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커버그·잡스·게이츠를 키운 부모의 특별한 교육법
김희섭 지음
북오션 / 2012년 7월
Chapter 01 마크 저커버그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20대 청년 갑부 : 갈색 곱슬머리에 매부리코, 헐렁한 후드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채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젊은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인상의 이 청년은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인물이다. 페이스북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는 페이스북 최대 주주로 그의 재산은 약 30조 원에 달한다. 《포브스》에 따르면 전 세계 부자 랭킹 33위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부자라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재산보다 3배가량이나 많은 금액이다. 그의 나이가 아직 20대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더욱 놀란다. 페이스북은 2012년 5월 뉴욕 나스닥 증권시장에 정식으로 상장되었고 시가총액은 122조 원에 이르렀다. 그러나 저커버그는 단지 돈이 엄청나게 많다고 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전 세계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저커버그 부모의 자녀 교육법 : 저커버그는 원래부터 천재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대성공을 이룬 것일까?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아서 대박을 친 것일까? 물론 재능과 운도 따랐겠지만 자녀의 적성을 조기에 파악하고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도와준 저커버그 부모의 교육열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페이스북도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저커버그의 성공 배경에는 부모의 세심한 관찰과 맞춤형 교육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어려서부터 컴퓨터와 IT(정보기술)에 대한 뛰어난 관심과 집중력을 보이는 것을 보고 아들이 컴퓨터 천재로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교육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막연히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채근한 것이 아니다. 자녀가 어떤 분야에 흥미를 느끼는지, 지적 능력이 어느 수준인지 파악해서 적절한 교육과정을 제시하며 이끌었다. 학교 수업과 별도로 개인 과외교사를 붙여주기도 했고, 아직 중학생인 저커버그를 대학원 수업에 데려가 청강을 시키기도 했다.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시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자녀가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창의성을 길러주고 도전정신을 키워준 것이다. 저커버그도 “내가 IT를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 제일 컸다”고 말한다. 하버드를 다니던 아들이 학교를 중퇴하고 벤처기업을 창업한다고 했을 때도 말리기는커녕 “그거 정말 재미있겠다. 네 생각대로 멋지게 한번 해 보렴” 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저커버그의 성장 배경 : 저커버그는 1984년 5월 14일 미국 뉴욕 주 화이트 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워드는 치과 의사, 어머니 카렌은 정신과 의사로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이었다. 저커버그는 4남매 중 유일한 사내아이로 2살 터울의 누나 랜디와 아래로 여동생 도나, 애리엘이 있다. 이들 남매는 우애가 깊었고 서로 어울려 장난치며 노는 걸 좋아했다. 아버지 에드워드는 지금도 뉴욕 주에서 45분 정도 떨어진 돕스페리에서 개인 치과병원을 운영한다. 어머니 카렌은 남편의 병원 운영을 돕고 있다. 아들이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부부는 예전과 다름없이 직접 환자를 진료한다. 아버지 에드워드는 매사에 낙천적이고 유머감각이 뛰어났다. 그는 병원 입구에 ‘고통 없는 의사 Z(Painless Dr.Z)’라는 간판을 걸어놓았다. 치과 치료를 무서워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친근한 문구를 표시한 것이다. 병원 웹 사이트에도 ‘겁쟁이 전문(We cater to cowards)’이란 문구가 있다. 에드워드는 페이스북에 병원 홍보 페이지를 따로 만들어 운영할 정도로 아들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 치과의 페이스북 친구는 1,000명이 넘는다. 어릴 때 아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주던 아버지가 이제는 아들이 개발한 페이스북으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는 셈이다.
에드워드의 치과병원과 집은 바로 붙어있다. 1층이 병원이고 2층이 가족들과 같이 사는 집이다. 그 덕에 저커버그의 부모는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일과시간에도 틈틈이 자녀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곁에서 항상 지켜보았다. 저커버그 남매들도 자주 병원을 들락거렸다. 병원의 간호사, 직원들과도 한 가족처럼 지냈다. 에드워드는 병원 일이 끝나면 늘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아빠로서 엄격한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아이들과 격의 없이 장난치고 노는 것을 더 좋아했다.
가정 교육에서 어머니의 역할 : 정신과 의사인 어머니 카렌도 아들의 천재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하지만 아버지와는 방향성이 약간 달랐다. 아버지 에드워드가 아들의 컴퓨터 실력 향상에 큰 역할을 했다면 카렌은 저커버그의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주는 일에 힘썼다. 아들이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컴퓨터에만 빠져 ‘컴퓨터만 잘하는 괴짜’가 되는 게 아니라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잘 이해하는 시각을 갖기를 바랐다. 어머니 카렌은 미래에는 기술과 인문학에 두루 통달한 융합형 인재가 중요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를 위해 카렌은 아들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이끌어 내는 교육환경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카렌은 자녀들에게 역사, 문학, 예술, 논리학 등 폭넓은 분야의 책을 읽도록 지도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로마사,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과 음악, 동서고금의 시와 소설 등을 틈나는 대로 읽게 했다. 저커버그가 지금도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의 장편서사시 『일리아드』를 줄줄 외우는 것은 이 당시 어머니의 조기 교육이 큰 도움이 됐다.
전 세계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인 뉴욕 주 근처에 사는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카렌은 아이들과 함께 뉴욕 시내의 박물관과 미술관, 콘서트홀을 찾아다녔다. 저커버그는 피카소, 고흐 등 대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컴퓨터 화면에서는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저커버그는 붉은색과 녹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적록색맹이었다. 어머니 카렌은 미술관에서 아들이 그림의 색깔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보고 색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렌은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나름대로 아들의 용기를 북돋워주려고 애썼다. 붉은 색이나 초록색이 많은 풍경화보다는 아들이 가장 잘 구별할 수 있는 푸른색과 흰색이 많은 현대미술 위주로 그림들을 보여줬다. 현재 페이스북의 로고가 청색과 백색으로 돼 있는 것도 저커버그가 파란색을 가장 잘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게 정한 것이다.
좋은 학교를 갔기에 좋은 기회를 얻었다 : 저커버그에게는 누나 랜디 말고도 조력자들이 많았다. 그는 하버드대 졸업장을 받지는 못했지만 하버드대를 다닌 턱을 톡톡히 봤다. 막강한 하버드대 인맥은 그의 든든한 사업 자산이었다. 기숙사 친구들인 더스틴 모스코비츠, 에두아르도 세버린, 크리스 휴즈 등은 저커버그의 페이스북 창업 동료들이다. 명문 사립고인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 동문도 큰 도움이 됐다. 집안이 부유한 고교 동창들은 그의 사업 아이디어를 신뢰하고 페이스북에 거금을 선뜻 투자했다. 초기 회사 운영자금 가운데 상당수는 저커버그의 고교 동창생들에게서 나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저커버그는 자신의 실력과 더불어 든든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유리한 환경에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런 배경은 아버지 에드워드와 어머니 카렌이 만들어준 것이다. 저커버그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저커버그는 돈 버는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돈을 멋있게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2010년 9월에 저커버그는 미국의 학교 교육환경 개선에 써달라며 1억 달러를 기부했다. 당시 그는 <오프라윈프리쇼>에 나와 ‘스타트업 에듀케이션 재단’을 만들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모든 어린이는 좋은 교육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저는 살면서 많은 기회가 있었어요. 그중 많은 부분이 정말 좋은 학교에 갔기 때문에 얻은 기회입니다. 다른 어린이들도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한 돕고 싶어요.”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의 역할 : 아들이 엄청난 부자가 됐지만 저커버그의 부모와 형제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며 소박하고 성실하게 살고 있다. 저커버그의 부모는 여전히 치과병원을 운영 중이다. 아버지 에드워드는 매일 2층 집에서 1층에 있는 병원으로 출근해 환자를 진료한다. 정신과 의사 출신인 어머니 카렌은 남편을 도와 치과를 관리한다. 평범한 미국 중산층 모습 그대로다. 저커버그 역시 여전히 수수한 후드티를 즐겨 입고 월세를 내는 주택에 살아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부자’로 불리기도 했다.
저커버그 부모는 2012년에 집과 병원이 붙어있는 새 건물을 구해 이사했다. 이사를 하면서도 오래전부터 써온 가구들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다. 작은 부엌이 있고, 바닥에는 푸른색 카펫이 깔렸다. 집을 옮길 때는 주택담보대출을 받았다. 그렇다고 이들 부부가 가난한 것도 아니다. 저커버그는 아버지 에드워드에게 “페이스북을 만들 수 있게 잘 키워줘서 고맙다”며 페이스북 주식 200만 주를 줬다. 600만 달러(70억 원)나 되는 거금이다. 부모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아들은 회사 이사회를 통해 공식적으로 아버지 에드워드에게 주식을 발행해 제공했다. 부모는 아들의 선물을 받기는 했지만 주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어떤 특별한 기술을 갖고 아이들을 기른 게 아니에요. 내가 해준 것은 오직 아들이 좋아하는 일을 잘하도록 격려해준 것뿐이죠. 아들이 성공했다고 보상을 바라지 않아요. 평소처럼 나는 내 일을 하면 돼요.” 에드워드는 자녀를 키우는 비법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아이들의 열정을 지지해주세요. 그 어떤 것보다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라고 조언한다. 저커버그도 부모의 영향을 받아 페이스북 직원들이 자녀와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도록 지원하고 있다.
에드워드는 자녀 교육에 대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쉽게 하기 힘든 진리를 일찌감치 깨닫고 실천했다. “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자녀를 이끌 수도 있지만 그건 자녀가 원하는 게 아닐 수도 있어요. 부모의 욕심을 내려놓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도록 도와주세요. 다만 아이를 키우는 데 어떤 형태로라도 극단적인 것은 좋지 않아요. 해야 할 일과 놀이의 균형을 잡아줄 필요가 있어요.”
Chapter 02 스티브 잡스
세계를 뒤흔들고 사라진 거물 : 2011년 10월 5일, 전 세계는 한 인물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다. 허름한 차고에서 창업한 애플을 세계 최고의 IT기업으로 성장시킨 스티브 잡스(1955.2.24~2011.10.5). 강력한 카리스마, 편집광적인 열정, 완벽주의, 화려한 쇼맨십, 마법 같은 프레젠테이션, 창조경영의 아이콘 등이 잡스를 상징하는 단어다. 잡스는 혁신적인 사고방식으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고, 결국 세상을 자신의 생각대로 바꿔놓았다.
스티브 잡스는 1970년대 말, 기업용 대형 컴퓨터만이 판을 치고 시장을 주도하던 시기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 컴퓨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그 덕에 잡스는 20대 초반에 백만장자의 반열에 오른다. 2001년 이후에는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삼총사를 내세워 모바일 시대를 선도했다. 다양한 IT 기기와 아이튠즈 등의 서비스가 성공적으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기반에는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던 잡스의 열정이 깔려 있었다. 잡스는 완벽하고 훌륭한 인물은 아니었다. 성격이나 도덕적인 면을 보면 결함이 많은 사람이었고, 이기적인 행동과 지나친 독설로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런 잡스의 일생이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잡스가 굴곡 많은 삶을 살면서도 고난에 굴하지 않고 그 나름의 방식대로 인생을 살면서 세상을 재창조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 나를 키워주신 양부모님 : 스티브 잡스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랐다면 오늘날의 애플은 탄생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입양됐다. 어렵게 들어간 대학도 한 학기 만에 때려치웠다. 20대에 애플을 창업해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독선적인 성격 탓에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나는 수모도 겪었다. 절치부심한 끝에 애플에 복귀해서 최고의 결정에 이르는 순간, 췌장암이라는 병마가 엄습했다. 지긋지긋한 불운의 연속이자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인생이다. 스티브 잡스는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신제품 개발을 멈추지 않았다. 잡스가 온갖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빛나는 업적을 쌓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족에 있었다.
잡스는 자신을 키워준 양부모님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아내, 자녀 등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어린 시절 헤어진 여동생을 찾아서 못다 한 우애를 나누기도 했다. 젊은 시절 일에 매달리느라 가족을 돌보지 못했던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원로 기자에게 부탁해 자신의 전기 『스티브 잡스』를 남겼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사람들, 특히 가족들에게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어린 잡스에게 나사의 컴퓨터를 보여주다 : 양아버지 폴은 잡스가 당시 막 싹트기 시작한 전자공학에 재능을 보이는 점에 주목했다. 그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나사(NASA, 미국 항공우주국) 연구소에 잡스를 데려가 대형 컴퓨터를 보여줬다. 당시 나사의 컴퓨터는 우주선의 궤도 계산 등 사람이 하기에는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복잡한 계산을 담당하고 있었다. 자동차보다 훨씬 거대하고 복잡한 컴퓨터가 조명이 번쩍거리는 가운데 ‘윙~윙’ 소리를 내면서 작업을 처리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어린 잡스는 컴퓨터를 보고는 곧바로 매료되어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컴퓨터가 이렇게 멋진 거구나. 나중에 꼭 내 손으로 컴퓨터를 만들어 보겠어.” 잡스는 이렇게 컴퓨터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자제품에 대한 지식 면에서는 잡스가 아버지를 능가했다. 아버지 폴은 자동차에 대해서는 척척박사였지만 전자공학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그다지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잡스의 부모는 이웃에 사는 전자회사 엔지니어에게 도움을 청했다. 초등학생 잡스를 이 집에 보내 마이크와 스피커의 작동 원리 등 전자공학의 기초를 배우게 한 것이다. 실리콘밸리 최초의 벤처회사인 HP(휴렛팩커드)에 다니던 그 엔지니어는 영민한 잡스에게 마이크, 배터리, 저항, 콘덴서 등의 작동 원리를 친절하게 가르쳐줬다. 잡스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빠른 속도로 지식을 깨우쳤다. 잡스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부품을 이것저것 끼워 맞춰 라디오 같은 전자제품을 만드는 손재주가 뛰어났다. 나중에 잡스는 마이크와 스피커를 연결해 간단한 도청장치도 만들었다. 이걸 부모님의 침실에 설치해 놓고는 무슨 소리가 나는지 다른 방에서 헤드폰을 끼고 몰래 엿들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폴은 잡스를 혼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칭찬을 했다. “이 녀석, 고약한 물건을 만들었구나. 네 실력이 훌륭한 건 잘 알겠으니 이제 우리 방에서 저걸 치워라.”
부모님처럼 살지는 못했지만 그분들을 닮고자 노력하다: 잡스는 인생의 절정기였던 2004년에 췌장에서 암이 발견돼 오랜 투병생활을 했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창조적 발상으로 세상을 바꾼 잡스는 결국 2011년 숨을 거둔다. 그가 말년까지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가족 덕분이었다. 부모인 폴과 클라라는 1980년대에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잡스는 아내와 여동생, 자녀들의 보살핌 속에 남은 인생을 정리했다. 잡스는 그동안 사업을 핑계로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을 특히 아쉬워했다. 자신이 부모에게 받았던 것처럼 자녀에게 사랑을 많이 베풀어주지 못한 것을 항상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틈틈이 자녀와 국내외 여행을 다니며 마지막 생을 보냈다.
잡스는 분명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말썽쟁이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그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항상 애틋한 정과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부모님은 성실한 분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처럼 살지는 못했지만 그분들이 훌륭한 분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잡스는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자신을 키우느라 헌신한 양부모를 깊이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는 “폴과 클라라는 1,000퍼센트 내 부모님”이라고 말했다.
Chapter 03 빌 게이츠
죽기 전에 내가 번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겠다 : 빌 게이츠가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 것은 단지 돈을 많이 벌었거나 큰 회사를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다. 잡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 놓았다. 엔지니어들이나 쓰는 걸로 알았던 컴퓨터를 집집마다, 사무실마다 들여놓게 한 결정적인 인물이 바로 게이츠다. 잡스보다 더 뛰어난 점도 있다. 게이츠는 2008년 회사 경영에서 손을 떼고 명예롭게 은퇴했다. 자신이 창업한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지금은 부인 멜린다 게이츠와 함께 세계 최대의 자선재단인 빌&멜린다 재단을 이끌며 자선활동에 힘쓰고 있다. 그는 “죽기 전에 내가 번 재산의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켜가고 있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저개발 국가의 질병 퇴치 연구를 지원하고 컴퓨터를 보내 학습 환경도 개선하고 있다. 미국 공립학교의 교육 환경 개선에도 많은 돈을 지원한다.
획기적인 소프트웨어로 열심히 돈을 벌어 인류를 위한 자선사업을 펼치는 게이츠는 훌륭한 기업가의 표상으로 통한다. 역설적으로 그가 은퇴한 뒤 마이크로소프트는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시대에 잘 적응하지 못해 예전의 기세가 많이 약화된 모습을 보였다. 아직 나이가 많지 않은 게이츠가 흔들리는 마이크로소프트에 복귀해 회사를 되살릴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는 “내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할 일은 끝났다”며 자선활동에 매진할 것이라는 의사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철두철미한 성격의 어머니 : 게이츠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격을 반반씩 닮았다. 내성적이고 사교성이 약한 측면은 아버지의 영향이고, 승부욕이 강하고 어려운 일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것은 어머니를 닮았다. 어머니 메리 게이츠는 강한 의지와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여성이었고, 은행가 집안에서 자라 사업 수완도 뛰어났다. 가족들 사이에서 중요한 사안이 생기면 결정을 하는 것은 언제나 메리의 몫이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수줍어하는 내성적인 성격의 남편 윌리엄에게 부족한 부분을 부인 메리가 훌륭히 메워줬다. 활달한 성격의 메리는 종종 시애틀 지역의 변호사, 정치인, 공직자, 문화계 인사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었다. 시애틀 부유층과 실력자들은 대부분 게이츠 집의 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교사 출신이었던 메리는 세 자녀를 키우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교직에 복귀하지 않고 자녀 교육에 헌신했다. 메리는 빌이 1주일간 입을 옷의 종류와 색깔을 미리 정해놓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셔츠, 바지, 양말 색깔도 맞춰서 계획표를 붙여놓았다. 매일매일 어떤 음식을 먹을지 식단을 짜서 냉장고에 붙여놓는 것은 기본이었다. 집 안팎도 늘 단정하게 정돈했다.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는 등 모든 것을 짜놓은 계획표대로 움직여야 안심이 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빌은 어머니의 정리정돈 습관은 전혀 물려받지 못했다. 그의 방은 항상 옷가지와 책이 바닥에 널려 있어 어지러웠다. 어머니는 빌 게이츠의 방을 치우다 지쳐서 나중에는 손님들이 보지 못하게 아예 그의 방문을 항상 닫아놓을 정도였다. 그러나 빌은 어머니 덕분에 차분하게 계획을 세우고, 공부할 때나 놀 때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습관을 익힐 수 있었다.
엄할 때는 엄하게, 1년간 컴퓨터 사용 금지: 빌 게이츠는 수학을 특히 좋아해 수학은 항상 학교 전체에서 1등이었고 교과 과정을 훨씬 뛰어넘는 실력을 인정받아 워싱턴 대학에서 수학과목을 청강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과목에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로지 컴퓨터에만 관심을 쏟았다. 빌 게이츠와 그의 친구들이 학교 컴퓨터로 체스 게임을 너무 많이 해 사용 요금이 많이 나왔다. 학교에서 컴퓨터 사용 한도를 정하고 사용시간을 제한하자 빌 게이츠는 컴퓨터 회사 요금 부과 시스템을 해킹해 사용료를 대폭 낮췄다. 그러나 몇 달간 컴퓨터를 마음껏 사용한 그 악동들은 결국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컴퓨터를 해킹한 사실을 통보받은 빌 게이츠 부모는 크게 낙담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등학교에 막 진학한 빌 게이츠에게 가장 엄중한 벌칙을 내린다. 1년 동안 컴퓨터를 쓰지 못하게 한 것이다. 컴퓨터를 못 쓰는 것은 게이츠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부모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게이츠는 컴퓨터를 끊고 그동안 소홀했던 학교 공부를 시작했다. 수학, 과학, 역사와 문학, 경제 관련 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컴퓨터에 몰두했던 열정을 책으로 돌리자 그의 지식은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같은 위인들의 전기를 많이 읽고 그들의 사고방식과 문제해결법을 배웠다.
게이츠는 레이크사이드스쿨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낸 학생이었다. 몸집이 작고 왜소해 스쿨버스에서는 늘 뒷자리에 앉았지만, 뛰어난 컴퓨터 실력과 수학 성적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학교에서 최고의 천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학생들은 모두 빌 게이츠라고 답했다. 그 때문에 미움과 질시도 많이 받았고, 종종 교사와도 논쟁을 벌였다. 교사의 말문이 막혀 게이츠가 이기는 경우도 있었다. 교사가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빙빙 돌려 말할 때는 “선생님, 이걸 말하고 싶은 거 아닌가요”라고 툭 던져 무안을 주기도 했다. 이는 다른 사람을 깔봐서 나온 행동이라기보다 자신감이 지나쳐서 나타난 행동으로 보인다.
게이츠의 부모는 아들이 1년간 컴퓨터를 완전히 끊은 점을 대견하게 생각했다. 아들이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것을 보고는 안도했다. 그동안의 가정교육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게 판명된 것이다. 게이츠는 고교 2학년 때 다시 컴퓨터를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컴퓨터만이 아니라 과학, 인문, 역사 등 다방면에서 폭넓은 지식을 쌓은 게이츠는 더 이상 컴퓨터에만 빠져 사는 괴짜가 아니었다. 고학년이 된 그는 레이크사이드스쿨 학생들을 모아 교내에서 소프트웨어 회사를 차렸고,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수강시간표 짜는 프로그램을 게이츠에게 의뢰했다. 게이츠와 친구들은 이 소프트웨어를 시애틀의 다른 대학에도 판매해 짭짤한 수익을 올렸다.
아버지에게 배운 계약법으로 성공의 발판을 만들다: 빌 게이츠는 마침내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서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했고 3년 뒤 고향인 시애틀로 회사를 옮겼다. 아버지 윌리엄은 아들에게 자신을 따라 변호사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들이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걸 하라고 격려했다. 게이츠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자신의 삶에 제일 큰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게이츠가 ‘사업 계약서 내용을 제일 잘 이해하는 최고경영자’라는 평을 듣는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다. 그는 중요한 사업계약을 할 때는 계약서 문구를 꼼꼼히 검토하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될 때 서명을 해야 한다는 걸 어려서부터 체득하고 있었다.
1980년 최고의 IT 기업이었던 IBM과 맺은 컴퓨터 운영체제 판매계약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이 계약은 ‘IT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계약’으로 통한다.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에게는 막대한 부를 안겨준 최고의 계약이었고, 반면 IBM 경영진은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된다. 당시 스티브 잡스가 세운 조그만 벤처회사 애플이 PC 산업에 진출해 성공을 거두자 대기업인 IBM도 PC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IBM은 정부기관이나 대기업에서 사용하는 중대형 컴퓨터만 만들고 있었고, 개인이 사용하는 PC에는 사실 큰 관심이 없었다. 애플은 PC와 운영체제를 모두 직접 개발했다. 그러나 IBM은 하드웨어만 만들고 PC를 작동하는 데 필요한 운영체제는 외부업체를 활용하기로 했다. IBM은 PC가 일시적인 유행에 그칠 것으로 보고 적당한 외주업체를 물색했는데, 이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가 등장했다.
게이츠는 IBM에 MS-DOS를 공급하되 일시불로 돈을 받지 않고 PC 한 대당 일정액을 받는 라이선스 계약을 했다. 판매대수가 늘어날수록 마이크로소프트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계약이었다. 게다가 MS-DOS의 소유권을 IBM에 넘기지 않고 마이크로소프트가 갖겠다고 주장했다. 다른 회사에도 운영체제를 판매하기 위해서였다. PC 시장의 성장성을 높게 보지 않았던 IBM은 게이츠의 제안을 선뜻 수용했다. 그 이후 벌어진 일은 IT업계의 판도를 바꿨다. PC는 전 세계에서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초반에는 IBM PC가 제일 많이 팔렸지만 곧 컴팩, HP 같은 경쟁사들이 나타나 IBM을 추월했다. 이들 컴퓨터에도 모두 MS-DOS가 깔려 있었다. 당연히 마이크로소프트의 수익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후 개발한 ‘윈도’ 운영체제와 사무용 프로그램 ‘오피스’도 불티나게 팔렸다.
Chapter 04 IT 천재들의 부모들
아이에게 힘이 되어주는 가족의 존재: 세 사람은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다. 아버지들은 가족을 부양하는 일로 바빴지만 가능한 한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애썼다. 게이츠의 아버지는 워싱턴 주 변호사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외부 일이 많았다. 그런데도 일이 없는 날에는 늘 일찍 집에 돌아와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요즘 자녀가 어떤 일에 관심을 갖는지, 친구들과 사이는 어떤지, 사회적인 이슈나 문화이벤트, 세상 돌아가는 얘기 등에 대해서도 폭넓게 의견을 나눴다. 특히 일요일 저녁에는 지역의 유명 인사들을 초대해 자녀들에게 그들의 성공 스토리를 들려주고 자녀의 도전정신을 키워줬다. 매년 여름방학에는 2주간 가족여행을 떠나 돈독한 가족애를 쌓았다. 어린 시절 게이츠가 가장 좋아한 것도 가족과 떠나는 여름캠프였다.
저커버그의 아버지는 저커버그가 어릴 때부터 같이 컴퓨터 게임을 즐기고 아들의 지적 능력과 관심사를 세세히 파악했다. 병원 일을 보는 틈틈이 아들이 놀러오면 기꺼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버지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는 친한 친구처럼 대해줬다. 저커버그도 아버지를 어렵게 느끼지 않고 늘 가까이에서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으로 삼았다.
스티브 잡스의 경우는 출발부터 이들과 달랐다. 잡스는 입양아였지만 그의 양부모는 그를 친아들 이상으로 귀하게 여겼다. 어린 시절 잡스가 “친부모가 정말 저를 버렸나요”라고 울면서 물어보자 아버지는 “그게 아니란다. 우리가 너를 선택한 거야”라고 따뜻하게 말해줬다. 양부모는 빠듯한 형편에서도 아들이 원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뭐든지 들어줬다. 아버지는 아들과 차고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잡스에게 자동차 고치는 법과 울타리나 가구를 만드는 목수 일도 가르쳐줬다. 훗날 잡스가 아이폰 같은 기기를 만들 때 완벽한 제품이 나올 때까지 계속 설계와 디자인을 뜯어고친 것도 무슨 일이든 대충 처리하는 법이 없었던 아버지를 보고 배운 것이었다.
부모는 자녀의 가장 훌륭한 역할모델: IT 천재들의 부모는 자녀에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지 않았다. 공부하라고 말하거나, 아버지처럼 의사나 변호사가 되라고 요구한 적도 없었다. 그 대신 스스로 일상생활에서 모범을 보였다. 자녀들은 자연스럽게 부모의 성실하고 진지한 생활태도를 보며 자랐다.
잡스의 아버지는 집에 울타리를 만들 때 잡스에게 망치질을 가르쳐주고, 차고에서 자동차를 수리할 때도 함께 일했다. 그는 “남에게 보이는 앞부분만 신경 쓸 게 아니라 숨겨져 있는 뒤쪽도 잘 다듬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잡스의 완벽주의는 어려서부터 잉태된 셈이다. 잡스의 아버지는 자동차 수리공, 금융회사 채권 추심원, 부동산 중개업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해 큰돈을 만지지는 못했다. 잡스는 누구보다 아침 일찍 회사에 출근해서 가장 늦게 돌아오는 아버지가 돈을 잘 벌지 못하는 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는 늘 쾌활한 얼굴로 일터에 나갔고,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자동차 수리 분야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잡스가 “나중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세계에서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게이츠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게이츠의 아버지는 성공한 변호사이면서도 지역사회에 많은 기부를 하는 인물이었다. 혼자만 잘사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소외된 이웃을 보살피는 일에 신경을 썼다. 어머니도 자선활동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은퇴해 세계 최대의 자선재단을 운영하는 것도 이런 부모의 베푸는 삶에 제일 큰 영향을 받았다. 부모가 자녀의 가장 훌륭한 역할 모델이었던 것이다.
스티브 잡스(애플), 빌 게이츠(마이크로소프트),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세 사람은 IT 산업의 발전을 이끌어온 천재들로 높이 평가된다.
IT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바꿨다는 칭송도 쏟아진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가 없었으면 컴퓨터는 어떻게 사용할지,
아이폰 없이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모처럼 멋지게 차려입고 사진을 찍었는데 페이스북이 없다면
친구들에게 어떻게 자랑할지 막막할 것이다.
과연 이들 IT 천재들은 천재로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천재로 길러진 것일까?
어떻게 하면 이들 같은 천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정부와 경제계에서 ‘제2의 스티브 잡스’,
‘제2의 저커버그’를 키워야 한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이런 호기심은 더 강해진다.
이것은 21세기 대한민국에 사는 부모들에게도 큰 관심사일 것이다.
물론 이들이 자라온 가정환경이나 시대적 배경, 문화, 교육환경 등이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인 규칙을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이들 IT 천재 3인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많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다들 머리는 좋았지만 인간관계는 매끄럽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말썽꾸러기였고,
수업시간에는 장난을 치거나 딴짓을 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는 끈질기게 매달렸고 유독 승부욕이 강했다.
수학과 과학 실력이 뛰어났으며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했다.
기술에만 매몰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폭넓게 이해하는 안목과 사업가적 기질을 겸비한 ‘융합형 인재’였다.
그리고 천재들의 뒤에는 천재를 길러낸 부모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출생환경이나 성장배경은 제각각 달랐음에도
이들에게서 여러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은
부모들의 자녀 교육 방식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게이츠는 부유한 변호사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다.
저커버그는 부모가 의사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잡스는 자동차 수리공의 가정에 입양됐다.
언뜻 봐도 셋의 배경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자녀를 키우는 데 부의 크기나 배경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IT 천재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어떤 목표를 세워 정진하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부모의 역할이 가장 크고 중요했다.
이들이 각종 언론 인터뷰에서 가족을 중시하고
부모를 존경한다고 말한 것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잡스, 게이츠, 저커버그의 부모가 자녀를 키운 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대한민국의 부모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부모의 교육열은 이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다.
오히려 훨씬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입시제도가 바뀔 때마다
자녀를 어느 학원에 보내는 것이 유리한지 따지는 것도 물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녀의 시각에서 자녀를 바라보며 자녀가 무엇을 원하고,
어느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 발견해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는 자유방임형 교육이 아니라 세
심한 관찰과 보살핌, 헌신적인 애정이 필요한 그런 교육 말이다.
그런 교육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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