공부하기를 권했고, 마오는 1911, 성도인 창사 샹샹주성중학당에 들어갔다.

 

어느 날 후베이성 혁명군의 한 대표가 학교에 와서우창기의(武昌起義)’에 대해 강연하면서 반청운동을 고취시켰다. 마오는 이 혁명을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결심한 뒤 학업을 중단하고 창사혁명군의 일반 사병으로 들어갔고, 병영생활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어느 날 마오는 신문에서사회주의에 관해 쓴 한 편의 글을 읽었는데, 사회주의의 구체적 내용은 몰랐으나 대단한 흥미를 느꼈다. 한편 당시 신해혁명의 앞날은 불투명한 상태였다. 청 왕조가 정권을 포기하지 않은 상황에서 북양군벌 우두머리 위안스카이는 황제를 겁박해 자신에게양위할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많은 지역에서 위안스카이의 야욕에 반대하는 불길이 거세게 일어났다. 일촉즉발의 전쟁 발발 직전 난징에 있는 쑨원을 대총통으로 한 중화민국 임시정부와 베이징의 북양군벌 위안스카이 간에 협상이 타결되어 남북통일을 이루었다. 이로써 267년 동안 중국을 통치했던 청 왕조가 사라졌다. 위안스카이는 국민혁명의 과실을 따먹어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되었고, 신해혁명은 시나브로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마오는 혁명이 끝난 것으로 보고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1912, 마오는 몇 개 학교에 들어갔다가 마음에 차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리고 차라리 독학을 하며 공부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마오는 도서관을 다녔고, 도서관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등을 읽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지리와 역사 서적, 그리스와 로마의 시, 소설 등의 문예작품도 보았다.

 

마오와 은사들

마오의 1913년 봄, 후난 제4사범학교(1년 뒤 후난 성립 제1사범학교로 통합됨)에 들어가 5년 동안 다녔다. 마오는 이때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준 선생들을 만났다. 윤리학을 가르쳤던 양창지는 천두슈가 발행하던 신청년 잡지를 마오에게 보내주고 투고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는 마오의 실제적 첫 부인 양카이후이의 아버지로 은사이자 장인이 되었다. 또 다른 선생은 쉬터리이다. 그는 창사에서 초등학교를 설립해 학업의 때를 놓친 학생들을 데려다가 학비를 면제해 가르치는 등 많은 제자들을 배출했다. ‘위안털보별명의 위안지류는 중국 고전의 기초와 문장, 서법 등을 가르침으로써 마오가 깊고 폭넓은 문사철(文史哲) 지식과 시서(詩書)에 일가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베이징대학 도서관 사서 보조원

졸업 후 양창지는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에게 마오를 부탁했고, 차이 총장이 도서관 주임 리다자오에게 써준 소개장을 갖고 마오와 함께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마오는 1918 10월부터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 리다자오의 사무실 옆에 있는 제2열람실 사서 보조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신문화운동의 기수들인 푸스녠과 뤄자룬, 후스 등을 보았다. 참고로 리다자오는 중국에 마르크스주의를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다.

 

1919 3, 후난으로 돌아온 마오는 본격적으로 중국 현대사의 무대에 올라섰다. 마오는 신민학회를 애국운동의 전위로 삼아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1920 4 11, 마오는 상하이로 갔고, 그곳에서 신민학회 회의를 열어 시대상황에 걸맞은 조직으로 학회를 확대 발전시키기로 했다. 1920 7, 창사로 돌아온 마오는 신사조의 흐름을 연구, 비교 감별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리를 심화시켜갔다. 참고로 차이허썬과 마오는 회원들과의 사상 교류를 더욱 촉진시켰는데, 그들은 10월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 모델을 따와러시아의 길을 답습하고, 이를 위해공산당 창건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중국공산당 창립, 시대조류를 타다 / 중국공산당 탄생

1920년 겨울, 마오와 허쑤헝의 지도 아래 창사 공산주의 소조(小組)가 만들어졌다. 이를 전후해 상하이, 베이징, 우한, 광저우, 지난 등지에 잇따라 공산주의 소조가 생겨났다. 이는 중국공산당 창립을 다지는 기초가 되었다. 1921 7 23일 밤, 드디어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마오는 기록을 담당했다. 전날의 준비 모임에서 24세의 장궈타오가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대회의 의사일정, 당면한 정치상황, 당의 기본임무, 당장과 조직문제 등이 제안되었다. 회의가 열린 뒤 밀정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드러났다. 대회 참석자들은 안전을 고려해 대회 마지막 날 회의는 7 31일에 난후에서 열었고, 대회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강령을 통과시키고 당의 중심 임무는 노동자계급을 조직해 노동운동을 펼쳐나가기로 확정했다.

 

그리고 무기명투표로 진행된 선거에서 전국 대표대회에 참석하지 않은 천두슈가 만장일치의 몰표를 받아중앙국의 초대 서기로 뽑혔다. 1차 전국 대표대회를 주재한 장궈타오가 조직 주임, 리다가 선전 주임으로 각각 뽑혀 이들 3인이 중앙국을 구성했다.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끝난 뒤 후난으로 돌아온 마오는 허쑤헝과 함께 후난지방 당 조직 결성에 힘을 기울여 그해 10 10일에 정식으로 후난 지부를 설립했다. 중국 전역에서 처음으로 생겨난 공산당 지부였다. 마오가 서기로 뽑혔다.

 

한편 1923 6 12일부터 20일까지 광저우에서 열린 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는 전당 사상을 통일하고 첫 국공합작의 기초를 다졌다는 점에서 공산당 역사상 중요한 회의로 기록되고 있다. 또 공산당 제3차 전국대표대회 중앙위원은 투표 결과 천두슈, 리다자오, 마오쩌뚱, 탄핑산, 차이허썬 등이 당선되었다. 천두슈가 서기를 맡고 마오가 조직, 취추바이가 선전 책임자로 뽑혔다.

 

장제스 ‘412’ 쿠데타

1926 7월에 국공합작의 국민혁명군은 북벌에 나선 뒤, 1927년 봄에 우페이푸와 쑨촨팡 등의 군벌을 물리치고 우한, 난징, 상하이 등 창장 유역의 중요 도시를 탈환했다. 이런 좋은 형세에 공산당은 오히려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하나는 국민당 내 우파인 장제스를 대표로 하는 대지주와 대자산계급들이 노골적으로 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는 공산당 내 천두슈를 대표로 하는 우경 투항주의가 날로 심해졌기 때문이다. 국공합작의 혁명 열기는 급전직하로 식어갔다.

 

북벌 총사령관 장제스는 이런 틈을 타 4 12일에 상하이에서 ‘412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뒤, ‘청당(淸黨)’을 내세워 대대적인 공산당 소탕에 나섰다. 당시 국민당은 우한에 좌파 우두머리 왕징웨이가 정부 수반을 맡고 있었는데, 장제스는 쿠데타를 일으켜 난징에 국민당 난징정부를 세웠다. 장제스가 국민당 내 좌파를 압박하자 왕징웨이와 탕성즈 등은 머리를 조아리고 공산당 탄압에 나서 국공합작은 완전히 깨졌다. 국공합작을 주선하고 배후에서 지원했던 소련 고문들도 중국을 떠나 국민당과 소련과의 관계도 끝났다. 공산당원들은 장제스의 검거령과 백색 테러를 피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그해 말까지 공산당원의 5분의 4에 이르는 30만 명 이상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장제스의 쿠데타를 간파하지 못하고 군부대의 함정 초청에 걸려들어 체포되었으나, 다음 날 아슬아슬하게 풀려났다. 그 뒤 저우는 장제스군의 잔혹한 백색 테러가 상하이를 들쑤시자 홍콩으로 탈출했다. 우창에 있던 마오도 7 15일에 왕징웨이가 공산당원 검거령을 내려 체포될 뻔했다. 집으로 돌아온 마오는 당을 구하고 좌절된 국민혁명을 이루기 위해 농촌에 들어가 무장투쟁을 벌일 결심을 했다.

 

혁명의 횃불

 

징강산 무장투쟁 / 유격전

이후 마오는 불퇴전의 투혼을 가슴에 품은 채 직접 노농혁명군을 이끌고 뤄샤오 산맥에 자리한 징강산으로 출발했다. 마오가 처음 징강산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병력은 1천여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주더와 마오 군이 합류하면서 병력이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때 후난과 장시의 국민당군이 여러 차례 포위공격을 해왔다. 홍군은 처음 3년 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다. 장제스가 다섯 차례의 대규모 포위공격 소탕전을 벌이기 직전에 홍군의 병력은 4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장제스는 제1차 공격 때 10만 명, 2차 공격 때 20만 명, 3차 공격 때 30만 명, 4차 공격 때 50만 명, 5차 공격 때 100만 명 등 다섯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공산당 포위공격 소탕전을 펼쳤다.

 

장정

 

전략적 대이동

국민당군의 제5차 포위공격 소탕전에 대비해 중국 전역에서 홍군의 대이동이 잇따랐다. 맨 먼저 근거지를 탈출한 홍군부대는 제7군을 이끄는 팡즈민 부대였다. 팡즈민은북상항일 선견대라는 기치를 내걸고 제일 남쪽 푸젠성 북부에서 국민당군의 봉쇄선을 뚫고 북쪽으로 치고 올라갔다. 두 번째 부대는 샤오커가 지휘하는 제6군으로 징강산 지구에서 이동을 시작했다. 샤오커는 후베이와 후난 변계지역에 있는 허룽이 이끄는 부대와 합류해 홍군 제2, 6군단을 결성하고후난-후베이-쓰촨의 경계지역에 소비에트 근거지를 마련했다. 세 번째 부대는후베이-허난-안후이변계에서 근거지를 마련했던 장궈타오와 쉬샹첸, 리셴넨 부대로 이들은 쓰촨지역으로 떠났다. 이곳에 잔류했던 쉬하이둥과 우환셴이 인솔하는 제25군은 후난-안후이 근거지에서 산시로 북진했다. 애초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제7군과 제6군이 국민당군의 봉쇄선을 돌파해 탈출하면서 9월에 들어 장제스의 직계부대들이 본격 군사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앙홍군은 국민당군의 남쪽 포위망을 책임지고 있는 광둥군벌 천지탕과 비밀협상을 벌여 안전한 탈출로를 보장받아 앞당겨 10월 상중순께 이동을 하기로 했다. 이는 중대한 군사정책 문제임에도 보구와 리더는 군사회의는 물론 정치국에서 토론 한 번 거치지 않고 결정해버렸다.

 

3겹 봉쇄선 돌파 / 2자루로 혁명한 허룽 / 홍군 피로 물들인 샹장전투

1934 10 10일 밤, 중앙홍군 5개 주력군단과 중앙,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종대 등 8 6천여 명이 앞날의 명운을 헤아릴 수 없는 상황에서 비통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장정(長征) 길에 올랐다. 중앙과 혁명군사위원회 지도자들로 보구, 저우언라이, 리더, 마오쩌둥, 장원톈, 왕자샹 등이 이 종대에 편입되었다. 천지탕군은 비밀협약을 지켜 홍군이 행군하는 방향에서 40리를 철수해비밀통로를 확보해주고, 각 부대에적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면 총을 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홍군은 순조롭게 국민당군의 제1봉쇄선을 돌파해 광둥 북쪽인 난슝 경내로 진입했다. 장제스는 홍군이 제1봉쇄선을 돌파했다는 보고를 받고 맥이 풀렸다. 10 27, 혁명군사위원회는 제1봉쇄선을 뚫은 홍군이 후난과 광둥 변경으로 진격해 제2봉쇄선을 돌파하도록 명령했다. 그 뒤 중앙홍군이 세 번째 봉쇄선을 돌파하자 장제스는 40만 명의 대군을 나누어 후난 서쪽의 샹시에 제4차 봉쇄선을 구축해 홍군의 앞을 가로막고 뒤를 추격해 샹장 언저리에서 섬멸하려 했다. 그 뒤 1934 11월 말, 중앙홍군은 만신창이가 되어 최후 봉쇄선을 뚫고 힘겹게 샹장을 건넜지만 전투 결과는 경천동지할 만했다. 8 6천여 명으로 출발했던 홍군이 3만여 명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쭌이회의 / 마오, 병권을 잡다

중앙은 1935 1 15일부터 17일까지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주재한 보구는 장제스의 제5차 포위공격 소탕전과 그 이후 상황에 대해 보고했다. 보구는 정치, 군사상 당의 지도는 정확했고, 군사상의 실패 원인은 적의 역량이 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투의 자기변호에 급급했다. 저우언라이는 군사에 관한 총결 보고에서 ‘3인단이 군사를 지휘하는 데 큰 과오를 저질렀다고 자아비판을 하고 책임을 인정했다. 이어 장원톈이 중앙 지도자들의 단순방어 군사노선에 반대한다는보고’, 이른바반보고를 했다. 보구는 휴회를 선언했다. 휴회 뒤 시작한 회의에서 첫 발언에 나선 마오는 이론에서부터 실천, 국내정세에서 군사정세, 공산당의 종지와 혁명전쟁의 특징에서 정치, 군사책략에 이르기까지 이야기했다. 마오는 군사문제에 관해 좌경 모험주의의 소극 방어와 방어에서 나타는 보수주의, 즉 진공 시의 모험주의와 이동할 때의 도망주의를 비판했다.

 

마오의 발언은 대다수 사람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왕자샹은 마오의 발언을 들은 뒤에 더욱 마오를 지지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왕자샹은 보구와 리더의 군사 지휘와 군사 이론상의 문제를 비판했다. 결국 회의는 마오와 왕자샹, 장원톈 등 3인의 발언을 기초로 다음과 같은결의를 작성했다.

 

() 5차 포위공격 소탕전은 군사 지휘에서 잘못을 저질렀다. 회의는 중앙 지도기구를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3인단과 보구, 리더의 군사지휘권을 취소한다. 주더와 저우언라이는 여전히 최고 군사수장으로서 군사를 지휘하며, 저우언라이는 당이 위임한 군사문제를 최후 결정하는 책임자다. 마오쩌둥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임명하고,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의 군사 지휘를 보좌한다. 장원톈은 쭌이회의 결의를 기초해 상무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지부에 보내 토론에 부의토록 한다. 장원톈이 보구를 대신해 중앙의 모든 책임을 관장할 수 있도록 권한을 명확히 규정한다. 중앙홍군은 쭌이회의 이후 면모를 일신했다. 당정군(黨政軍)의 최고 핵심기관인 ‘3인단을 없애고저우언라이마오쩌둥왕자샹을 축으로 한 비공식기구 3인단이 머리 구실을 했다. 저우가 형식적으로 군권을 장악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마오가 전투를 총괄 지휘하는 시스템이었다.

 

마오 군사전략의 백미 츠수이 전투

마오가 창안한 기동력을 생명으로 한 운동전(運動戰)으로 츠수이 강을 네 번씩 건너다니며 싸우는츠수이 전투가 시작되었다. 홍군이 윈난성 자시에 도착했을 때 국민당군의 쓰촨, 구이저우, 윈난, 후난군과 장제스의 직계부대 중앙군은 홍군을 추격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추격군의 후방이 비어 있었다. 홍군은 두 번째 츠수이를 건너 후방의 빈틈을 이용해 퉁주를 점령했다. 구이저우 군벌 왕자례는 급히 쭌이와 주변 일대의 부대를 동원해 러우산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홍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홍군 제3군단 제10, 11, 12, 13연대가 러우산관과 반차와 사이에서 왕자례군을 격파하고 그날 밤에 쭌이를 두 번째 점령했다. 중국에서는 츠수이 전투를 허허실실과 성동격서의 전술에 마오의 기민하게 치고 빠지는 운동전을 종횡무진으로 펼친 명전투로 평가하고 있다. 이로써 홍군은 진사장 상류에서 창장을 도강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중앙홍군, 홍군 제4방면군과 합류 / 북상 남하 논쟁 / 야심 드러낸 장궈타오

6 16, 주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장원톈 등의 명의로 이날 성명을 내어오늘 이후에 홍군 제1, 4방면군의 모든 방침은촨산간’ 3성을 점령해 소비에트 정권을 건립하는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중앙은 홍군 제4방면군을 통솔하고 있는 장궈타오에게 이런 내용의 전통을 보내 홍군의 미래 행동 방향과 임무에 대해 설명했다. 다음 날, 장궈타오는 당중앙에게 보낸 전통에서 “(홍군의) , 북쪽 발전 방침을 반대하고 쓰촨 서북쪽으로 나아가 아바에 주력을 집중한 뒤에 칭하이와 신장 쪽으로 진출해야 한다. 곤란할 경우 잠시 남쪽으로 진공(, 서진 또는 남하)해야 한다.”고 중앙과 다른 방침을 밝혔다.

 

6 18, 당중앙과 마오는 다시 장궈타오에게 전통을 보내 북상방침을 알렸다. 6 20, 당중앙과 마오는 장궈타오에게 또 전통을 보내 마오궁으로 와 전략방침을 상의할 것을 촉구했다. 마오와 주더, 저우언라이는 24일에 장궈타오를 만나기 위해 량허커우진에 도착했다. 6 25일 오전, 장궈타오는 량허커우진으로 달려왔다. 당중앙은 다음 날에 3일 일정의 정치국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마오와 저우의 의견에 동의했다. 장궈타오는 할 수 없이 자신의 견해를 포기해야만 했다.

 

마오와 장궈타오의 격돌

중앙 상무위원회는 장궈타오를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임명하고, 혁명군사위원회는 7월 초에 쑹판 공격 임무를 장궈타오에게 맡겼다. 장궈타오는통일 지휘조직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고의로 홍군 제4방면군의 북상을 지연시켰다. 또 장궈타오는 7 9일에 추종자들을 부추겨총사령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총사령부를 개조해 홍군 제4방면군의 천창하오를 홍군 총정치위원에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7 18, 천창하오는 주더에게 전문을 보내 장궈타오를 군사주석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권력을 장악하려는 장궈타오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중앙은 거부했다. 마오와 당중앙은 대국적인 관점에서 홍군 제4방면군 장사병들과의 단결과 장궈타오의 태도를 바꾸기 위해조직문제해결 요구에는 동의했다.

 

중앙정치국은 이날 다시 회의를 열었다. 저우언라이는 이 회의에서 큰 적을 앞에 놓은 상황에서는 단결이 우선이라며 홍군 총정치위원직을 내놓았다. 장원톈도 총서기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마오는 총정치위원직을 장궈타오에게 줄 수 있으나 당중앙의 직위인 총서기직은 불가하다고 반대했다. 혁명군사위원회는 7 18일에 주더를 총사령관, 장궈타오를 총정치위원으로 임명했다. 또 모든 군대는 노농홍군 총사령관과 총정치위원이 균등하게 직접 지휘를 통솔한다고 규정했다. 7 21, 혁명군사위원회는 또 전적 총지휘부를 만들어 홍군 제4방면군 수장인 쉬샹첸을 총지휘, 천창하오를 정치위원에 각각 임명하고 예젠잉을 참모장으로 기용했다. 중앙이 장궈타오를 설득하기 위해 권한을 대폭 홍군 제4방면군에 넘겨주는 조직상 중대한 양보를 한 것이다. 그런데도 장궈타오는 투정을 부렸다. 장궈타오는 홍군 제1방면군을 통제하면서 각 군단이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암호책을 회수하고서야 주더와 홍군 제4방면군을 인솔하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혁명군사위원회는 당중앙과 마오가 통솔하는 홍군 제1방면군을 우로군으로, 장궈타오와 주더가 이끄는 홍군 제4방면군을 좌로군으로 나누었다.

 

죽음이 어른거리는 대초지

중앙은 장궈타오가 남하(또는 서진) 주장을 견지하며 힘겨루기를 하는 바람에 두 달가량의 중요한 시기를 쟁론으로 허비해버렸다. 장제스는 이 두 달 동안 홍군이 마오얼가이에서 북상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3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마오얼가이에서 서북방향의 모든 중요 도로를 차단할 수 있는 3겹의 봉쇄선을 구축했다. 참고로 장제스는 홍군이 초지(늪지대)를 통해서 북상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의표를 찔러 초지를 통과해 북상한 뒤산간지역으로 갈 것을 주장했다.

 

탈신지계

1935 8 26, 홍군은 6일간의 사투 끝에 초지를 벗어나 바시지구에 도착했다. 바시에서 간쑤성 남쪽에 도착한 중앙과 마오는 바오줘를 공격하기로 했다. 쉬샹첸과 천창하오는 중앙의 건의를 받아들여 8 29일에 전투를 벌여 30일에 바오줘를 점령했다. 바오줘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때 소집된 정치국 회의에서 마오는 유리한 전투 상황을 틀어쥐어 간난으로 북상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장궈타오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마오는 쉬샹첸, 천창하오와 협의해 장궈타오의 좌로군이 빨리 북상하도록 재촉했다. 9 3, 장궈타오는 중앙에 전보를 보내 거취허의 물이 불어 좌로군을 이끌고 가기 어렵다는 빌미를 내새워 중앙의 계획에 따라 행군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9 8, 저우언라이가 머물고 있는 거처에서 정치국 비공식 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저우언라이, 장원톈, 보구, 쉬샹첸, 천창하오, 마오쩌둥, 왕쟈샹 등 7인이 연명으로 장궈타오에게 전보를 보내 다시 북상을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9 9, 장궈타오는 중앙에 보낸 전문에서 다시 북상을 반대하고 남하를 주장했다. 그날 중앙은 장궈타오에게 전보를 보내중앙은 간절하게 요구한다. 현재 북상만이 출로가 있다.”고 장궈타오를 설득했다. 장궈타오는 중앙의 북상방침을 거부하고 도리어 이날 천창하오에게 전보를 보내 우로군의 남하 명령을 내려 홍군을 분열시키고 중앙을 해코지하려 했다.

 

전적위원회 총지휘부 참모장 예젠잉은 이런 내용의 전보를 입수하고 즉시 마오에게 보고했다. 마오는 천창하오와 같이 있는 예젠잉이 위험에 처할 것을 고려해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마오는 회의를 열어 제1, 3군단을 먼저 북상토록 결정했다. 몸을 빼내는 계책이었다. 마오는 곧바로 쉬-천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시치미를 떼고 쉬샹첸과 천창하오를 찾아가 그들의 의중을 떠보기로 했다. 쉬샹첸은 홍군 제1, 4방면군이 합류했는데 갈라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마오는 이어 천창하오를 찾아갔다. 천창하오는 마오에게 장궈타오가 남하하라고 보낸 전문 얘기를 했다.

 

천창하오와 헤어진 마오는 장원톈, 저우언라이, 보구와 함께 저우의 거처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중앙의 북상방침을 관철하고 홍군 내부에서 발생 가능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밤을 도와 제1, 3군단과 혁명군사위원회 종대 일부, 홍군학교 관계자들이 신속하게 북상해 간난(甘南)으로 행군할 것을 결정했다. 마오는 북상하는 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예젠잉을 천창하와에게 보내서, 남하를 위한 양식이 필요한 만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부대를 동원해 양식 준비를 하겠노라고 그를 속이도록 했다.

 

홍군이 어찌 홍군을 공격할 수 있나 / 포의 원수 쉬샹첸

아침에 제1, 3군단이 북상한 사실을 알게 된 쉬샹첸과 천창하오는 대경실색했다. 천창하오는 쉬샹첸에게홍군 제1방면군 부대가 이동했다. 우리가 부대를 파견해 그들을 추격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펄펄 뛰었다. 하지만 쉬샹첸은홍군이 홍군을 공격하는 게 도리라 할 수 있겠는가. 절대 공격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한편 천창하오는 리터에게 일군의 기병대를 거느리고 추격해 남하를 권유하도록 명령했다. 리터는 마오 부대를 추격해 따라잡은 뒤에 큰 소리로원래의 홍군 제4방면군 동지들은 돌아와라. 기회주의자들과 북상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마오는북상은 정치국이 결정한 것이라고 설득했다. 리터는 마오의 말을 듣지 않은 채 홍군 제4방면군 장병들을 강제로 데려가겠다고 겁박했다. 마오는 리터한테 장궈타오와 천창하오에게 전해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북상방침은 정확하다. 부대를 인솔해 함께 가기를 희망한다. 만약에 일시적으로 생각이 미치지 않아 어쩔 수 없으면 나중에라도 깨달아 북상하면 중앙은 환영한다.” 이렇게 해서 북상하려는 사람들은 북상하고, 남하하려는 사람들은 반여우로 돌아갔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자 당중앙은 장궈타오의 이런 행위는 스스로 당과 중국혁명을 배척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강력 비판했다. 마오의 말대로 남하는 출로가 없었다. 장궈타오가 남하해 근거지를 세우겠다는 전략은 처참하게 깨졌다. 점차 홍군 제4방면군 장병들은 현실 상황을 통해 북상이 정확했다는 것을 인식했다. 량허커우 회의 이후 1년 뒤에 허룽이 통솔한 홍군 제2, 6군단과 홍군 제4방면군은 간쯔에서 합류했다. 합류한 홍군 제2, 6군단과 제4방면군은 주더와 런비스, 허룽 등의 투쟁으로 장궈타오가 동의해 마침내 중앙이 있는 산베이로 북상, 합류하게 된다.

 

막 내린 공전절후의 25천 리 장정 / 장정 최후의 전투

1935 8, 척박한 황토고원이 끝없이 펼쳐진 산베이 지역. 쉬하이둥과 청쯔화가 홍25군을 이끌고후베이-허난-안후이소비에트 근거지를 출발해 산난을 거쳐 장정 종착점인 산베이에 도착했다. 시중쉰과 산간 변계 군사위원회 주석 류징판이 융닝산에 나아가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9월에 홍25, 26, 27군이 합쳐 제15군단으로 개편해 쉬하이둥이 군단장, 류즈단이 부군단장 겸 참모장에 각각 임명되었다. 그때 중앙홍군의 장정은 간쑤성 경내로 들어와 류판산을 넘고 있었다. 홍군 제1방면군 선두부대가 우치전에 도착했을 때 홍군 후미부대를 추격하는 일단의 국민당군이 있었다. 국민당군 동북군의 기병부대였다.

 

홍군 진영에서는 이들과의 전투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설왕설래 끝에 중앙은 전투를 하기로 결정하고, 전투 지휘는 펑더화이가 하기로 했다. 펑더화이는 정면에서 적과 대치하면서 주변 곳곳에 병력을 매복시켜 포위공격하는자루전술로 국민당군을 격파하고 장정 최후의 전투를 승리로 장식했다. 이로써 1년여의 기나긴 홍군의 전략적 대이동인 2 5천 리 장정이 마무리됐다.

 

시안사변

 

장제스 구금 세계가 놀라다

1936년 시안. 서북군 공산당 포위공격 소탕전 부사령관 겸 동북군 사령관 장쉐량과 산시 제17로군 사령관 양후청은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장제스의양외필선안내(먼저 국내를 안정화시킨 뒤 외적을 물리친다. 즉 공산당을 먼저 섬멸하고 일본과 싸운다)’ 정책을 반대했다. 이들은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홍군과 힘을 합쳐 먼저 일본군을 물리쳐야 한다는 뜻을 견지하고 있었다. 장쉐량과 양후청은 시안에 온 장제스를 만나 다시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에 나설 것을 건의했으나 장제스는 들은 척도 않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 12 12, 장쉐량과 양후청은 마침내 병란을 일으켰다. 시안 일대를 장악한 이들은 오전 6시께 동트기 직전 장쉐량의 친위병력을 화칭츠에 투입해 장제스의 경호대를 제압했다. 잠결에 총소리를 듣고 놀란 장제스는 화칭츠 뒷산 뤼산으로 달아나 바위 밑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억류되었다.

 

장쉐량과 양후청은 8개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난징정부를 개편해 각 당, 각 과를 참여시켜 구국정부로 재조직하며, 모든 내전을 중지하고 애국적 지도자를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시안사변이 터지자 중국인들은 경악했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면서 무력충돌의 내전 위험성도 한층 높아졌다. 장쉐량과 양후청은 바짝 긴장했다. 이들은 시안사변이 터진 새벽에 연명으로 마오쩌둥과 중공중앙에 전보를 보내 항일구국의 대계를 상론하고, 구금한 장제스 문제를 풀어가자며 공산당에 대표 파견을 요청했다.

 

마오는 급히 중앙 지도자 회의를 소집했다. 저우언라이, 장원톈, 보구, 주더, 장궈타오 등이 잇따라 마오쩌둥의 동굴집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전보를 돌려 본 뒤에 시안사변 처리방침에 관해 논의했다. 대부분 장제스를 죽여야 한다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장궈타오도장제스를 죽여야 한다.”고 흥분했다. 하지만 마오는민족의 근본이익에서 출발해 국내외 복잡한 형세를 전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며 장궈타오의 주장을 일축했다. 12 13, 공산당은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어 시안사변의 예측과 대책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주더, 마오, 저우언라이, 장원톈, 장궈타오, 보구, 린뱌오 등 12명이 참석했다.

 

12 15, 중공중앙은 마오가 서명한홍군 장령이 시안사변에 관해 국민당 정부에 보내는 전보를 발표했다. ‘전보는 장쉐량과 양후청이 발동한 병간을 정의감에서 나온 것으로 평가했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장제스가 대외적으로 양보하고, 대내적으로 군사를 부리면서 민중을 압박하는 3대 과오정책의 당연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했다. 또 장, 양 두 사람이 요구한 8개항을 지체 없이 시행하고, 내전 발동 중지를 촉구해 난징정부가 장쉐량과 양후청을 토벌하려는 움직임에 쐐기를 박았다.

 

한편 장제스가 억류된 뒤 난징정부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국방부장 허잉친, 왕징웨이 등 친일파들로 장, 양 응징론을 내세우며 시안으로 쳐들어가야 한다고 강경론을 폈다. 이들의 속내는 장제스의 안위보다 권력을 탈취할 절호의 기회로 여겨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반면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과 그의 오빠 쑹쯔윈 등 장제스 측근들은 장제스의 안위문제는 물론 권력의 추가 왕징웨이 등으로 쏠릴 것을 우려해 시안 출병을 반대하고 있었다. 마오와 중앙지도자들은 17일에 저우언라이를 대표로 하는 중공대표단을 시안으로 파견했다. 저우언라이는 시안에 도착한 뒤 곧바로 장쉐량과 회담을 했다. 그리고 22일에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과 쑹쯔윈 등 난징 협상대표 일행이 시안에 도착했다.

 

다음 날에 저우언라이는 공산당 전권대표로서 장쉐량, 양후청과 쑹메이링, 쑹쯔윈 남매간에 벌이는 담판에 참여했다. 저우언라이는 회담이 끝나자 쑹메이링 남매와 장제스를 만나러 갔다. 저우는 장제스를 면담한 뒤에 중앙에 3차례 전보를 보내공산당 포위공격 소탕전을 중지하고 홍군과 연합해 항일전쟁을 하기로 했다. 통일중국에 노력하며, 장제스의 지휘를 받는다. 장제스, 쑹 남매와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그들이 난징에 돌아간 뒤에 내(저우언라이)가 직접 가서 담판하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개괄적 합의를 이끌어낸 저우언라이는 24일 밤에 장제스를 면담했다. 장제스는 이미 합의한 공산당 포위공격 소탕전 중지와 일본에 항전하기 위해 공산당과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12 25, 풀려난 장제스는 시안사변의 주역 장쉐량을 대동하고 난징으로 돌아갔다. 시안사변을 일으킨 양후청 등 장군들과 저우언라이는 장쉐량이 난징에 가면 장제스의 보복을 받을 것을 우려해 난징행을 극구 말렸다. 하지만 장쉐량은 사변의 목적을 달성했고, 결과적으로항명을 한 만큼 군인으로서 당당하게 처벌을 받겠다며 난징행을 고수했다. 장쉐량은 난징에 도착하자마자 체포, 연금되어 중국 대륙과 타이완에서 55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 동안 유폐생활을 해야 했다.

 

국공항일 통일전선

 

핑싱관 전투 영웅이 된 린뱌오

시안사변의 후속 조처로 1937 2 19, 난징정부와 중공중앙은 항일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데 묵시적 협약을 체결했다. 중공중앙은소비에트 정부중화민국 특별지역으로 변경해 이 지역에서 보통선거 제도를 시행하고, 지주 재산의 몰수 정책을 폐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이를 바탕으로 국민당과 중공중앙 간에 느슨한 형태의 항일연합이 결성되었다.

 

한편 1937 7 7일 밤, 일본군이 베이핑 서남쪽의 마르코폴로 다리로 불리는 루거우차오에 주둔한 국민당군을 기습공격해 전면적인 중국 침략전쟁이 터졌다. 마오와 주더 등 홍군 지도자들은 장제스에게 전문을 보내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적과 싸워 국가를 보위하고 국토를 보전하겠다.”는 홍군 장병들의 바람을 전달했다. 7 8일에 최종 협약이 체결되어 국공 양당의 제2차 합작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8 13,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장제스는 21일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814일에 홍군은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재편성되어 형식상으로는 산시군벌 옌시산이 지휘하는 국민당군 제3전구에 소속되었다. 하지만 팔로군은 사실상 독자적인 지휘권을 갖는 독립부대로 총사령관 주더, 부하령관 펑더화이의 지휘 아래 홍군 4 5천 명의 3개 시단으로 구성되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9 22일에 제2차 국공합작을 공식 선언했다. 산시전선에 투입된 팔로군은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해 일본의 기세를 꺾어 홍군의 위세를 드높였다. 팔로군은 여세를 몰아 전국의 인민과 연전연패하는 국민당군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한 본격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팔로군의 전략적 총지휘는 옌안에 있는 마오가 맡았다. 팔로군의 전쟁터가 된 곳은 핑싱관이었고, 린뱌오가 통솔한 제115사단 주력은 매복 작전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핑싱관 전투는 화베이 지구에서 중국 군대가 처음으로 거둔 승리여서 상징적 의미가 컸다. 그리고 대첩을 이끈 린뱌오는 일약 중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한편 전쟁 형세는 마오가 예측했던 대로 산시 동쪽 방면의 냥쯔관 방어선이 엄중한 위험에 직면했다. 냥쯔관 방어선을 지키고 있던 국민당군은 일본군에 의해 배후가 끊길 것을 두려워해 앞다투어 철수했다. 일본군은 신속하게 핑딩, 양취안, 시양 일선을 점령했다. 냥쯔관에서 철수한 국민당군은 통일 지휘가 흔들리면서 효과적인 방어능력을 구축하지 못해 패색이 짙어졌다. 11 2, 웨이리황은 신커우 진지에서 철수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11 8일에 타이위안이 함락되었다.

 

흠차대신 왕밍의 귀국

1937 11, 일본군이 잇따라 상하이와 타이위안을 함락시켜 광활한 국토가 일본군 수중에 떨어졌고, 전국적으로 항전에 많은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내적으로는 친일파로 변신하는 민족 투항주의가 고개를 들고, 공산당 안에서는 계급 투항주의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11 7일에 왕밍이 모스크바에서 옌안으로 귀국하면서 복잡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왕밍은 1923년 상하이대학에 들어가 1925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해 모스크바 중산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소련으로 가 코민테른 지도자 미프를 만나 통역원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미프의 도움으로 ‘28인의 볼셰비키로 알려진 중산대학 중국인 학생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1931, 상하이에서 열린 중공중앙 제6 4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에 파견된 코민테른 대표 단장 미프의 도움으로 정치국 위원으로 진입했다. 그 후 총서기로 선출된 샹중파가 6개월 뒤 처형되자 24세의 나이로 공산당 총서기가 되었다. 왕밍은 그해 918사변 뒤 모스크바로 돌아가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대표단 단장이 되었다. 왕밍은 또 코민테른 집행위원에 당선되어 주석단 위원과 서기처 서기에 임명되었다. 왕밍은태상황으로서 4년 동안 좌경적 공산혁명 노선을 부르짖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1937 11 7, 왕밍이 옌안에 도착할 때 마오는 소련과 코민테른의상방보검을 가진흠차대신왕밍을 마중하러 직접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옌안 비행장에서 처음으로 상면했는데, 마오와 왕밍이 악수하는 순간 투쟁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오와 왕밍에 대한 코민테른의 태도도 미묘한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왕밍은 이런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공개적 장소에서는 마오의 지도적 지위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나 내심으로는 불복했다.

 

12 9일부터 14일까지 옌안에서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왕밍은 회의에서 항전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항일 민족통일전선 견지를 주장하며 중앙과 마오를 비판했다. 왕밍은 또항일은 모든 것들 가운데 제일 중요하다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민주, 민생 문제 해결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오는 왕밍의 연설에 깜짝 놀랐다. 마오는 만약에 왕밍이 제기한 주장대로 항일전쟁과 항일 민족통일전선 공작을 전개한다면 이는 천두슈의 전철을 밟아 대혁명 실패의 역사적 비극을 재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정치국 회의는 왕밍과 천윈, 캉성을 중앙서기처 서기로 임명했다. 또 중앙인사와 관련해 코민테른의 의견을 받아들여 집단 지도체제를 실시해 장원톈은 당무 등 일상 업무를, 마오는 군사문제, 왕밍은 통일전선 분야를 각각 책임지고 이끌어가도록 했다. 또 저우언라이, 왕밍, 보구, 예젠잉을 중공 대표단으로 구성해 국민당과의 회담을 책임지도록 했다.

 

마오와 왕밍이 공개적으로 정면충돌을 벌이지는 않았으나 수면 아래의 격렬한 투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마침내 참다못한 마오가 왕밍의 잘못된 주장을 견제하고 나섰다. 마오를 우두머리로 하는 중앙서기처는 3 25일에중공중앙이 국민당 임시 전국대표대회에 보내는 축하 전문에서 왕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민주와 민생에 대한 요구를 제기했다. 왕밍은 불만을 품고 이 전문 공표를 보류했다.

 

마오는논 지구전(論持久戰)’을 발표해 팔로군, 신사군 및 유격전쟁의 중요한 구실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왕밍의 걱정과 불만의 도화선이 되었다. 우한에서 통일전선 공작을 하고 있던 왕밍은 마오가논 지구전신화르바오에 발표하려 할 때 동의를 거부하고 소책자로 인쇄토록 했다. 또 왕밍은 비밀리에 소련인을 찾아가 마오의 행태를 스탈린과 코민테른 대표 드리트로프에게 전해 코민테른이 조직에 관여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의 부탁을 했다. 마오와 왕밍의죽기 살기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처럼 마오와 왕밍의 충돌이 격화되고 공개화되는 상황에서 3월의 정치국 회의는 런비스를 모스크바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코민테른에 중국공산당의 상황과 항일전쟁의 형세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4 14, 런비스는 코민테른에 중앙이 작성한중국 항일전쟁의 형세와 중국공산당의 공작과 임무제목의 서면 보고를 제출했다. 그런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주석단은 6 11일에 회의를 열어 항전 이래 중공의 정치노선이 정확했다고 추인했다. 그리고 얼마 뒤 런비스가 코민테른 중공 대표단 단장으로 모스크바에 있던 왕자샹의 임무를 대신하고 왕자샹이 귀국키로 했다.

 

코민테른 대표 드미트로프는 왕자샹을 만나 중국공산당 전체 당원에게 마오쩌둥을 중앙의 지도자로 지지하도록 전해줄 것을 지시했다. 드미트로프는 마오가 실제 투쟁하면서 단련되고 성장한 지도자라면, 왕밍은 현장공작 경험이 부족해 영수로서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귀국한 왕자샹은 1938 9월에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드미트로프의 담화를 전달했다. 승부는 끝났다. 서슬 퍼렇던 왕밍의상방보검(尙方寶劍)’은 빛을 잃었다. 코민테른이라는 뒷배를 잃은 왕밍은 끈 떨어진 쪽박신세가 되었다. 반면 코민테른의 지지를 받은 마오는 공산당 내에서 지도자 지위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 대륙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다시 시작되었다.

마오쩌둥은 3년여의 전투 끝에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승리를 거두고

1949년 3월 베이징에 입성했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그런 마오쩌둥은 누구인가?

 

현대 중국의 건설자 마오쩌둥은

청나라 말엽인 1893년

후난성 샹탄현 샤오산충에서 태어났다.

그는 신중국 창시자,

무산자 혁명가,

걸출한 군사전략가,

시인이자 서법가

등으로 불린다.

그런가 하면 20세기 진시황,

철권 독재자 등 무한권력을 휘두른

영원한 주석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여전히 진행형으로,

더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지》는 중국 근현대사

100년의 혁명을 조감하고 있으며,

상권, 중권, 하권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 책은 상권으로, 신해혁명 이후

군벌의 난립 속에서 구국제민(救國濟民)과

새로운 중국 건설을 열망하는

중국공산당의 생성과정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벌이는 혁명투쟁을,

그 자체로 중국공산당의 혁명 역사인

마오쩌둥과 주변 인물들의

생애를 중심으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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