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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열전 황제 - 샹관핑 지음

삼생지연 2021. 2. 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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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열전 황제 샹관핑 지음 / 차효진 옮김 달과소 / 2008년 1월/

1. 선정을 베푼 제왕들

 

부모 형제라도 공정하게 법을 시행한 제왕

제왕의 친척과 외척은 종종 법률의 구속을 받지 않는 특수한 사람들이다. 우둔한 군주가 제위에 오를 때마다 이들은 항상 위를 기만하고 아래를 능멸하며 나쁜 짓을 일삼았다. 그 결과 왕조에 끊임없는 분란과 화를 가져왔고, 제왕 본인에게도 커다란 비극을 초래하였다. 그래서 현명한 제왕들은 황제 일가의 위법행위에 대해 차별을 두지 않고 엄중하게 처벌하였다.

 

명 태조 주원장의 친척들에 대한 결연한 자세는 유명하다. 그는 세수를 늘리기 위해 민간이 차를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때 주원장의 사위인 구양륜이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차를 밀매하고 이를 조사하는 관리를 모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화가 난 주원장은 황후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구양륜을 참수하였다. 이 사건은 조정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또한 주원장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친인척들은 이후로 행동을 극히 조심했으며, 차의 불법 매매는 막을 내렸다.

 

수의 문제 양견은 중원 통일에 큰 공을 세운 셋째 아들이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법을 어겨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키자 매우 화가 나서 모든 관직을 삭탈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해 신하들이 너무 가혹하다며 어명을 거둘 것을 주청했지만 그는 끝내 의견을 바꾸지 않았다. 다섯 아들의 아버지로 만약 내가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면 어느 아들이 법을 지키겠는가? 양견은 법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았으니, 이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조시대의 제왕에게는 매우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오대십국 시기 오월의 시조 무숙대왕 전류는 외척들을 매우 엄격하게 대했다. 그는 정비를 매우 총애하였는데 정비의 부친이 큰 죄를 저지른다. 전류는 엄중히 처벌하기로 마음먹지만 신하들은 그가 정비를 총애함을 알고 정비 부친의 허물을 덮어주는데 급급했다. 이에 화가 난 전류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어찌 나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는가!라며, 좌우에 어명을 내려 정비의 부친을 곧바로 참수했다. 뿐만 아니라 정비도 같이 죽였다. 혼란스런 시기에 오월이라는 이 작고 작은 왕조는 70년이나 계속되었는데, 이는 그가 국법으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기 때문이다.

 

간언을 잘 받아들인 제왕

봉건왕조에서 성세를 연 제왕들은 간언을 중시하였고, 이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당 태종 이세민이다.  제왕은 천하를 지배하는 사람이나 결점 없는 존재가 아니기에 간언이 필요하다는 그의 생각은 통치기간 내내 유지되었다. 서기 630년 이세민은 병사들을 징발하여 건원전을 짓도록 하였다. 대신들은 이를 국민을 혹사시키고 물자를 낭비하는 일로 여겼다. 이에 장현소가 상소를 올려 후세에 커다란 웃음거리가 되는 일이다라고 간언 하였다. 이세민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생각지 못한 것인데 이렇게 된 것이었구나라며 건원전 공사를 중단시키고 비단 오백 필을 하사하여 그의 간언에 대한 표창을 하였다.

후당의 이존욱도 간언을 받아들이는데 있어 찬양할 만하다. 그는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여 백성들의 밭을 짓밟는 일이 허다했다. 이는 모든 대신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어느 날 그가 사냥을 나갔을 때 하택이라는 신하가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이존욱의 앞을 막고서 간언을 올렸다. 하택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이존욱은 화를 거두고 기쁘게 사냥을 중단하였다. 이존욱은 통치기간 중에 쓸데없이 공신들을 죽이거나 적합하지 않는 상벌을 하는 등 종종 실수를 저질렀으나, 동시에 신하들의 간언을 잘 받아들여 사냥으로 백성들의 밭을 망치는 것을 멈추었으니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간언에 대해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제왕이다. 어느 날 그가 새를 잡고 있었는데 어떤 대신이 급한 일이라며 보고를 올렸다. 들어보니 별로 급한 일이 아니어서 따져 묻자 대신은 새를 잡는 것보다 급한 일이라 생각됩니다라고 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격노한 조광윤은 도끼 손잡이로 대신의 입을 때려 치아 두 개가 부러져 버렸다. 대신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치아를 주웠다. 이를 보고 조광윤이 물었다. 부러진 치아로 나를 고발하려는 것이냐? 소신이 폐하를 고발할 수 없으나 사관들은 당연히 사건을 사서에 기록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대신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조광윤은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에 유감의 뜻을 표하고 상금으로 비단을 하사하였다. 이 사건 뒤로 조광윤은 대신들의 건의와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였다.

 

사람을 잘 알아보고 쓰는 제왕

출신에 의해 사람을 선택하고 쓰는 것은 인재를 억눌러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왕조시대의 폐단이다. 이 때문에 우매한 제왕은 많은 인재를 잃었다. 그러나 현명한 제왕은 필요하다면 가문과 출신을 따지지 않고 대담하게 기용하여 역사에 미담을 남겼다. 한무제 유절은 재능 있는 인재를 출신가문에 상관없이 기꺼이 받아들여 임용하였다. 위청, 곽거병 등이 바로 그들이다.

 

노비 출신이었던 위청은 누나인 위자부가 유절의 후궁이 되면서 궁중에 들어가게 된다. 유심히 위청을 보아오던 유절은 그의 성품이 소박하고 성실하여 나중에 큰 인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태중대부에 임명한다. 위청은 후에 전한왕조의 유명한 장군이 되었는데 흉노를 토벌하는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위청의 생질 곽거병도 노비였다. 어릴 때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익숙했던 그는 외삼촌 위청을 따라 흉노를 토벌하는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흉노의 주 세력을 격파하여 한군 최고의 통솔자가 되었다. 당시 계속되던 흉노의 침입으로 골치를 썩던 한 왕조는 위청과 곽거병 이 두 사람의 용기와 계략으로 위기를 넘기고 크게 발전하게 된다.

 

송 태조 조광윤 또한 인재의 발견과 사용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는 재능은 출중하나 이력이 낮은 사람을 선발해 중책을 맡겼고, 동시에 그들의 장점과 재능을 기억해 두었다가 관직에 공석이 생기면 기억해 두었던 관리들의 장단점에 의거해 알맞은 사람을 임명했다. 그는 중용한 인재를 매우 존중하였다. 특히 개국공신인 재상 조보를 매우 신임하여 큰일이 있으면 항상 조보와 상의하였고, 심지어 밤길에 조보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에 조보는 집에서도 의관을 감히 벗지 못했다. 제왕의 신분이었지만 그는 신임하는 사람 앞에서는 잘난 체 하지 않고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였다. 때문에 조광윤의 주위에는 인재가 수두룩했으며, 이들과 함께 중원을 통일하는 위업과 송 왕조를 건립할 수 있었고, 중국 역사상 손가락에 꼽는 현명한 제왕이 되었다.

 

 

 

2. 놀기에 바쁜 제왕들

 

술을 목숨처럼 여기는 제왕

술은 제왕에게 있어 어떤 음료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하나의 향락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일단 술에 빠져 자제가 안 되면 총명한 제왕도 이성을 잃고 방탕하게 변한다. 술로 인해 품었던 큰 뜻을 잃고 죽음에 이른 역사의 예가 적지 않다. 북제의 건립자 무선제 고양이 전형적인 예이다. 고양은 건립 초기에는 법을 정비하고 적극적인 치세를 펼쳤다. 그러나 나라가 안정되자 술에 빠져 제 멋대로 행동하고 난폭해졌다. 그는 술에 취하면 머리를 풀어 헤치고 혼자 춤추고 노래하며 온 밤을 지새웠다. 음탕한 여자를 모아놓고 구경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알몸을 드러내고 밖으로 걸어 다니기도 하였다.

 

이것뿐만 아니었다. 술에 취하면 황후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고 부녀자를 간음하였다. 일단 그의 눈에 띄면 친족이라 할지라도 모욕을 면치 못했다. 또한 술에 취해 사람 죽이는 것을 장난으로 여겼고, 죽은 자가 많으면 불로 태우고 물에 던지기도 하였다. 한번은 고양이 온종일 술을 마시니 정말 즐겁구나라고 말하자 한 신하가 큰 즐거움 뒤에는 큰 고통이 있습니다라고 한탄하였다. 고양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신하는 음주로 나라가 망하고 스스로 죽은 것을 깨닫지 못하니 이것이 큰 고통입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지나친 음주로 인해 고양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졌고 나중에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고 오직 술만 마시다가 죽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31세였다.

 

술을 탐하다 아예 조정대사를 내팽개친 제왕들은 나중에 사람들에게 폐위되어 죽기도 하였다. 전진의 역왕 부생은 제위에 오르자마자 음주에 빠졌다. 태만하여 정사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온종일 술이 거나하게 취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또한 취중에 대사를 결정하고는 나중에 이를 시비 삼았으며, 한밤중에 술에 취해 시찰을 나가 살육을 저질렀다. 한번은 조정대신들과 연회를 베풀다가 상서령 신로가 권한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그를 활로 쏴 죽였다. 이에 문무백관들은 두려움에 떨며 술을 따라 연거푸 마셔댔다.

 

또한 그는 시종의 얼굴 가죽을 벗겨내고는 그에게 노래하며 춤 출 것을 명령하기도 하였다. 대신들이 옆에서 재미있다고 말하면 아첨한다고 죽였고, 형벌이 너무 가혹하다고 말하면 불충하다고 죽였다. 부생의 이 같은 악행은 대신과 황실의 강력한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결국 부생의 사촌 동생 부견이 병사들을 이끌고 황궁으로 돌진하였다. 병사들이 부생의 침실에 들이닥쳤을 때도 그는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 부견은 병사들에게 명하여 술고래를 끌어내 가둘 것을 명하고 폐위되었음을 선포하였다. 부견은 제위에 오른 얼마 후 부생을 제거하였다, 죽기 직전에도 이 무뢰한은 여전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2세였다.

 

천성이 잔인한 제왕

역대 제왕들 중에는 잔인한 폭군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승냥이처럼 잔인한 성격을 가졌으며 너무나도 악독했다. 인간성이 심각하게 비뚤어져 버린 이들은 늘 타인의 생명을 한낮 초목처럼 여겼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들이 사용했던 형벌의 가혹함은 지금 읽어도 여전히 두려움에 떨리는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유송 왕조의 황제 유욱은 즉위할 때 만 10살이었지만 심성은 아주 잔인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신하는 무조건 때렸으며, 맨발 바람으로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있게 하였다. 또한 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넘어가지 않았고, 늘 형벌 도구들이 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는 형구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는데 집게나 망치, 송곳, 톱 등이 손에서 떨어질 날이 없어 머리를 깨거나, 몸을 뚫거나, 심장을 파내 죽인 자가 하루에도 수십 명이나 되었고, 늘 질퍽한 피범벅 속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그가 외출을 할 때면 부하들이 창을 들고 따랐는데 행인과 남녀는 물론 개와 말, 소 등의 짐승들도 그와 마주치면 살아남지 못했다. 유욱은 포악무도한 성격으로 인해 5년 동안 황제자리에 있다가 결국 부하에 의해 침실에서 살해당했다.   

 

후세에게 욕을 먹는 살인마들은 종종 호기심에서 살인의 동기를 찾는다. 상 왕조의 마지막 황제 주가 그러한 인간이다. 어느 겨울 주와 그가 총애하는 왕비 달기는 한 사람이 맨발로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살기가 발동한 주는 사람을 시켜 그를 잡아오게 한 다음 맨발로 얼음 위를 왜 그렇게 잘 걷는지 모르겠다며 발 뼈를 부수게 했다. 그는 태아가 뱃속에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보기도 하고, 뼈의 골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 위해 대신 조섭의 허벅지를 칼로 도려내기도 하였다.

 

주왕이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였지만 달기는 더욱 자극적인 것을 원했다. 그는 동으로 된 둥근 기둥에 기름을 바른 뒤 뜨거운 목탄 위에 눕혀놓고 죄가 있는 자들이 걷게 했다. 발이 미끄러워서 불속에 떨어지면 주와 달기는 서로를 쳐다보며 좋아했는데, 이를 포락지형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주왕은 미친 듯이 날뛰며 살인을 일삼았는데, 대신과 친척들도 그의 손길을 피해가지 못했다. 하루는 대신인 희창이 폭정에 불만을 보이자 옥에 가두고 희창의 아들 희고를 죽여 고기를 희창에게 먹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몇 년 뒤 희고의 동생 희발이 목야 전투에서 주의 군대를 대파하자 주는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희발은 그의 시체를 참수하여 백기에 걸어 놓았다. 달기 또한 같은 운명이었다.

   

궁녀가 많았던 제왕

역사를 살펴보면 대다수의 제왕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여색을 마음껏 탐하였다. 후궁에는 많은 미녀들이 있었고, 그 미녀들을 약탈하는 수단은 매우 잔혹했다. 제왕들은 허황되고 인성이 없었으니, 중국 역사 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도 영원한 치욕으로 남았다. 오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손호는 후궁에 이미 5천명의 궁녀가 있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부하를 보내 여자들을 약탈했는데 2천 명의 조정대신 딸들을 조사해 나이가 15~16세가 되는 여자를 선발하게 하였다. 선발에서 탈락하면 비로소 시집을 갔다. 다시 말해 예쁘장한 소녀는 잡아가고 선택되지 않은 아이들만 시집을 갈 수 있었다. 자신의 음탕함을 채우기 위해 손호는 이렇게 잔혹하고 무정하였다.

 

서진의 무제 사마염도 탐욕스런 색마였는데 만여 명의 궁녀를 거느렸다고 한다. 너무 궁녀가 많아 매일 밤 어느 곳에 묵어야 할지 고민했고, 총애하는 여자가 많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매일 밤 궁녀들은 대나무 잎을 문에 끼우고 소금을 땅에 뿌려놓고 황제의 마차를 기다렸다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사마염이 양이 끄는 마차를 타고 가다가 어느 궁녀의 거처에 멈춰서면 그곳에서 잠을 잤는데, 궁녀들은 총애를 얻기 위해 대나무 잎을 문에 끼우고 소금을 뿌려(양이 소금을 좋아함) 마차가 자신의 처소에 멈추도록 했다는 것이다. 지나친 여색으로 원대한 꿈을 잃어버린 사마염은 정사를 태만히 하고   연회에만 몰두하다 결국 황천길로 가고 만다.

 

당나라 현종 이융기는 4만 명의 궁녀를 거느렸다. 당시 궁녀를 뽑는 관리를 화조사라 불렀는데 이들은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업고 이곳저곳에서 술을 마시고 여자를 겁탈했다. 이렇게 끌려온 부녀자는 극소수만이 황제의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고, 나머지는 후궁에서 하녀나 노예가 되었다. 이융기는 엄청난 수의 궁녀를 끌어 모은 다음, 이번에는 매일 어디서 잠을 잘지를 근심하였다. 그는 매일 궁녀들을 소집하여 주사위를 던지게 하고 어떤 궁녀가 이겼는지에 따라 그날 밤의 처소를 결정했다. 당시 환관들은 이 주사위 놀이를 좌각매인이라고 불렀다. 매일 이렇게 놀아도 수많은 궁녀들은 황제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다. 이융기는 한 번 잠자리를 한 궁녀의 팔뚝에 풍월상신이라는 흔적을 남겨, 매일 다른 궁녀와 음란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역사적으로 보기 드문 방탕한 생활이었다.

 

3. 제왕의 운명

 

재임이 짧은 제왕

중국 역사에서 재위기간이 짧은 제왕을 살펴보면, 왕조의 붕괴가 가까워질수록 정치는 부패해지고 내부는 동요되어 제위를 탈취하려는 투쟁이 점점 참담해진다. 이런 현상은 후한 막바지와 대분열시기인 남북조 시대에 특히 두드러졌다. 통치 집단과 백성들 간의 모순이 첨예해지고, 왕조내부의 권신들과 군벌이 패도를 일삼아 정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서기 349년 후조는 짧은 1년 동안 참담한 내부투쟁으로 네 번이나 왕이 바뀌었다. 망나니였던 3대 제왕 태조 석호가 병사하자 어린 아들 석세가 제위를 이었다. 그러나 33일 후 석세는 승상 석준에 의해 퇴위되어 살해되었고, 석준이 제위에 오른다. 그러나 좋은 날도 잠시, 183일이 지나 석준은 형제 석감과 대장군 난민이 일으킨 정변으로 살해당한다. 석감이 정변을 통해 옥좌에 앉자 난민은 불만을 품고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 결국 석감과 그의 조카 38명을 모두 살해한 난민은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난위로 고친다. 2개월 후, 이 소식을 들은 석감의 동생 석지는 양국(현 하북성)에서 스스로 제위에 오른다. 그러나 얼마 후 석지는 난민이 보낸 대장군 유현에 의해 살해된다. 야심가였던 유현은 주제파악을 하지 못하고 양국에서 왕위에 올랐다가 난민에 의해 죽는다. 피로 가득 찬 이 권력투쟁의 와중에 석호의 아들 13명 중에 5명이 난민에게 살해당하고, 나머지 8명은 자기들끼리 서로를 죽였다.  

 

노년에 즉위한 제왕

어린 나이에 즉위한 황제들 대부분이 황족으로 태어나 운명에 의해 황위에 오른 것이라면, 50~60세가 되어서야 등극한 제왕들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꿈을 실현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황족으로 태어난 어린 제왕들과 달리, 빈민으로 태어나 맨손으로 천하를 누볐으며, 나중에 성공하면 황제가 되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모험을 감행해 승리한 사람들이다.

 

56세의 나이에 제위에 오른 북한의 세조 유숭은 어릴 때 건달행세를 하며 살았다. 이후 사촌형이자 나중에 후한의 고조가 되는 유지원을 따라 다니면서 관직에 올라 도지휘사 겸 하동절도사가 된다. 후주가 후한을 멸망시키자 유숭은 서기 951년 태원에서 스스로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한으로 정했다. 그리고 요나라 황제를 숙(삼촌) 황제로 모시고 자신을 질(조카) 황제로 자칭했다. 요나라의 지원을 받게 된 유숭은 깊은 원한을 갖고 있던 후주를 공격한다. 그러나 군세가 너무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후주 군대에 대패한다. 서기 954년 주나라 태조가 죽자 유숭은 요나라와 손을 잡고 또 후주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크게 패하고 수도 태원까지 위협을 받는다. 유숭은 산을 넘어서 도망갔으나 얼마 후 화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때 나이가 60이었으며 겨우 4년 동안 제위에 있었다.

 

 

어릴 때 즉위한 제왕

기원 전 87년 전한의 무제 유철은 순행을 떠났다가 불행히도 병사하고 만다. 유철이 죽자 어린 아들 유불릉이 8세의 나이에 한나라의 6대 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그가 바로 한 소제이다. 유불릉은 황제에 즉위하지만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1학년에 불과한 나이인데다, 밥 먹고 옷 입는 것조차 시중이 필요한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왕조시대의 세습제는 포대기 속의 젖먹이건, 숫자도 셀 줄 모르는 어린아이건 간에 왕족의 혈통을 타고 나면 만민지상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수천 년 역사의 중국에서는 소제 같은 젖비린내 나는 어린 황제들이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후한의 첫 번째 어린 황제는 4대 황제 유조이며 즉위 시 나이가 10살에 불과하였다. 당시 실권을 쥔 사람은 그를 키워준 어머니 두태후와 대장군 두헌(두태후의 오빠)이었다. 두태후는 섭정을 맡았고, 두헌은 조정의 실무를 맡아보았다. 어린 유조는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이때부터 후한의 조정은 외척과 환관 세력의 어두운 그늘에 휩싸이게 된다. 유조는 환관들과 밀모하여 두헌을 주살하고 외척세력을 일거에 제거하였으나 이번에는 환관 정중밀이 외척세력을 물리친 공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유조는 근근이 17년을 버티지만 결국 병으로 죽고 만다. 이후 그의 아들에게 제위가 물려지는데 바로 태어난 지 백일이 된 유용이다.

 

중국역사에서 유용은 나이가 가장 어린 황제이자 가장 불쌍한 황제이다. 그는 명목상의 황제가 된지 일 년도 안 되어 감기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강보에 싸여 우유를 빨며 황제 노릇을 해야 했던 이 아이는 자신이 권좌에 앉아 일 년여를 보낸 일조차 몰랐을 것이다.        

 

나라가 망하여 투항하는 제왕

제왕에 오르는 길은 너무나 험난하여, 일반인은 물론 제왕의 직계자손들 조차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때문에 어떤 수단을 통해 얻었든 일단 제왕의 자리를 차지한 자들은 온갖 투쟁과 생사를 넘나들며 얻어낸 그 자리를 자자손손 물려주고 싶어했다. 그러나 갖은 방법을 써 보지만 왕조 자체의 모순으로 인해 많은 제왕들은 무너져가는 나라와 가문을 지켜내지 못했다. 때로는 어이없이 스스로를 멸망의 길에 밀어 놓고, 새로운 왕조에 항복함으로써 자신의 왕조의 문을 닫았다.

 

삼국시대 촉나라 후주 유선의 군주로서의 재능은 아버지 유비의 발치에도 못 미쳤다. 어린 아들 유선을 두고 죽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유비는 제갈량에게 뒤를 맡겼다. 유선은 제갈량의 보좌 아래 농경을 장려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또한 위나라와 수차례 전쟁을 벌이면서 촉을 강국으로 키우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위나라와 전쟁을 치르면서 국고는 텅텅 비고 말았다. 기원 234년 제갈량이 죽자 유선은 궁궐을 떠나 순회하며 널리 향락을 찾아다녔다. 서기 263년 위나라는 정동장군 등애를 보내 촉을 공격했다. 유선은 결국 시중 장소를 시켜 옥새를 들고 가서 항복을 청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유선 자신은 팔을 뒤로 묶은 채 흰 수레에 관을 싣고 태자와 신하들을 이끌고 등애의 군영으로 가서 굴욕스럽게 항복을 청했다. 이로써 촉한 왕조도 멸망했다.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을 한지 십여 년 후, 오나라 황제 손호도 사마염이 세운 진 나라에 항복하게 된다. 손호는 처음 황제가 되었을 때는 나라를 잘 다스리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그의 본래 성격들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여 백성들을 실망시켰고 주색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황당하고 잔인한 사건도 있었다. 신하들을 불러 주연을 베풀어 모두가 취할 때까지 마시게 한 뒤 얼굴 가죽을 벗겨버리거나 눈꺼풀을 까버렸다. 계속되는 대신들의 간청에도 손호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기원 280년 서진의 황제 사마염은 보병 20만과 수군 8만 명을 동원하여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서진의 대군에게 오나라 군대는 풍지박살이 나고 이에 손호는 유선과 같이 팔을 뒤로 묶고 수레에 관을 실은 채 항복을 청했다.

 

4. 엉뚱하게 죽은 제왕들

 

후비에게 죽은 제왕

황제의 권력이 컸던 만큼, 이를 차지하기 위해 벌어지는 권력다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했다. 이러한 투쟁은 종종 황제의 생명까지도 위협했다. 권력을 탐한 무리 중에는 황후나 귀빈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후비들은 언제 터질 줄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숨어 있다가 시기가 무르익으면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일을 터트렸다. 이 때문에 태후나 왕후, 비빈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죽음에 이른 황제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이다.

 

동진의 사마요는 불과 10살의 나이에 동진 왕조의 권좌에 앉는다. 역대 어린 황제들이 즉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왕조의 실권은 다른 사람이 쥐게 되었고 그는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당시 동진은 주변 제후국들과 몇 년 째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력이 쇠약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무능하고 간섭에 시달렸던 사마요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해 듣지도, 묻지도 않은 채 종일 후비들과 유흥을 즐길 뿐이었다.

 

서기 396년 연회에만 빠져있던 이 멍청한 군주는 총애하던 장귀비와 선녀처럼 아름다운 궁녀들을 대동한 채 끝이 없이 마셔댔다. 장귀비가 술을 마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사마요는 계속 마실 것을 강요하였다. 장귀비가 따르지 않자, 사마요는 농이 섞인 어조로 당신 나이가 이미 한물갔으니 진작 내쳤어야 하는 것인데…….라고 말했다. 장귀비는 그 말에 화가 치솟았다. 사마요는 날이 저물자 거하게 취해 드러누웠다. 환관들을 모두 내보낸 장귀비는 시녀에게 명하여 사마요의 얼굴에 이불을 뒤집어씌우게 하였다. 황제의 숨이 끊어지자 장귀비는 심복들을 매수하고는 사람들에게 가위에 눌려 죽었다고 둘러대었다. 35세의 사마요는 술에 취해 농을 잘못하였다가 졸지에 황천길로 떠났다. 사마요가 죽은 뒤 실권을 잡은 사마도지는 장귀비와 심상치 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장씨는 더 이상 추궁당하지 않았다.

 

독살로 죽은 제왕

서기 290년 후세에 백치황제로 불린 사마충은 부친인 무제 사마염에 이어 서진 왕조의 제위에 오른다. 즉위할 때 그는 30세가 넘은 나이였지만 선천적으로 지능지수가 낮았고, 어수룩한 황제로 인해 통치 집단 내부에서는 치열한 권력 쟁탈전이 벌어졌다. 특히 사마충이 가남풍을 황후로 맞이하면서 조정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가남풍은 까만 얼굴에 사마귀가 있는 추녀였는데 질투가 많아 후궁이 임신을 하면 몰래 칼로 죽여 버렸다. 또한 그녀는 방탕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권력욕이 남달랐던 가남풍은 황제의 외조부 양준이 많은 권력을 쥐고 있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그녀는 영남왕인 사마량에게 밀서를 내려 양준을 제거하도록 하고, 얼마 후에는 다른 이들과 같이 사마량을 없애기로 모의한다. 이에 사마량의 동생인 사마륜이 황후의 처사를 참을 수 없다고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쳐들어와서 사마충의 퇴위를 선언하였다. 이때부터 16년 동안 황족들 간의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이를 팔왕의 난이라 부른다. 혼돈이 끝났을 때 8명의 왕 중에서 7명이 목숨을 잃고 오직 동해왕 사마월만이 살아남았다. 난의 와중에서 사마충은 황친들의 끊임없는 협박에 시달렸고, 난이 끝나자  사마월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마침내 백치제왕의 마지막이 다가왔다. 서기 306 11월 어느 날 밤 사마월은 심복을 시켜 음식에 몰래 독을 넣는다. 17년을 명목상의 제왕이었던 사마충은 독이 든 음식을 먹고 그 참담했던 허수아비 인생을 마감하였다.

 

선약으로 죽음에 이른 제왕

진시황은 죽음을 금기시 했다. 그는 불로장생하는 약을 찾아 그것으로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선약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며 어린아이 수천 명을 바다에 던져 넣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50세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진시황에 이어 후대의 많은 제왕들이 술사들의 속임수를 맹신하여 소위 선단영약을 복용하지만 수명을 늘리기는커녕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였다.

 

북위 왕조의 건립자 도무제 탁발규는 선약을 먹음으로써 스스로 생명을 재촉한 제왕이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북위 왕조의 정치, 경제, 문화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통치 후기에 선약에 홀려 황당한 일을 저질렀다. 탁발규는 복이선경이라는 책에 적힌 대로 백약을 달여 약이 완성되면 죽을죄를 지은 자들에게 먼저 먹여 효과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렇게 요상한 약을 복용하자 몸은 점점 나빠졌고, 감정 기복이 심해지면서 관료들을 의심하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서기 409년 선약의 과다복용으로 인해 성격이 포악해진 탁발규는 정신 이상을 일으켰다. 항상 누군가를 죽이려 준비하였고, 개나 돼지를 쏘아대며 그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심지어 임신한 여자를 죽이기도 하였다. 만행을 보다 못한 부인이 아들과 공모하여 탁발규를 침실에서 난도질하여 죽였다. 39세의 탁발규는 선약으로 인해 목숨을 내놓고 만 것이다.

 

당나라 무종 이염은 남조 때부터 성행하며 횡포를 일삼던 불교를 억제한 업적을 남겼으나 30세를 넘어서자 금단선약에 홀리고 말았다. 이염은 조정대신인 정주에게 금단 제조의 책임을 맡겼는데 정주는 약에 어린아이의 간을 배합해야 한다고 우겼다. 이에 이염은 포졸들에게 밀령을 내려 아이를 잡아오게 하였다. 이 일이 순식간에 소문이 퍼지자 파문이 확대될 것을 두려워한 이염은 아이들의 유괴를 멈추게 하였다. 불로장생을 위한 이런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염은 병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고 만다.

 

당나라 선종 이침은 태종 이세민의 정치적 경험을 교훈으로 삼고자 정관정요를 침대 맡에 두고 매일 송독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불로장생을 갈구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황당무계했다. 이침은 술사에게 불로장생의 선약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어명을 이기지 못한 술사는 거짓인 줄 알면서도 복숭아털, 거북이털, 토끼뿔 들이 들어간 처방을 내린다. 이런 것은 구할 수 없는 약재들이었으니 약을 지을 수 없었다. 이침은 이 처방을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 처방을 요구하였다. 결국 이런 황당무계한 불로장생 약을 장기간 복용한 그는 온갖 지저분한 병에 시달리다 5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중국 역사는 ‘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나라에는 두 명의 주인이 있을 수 없다’는

엄격한 정치사상이 전 시대를 관통하였다.

따라서 왕권은 오직 한 사람만을 필요로 했다.

중국 역사상 제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583명이라 한다.

수많은 이 제왕들은 그들이 총명하든 아둔하든,

왕조의 수명이 길든 짧든,

또 어느 민족의 혈통에서 나왔는가에 관계없이

제왕 개인의 정신적 구조의 틀은

기본적으로 일치하였다.

 

처음 왕조가 세워지면 초기에는

나라의 안정을 이루기 위해 이로운 것을

일으키고 해로운 것을 없애며 좋은 출발을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몇 대의 황제를 거치면서

그 자손들은 점점 주색에 빠져 정치를 게을리 하고

조정의 기강은 문란해지기 시작한다.

이로써 왕조는 빠른 속도로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제왕의 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투쟁은

격렬하고 잔혹했으며 태후나 왕후,

비빈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죽음에

이른 황제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또한 대부분의 황제들이 탐욕이 넘치고 사치스러웠고,

근친상간까지 저지르는 등 음란함이 극에 달했다.

불멸의 꿈을 버리지 못한 황제 중에는

선약을 만들어 복용하다가 죽은 사람까지 생겨났다.

우둔한 군주가 제위에 오를 때마다 두려움을

모르던 황제의 친척과 외척들은 항상 위를 기만하고

아래를 능멸하며 나쁜 짓을 일삼았고

올바르게 정사를 돌본 사람은

수많은 황제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처럼 이 책은 중국 역대 황제에 대한 철저한 고증으로

성스러운 제왕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한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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