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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움직이는 시진핑 리커창 - 샹장위 지음

삼생지연 2021. 2. 1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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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움직이는 시진핑 리커창 샹장위 지음 린 / 2014 년 5 월

 

 

용은 용을 낳고 봉황은 봉황을 낳는다

시진핑은 1953년에, 리커창은 1955년에 출생하여 시진핑이 두 살 많다. 시진핑의 부친인 시중쉰은 32세 때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본부장이 되었고, 신중국의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원로 지도자다. 마오쩌둥도 시중쉰을 대단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상대적으로 리커창의 부친은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리커창의 부친도 일반 서민은 아니었다. 그 역시 중국공산당이 집권하기 전에 혁명에 참가했으며, 신중국 초기에는 현장(懸長)으로 일했다. 리커창 역시 간부 가정에서 출생한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성지인 옌안과 제왕의 고향 펑양

시진핑과 리커창의 학창 시절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문화대혁명 시기였다. 시진핑이 다닌 곳은 붉은 귀족학교(紅色學校)였고, 리커창도 현지의 명문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중학교 정규 과정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시진핑은 반동 학생으로 몰려 학교에서 쫓겨났고, 리커창은 중퇴하고 독학했다. 다시 말해 두 사람은 학창 시절이 비슷하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시진핑은 부친이 고위 관료였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고, 리커창은 어지러운 시대에 국학의 대가였던 스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시진핑과 리커창은 모두위대한 지도자 동지인 마오 주석의 호소에 부응하여 벽지 농촌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많은 일을 해냈다. 궁벽한 농촌에서 보여준 그들의 활약상이 현지 당 조직의 인정을 받아 각각 중국공산당에 입당, 그 후 수년간 핵심 간부로 활동했다.

 

“시진핑은 우리 량자허(梁家河) 사람입니다: 옌안 시에서 210번 국도를 따라 북동쪽으로 7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원안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다시 원안이에서 산간지역으로 몇 킬로미터를 더 가면 량자허 촌이 나온다. 1969년 이 외딴 산촌에 베이징의 지식청년(1950년대에서 문화대혁명이 끝날 때까지 자발적 혹은 강제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보내져 노동에 참여한 청년 남녀)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똥 더미와 석탄을 메고 제방을 쌓고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리고퇀즈(주먹밥)’를 나눠 먹었다. 30여 년이 지나자 이들 가운데 일부는 현지에서 평범한 노동자가 되었고, 일부는 고향인 베이징으로 돌아갔으며, 지도 간부가 된 사람도 있다. 그중에는 현재 국가주석인 시진핑도 있었다.

 

산시에서 배출한 국가 지도자라는 인터넷 기사를 보면, 1969 16세였던 앳된 시진핑이 산베이 농촌생산대에 왔고, 소박한 마을 사람들과 막역하게 지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산시 방송국과 산시 라오싼제 기업집단이 공동 제작한 다큐멘터리 <라오싼제(문화대혁명의 혼란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1966~1968년에 졸업한 중고등학생) 이야기>에서 시진핑을 소개했는데, 다큐멘터리를 보면 시진핑은 이 지역 사람들과 무척 가깝게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훗날 시진핑이 지부의 추천을 받아 대학에 입학하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를 다음과 같이 배웅했다고 한다. “그가 떠나던 날, 우리 량자허 사람들은 길가에 죽 늘어서서 시진핑을 떠나보냈지요. 어떤 사람은 경운기에 태워 마을 어귀까지 데려다 주었어요.” 그 후 1973년에 시진핑은 량자허 촌에서 처음으로 입당신청서를 제출하고, 1974 1월에 별문제 없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입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생산대대 당 지부의 서기가 되었다.

 

‘제왕의 고향’ 펑양 현에서 호평을 받은 리커창: 1974, 리커창을 포함한 학생들이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버스에 올랐다. 이들은 평양 현에 있는 다먀오 공사의 둥링 대대에 합류했다. 생산대 시절에 리커창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하여 농민들에게 과학적으로 경작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품종이 우수한 벼를 보급했다. 그러자 현지 농민에게 지지를 얻고 (인민)공사의 당 위원에게 호평을 받게 되었다. 1976, 리커창은 공산당에 입당했고, 얼마 후 진카오 공사의 다먀오대대로 옮겨갔고, 곧바로 당 지부 서기가 되었다. 참고로 생산대로 하방하는 것에서부터 농촌에서의 공산당 입당, 대대의 당 지부 서기가 되기까지, 그리고마오쩌둥 사상을 학습한 안후이 성의 우수 인물로 뽑히기까지 이 모든 것은 부친인 리펑싼이 리커창의 앞날을 위해 주도한 것이었다. 하지만 리커창은 시대의 거대한 변화에 뒤처지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중국공산당의 중심축이 이동하자, 아버지가 제안한 지방관 자리를 마다하고 베이징대학교 법학과에 시험을 거쳐 입학했다.

 

칭화대학교와 베이징대학교

시진핑은 칭화대학교, 리커창은 베이징대학교를 졸업했다. 두 사람 모두 최고의 대학을 졸업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시진핑은 농촌에서 추천을 받은 공농병 학생(1970년부터 1976년까지 시험을 거치지 않고 추천으로 대학교와 전문대학의 입학 전형에 합격한 노동자, 농민, 해방군, 지방의 지식청년)이었고, 리커창은 정규 대학입시를 거쳐 입학했다. 시진핑의 재학 시절 관련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리커창의 베이징대학교 시절 활약상과 학업 성적 자료는 많이 남아 있다. 대학에 다닐 때 리커창은 생각이 자유롭고 성적도 우수했지만, 시진핑은 칭화대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서로 다른 경로로 정계에 입문한 두 사람

일약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에 들어간 시진핑: 1979 4월 시진핑은 칭화대학교 공정화학과 보통반을 졸업한 후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에 배치되어,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및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겸 비서장이며, 훗날 국방부장(장관급)을 역임한 겅뱌오의 비서가 되었다. 시진핑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중앙군사위원회에 들어가 겅뱌오의 비서가 된 것에 대해 수많은 내부 관계자와 평론가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요지는 그가 만일 태자당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아버지의 후광이 없었다면 어떻게 졸업하자마자 벼락출세나 다름없는 중앙군사위원회에 들어갈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당시 시진핑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재무장하기 위해 기층으로 내려간 시진핑: 시진핑은 중앙군사위원회의 판공청에서 3년간 근무한 후 1982년에 갑자기 허베이 성 정당 현으로 갔고, 현위원회의 부서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풍문이 있다. 하나는 부정적인 언론을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압력이 점점 커진다고 생각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시진핑이 국방부장인 겅뱌오에게 지방의 기층으로 내려가 스스로 재무장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중국은 영국과 홍콩 반환 협상을 시작했는데, 이때 겅뱌오가 홍콩에 중국군이 주둔하는 문제를 두고 덩샤오핑과 의견 충돌을 빚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겅뱌오는 시진핑에게 이제 자신은 앞날을 확신할 수 없으니 다른 자리를 알아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두 가지 풍문에 대해 중국 전문가들은 후자가 더 사실에 가깝다고 말했다.

 

리커창 - 유학을 포기하고 모교에 남다: 1982년 봄황포 1로 불렸던 베이징대 법학과 77학번이 졸업했다. 졸업 전날, 리커창은 인생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미국 유학이었다. 그러나 베이징대학교 당위원회 부서기인 마스장이 리커창의 정치적 재능과 침착한 성격을 알아보고 십여 차례나 찾아와 모교에 남아 공청단 베이징대학교 위원회 서기를 맡아 약 1만여 명의 학교 소속 공청단원을 지도하라고 권유했다. 여러 차례 마스장의 권고를 듣고 리커창은 결국 모교에 남기로 결심했다. 이후 리커창은 베이징대 공청단에서 크게 활약했다.

 

정계 입문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리커창: 1982 12, 중국 공청단 제11차 전국대표대회가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공청단 제11 1중전회에서는 열일곱 명으로 구성된 상무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왕자오궈는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 후진타오는 서기처 상무서기, 리커창은 공청단 중앙상무위원이 되었다. 일부에서는 여기서부터 리커창이 정계의 엘리트 코스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허베이에 ‘대관원(大觀園)’을 조성한 시진핑: 시진핑은 허베이 성 정딩 현으로 내려가 3년간 일했다. 당시 30세 남짓한 시진핑은 현위원회 부서기로 있다가 얼마 후 서기로 승진했다. 중국의 홍색여행망(www.crt.com.cn)에 실린 글에 따르면, 정딩 현에서 재직 기간 동안 시진핑은 청렴하고 성실했으며 강한 추진력으로 일에 임했다고 한다.

 

시진핑 공직 생활의 전환점이 된 푸젠(福建) 남하: 중국 정부에서 공개한 시진핑에 대한 자료를 보면, 1985년 시진핑이 푸젠 성으로 간 것이 그의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해 시진핑은 샤먼(아모이) 시위원회 서기, 난징군구 닝더군관구 당위원회 제1서기와 푸저우 시위원회 서기, 푸저우 시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푸젠 성위원회 상무위원, 성위원회 부서기, 부성장, 성장 대리, 성장 등 다양한 보직을 거쳤다. 시진핑은 푸젠 성에서 무려 17년간 근무했다.

 

‘인생의 기회 잡기’, 리커창의 보수화 정치 행로: 1984 4, ‘국제 청년의 해중국 조직위원회의 회원 명단에 리커창의 이름이 당당히 올라왔다. 이 조직의 주임 위원은 후진타오, 부주임 위원은 류옌둥이었으며, 이때 중화전국청년연합회 부주석 겸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에 부임한 리커창 역시 부주임 위원으로 명단에 올랐다. 당시에 그는 중화전국학생연합회 비서장을 겸임했다.

 

푸젠 성 대사건, 허난 성 대화재

시진핑이 푸젠 성장, 리커창이 허난 성의 성장을 지내는 동안 다양한 사건과 난제가 연이어 발생했다. 푸젠 성에서는 대형 사건이 연일 터졌고, 허난 성에서는 화재가 여러 차례 일어났다. 1980년대에 두 인물에 대한 평가는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지만, 1990년대에도 관운이나 개인적인 능력 면에서 누가 낫다고 단언할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경쟁 관계가 팽팽했다.

 

저장 모델랴오닝 성의 경험

2000년대에 들어와 시진핑과 리커창은 관운이 매우 좋아 모두 중국공산당 5세대 후계자 대열에 들어섰다. 2002 10, 푸젠 성장이었던 시진핑은 저장 성장을 거쳐 성위원회 서기에 올랐다. 그는 저장 성에서 4년 반 동안 경제 발전을 선도하고 사회 발전의 토대를 닦아 여러 분야에서 저장 성을 전국적으로 풍요로운 곳으로 이끌었다.

 

한편 2004 12, 리커창 허난 성위원회 서기는 갑자기 랴오닝성위원회 서기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랴오닝 성으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푸신 시 쑨자완에서 214명이 사망하는 초대형 탄광 사고가 발생했으며, 창하이 현에서는 배가 침몰하여 19명이 사망하고, 푸신우룽 탄광 사고로 32명이 사망했다. 또한 푸순라오후타이 탄광 사고로 29명이 사망하고, 톄링 특수철강공장에서 쇳물 바가지가 떨어지면서 32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의 선전 기관은 실세를 보호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리커창이 권력의 핵심부에 들어가기 전에 부정적인 뉴스가 퍼지는 것을 경계했다. 따라서 리커창과 관련된 부정적인 기사는 적극적으로 막았다. 홍콩 언론이 리커창을언론의 탄압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공산당의 5세대 후계자는 이러한 피아(彼我)가 경쟁하는 국면에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저장 모델이 사실상언론의 탄압자를 이겼으며, 나중에 낙하산 인사로 상하이로 발령 난 시진핑이 리커창을 누르고 중국의 새로운 리더가 된 것이다.

 

후발 주자의 추월

오랜 공직 경력에서 리커창은 시진핑을 앞서 나갔다. 리커창이 1999년에 성장이 되었지만 시진핑은 2000년에 성장이 되었고, 리커창이 2002년에 성위원회 서기로 올라갔지만 시진핑은 2003년에 성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또 리커창이 제15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지만 시진핑은 중앙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시진핑이 리커창을 추월했다. 시진핑이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가 되었는데, 역대로 이 직위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의미한다.

 

천량위의 낙마와 상하이를 장악한 시진핑: 2006 7 5일부터 중국공산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관계 부처와 함께 상하이 시 노동 및 사회보장국의 사회보장기금 불법 운영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 과정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인 천량위가 이 사건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것을 알아냈고, 9 24, 당 중앙정치국은 중앙기율검사위원회가 제출한 천량위 문제에 대한 1차 조사 보고서를 심의하여 천량위의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 상무위원, 위원 직무를 박탈하고, 그가 맡고 있는 당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위원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고위층은 치열한 권력 투쟁을 거쳐 2007 3, 저장 성위원회 서기인 시진핑을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로 임명했다.

 

천량위가 낙마하자 중국공산당의 각 파벌은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예로 2005 8, 로이터통신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하며 후진타오의 측근이자 안후이 성위원회 서기인 궈진풍이 상하이 시장이 될 것이 유력하다고 했다. 또 양회 기간 동안 후진타오의 심복인 류옌둥이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가 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지만, 2주 만에 상하이탄(상하이의 별칭)의 권력은 태자당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 자리를 두고 권력 투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엿볼 수 있다. 참고로 중국의 태자당은 이미 거대 특권층이 되어 당군의 수많은 요직을 통제하고 있는데, 홍콩 잡지인 쟁명에 따르면, 중국의 청국급 간부 87%와 처급 간부의 90%가 고위 간부의 자제라고 한다. 한편 전문가들은 시진핑이 화려한 집안 배경이 있지만 정치 경력 면에서는 밑바닥에서부터 한 단계 한 단계 올라와 지방의 고위 관료가 되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시진핑의 상하이 입성과 세 가지 약속: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가 된 시진핑은기존의 토대에서 책임 있는 중책을 맡아 직무에 충실하게 임하며 내실 있는 성과를 거두겠다고 밝히면서 세 가지 측면에 중점을 두겠다고 말했다. 첫째, 덩샤오핑 이론과 ‘3개 대표 이론(중국공산당이선진 생산력의 발전 요구, 선진 문화의 전진 방향, 가장 광범위한 인민의 근본 이익을 대표한다는 말)’, 장쩌민 문선, 과학적인 발전관 등 중요한 전략 사상을 학습한다. 둘째, 국민을 위해 일한다. 상하이 시민을 위해 실용적으로 일하고 잘해낼 것이다. 자율과 청렴한 태도를 유지하고 요구 기준을 엄격하게 준수하여 자발적으로 감독을 받으며, 다방면의 감독을 환영한다. 셋째, 민주집중제(중국공산당의 민주집중제는 소수의 다수에 대한 복종, 개인의 집단에 대한 복종, 하부의 상부에 대한 복종, 전당(全黨)의 중앙에 대한 복종이라는 네 가지 원칙을 포함하며, ‘집중 지도하의 민주와 민주를 바탕으로 한 집중이 기본 정신이다)의 원칙을 관철시키고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각급 지도층과 간부의 전문성을 강화한다.

 

당보(黨報)에서 높이 평가받은 시진핑의 상하이 정풍(整風): 2007 5, 시진핑이 상하이를 장악한 지 2개월 후 중국공산당 상하이 시 제9차 대표대회가 개막했다. 시위원회 서기인 시진핑은 회의에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기치를 높이 받들고 천량위 사건에 대해 비판과 반성을 하는 한편, 상하이의 미래 발전을 위해서는 후진타오 총서기가 제기한 상하이 전략이 반드시 정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년 만에 두 단계 승진한 시진핑: 17차 당 대회가 개최되기 전에 베이징 당국이 시진핑을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로 발령 낸 뉴스를 특종 보도한 둬웨이신문사 2007 9 22일에 시진핑이 제17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고, 5년 후 당군을 장악하는 가장 유력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홍콩에서 발행되는 둬웨이 월간 2007 10월호인17차 당대회 특별호에서는 제17차 당 대회 정치국 상무위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정치국 상무위원은 아홉 명으로 구성되며, 새로운 인물인 시진핑은 서기처를 주관하고, 리커창은 상무 부총리, 허궈창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저우융캉은 정법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정치국 상무위원의 서열은 후진타오, 우방궈, 원자바오, 자칭린, 리창춘, 시진핑, 리커창, 허궈창, 저우융캉 순이다.

 

17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물러난 쩡칭훙과 우관정, 뤄간은 모두 최고정책결정 그룹에서 독자적인 요직을 담당했었다. 쩡칭홍은 서기처 서기이자 중국의 국가부주석으로 당무, 조직 및 홍콩과 마카오를 책임졌다. 우관정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이고, 뤄간은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를 역임했다. 이들 세 명 중 특히 쩡칭훙과 뤄간은 정치 생애에서 수많은 루머를 몰고 다녔다.

 

그들은 무슨 이유로 사임했을까? 전문가들은 각 세력이 오랜 시간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게임을 해왔다고 전한다. 2009년 여름, 베이다이허 회의(허베이 성 베이다이허에서 열리는 비공개 정치국 확대회의로 국가 대사의 밑그림이 이 회의에서 그려짐)가 열려 이른바새로운 정치 원로의 의견을 수렴했는데, 둬웨이의 분석에 따라 최종적인 결론을 먼저 살펴보면, 회의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작용한 기준은 연령이었다. 참고로 제16차 당 대회 정치국 상무위원이 대체로 68세를 기준으로 교체된 선례가 있었다. 그리고 결국 제17차 대회에서도 68세가 넘은 세 명은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물러났다. 68세인 쩡칭훙, 69세인 우관정, 72세인 뤄간이 바로 그들이다.

 

원로들을 존중하고 군을 각별히 챙기는 시진핑: 홍콩의 명보는 제17차 당 대회의 정치 신인스타 가운데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인 시진핑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의 지명도는 스타 가수인 부인 펑리위안보다 낮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평범한 정치 성적표에 비해 그의 인맥과 이미지는 매우 좋았으며, 그의 부친이 ‘4인방에 당한 박해 등은 그가 승진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었다. 명보는 조용한 일 처리와 평범한 정치 성적표, 그리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정계에서는 시진핑에 대해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갈렸다고 전했다. 그러나 정계 일각에서는 시진핑의 이런 단점이 사실은 장점일 수도 있다고 평가한다. 조용한 일 처리는 신중하다는 의미이며, 타인의 비판을 촉발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그의 정치 성적표가 대단하지 않지만, 실사구시의 측면에서 각각을 고려하여 사업을 추진해 왔다고 지적했다. 이 외에도 부친인 시중쉰의 존재 역시 시진핑이 승진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 태자당인 시진핑은 아버지 세대인 원로 간부들을 존중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노 간부들은 시진핑에 대해 칭찬 일색이다.

 

리커창은 당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을 것: 리커창과 왕쥔타오. 한 사람은 13억 대국의 총리이며, 다른 한 사람은 중국 정부에 의해중국을 전복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반혁명 선전 활동을 선동한다고 비판을 받아 해외로 망명한 정치학 박사이다. 두 사람은 청년 시절에 역사적인 만남을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들은 친구지간으로, 베이징대를 졸업한 동기동창이다.

 

2007년에 제17차 당 대회 개최 전야에 리커창은 국제적인 주목을 받는 정치 엘리트였다. 그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될 수 있는가는 2012년 이후 중국의 대권을 장악할 수 있는가를 의미했고, 중국의 최고 통수권의 세대교체를 상징했다. 이는 중국 정치권력이 5세대로 평화롭게 이전할 수 있는가를 의미하기도 했다. 왕쥔타오는 2007 8월에 타이완 중국시보와의 인터뷰에서 리커창에 대해군자는 파당을 이루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다. 이어서 리커창이 베이징대 출신의 고결한 성품을 유지하고 있고, 문제를 객관적으로 논하는 날카로움을 잃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리커창이 가장 못하는 것은 바로 공산당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이므로 그는 당권을 잡지 못할 것입니다!”

 

제17차 당 대회에서 우위를 차지한 시진핑: 일부 해외 언론은 제17차 당 대회가 개최되기 전 1년 동안 공청단파의 적장자인 리커창이 다음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가장 유력한 인선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바 있다. 그러나 2007 10 22, 17차 당 대회에서 신임 정치국 상무위원 서열 중 리커창은 상하이 시위원회 서기인 시진핑에게 뒤졌다. 시진핑이 차기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자리를 선점한 셈이다. 현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후진타오가 과거에 권력을 승계한 방식에 따르면, 총서기가 되기 전에 반드시 당권을 먼저 장악하고 중앙서기처의 제1서기가 되어야 한다.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정치국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두 단계나 건너뛰어서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고 중앙서기처 상무서기로 임명되었다.

 

리커창은 해외에서 추측한 것처럼대권 승계의 자리에는 오르지는 못했지만 시진핑과 마찬가지로 한 번에 두 계단이나 뛰어올라 중앙위원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이라는 핵심 지도층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리커창은 2008년에 새로 구성된 정부 인사 배치를 통해, 황쥐의 서거로 남은 국무원 상무 부총리를 승계하였고, 18차 당 대회 이후에는 국무원 총리로 승격하였다. 오랜 세월 베이징의 언론계에 종사한 리다퉁 기자는 더 이상 한 사람이 후계자를 지정하는 시대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후진타오가 후임자가 될 후보자를 당내에서 여러 인선을 통해 제시하고 당내 의견을 널리 수렴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시진핑이 당내 평가가 가장 높고 리커창보다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시진핑을 선택할 것이라고 전망했었다. 리다퉁은 시진핑이 우선 현위원회 부서기로 시작해 기층에서부터 축적한 경력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했다. 둘째, 시진핑은 당파의 색깔이 없기 때문에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장쩌민과도 별다른 관계가 없다. 셋째, 시진핑은 중국공산당의 원로인 시중쉰의 아들로 원로 혁명가의 후원을 받아 당내에서 상당한 신임을 얻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당내에서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18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이 예상대로 권력을 계승할지는 검증을 거쳐야 한다고 전망했었다. 불미스러운 문제를 일으켜서도 안 되고 명망도 좀 더 쌓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후야오방이 타의로 물러났을 때 국무원 총리였던 자오쯔양이 총서기를 승계한 역사가 되풀이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18차 당대회를 거쳐시진핑리커창 체제는 순조롭게 출범하게 되었다.

 

태산명동서일필(太山鳴動鼠一匹)

중국 운명의 해, 사회불안 대책반 ‘6521’ 프로젝트: 중국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국가부주석인 시진핑은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특별대책팀을 공식적으로 가동했다. 그런데 ‘6521’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숫자는중국공산당 중앙 사회안정영도(지도)소조판공실이 맡은 2009년 사업의 코드 번호다. 참고로 2009년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60주년이 되는 본명년(本命年, 중국에는 자신이 속한 띠의 해가 되면 액운이 낄 것이라고 불안해하는 풍습이 있음)이었다.

 

밍징 출판사에서 출간한 2009 중국의 본명년이라는 책을 보면, 중국 당국은 우환이 많을수록 정권과 사회에 매우 큰 위협으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따라서안정 유지 2009년의 키워드였다. 황태자인 시진핑이 군을 장악하고, 저우융캉 정법위원회 서기, 멍젠주 공안부장, 류징 사회안정판공실 주임, 겅후이창 국가안전부장 등의 인사가 보좌하며 정권과 체제의 유지와 관련된 각 부문의 자원을 동원해 삼엄한 경비 태세를 갖췄다. ‘이르지 않는 것이 없고,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닿지 못한 곳이 없고, 파고들지 못하는 구멍이 없다는 의미로 이 조치는 ‘4(四無)’라고 불렸다.

 

이 코드 번호는 결코 무계획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6521’이란 2009년도의 정국 안정에서 매우 중요한 네 가지 사건이 일어난 날짜와 관련이 있다. 10 1일은 신중국 건국 60주년 일로 중앙에서는 대규모 열병식을 거행하기로 했었으며, 3 10일은 티베트 소요와 달라이라마의 해외 망명 5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은 중국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티베트 소요 진압 및 민주 개혁 50주년 일이다. 6 4일은 천안문학생민주화운동 진압 20주년일이며, 4 25일은 파룬궁 수련자들이 중난하이를 포위하며 시위를 벌인 지 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60주년, 50주년, 20주년, 10주년의 머리글자를 합쳐 ‘6521’이라는 명칭이 만들어진 것이다.

 

시진핑은 ‘안정’, 리커창은 ‘발전: 소식통이 2009 중국의 본명년의 저자에 전해 준 정보에 따르면, 중국공산당 중앙은 발전과 사회 안정이라는 두 임무를 이미 ‘50()(5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 세대인 두 정치 후계자에게 분담시켰다고 한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국무원 상무 부총리인 리커창은 발전의 축을 책임지고, 17차 당대회에서 황태자로 지명된 시진핑은 사회 안정의 축을 맡았다.

 

발전과 사회 안정이라는 과제의 난이도는 대동소이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사회 안정 문제가 좀 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정치적 지혜가 필요하고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는 인내심과 세심함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사회안정지도소조와 정법위원회, 치안관리판공실(사회치안종합관리위원회판공실) 이 세 기기관은 저우융캉이 지휘하지만, 사실은 시진핑이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서기처 상무서기로서 윗선에서 사회 안정 임무를 총괄한다고 할 수 있다.

 

10년 전의 황태자인 후진타오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국가부주석의 직무를 맡았을 때 몇 가지 국가적 위기와 관련된 복잡한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받았다. 예컨대 1999년에 나토의 미사일이 유고 주재 중국대사관을 폭격하여 유발된 격렬한 반미시위 사건의 해결과 군대와 기업의 분리 정책 등이다. 당시 사람들은 장쩌민이 매우 영리하다고 말하면서 매우 힘들고 본전도 찾기 어려운 지저분하고 힘든 일은 후진타오에게 넘겼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황태자가 되려면 대중을 설득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여 리더십을 입증하는 일이 필요하다. 후진타오는 당시에 군대와 기업의 부적절한 고리를 끊는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해 군대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훗날 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입지도 강화할 수 있었다. 또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을 처리하면서 민중의 이해를 구했다. 마찬가지로 시진핑이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회 안정에 해악이 될 수 있는 다양한 도전 과제를 잘 해결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관찰가들은 시진핑이 중국의 황태자 자리에 오른 후 린뱌오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것을 놓고 두뇌가 명석하고 관용적이며 도리를 알고 기성세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판단하여 사회 안정이라는 과제를 처리할 적임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최고 자리에 있기 때문에 왜곡된 정보나 사실 무근의 정보를 보고받을 수도 있고, 체제 유지의 관성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정책적인 과오를 저질러 실점할 우려도 갖고 있다. 그리고 사회안정판공실과 같이 관계 기관을 초월한 통섭 기구에 대해 전문가들도 단기 목표를 둔 임시 기구로서의 한계는 피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사회 안정은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시한을 둘 수 없는 과제이므로 임시 기구에서 상설 기구로 전환해 공산당과 정부 부문을 초월하여 권력을 행사하면, 원래 있던 기관의 효율성을 약화시키거나 운영 과정에서 상당한 갈등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중국의 집권자로서 시진핑은 이러한 부정적인 면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최후의 승자는 시진핑

중국공산당이 혁명정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 시진핑: 국가주석인 시진핑은 1949년부터 60여 년을 집권한 중국공산당의 정당 성격이 이제는 바뀌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바 있다. 그는 한 행사에서 중국공산당은 이제 과거의 혁명정당에서전국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장기 집권하는집권당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중국공산당이라는 정당 성격의 근본적 변화이며, 중국 정당 이론의 중대한 진전으로 중국의 새로운 사상 해방 운동의 중요한 돌파구를 연 선언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실 중국공산당은 이론적 혁신을 추진해야 하고 집권당으로서의 새로운 논리를 개발하여 영속적인 운영을 위한 생명수를 찾아야 한다. 시진핑은용감하게 변화하고 혁신해야 하며, 변화를 추진하고 합리적이고 융통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것이 우리가 오랜 세월 견지한 당과 국가를 이끄는 통치의 길이다. 이것이야말로 30년간 당의 건설에서 얻은 가장 근본적이고 의의 있는 성취이고 진보다. 앞으로 당과 국가는 중대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시진핑은 이를 기회로 중국공산당이 이론적 혁신 이외에도혁명당과의 고별을 계기로 제도의 혁신을 추진할 의지를 드러낸 것 같다. 하지만 혁명당이라는 철학에서 집권당으로서의 전환은 달성하기 쉽지 않은 혁신이다.

 

베이징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의 판웨이 교수는 혁명당에서 집권당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인데, 그것은 바로 법치화라고 지적했다. 변화와 혁신의 달성을 보여 주는 지표는 당연히 법치이다. 법치란 무엇일까? 첫째, 지도자나 정당이 아닌 기본법이 지고(至高)무상한 권위를 가져야 한다. 둘째, 정부 권력 기관 간의 분권과 견제를 통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사법부의 독립과 공무원의 법 집행 시스템의 독립성을 확보하여 기본법의 권위가 보장되어야 한다. 셋째, 고시와 검증을 통해 공정하고 청렴한 사법 및 법 집행 관료를 선발하여 공직자의 청렴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중국공산당의 제도 혁신에 대한 결심과 용기를 검증하는 것이다. 판웨이 교수는 혁명당에서 집권당으로 변화하는 과정의 핵심적인 문제는 제도화에 있다고 지적한다. 혁명은 지도자의 역량에 따라 결정되고, 혁명당의 성공 역시 지도자의 의지에 따라 성패가 갈라진다. 하지만 제도 자체는 지도자나 정당의 힘에 의존하지 않는다. 제도는 지도자의 자율적 재량권을 제한하고 정당의 권력마저 제한한다. 이 점이 바로 중국공산당의 제도 혁신이 달성되기 어려운 병목이며, 중국공산당이 사상 해방에 진의가 있는지 검증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중국의 현 정치구도는 후진타오의 정치적 자산인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 계열과

여전히 장쩌민의 영향력 아래 있는 상하이방 세력,

그리고 혁명원로의 자제들로 구성된 태자당

그룹이 얽혀 있는 형세다.

이를 제5세대 지도부의 핵심 인물인 시진핑과

리커창에 적용시켜 보면,

시진핑은 태자당과 상하이방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고,

리커창은 공청단의 지원을 받고 있다.

 

한편 시진핑은 안정을 추구하지만

리커창은 발전을 추구한다.

또 시진핑은 칭화대를 졸업했지만

리커창은 베이징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시진핑은 북쪽 지방 사람이지만

푸젠, 저장, 상하이 등

남쪽 지방에서 오랜 기간 정치 인생을 보냈다.

반면 리커창은 남쪽 지방 사람이지만

오히려 베이징, 허난, 랴오닝 등 북쪽 지방에서

오랜 기간 고위 관리로 있었다.

그리고 시진핑은 중후하고

온화하며 내성적이지만카리스마가 있다.

반면 리커창은 호탕하고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처럼 시진핑과 리커창 두 사람은

공통점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척점에 서 있으며,

아울러 최고지도자가 되기 위해 경쟁해 왔다.

이는 최고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었을 뿐 아니라,

국이 앞으로 발전할 방향을

결정짓는 노선투쟁이었다.

 

이 책은 중국 제5세대 지도부 중 최고지도자인

시진핑과 리커창의 젊은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비교하는

형태로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공식 자료 중 중국 관영 언론의

자료,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구미 지역의 언론 보도와

중국의 반정부 인사인 왕쥔타오와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인 리청 등이

공개한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앞으로 중국은 내수 확대,

서부대개발 정책을 더욱 적극 도입할 것이고,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렸던

분배와 평등의 문제도 고려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아울러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은

혁명당으로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만 고집했지만,

앞으로는 집권당으로서 이념의 문제보다는

경제 발전과 같은 실용적인 문제를

더욱 중시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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