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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거짓말 - 기 소르망 지음

삼생지연 2021. 2. 1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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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거짓말 기 소르망 지음 문학세계사 / 2006년 9월

저항하는 사람들

 

2005, 새해 첫날이었다. 웨이징성(魏京生)이 워싱턴의 차이나타운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그를 반겼다. 웨이는 중국 감옥에서 18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미국으로 추방당한 노동자 출신의 반체제 인물이자 인권운동가이다. 그의 공적인 역사가 시작된 것은 1978 12 5일이었다. 그 당시 웨이는 29세로 폴란드의 레프 바웬사와 같은 전기공이었다. 그는 베이징의 한 담벼락에 대자보를 붙였다. 대자보 제목은 5대 현대화-민주주의였다. 덩샤오핑은 공산당 용어로 4개 현대화라고 부르는 것을 권장하였다. 이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현대화였다. 웨이는 4개 현대화 속에 다섯 번째 현대화를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것은 바로 정치의 현대화였다.

 

대자보가 붙여졌던 민주의 벽은 파괴되었고, 웨이는 체포되었다. 웨이의 재판은 선택된 방청객들 앞에서만 개최되었다. 그러나 한 기자가 그 재판 장면을 찍었고, 그 해적판 비디오테이프가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기자는 이 일로 인해 10년간 강제노동형을 살았다. 웨이는 창문 없는 지하 독방에서 스탈린과 나치 시대 때의 죄수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공포를 모두 참고 견디었다. 그러나 1994, 형을 다 마치고 석방된 후 그는 또다시 체포되었다. 2년 동안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웨이가 다시 강제노동수용소로 이송되었을 때, 서양의 인권단체들이 웨이의 석방을 요청했고 웨이는 건강상의 이유로 미국으로 보내졌다.

 

웨이징성이 미국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클린턴 대통령이 그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상 어떤 공식적인 지지도 누리지 못했다. 수많은 미국 재단들이 공산당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공산당은 웨이징성과 같은 반체제 인사들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기구들과 정부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일은 비즈니스 계약을 취소하거나 비자 발급을 못해 준다는 단순한 위협만으로도 충분하다. 쟈크 시라크 대통령은 달라이 라마와 웨이징성이 프랑스를 경유할 때 그들과 만나는 것을 언제나 거부했다. 그러나 파리 시장 시절의 자크 시라크는 바로 그 달라이 라마에게 찬사를 보냈었다.

 

민주주의의 베테랑 펑란루이(蘭瑞)

펑 여사는 20살인 1940년대부터 마오쩌둥 곁에서 일한 중국 공산당의 주동인물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초, 자유주의의 영감에서 나온 경제서적 시리즈를 출간하면서 공산주의와의 결별을 드러냈다. 그때부터 이 책들은 사회개혁론의 입문서로 간주되었고, 1989년 봄, 천안문에서 베이징의 학생들과 많은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보기에 학생들은 당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다. 그녀는 과거 자신이 혁명을 믿었던 것은 바로 젊음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혁명의 본질보다는 지식인의 서정주의가 더 컸던 것이다. 그녀는 중국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지려면 간헐적인 시위가 아닌 꼭대기를 통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대다수의 중국 지식인들처럼 그녀도 당 내부에서 조직을 무너뜨릴 중국의 고르바초프나 옐친을 기다리고 있었다.

잡초들

 

잡초 뽑기 이 용어는 1959년 마오쩌둥이 공산당 당원들에게 내린 강령이다. 마오쩌둥은 짧은 기간이나마 백 송이 꽃이여 피어나라(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는 슬로건에 따라 예술과 학술분야에서 작품 및 학설을 자유로이 발표하고 논쟁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활짝 피어나자 마오쩌둥은 겁을 먹었다. 마오는 곧 백송이 꽃의 시대라는 기회를 이용하여 그의 독재 하에서 가장 말을 듣지 않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을 모두 가려냈다. 그리고 그들 중 10%를 다시 뽑아내어 강제노동수용소에 보내거나 처형시키라고 공표했다. 이렇게 시작된 잡초 뽑기라는 표현은 아직까지 공산당 내부 용어로 남아 있다.

 

허난성의 수도 정저우(政州)의 병원 의사였던 가오 야오지에는 65세까지 별 탈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오 박사의 운명은 1994년 상차이 현에서 온 농촌 여자 두 명을 진찰하게 되면서 뒤바뀌고 말았다. 상차이의 두 여자는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었다. 가오는 두 여인을 진찰하다가 그들의 양팔에 주사 바늘 자국이 수없이 많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들은 십 년 전부터 생계 수단으로 일주일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피를 팔아 왔던 것이다. 허난성에서는 1980년대 초부터 혈액매매가 자행되었다. 이를 통해 부자가 된 간부들은 미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매혈을 한 희생자들도 역시 부자가 되었을까?

 

가오 박사는 조사를 위해 상차이에 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매혈을 하는 마을 사람들의 혈액이 단 하나의 주사기를 통해 채혈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혈액은 그 자리에서 원심 분리되어 혈장만 보관되고 혈구와 혈소판들은 제공자들에게 도로 재수혈되었다. 이로 인해 기운이 빨리 회복된 매혈자들은 일주일에 두 번, 아니면 그보다 더 자주 피를 팔 수 있었다. 다시 매혈을 할 사람은 처음에 받은 돈의 절반가량을 도로 반납해야 했지만 가난한 그들은 이러한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고, 모두 에이즈에 감염되어 있었다. 가오 박사는 곧 보건당국에 이러한 사실을 알렸으나, 그들은 입을 다물 것을 그녀에게 명령했다.

 

가오 박사는 국제적인 신문에 이 사실을 제보했다. 그러자 《뉴욕타임즈와 《리베라시옹이 현장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의 기사를 읽은 베이징의 지도자들은 1996년 마침내 혈액매매를 금지시켰다. 그런데 허난성 하나만 보더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사는 이주자들이 많다. 이들은 벌써 베이징이나 광둥에서 이런저런 통로로 바이러스를 확산시켰을 것이다. 여기에다 허난에서 팔려 간 혈액을 수혈 받은 사람들까지 있지 않은가. 공식적인 시효를  넘기고 혈액이 거래되는 것도 문제다. 가오는 법적 시효기간을 2년이나 넘긴 혈액 재고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기사화하는 언론 매체는 없었다. 그래서 가오는 이러한 사실을 웹사이트에 전부 다 올렸다. 그녀는 투쟁만 할 뿐, 정치화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 잡초들이 일을 도맡았다.

 

반체제 신문기자 옌(Yan), 검역에 반기를 들다

옌은 신문기자로서 지방 일간지에 시평(時評)들을 연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필명으로 공산당의 내부 기관지의 편집자 일도 한다. 내부 기관지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많은 대중들에게 배포하는 용도이고 다른 하나는 당 간부들 용이다. 첫 번째 신문은 오로지 선전만 실어 간행한다. 공산당 간부들은 이 기사들이 모두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자신들이 선전을 만들어낸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중앙당의 편집부는 매 십 일마다 취급할 주제와 찬양해야 할 영웅들 이름을 기입해 놓는다. 기자들은 파면당하지 않기 위해 여기에 순종한다. 간혹 대담한 자들도 있다. 이들은 지시의 틈 사이를 교묘하게 빠져나가 다양한 사건들과 중국 사회의 잔혹성을 드러내 주는 수탈 사례를 상세히 보도하기도 한다.

 

스타오라는 기자는 2005 9, 국가 기밀을 폭로한 죄로 10년 형을 언도 받았다. 사실 그는 선전부가 내린 지시사항들 중 특별한 비밀도 아닌 자료를 하나 웹에 올렸을 뿐이다. 스타오가 제일 먼저 글을 올린 곳은 야후에 있는 그의 이메일 주소를 통해서였다. 야후의 사장도 중국 태생이다. 그런데 그는 스타오의 이름을 공개했다. 미국의 대중매체들이 이를 공격하자 그는 우리나라의 관습을 존중한다고 변명했다. 도대체 관습이라니? 당의 관습은 검열과 밀고에 동조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야후에 알리바바라는 이름으로 웹 포털을 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미국의 투자를 축하하기 위하여 빌 클린턴은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신비주의자들

 

중국 공산당은 유교 뒤에 몸을 숨기고자 한다. 그들이 중국 전통 안에 서 있다면, 당이 대죄를 저질렀다고 사람들이 당을 규탄하거나 단죄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자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밖에서 더욱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당은 노련하게도 공자 뒤에 몸을 숨기는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식들과 제사가 치러지던 사당들은 파괴되고 없다. 이는 본래의 유교에 대한 살균조치 이다. 중국 공산당은 2005년 공자가 태어난 고향인 산둥성에 있는 취푸라는 도시에 성벽을 다시 쌓았다. 이로써 취푸는 관광객들의 놀이공원이 되어버렸다. 엄격한 숭상의 대상이었던 유교가 마케팅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당으로서의 파룬궁

1980년대 온 중국이 기공 열풍에 사로잡혔다. 공산주의자들에 의하면 기공이나 전통의학이나 침술은 서구적인 지식에 대한 애국적인 대안들이었다. 그러나 기공 열풍에는 불교와 도교에 대한 중국인들의 향수가 깔려 있었다. 리홍즈는 공산당 간부로 당이 격려하는 기공(氣功) 선생이었다. 그는 반세기 동안의 폭력, 밀고, 조직화된 증오 위에 단지 사랑과 환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다. 이에 파룬궁의 신도들은 매료되었다. 파룬궁의 가입자들은 대다수 퇴직자들인데, 이외에도 공무원, 군인, 대학생, 심지어 당원들 중에서도 리홍즈의 메시지를 믿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파군궁은 당 지도자들에게 불안의 근원이 되었다.

 

1999 4 17, 인터넷으로 협의한 만 명의 파룬궁 신도들이 베이징의 인민대회당 앞에 모였다. 리홍즈를 모욕하는 신문 기사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이날로부터 파룬궁 신도들은 추적당했다. 중국 정부는 파룬궁 신도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지역의 기초 위원회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따라서 지역장은 파룬궁 신도를 발견하면 재판 없이 행정적인 감금을 하거나, 감옥에 보내거나 처형을 하는 등 강력한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단지 건강을 위해서 기공체조를 하는 사람들과 교주를 따르는 파룬궁 신도를 가려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특수간부들은 공원, 호수가, 사원 부근들에 체조 기계를 설치해 놓았다. 또한 현대적인 왈츠를 추라고 권장했다. 공원에서는 왈츠음악이 흘러나오고, 노인 커플이 형성되고 옛 중국은 사라졌다. 이렇게 하여 파룬궁은 겉으로는 사라졌다. 그러나 파룬궁은 거대한 비밀 단체가 되었다. 이들은 인터넷으로 그리고 SMS로 회원들을 모집하고 있다.

 

굴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우리는 시안의 서쪽에서 밤낮으로 건설 중인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200㎞쯤 가자 고속도로의 폭이 좁아졌다. 여기저기 파손된 부분이 드러나고 움푹 패인 구덩이 속으로 트럭들이 빠졌다. 이 도로는 두부길이라고 누가 설명해 주었다. 이 지역의 공무원들이 자금을 빼돌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공항과 고속도로는 텅 비어 있을 때가 많다. 중앙부와 서부지방에서 고속도로를 주로 이용하는 자들은 단지 정치 지도자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손실은 누가 상환해 줄 것인가? 고속도로 건설에는 국립은행들이 융자를 해 준다. 그리고 이 은행들은 대출해 준 금액들을 절대로 돌려받지 못한다. 고속도로 회사들도 대부분 국유기업들이다. 이들은 도로 양쪽으로 넓게 땅을 수용하고 있다.

 

여행의 종착지는 불사조 탑이라는 마을이었다. 그곳의 주민은 만 이천 명이다. 중국의 농촌은 멀리서 보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목가적이다. 그러나 실상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목가적이지도 않다. 집안에는 필요한 침구들과 풍로, 걸상 몇 개밖에 없다. 난방기구로는 벽돌 화로인 캉뿐이며 지푸라기나 잔가지들로 불을 땐다. 위생 같은 것도 없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는 공공장소가 없으니 사교생활도 없고, 서로 간의 일치나 협조도 없다. 물론 읍마다 전기가 들어오고 텔레비전도 개통되었다. 그러나 공영 채널 하나밖에는 시청할 수 없다. 이 채널은 정부의 훈계조 방송을 내보내며 쇼 프로를 많이 방송한다.

 

불사조 탑 마을에는 외관이 좋고 세련된 학교가 하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의 4분의 1 이상은 길거리에서 배회하거나 밭에서 일을 한다. 부모들의 가난 때문이다. 도시의 학교들은 무상교육이거나 공기업들로부터 보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부모들이 학용품과 교실 난방비와 분필 사는 비용과 구내 식당비도 지불해야 한다. 또한 교장들이 생각해내는 다른 여러 가지 수당들도 지불해야 하며, 교사들의 선물도 챙겨야 한다. 교사들을 변호하자면 그들이 받는 월급이라는 것이 극히 소액이다. 교사들이 기거하는 오막살이는 난방이 되지 않는 방 한 칸이며 그 안에는 초라한 침대와 화로만 있을 뿐이다.

 

도시에서 양성된 학위증이 있는 교사들은 모두 이런 환경을 떠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을에 남아 있는 교사들은 진짜 교사가 아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교사들은 2주간의 표면적인 연수만 받은 지방의 농부들이다. 이런 교사들은 수업시간 사이사이에 밭으로 나가 경작을 한다. 당이 떠벌리는 9년 무상교육은 하나의 소설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이것은 중국에서 문맹자 비율이 인구의 4분의 1, 특히 여자들의 문맹율이 왜 높은지를 설명해 주는 단적인 예다.

 

농부들에게 최악의 불행은 병에 걸리는 것이다. 그들은 위생규칙들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손을 잘 씻지도 않으며 가축들과 같이 생활하는데 이 두 가지 사항이 주된 감염요소이다. 수술비는 항상 선불로 지불해야 하며 약값이 지나치게 비싸다. 이 약값은 수년 동안이나 빚을 져야 하는 금액과 맞먹는다. 이렇게 비싼 비용을 치르고도 때로는 더 안 좋은 결과가 생기기도 한다. 한 번 사용한 주사바늘을 재사용하고 시효가 지난 약들을 주기도 하여 간염에 감염된 많은 환자들이 간암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농촌에는 젊은 남자나 여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모두 중국 동부의 공장으로 일하러 갔기 때문이다. 마을의 책임자들은 지역당의 상관으로부터 연간 쿼터 할당을 통고 받는다. 책임자가 이 쿼터제를 지키지 않으면 벌금을 물거나 당에서 강등당하게 된다. 즉 아이들이 16세만 되면 마을에서 떠나 노동력을 팔게 하라고 책임자를 부추긴다. 부모들도 이런 집단 이동에 협력한다. 자식이 도시로 나가게 되면 그가 받는 월급의 일부를 생활에 보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들이 종적을 감춰버리고, 이로 인해 고아들의 수는 더 많아졌다. 이 고아들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즉시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이제 중국에서 중요한 덕행으로 치는 효심은 시장경제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

 

현재 중국 대도시에 있는 사람들의 3분의 1은 농촌 이주민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도시호구를 취득하기란 불가능하다. 상하이를 예로 들자면, 이곳도 다른 중국의 도시들처럼 혈연을 통해 내려오는 일종의 지방 국적이 존재한다. 2005년 상하이 시에서는 결혼을 통해 호구를 취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하지만 15년간 결혼생활을 유지한 후에야 비로소 지방 호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사정이 이러니 이주민들은 도시 주변 빈민지대의 시민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임대주택, 초등교육, 의료혜택, 도시나 기업의 보조금과 같은 공공서비스의 혜택을 받을 수가 없다. 이들이 도시의 납세자도 아니거니와 분담금을 낸 적도 없다는 것이 이유이다.

 

2005 10, 중국정부는 민주주의에 관련된 백서를 공표하였다. 이 백서는 중국어와 영어로 동시 출판되었다. 백서가 영어로 출간되었다는 것은 서양의 독자들을 염두에 두었다는 증거이다. 하지만 이 백서는 오로지 1949년부터 당이 이룩한 성공 사례만 수록되어 있었다. 같은 10, 정부는 과학을 통한 조화의 프로그램을 예고했다. 10월에 로켓탄포를 발사하여 두 명의 우주인을 우주로 보낸 것이다. 중국 언론은 전 세계가 중국의 성공에 경탄했다고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이 로켓을 발사한 비용은 백여 개의 병원과 학교를 세울 수 있는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당이 아니다. 그러니 무슨 동기로 수익성 높은 산업투자를 생산성이 낮은 사회복지 쪽으로 돌리겠는가.

 

중국의 미래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2005 10, 광둥성 근처 남부의 한 작은 도시인 타이 시에서 2천 명의 주민들이 탄원서에 서명을 하고 부패가 드러난 마을 이장의 사임을 요구했다. 이장은 민병대를 급파했고, 민병대원들은 서명자들이 탄원서를 포기할 때까지 구타했다. 그리고 12월에는 중국에서 가장 번영을 이룬 광둥성에 있는 둥저우에서 일제사격이 있었다. 이처럼 중국에서 탄원과 시위가 증가하는 것은 민간사회의 부활을 예고하는 것일까? 중국 공산당은 경찰과 군대의 총이 난사되더라도 굴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체념할 때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착취 위에 세워진 중국 경제의 바탕은 바로 이 농민들이기 때문이다.

 

발전의 허상

 

상하이의 실패

조명이 휘황찬란하게 번쩍거리고, 고속도로들이 관통하며, 마천루가 세워져 있는 상하이는 중국의 경이로운 성공의 상징이다. 무엇보다 상하이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고 가능하면 홍콩 자본들을 다시 회수하기 위하여 상하이와 베이징 지도자들이 구상해낸 전시품이다. 그러나 상하이는 수백만 명의 금융투자자들을 파산시켰으며, 도시계획은 많은 문제점들을 발생시켰다. 성공한 몇 개의 건물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건물 뒤의 도시는 통행이 불가능하고, 17백만 상하이인들의 절반은 정화조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 황푸강의 누런 색깔이 이를 증명한다. 모든 것을 서둘러 짓는 바람에 지방 정부는 소통과 공중 보건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상하이의 지도자들은 홍콩의 수직적 도시계획을 모방만 하면 되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홍콩은 도시이면서 동시에 문화이다. 법치상태, 법정, 언론의 자유가 부여하는 쾌적함이 있다. 반면 상하이는 여전히 정글이다. 은행은 법의 테두리 밖에 있고, 모든 반대파들은 감옥으로 간다. 내가 방문한 도시들 중 단 한 명의 반체제자도 접촉할 수 없었던 유일한 곳이 바로 상하이다. 이름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기만 해도, 안전요원들은 그들의 인터넷과 전화 통화를 검열하고 주거제한 명령을 내린다. 상하이는 당이 중국의 미래를 꿈꾸며 연출한 현대화의 장식품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잠깐 들르는 외국인들은 이곳에 도착할 때부터 모든 비판정신을 잃어버린다.

 

경제적인 기적?

마오유시는 중국에서 가장 명석한 경제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런데 80세 가까운 그는 항상 안전부 요원들에게 감시를 받는다. 마오유시는 격렬한 행동도, 혁명적인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 당국에게 그는 불손한 자이다. 천안문 사태 15주기인 2004, 그는 당 주석에게 학살의 책임자들은 사실을 인정하고 중국 국가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인터넷에 유포되었고, 많은 지식인들이 편지에 공동 서명하였다. 2005, 그는 다시 재범자가 되었다. 마오유시가 예전에 쓴 기사들을 모아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 나는 자유를 원한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출판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판매에 들어가기 전에 모두 수거되어 불태워졌다.

 

마오유시는 중국의 경제 발전은 기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파탄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조국은 연간 경제성장률 9% 혹은 10%라는 발전을 누리고 있지 않는가? 마오는 성장률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우선 환경적인 재해, 토지의 고갈, 공해와 그로 인한 전염병들, 집단적인 인구이동에 따른 개인적, 혹은 집단적인 혼란에서 오는 손실을 중국의 기적적인 경제성장률에서 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중국 정부는 정수장이 불필요한 투자라고 생각한다. 십억이 넘는 중국인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이 없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투자의 정치화가 중국경제의 핵심적인 균열이라는 것이 마오유시의 견해다. 중국에서 거의 만 개에 달하는 국유기업들은 생산을 위한 생산을 한다. 은행이 손실을 메워 주기 때문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도로와 공항과 건물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은행이 정치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장이 가져다주는 이익, 특히 수출로 벌어들이는 외국 돈들이 이처럼 새로운 부도, 일자리도 창출하지 못하는 비생산적인 투자에 쏟아 부어지고 있는 것이 중국 경제의 현실이다. 막대한 실업률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에서는 해마다 억대의 인구가 이리저리로 이동하고 있고,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기술자들의 3분의 2는 그들의 자격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중국 발전의 성격에 기인한다. 즉 중국의 발전은 연구나 서비스 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닌, 노동력의 대대적인 활용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마오유시는 중국에는 중산층이 없음을 환기시킨다. 가난한 농민과 벼락부자 계층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벼락부자 계층은 공공행정직이나 국가가 설립한 기업체들에 소속된 자들로, , 군대 혹은 그 간부들의 회사에 고용된 자들이다. 이 새로운 계층의 생활형편은 월급이 아니라 현물로 들어오는 수입에 달려 있다. 벼락부자 계층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축재의 근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상환하지 않는 대출이다. 대출을 받는 자는 은행 담당자에게 5%의 커미션을 그리고 대출을 허락해 준 지역 당 간부들에게 약 15%의 커미션을 지불해야 한다. 자금은 원칙적으로 부동산이나 산업투자에 투입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투자가 실현되든 그렇지 않든, 20%의 최초비용을 제외하고는 대출 상환을 전혀 하지 않는다.

 

벼락부자들은 실제적인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당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아파트의 소유권은 인정되나, 그 건물이 지어져 있는 땅은 국가 소유이다. 군대나 지역정부가 건설업자에게 일정 기한 동안 임대한 땅이다. 따라서 임대기한이 만료될 때에 거주권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불확실한 사회를 두고, 중국의 경제 부흥이 중산층을 만들어낼 것이며, 중산층은 필수적으로 민주주의를 요구하게 될 것이라는 이론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계단식 시나리오가 바로 한국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는 중국에 적용 불가능하다. 중국의 벼락부자 계층은 그들의 번영의 담보인 중국의 현 정치체제에 가장 집착하는 계층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그늘

 

2005년 닭의 해 초봄, 샬라의 목동들은 소환명령에 복종했다. 샬라는 칭하이에 속하는 마을이며, 칭하이는 역사적으로 티베트에 속한다. 주민들을 소환한 사람은 당 서기 카이랑이었다. 그는 티베트인으로 그 지역 행정부에 협력하기로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받은 혜택은 냉동고와 발전기 구입 자금의 은행대출이었다. 이러한 장비를 구비하면 그는 다른 목동들보다 더 좋은 가격에 고기와 버터를 팔 수 있다. 그가 당의 노선을 따르는 한, 은행은 그에게 대출금 상환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젖은 풀밭 위에 목동들의 아내와 자식들이 양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그들이 모이게 된 것은 마을의 지역위원회를 선임하고 마을 대표를 뽑기 위해서였다. 카이랑은 투표용지를 높이 들고 흔들었다. 그리고 지역위원에게는 노란 용지, 마을주민에게는 분홍 용지가 돌아갔다. 후보자들의 이름은 미리 인쇄되어 있었으며, 위원회의 위원 자리는 다섯 석인데 여섯 명의 후보자 이름이 씌어 있었다. 한편 분홍 용지 위에는 단 한 명의 이름이 씌어 있었다. 당 서기는 후보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은 마을 주민들끼리 사전에 협의한 결과를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촌구석까지 일부러 찾아온 외국 관찰자들과 기자들을 위한 발언이었다.

 

당서기 카이랑이 모든 공산당 고위관리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특유의 우레 같은 목소리로 연설을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여자들은 재잘거리고 남자들은 담배를 꺼내고, 술병이 돌려졌다. 카이랑은 음악을 틀어 사람들의 관심을 다시 모았다. 여자들이 활짝 웃었다. 순금으로 해 넣은 이를 드러내며 돈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이제 선거전이 시작되고 카이랑은 당의 지지를 받는 후보자를 소개했다. 후보자는 샬라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자동차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대출로 산 냉동고를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이었다. 후보자는 자기 계획을 장황하게 발표했다.

 

공약연설이 끝나고 투표용지가 배분될 때 지렌이라는 목동이 모든 것을 망쳤다. 지렌은 자리에서 일어나 샬라의 목동들이 이러한 자유를 누리게 되어 매우 기쁘며, 그 점에 대해 공산당에 감사한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기도 마을 대표의 후보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지렌이 다시 자리에 앉자 그의 멋진 아내는 전부 금박을 해 넣은 이를 드러내며 남편에게 미소를 보냈다. 목동들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당서기는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하얀 타일이 붙여진 당 사무실로 들어갔다. 한 시간 후 간부들이 모두 그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민주주의를 존중한다는 것을 알리고, 원한다면 분홍색 용지 위에 지렌의 이름을 써 넣어도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목동들은 문맹이었다.

 

투표에 들어갔다. 공식적인 후보자가 3분의 2라는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승리했다. 경솔한 지렌은 그래도 마을 위원회의 한 자리를 얻어냈다. 지렌은 결과에 실망을 드러내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니까요. 곧 질서가 회복되었다. 그때 우윳빛 창유리의 검은 리무진 한 대가 풀밭으로 굴러 들어왔다. 중요 간부 한 사람이 내렸다. 간부는 마이크를 잡고 먼저 민주주의를 향하여 진보한 샬라 주민들을 축하했다. 그리고 이 선거는 중국의 발전, 그리고 소수민족들과 한족 사이의 완벽한 화합을 향하여 내디딘 첫 걸음이라고 덧붙였다. 간부가 돌아가고 지렌에게는 윤리 교육이라는 벌이 내려졌다. 그는 냉동고를 살 수 있는 은행대출은 절대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선출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선임하는 당이다. 도시에서는 비밀 엄수 속에 그리고 권한이 없는 구위원회의 전반적인 기권 속에 지명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지방에서는 왜 선거를 실시하는 것일까? 이는 공산당을 합법화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또한 농부들이 용납하는 사람들을 기용함으로써 당 간부들을 정당화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앙당의 힘에 대한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다. 중국의 각 지방에는 당이 지명한 특수간부들이 지역을 통치한다. 이들은 중앙당의 명령을 받지만,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노선을 행사한다. 즉 중국은 이들 지역간부와 당의 협상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밖에서는 중국의 지방선거를 어떻게 평가할까? 중국에서 매우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두 개의 미국 재단이 있다. 포드 재단과 카터 재단이다. 이 두 재단에서는 공산당이 선거라는 논리에 휩쓸려 결국은 인민을 제어하지 못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그래서 지방선거를 조직하는 지방당국에 수단과 충고를 아끼지 않고 지원하고 있다. 샬라가 바로 그런 경우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 지미 카터가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카터 재단은 샬라 지역정부에 컴퓨터를 제공했다. 속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순진한 카터일까? 아니면 선거라는 톱니바퀴에 물려 들어간 공산당일까?

 

야만 국가

 

1989 6 3일 저녁, 딩 여사의 열일곱 살 난 아들은 엄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안문 광장에서 친구들을 만난다고 집에서 나갔다. 그리고 6 4일 아침,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총알 투성이의 시체로 발견되었다.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총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누구의 명령을 받고 발포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답변을 해 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천안문 사태를 상기시키는 모든 것을 금지시켰다. 대부분의 시신들이 마치 증발해버린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장례식을 치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두 해가 지난 후 딩 여사는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희생자들의 숫자가 28백 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부상자도 똑같은 숫자로 파악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91년 국무원 부총리 리펑은 희생자들의 명단은 공개되지 않을 것이며, 유족들이 침묵을 희망하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이 지나친 거짓말이 딩 여사를 투사로 변모시켰다. 그녀는 희생자의 가족들이 침묵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부총리에게 보냈다. 그리고 홍콩의 한 기자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이로 인해 그녀와 남편은 체포되고 두 사람은 교수직도 박탈당했다. 혐의 조항은 중국인민의 감정 훼손이었다. 지금도 딩 여사는 미약한 힘을 쏟아 천안문 희생자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 당시 천안문에는 학생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나가던 행인들, 인근 공사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베이징 시에 야채를 공급하던 농부들, 데모를 보러 온 의사들이 기관총 난사 속에 사라졌다. 그것은 진압이 아니라 대학살이었다. 2005년까지 그녀가 신원을 밝혀낸 희생자들은 189명이었다. 그녀는 희생자들의 명단과 사진을 홍콩에서 책자로 펴냈다. 이 책은 그녀가 앞으로도 지속할 대기록의 첫 소묘인 것이다.

 

중국의 가족계획

하나만 낳기라는 원칙은 30년 전 모든 중국인에게 강요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지역적인 변수를 채택하고 있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와 쓰촨 같은 인구밀도가 높은 지방에서는 하나 낳기 원칙이 적용되며, 인구밀도가 희박한 지역에서는 둘째아이를 갖는 것이 허용되고 있다. 소수민족들은 셋도 가질 수 있으며, 티베트인들에게는 제한이 없다. 중국의 가족계획위원회의 국제위원장으로 있는 하오 부인은 이러한 가족계획의 결과 오늘날 중국의 총인구 수가 13억이 되었다고 한다. 가족계획이 없었다면 16억에 달했다는 것이다.

 

내가 하오 부인을 접견 요청한 이유는 천광청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였다. 천광청은 맹인 농부다. 그는 길잡이인 아내와 함께 베이징의 탄원 사무실로 향했다. 천의 고향 마을인 산동 지방의 린에서 7천 명의 여성들이 지난 석 달 동안 강제로 불임수술을 당했으며, 수백 명의 임산부들과 때로는 8개월이 나 된 임산부들조차 강제로 낙태수술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낙태된 태아들은 다시 소생하지 못하도록 끓는 물에 담겨졌다고 한다. 하오부인은 내게 이런 사실들을 심각하게 과장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는 지엽적인 실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강제불임수술과 강제 낙태명령은 시청에서 공표한 법령에 의한 것이었다.

 

사형제도

2005년 닭의 해 10, 후난성의 창사 시에서는 2천 명의 초등학생들이 사형수들의 사형집행을 참관했다.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들은 마약 밀매범 6명이었다. 해마다 중국에서는 국가 명절 기간에 이런 종류의 연출이 벌어진다. 일 년에, 3,500명에서 15,000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정치적 활동 때문에 소위 범죄자라고 분류되어 처형된다. 이런 연출을 아이들에게 참석하도록 하는 것은 범죄는 아예 꿈도 못 꾸게 하기 위한 것일까? 아니면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당을 보존하기 위해서일까?

 

중국에서 사형은 거래의 근원이며 치부의 근원이기도 하다. 사형 집행 몇 시간 전에 장기들은 미리 떼어지고 상거래된다. 뿐만 아니라 세포 이식 수술 요청도 있다. 세포 주사를 맞고 수명이 연장되기를 바라는 부유층 노인들 때문이다. 장기 및 피부를 떼어내는 수술 작업 후에 희생자들의 상처는 성급히 꿰매진다. 그 후에 총살당하고 화장되는 것이다. 거래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2005년 동안, 껍질이 벗겨지고, 플라스틱으로 처리된 신체들이 미국의 자연사 박물관들을 순회했다. 전시회가 열리는 동안, 이 신체들이 중국에서 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자 미국에서도 사형수들의 시체가 혹시 이렇게 재활용되는 것이 아닌 가 항의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전시회는 중단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종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아직도 권좌에 앉아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러나 상하이에 있는 공산당 학교 앞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조각이 아직도 있다. 공산당 간부들은 2 3년마다 이 학교의 교과프로그램을 거쳐야 한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마르크스주의 지식을 완벽하게 하고, 현실과의 지나친 접촉에 의해 침식된 이데올로기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첸시춘은 공산당 학교의 교과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교무처장이며 교장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투쟁이자 중국의 오래된 관습인 세 가지 대표성이라는 원칙이 당과 사회 사이의 모든 모순들을 단번에 해결해 주었다고 했다.

 

세 가지 대표성이란 원칙은 사상, 관습, 전통과 같은 구태와 싸우는 것이다. 과거에 당은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군인들의 전위대를 대표했었다. 그 당시 아방가르드 전문가들은 당에서 제외되었다. 아방가르드 전문가들이란 사기업의 사장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 새로운 계층이 이제는 당의 건설에 전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그들이 공산당 안에 통합되어 들어가면서, 농부와 노동자들은 당에서 빠져나가게 된 것이다. 이 기업가들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 덕분에 번영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도처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계층에서는 어디서나 명함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항상 상당분량의 명함을 가지고 다닌다. 명함 교환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자본, 다시 말해서 영향력과 영향력의 거래를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이 사회적 자본을 관시(關係)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시 덕분에 간부들은 계급 승진의 사다리를 일일이 다 거치지 않고 단번에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관공서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간부는 자기가 가진 관시를 과시한다. 공산당 학교에 오는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재교육을 받기 위해 오지만 관시를 쌓기 위해서도 오는 것이다. 경제적인 발전이 중국을 공산주의적인 색채가 덜한 국가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발전은 마르크스주의가 자기합리화를 위해 내세우는 첫 번째 사유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오랜 역사가 가르쳐 주는 바가 있다면 중국 공산당은 그 교훈을 염려해야 할 것이다. 22세기 동안 중국 역사에서는 스물여섯 개 왕조가 몰락했다. 그것도 항상 폭력 속에 와해되었다. 당의 내부 역사 또한 왕조사만큼 거칠다. 당 지도자들은 그들이 통치한 이래로 끊임없이 진로를 바꾸어 왔다. 대약진운동, 문화혁명, 개혁, 당의 내부 쿠데타. 지금 공산당 내부에서는 자유경제에 적대적인 좌파운동과 미국화되는 것에 적대적인 국수주의적 운동이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계파 사이에는 오로지 힘의 관계만이 존재할 뿐이다. 당과 국가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형태의 대화나 타협이 없다. 당은 시골 마을 사람들의 선거와 탄원사무실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일반을 위한 표현 형태이다. 당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협상하지 않는다. 중국 공산당은 본질적으로 전체주의적이다. 그래서 중국 공산당은 진화하지 않는다.

 

중국 공산주의 정부는 여전히 예측 불가능한 정부다. 중국 군대는 1960년대에 인도를, 1979년엔 베트남에게 위협적인 전투를 감행했었다. 2005년 닭의 해에 베이징의 국가원수는 핵공격으로 미국을 마비시키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을 했다. 중국 군대는 이미 중국을 다 점령하고 있다. 또한 그 중심부와 주변의 식민지까지 모두 다 점령했다. 그들은 여전히 1989년처럼 시민들과 대항하는 공산주의 체제를 답보하는 최후의 보증인으로 남아 있다. 이 중국 군대가 어느 날엔가 전 지구를 위협하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중국인들, 티베트인들, 그리고 위구르인들만을 억압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군사적 공산주의 복합체인 중국을 지지하고 있는 자유세계에 대해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윤리

 

중국의 두 토템, 늑대와 용

2005년 닭의 해 연말 나는 중국의 소설가들 중 가장 인기 있는 지앙롱과 보냈다. 그의 작품 『늑대 토템』은 2년간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다. 『늑대 토템』은 몽골의 초원에서 벌어지는 늑대 사냥 이야기로, 1,400만 부가 팔렸는데, 이 중 1,300만 부가 해적판이다. 지앙롱은 그전에는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6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지앙롱은 10년을 바쳤다. 지앙롱은 60년대에 몽골로 파견되었다. 집단 학교에서 그의 교육을 완성시키라는 지시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목민들 곁에서 보낸 10여 년 동안 그는 당이 원했던 수업과는 다른 수업을 받았다. 몽골에서의 체험을 통해 중국에는 하나의 문화가 아닌 두 개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하나는 유목민들의 문화이며 또 하나는 농부들의 문화이다. 유목민들은 스스로를 자기들의 토템인 늑대와 동일시한다. 그들은 늑대처럼 꾀바르고, 자유롭고, 당당하며 독립적이다. 반면 농부들은 양이다. 농부들은 유교주의에, 그 다음은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념의 감옥에 갇혀 사는 수동적인 사람들이다. 지앙롱의 소설은 농부의 전통과 반대되는 자유의 토템에 바치는 찬사이다. 늑대와 동일시하는 젊은 독자들에게서 열렬한 반응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공산당 정부는 양의 사회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독립을 꿈꾸는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양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 혁명에서 현 상태까지 이르는 네 가지 시나리오

중국이라는 대륙은 파악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그러니 중국에 대해 예언하는 일은 그만두겠다. 다만 현재 중국학에서 지배적인 중국의 미래에 관한 네 가지 시나리오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시나리오는 또 한 번의 혁명이 일어날까?라는 가정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중국 전체는 반란으로 들썩거리고 있다. 예언가들은 이런 반란이 증폭되면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한다. 하지만 불만이 깊은 수억 중국인들은 자기들 사이에서도 의사소통이 안 되며, 통일된 운동을 하지도 못하고, 리더도 없고, 프로그램도 없다. 당이 이들을 제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 즉 파국, 즉 파산의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자. 중국의 성장은 현재의 리듬으로 지속되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에너지 부족, 물 부족, 숙련된 노동력의 부족, 공해, 위생규칙도 없는 인구집중이 불러올 전국적 유행병들은 무시 못할 저해요소들이다. 게다가 당은 중국 성장의 두 가지 원동력을 제어할 수 없다. 두 가지 원동력은 미국 소비자들의 요구와 중국인들의 저축률이다. 미국인들이 중국시장에서 등을 돌리고 중국인 투자가들이 중국은행에서 다른 저축으로 옮기기만 하면 중국은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세 번째 시나리오, 이것은 점진적인 과도기를 지나 민주주의 쪽으로 조직되리라는 시나리오이다. 중국은 민주주의로 갈 수 있을까? 이 시나리오는 개혁을 예견한다. 중국이라는 사회는 점점 더 소란스러워질 것이고 더 복잡한 선택들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군사정권이 혼란을 막을 것이며, 홍콩과 타이완에 통합되기를 바라는 티베트나 투르키스탄, 푸젠성이나 광둥성 같은 여러 성들이 자치 독립을 선포하는 것을 저지할 것이다. 즉 중국 정치 체제에 어떤 변화가 온다면 민주주의보다는 군사정권이 들어서 당을 대체할 가능성이 크다.

 

 

네 번째 시나리오, 이것은 독재적인 현 상태에 대한 시나리오이다. 보통 독재는 독재자와 함께 멸망하거나 계승 방식을 정할 능력이 없어서 멸망한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은 현재 폭력 없이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비세습 왕조가 되었다. 또한 아무 혼란 없이 경제, 국방, 사회운동에 있어 경영능력을 모두 개선시키고 있다. 하지만 끔찍한 것은 당의 야망이다. 인간은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간과하고 있다. 인민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자식들을 위한 학교, 노년을 위한 병원, 통째로 걷어 가지 않는 적당한 수입, 관료들의 수탈 감소, 표현의 자유 등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목소리가 없다. 이 침묵의 민족, 10억의 착한 중국인들은 당의 놀라운 효율성 앞에 희생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결국 당의 미래는 중국 밖에서 결정되지 않을까? 중국 사람들 중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95%이다. 이들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과 가난한 농부들이다. 이들은 침묵하고 있다. 아직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은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 몇몇 중국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들이 독재적인 권력과 그에 반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현재의 토론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는 소련연방공화국의 침묵하는 소련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던가? 그들의 동료들과 연대했던 것처럼 지금도 그런 행동이 필요하다.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 올림픽을 그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올림픽을 위협하는 사고, 즉 민중 반항, 전염병 등이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갖고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경기는 베를린 올림픽처럼 될 것인가, 서울 올림픽처럼 될 것인가? 이것은 서구인들의 손에 달려 있다. 1936,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을 세계에 개방하면서 민주화를 열었다. 중국 공산당은 외국 투자자들에 종속되어 있다. 그들은 서양에 비치는 자신들의 이미지에 대단히 민감하다. 그러므로 중국의 인권을 위한 외부의 행동은 효과적인 것이다. 서구인들은 위대한 중국에 경탄만 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분명 실재하는 중국인들과 함께 자유라는 가치를 공유할 것인가?

 

이 책은 지금까지 출간된 중국에 대한 책들과는 다른 시각을 표출한다.

저자 기 소르망은 특유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친중국적인 시각과 반중국적인 논리를 제시한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이미지는 중국 정부와 그리고 중국과의 무역을 중요시하는 사업가들이

유포시킨 ‘위로부터’ 만들어진 중국의 이미지라는 점을 주장하고 그에 대한 이론(異論)을 제기한다.

그는 자신이 직접 중국에 체류하면서 만나 본 중국 시민들, 농부들, 노동자들,

그리고 중국의 민주주의자들에게서 들은 그들의 고발을 바탕으로

‘아래에서부터’ 말하는 중국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저자의 의도는 침묵하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발언권을 주기 위한 것이며,

또한 중국의 발전에 매혹당해 정신없이 투자하고 있는 외국인들의 성찰을 촉구하기 위함이다.

그는 경제발전의 특혜를 누리고 있는 소수가 아닌,

10억이라는 다수의 중국인들이 자유를 갈구하고 있음을 알린다.

중국 사람들 중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95%이다.

이들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남아 있는 사람들과 가난한 농부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불만, 반대, 증오는 측정할 수가 없다.

현실의 중국은 광대하고,

방문이 금지된 지역들도 있고,

정보는 검열을 당하며,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은 재판 없이 투옥당하기 때문이다.

소르망이 체류한 2005년 한 해만 해도 중국 도처에서 당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이 일어나고 투옥과 총기난사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다.

 

물론 저자는 중국의 경제적인 성공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성공을 과대평가하지도 않는다.

중국의 경제 성장에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기술개발도,

인재양성도 사회복지에 대한 투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어 있는 건물과 고속도로와 공항 등은 계속 건설되고 있다.

또한 1만 개의 국유기업은 생산을 위한 생산을 한다.

외국 투자자들의 자본으로 이루어진 은행대출이 그 손실을 메워 주기 때문이다.

연간 9%의 경제성장률.

이 기적적인 수치에서 환경적인 재해,

토지의 고갈,

공해와 그로 인한 전염병들,

집단적인 인구이동에 따른 개인적,

혹은 집단적인 혼란에서 오는 손실 등이 제해져 있는가?

해마다 수백만 명의 중국인들이 해외로 이민을 가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저자는 중국 사회와 중국 공산당을 혼동하는 것을 거부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외국의 정치인들과 사업가들이 잇달아 베이징을 방문하고 있다.

이들이 중국의 참모습을 보고 돌아가는지,

중국의 공산당이 서구의 여론을 유혹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상품을 보고 돌아가는 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들의 방문에는 실리와 국시(國是) 그리고 이해관계라는 동기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려하는 점은 서구 국가들이 전체주의 국가의 병기고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 병기고는 아시아와 세계 나머지 지역에 막중한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칠백 대의 전투기,

미국까지도 도달할 수 있는 핵무기의 용도는 무엇일까?

또한 백여 대의 중거리 미사일은 어디다 쓰려는 것일까?

 

저자는 민주화를 이룬 모델 케이스로 한국을 소개하면서 중국의 정치적인 미래에 대한 조심스런 예측을 시도한다.

폭력 없이 어떻게 공산당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당을 진보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은 정치적 발전과 경제적인 성공을 이룬 긍정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 대중문화는 중국 젊은 층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국 젊은이들은 문화가 없는 당과 맞서 독자적인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여기에 중국의 미래가 있다.

이들이 만든 새로운 사회가 중국을 이끌고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이 과도기는 중국에게도 이웃 나라에게도 가장 위험한 시기이다.

따라서 지금은 중국을 신중하게 관찰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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