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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중국 - 이익희 등저

삼생지연 2021. 2. 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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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중국 이익희 등저
일빛/2003년 8월

 

문화

때로는 순박하게, 때로는 영악하게 - 중국인의 기질

한 민족의 문화적 성격은 대체로 지리적 요인, 그 중에서도 기후와 깊은 관련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기후의 차이에서 시작된 문화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기질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인을 두고 풍류와 음주가무에 능하다거나 한의 정서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하고, 일본인은 냉정하며 배타 의식이 강하고 조화와 집단을 중시한다고 하는 이유도 곰곰이 따져보면 그 지역의 지리적 요인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전통적으로 중국 사람들의 기질을 일컫는 표현은 실용주의와 적당주의, 체면이나 관계 중시 등의 표현으로 집약되어 왔다. 하지만 광활한 국토와 다양한 지리적 조건에서 살아가는 중국 사람들을 통틀어서 한두 마디로 규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화북, 화남, 서북, 서남, 동북 지역들이 저마다 독특한 지리·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해보면 중국의 각 지역에 대한 좀더 세밀한 탐색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화북 지방의 중심은 두말할 것 없이 베이징이다. 베이징은 중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지역이니 만큼 이 지역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고, 높은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으며, 대인 관계에서 예절을 중시한다. 아울러 실리적이어서 외면을 치장하는 것보다는 먹는 일에 관심과 정성을 쏟는다. 베이징을 둘러싸고 있는 허베이(河北) 사람들은 풍부한 재치와 유머, 상업적 분야에서 두드러진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내몽고 지역은 대단히 직선적이고 호방한 사람들이다.

 

화동 지역은 중국에서도 물산이 풍부하고 기후가 따뜻한 곳인데, 상하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경제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 쟝쑤(江蘇) 지역은 전형적인 중국인이라고 할 만큼 정적이며, 온화하고 사리에 밝다. 푸젠(福建) 사람들은 전형적인 남방형으로 체격이 작고 근검 절약형이 많으며, 신중한 편이다. 내륙의 산간 지역 사람들은 보수적이고 배타적인데다 확실한 이익이 없는 투자를 잘 하지 않는 데 비해 연해 지역 사람들은 개방적이며 모험심도 강하고 임기응변에도 능하다.

 

동북 지방은 추운 기후에 대체로 척박한 자연조건을 지니고 있다. 동북 지역의 세 성을 묶어 동북삼성이라는 표현을 곧잘 쓰는데 랴오닝(遼寧), 헤이룽쟝(黑龍江), 지린(吉林)이 그곳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순박하고 부지런하며 개방적이다. 그리고 내륙의 중심에서 남부 해안까지 이어지는 화중과 화남의 허난(河南) 사람들은 대단히 보수적이다.

 

서남 지역은 내륙으로서 험한 자연 환경을 지니고 있다. 쓰촨(四川) 지역 사람들은 문화적 자존심이 강하고 예절을 중시하며 일 처리를 신중하게 하는 편이다. 소박하고도 온화한 성격이기도 하다.

 

내륙 중에서 내륙이라 할 수 있는 서북 지역 중 산시(陝西) 사람들은 무역업과 금융업에 뛰어난 자질을 보일 정도로 숫자 관념이 발달했다. 고대 문명의 유물들이 가장 잘 보존되고 가장 많이 출토되기도 하는 간쑤(甘肅)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의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려는 강한 인내심을 소유하고 있다.

 

각 지역의 중국인들은 지리와 기후, 문화적 풍습에 따라 저마다 색다른 특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중국, 혹은 단일한 모습의 중국 사람만을 염두에 두고 중국인과 교류한다면 많은 어려움이 뒤따를 것이다. 각 지역별 특징에 따라 그에 걸맞는 대응이 필요하다.

 

사합원(四合院), 그 금기와 상징의 집

중국 영화의 거장 장이머우의 역작 가운데 하나인 <홍등>은 전통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 아래에서 억압당했던 여성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결국 욕망의 연쇄적인 좌절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고 마는 이 영화의 분위기와 주제 의식을 잘 뒷받침해준 형식미학적 장치 가운데 하나가 바로 폐쇄된 사합원 구조였다.

 

사합원은 말 그대로 사방이 막혀 있고 대문으로만 통로가 나 있는 전형적인 베이징 지역의 전통 주택 양식이다. 그런데 이 사합원은 베이징의 전통적인 골목 양식이면서 사합원의 벽들이 만나 형성된 골목인 후퉁(胡同)과 따로 생각할 수가 없다. 후퉁과 사합원은 대체로 원 왕조 시대를 전후하여 형성되었다고 한다. 사합원은 대체로 남향으로 지어졌는데, 전체적으로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고, 그 가운데에는 (), 즉 정원 혹은 뜨락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네 벽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에는 주거용으로 지어진 다양한 용도의 방들이 자리잡고 있는데 대체로 사면의 건물들에 난 창문과 출입문은 뜨락을 향해 열려 있고, 남쪽과 북쪽은 다섯 간, 동쪽과 서쪽은 세 간으로 꾸며져 있다. 이와 같이 엄격하게 바깥과 차단된 건축 양식 속에서 전통 중국인들은 가정과 가족을 기초로 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시켜왔으며, 그 안에서도 상하 간의 수직적 질서를 익혀왔던 것이다.

 

사합원을 만들 때는 몇 가지 금기가 있다. 우선 베이징 사람들은 뜨락의 바닥을, 이곳을 나서면 바로 연결되는 후퉁의 바닥 높이보다 낮게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비나 눈이 내렸을 때 배수하거나 밖으로 퍼내기가 힘들다는 실용적인 까닭이 전제되어 있겠지만 더 나아가 집에서 문밖으로 나설 때 마치 등산을 하는 듯 높은 곳으로 올라서려는 행위를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뽕나무와 배나무 등도 사합원에 들이지 않았다. 뽕나무는 중국어로 상수(桑樹)라 하는데, 이때 자가 장사지낸다 할 때의 '() 자와 독음이 같고, 배나무는 리수(梨樹)라 하는데, 이때 자 또한 헤어진다고 하는 () 자와 독음이 같아 꺼리는 것이다. 대신 화려한 봄에는 화려한 꽃이 피고, 가을에는 풍성한 열매를 맺어 왕성한 생명력과 풍요로운 번창을 의미하는 대추나무, 석류나무, 해당화 등은 사합원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주거 형태도 사회주의 중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모두 정부나 직장에서 배급한 집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또한 개혁개방 이후에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1999년 제도개혁으로 개인이 주택을 소유할 수 있게 되자 베이징 곳곳에서 철거와 개발이 시작되면서 전통 중국의 상징이었던 후퉁과 사합원은 더 이상 중국과 베이징의 상징으로 남지 못한 채 헐리게 되었고, 이제는 낡은 사진첩에서만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문학

이데올로기와의 충돌 - 근·현대 문학

우리가 보통 중국 현대 문학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19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일련의 문학 현상들을 통칭한다. 그러나 중국어로 현대, 센다이(現代)라고 말할 때 그 시간의 종착점은 대체로 1949년 사회주의 중국의 수립이다. 그 이후의 시간을 중국어로는 당다이(當代)라고 부른다.

 

100년이 못 되는 시간 동안 이어져 온 중국 근·현대 무학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여섯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시기는 19171927년으로 중국 근·현대 문학의 다원적인 가능성을 꽃피우며 그 기초를 닦은 기간이다. 둘째 시기는 19281937년까지로 문학 현상이 점차로 주류 문학과 비주류 문학으로 나뉘며 이른바 혁명 문학이 주류 문학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기간이다. 셋째 시기는 19371949년까지로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치는 동안 전쟁 문학이 활발하게 창작된 기간이다. 넷째 시기는 19491966년까지로 대체로 사회주의 중국의 수립과 더불어 사회주의 문학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기간이다. 다섯째 시기는 19661976년까지로 문화혁명과 더불어 중국의 문학 예술 활동이 정치적 억압을 견뎌낸 기간이다. 여섯째 시기는 1976년부터 현재까지로 문화혁명이 끝나고 이른바 개혁개방과 더불어 새로운 시기(新時期)가 시작되면서 다시 다양한 문학 현상의 꽃을 피우기 시작한 기간이다.

 

1917년 후스의 문학 개량에 대한 소견이 당대의 근대적 진보 진영을 표방한 신청년에 실리면서 중국의 근·현대 문학의 본격적인 서막이 올랐다. 중국의 전통 문학이 가지고 있던 형식주의적 폐해를 언급하고, 이를 언문일치와 사실주의적 창작 이념 등으로 극복하자는 그의 주장은 직후 발생한 5·4운동이 문화 운동과 문학 운동으로 확산되어 천두슈와 리다자오 등의 지원을 받으면서 더욱 번져갔다. 이와 같은 새로운 문학관은 문학연구회·창조사 등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문학 단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실제 창작으로도 뒷받침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 가장 주목할 만한 이는 루쉰이다. 중국 근·현대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는 1918광인일기부터 시작하여 Q정전, 축복, 등을 통해 식인으로 상징되는 당시 중국인들의 전근대적인 의식에 일침을 가하고 희망의 메시지를 불어넣음으로써 이후 자신의 문학적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둘째 시기는 1928년에 시작된 혁명 문학 논쟁이 중심이다. 이것은 당시 중국 사회의 최대 화두였던 혁명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논제를 전제로 하여 창조사와 태양사 등과 같은 문학 단체를 주축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 문학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혁명 문학의 제창에 힘입어 1930년 발족한 중국좌익작가연맹(좌련)을 중심으로 한 문학 현상이 주류 문학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일련의 자유주의적 문학 사상이나 현상 등이 나타났다. 이 시기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창작 이념 혹은 창작 기법으로서 리얼리즘이 주류의 반열에 오르면서 구체적인 문학 현상들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시작된 셋째 시기는 전쟁 문학의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드러난 문학 현상은 다양한 정치적 공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이 시기에는 중국을 침략한 일본에 대한 저항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1942년 공통구인 옌안에서 마오쩌둥이 좌담회에서 연설을 하면서 기본적으로 중국의 문예가 노동자와 농민, 군인을 위해 봉사해야 하며, 따라서 문예의 수준을 향상시키기보다는 이를 보급하는 데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밝혔다. 이후 중국공산당의 주도 아래 사회주의 중국이 수립되었으니 이 연설은 중국 근·현대 문학의 기본 강령처럼 인식되어왔다.

중국 근·현대 문학의 넷째 시기는 사회주의 중국의 수립과 더불어 시작된다. 1949년 사회주의 중국의 수립과 때를 같이하여 개최된 1차 문학예술활동가대표대회의 개최는 사회주의 문학 예술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이와 동시에 사회주의 문학이 그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 동안 중국 문학, 특히 소설은 장편 소설이 다수를 차지하였고, 그 소재와 주제가 19301940년대의 혁명 투쟁을 회고하고 칭송하는 데 치우쳐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시 창작은 그다지 큰 성과를 보이지는 못했으나 전반적으로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과 송가가 주를 이루었다.

 

문화혁명 시기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숙청당하고 하방되어 노동 개조에 참여하였으며, 문학혁명이 종식되고 이른바 덩샤오핑 집권의 시대가 열리면서 그 동안 억압되어 있던 문학·예술계 또한 활발한 창작 활동을 시작, 5·4 이래로 다원화 시기를 꽃피우게 된다. 이 새로운 시기의 문학은 인간성 회복, 주체의 재발견, 서구 문학을 모태로 하는 다원화된 창작 기법의 도입 등을 토대로 발전한다.

 

중국 근·현대 문학의 총체적 특징은 결국 문학과 정치, 혹은 문학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어떻게 해명하는가에 의해 규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곧 결국 다시 문학의 본질적 사명,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2000년에는 프랑스에 체류 중인 반체제 작가 가오싱젠이 중국 출신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이러한 변화를 포함하여 앞으로 중국 문학이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나 돌아가리, 낙원은 어드매뇨 - 도연명과 육조 시가

계속되는 군벌의 득세와 황제의 무능함으로 인해 동진의 정치는 점차 문란해졌다. 반란군이 일어나고 황제의 복위와 폐위가 반복되며, 송을 건설하는 혼탁한 시대를 살았던 시인 도연명은 진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서자 은거하기로 마음 먹고 이름을 도잠으로 바꿨다. 41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산수와 시와 술과 벗하며 20년을 은거했다.

 

도연명의 작품 속에는 술이 많이 등장한다. 위진 시대 일부 문인들은 불로장생한다는 선약을 구해먹으면서 그 효과를 촉진하기 위해 술을 마셨고, 어떤 문인들은 술을 빌어 극도로 방탕한 생활을 함으로써 세상의 시름을 잊고자 했다. 이들의 방탕한 생활 이면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탓하고, 뜻을 이루지 못한 선비의 울분이 깔려 있다. 그러나 도연명에게 술은 인간의 삶을 자연 현상의 하나로 파악한 인생관과 연결된다. 그는 술을 통해 인간의 잡된 욕망이나 감정을 잊음으로써 자연과 합치되는 본연의 자신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시험삼아 마셔보니 온갖 정욕 멀어지고, 잔을 거듭하니 문득 하늘도 잊게 된다.

 

도연명은 전원 생활의 기쁨에서 시작하여 자연과 융화된 인간을 추구하는 데 모든 창작의 정열을 바쳤다. 이 때문에 도연명은 중국 시의 발전에 있어 전원시(田園詩)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대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도연명보다 약간 뒤에 등장한 사령운은 자연의 경치를 세밀하고 진실하게 그려내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해냄으로써 산수시(山水詩)라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사령운의 시는 산수의 묘사에 있어 풍부한 수사를 동원하여 언어의 폭을 넓혔고, 한 글자에 심혈을 기울여 그 표현이 매우 뛰어났다. 연못가에는 봄풀이 돋아나고, 정원 버들엔 새소리도 때를 탄다.라는 구절은 오랜 세월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처럼 사령운은 산수시로 대자연의 신비한 미를 재현함으로써 시의 영역을 넓히고, 언어의 감각성과 참신성을 살려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공을 세웠다.

 

 

역사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 중일전쟁, 제3차 국내 혁명 전쟁

1931 9·18 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1932 1월에 상하이를 공격하고 3월에 만주국을 건국함으로써 만주 지배를 본격화했다. 하지만 쟝제스는 공산당에 대한 토벌을 계속하면서 일본과는 타협을 꾀하고 있었다. 1935년과 1936, 항일 구국 운동이 벌어지고, 내전의 중지를 요구하는 단체가 결성되던 와중에 1936 12월 시안을 방문한 쟝제스가 동북 지역을 세력 근거지로 하고 있는 군벌 장쉬에량(장학량)에게 구금당하는 시안사변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내전 중지 등의 요구에 합의하여 제2차 국공합작이 실현되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9 22일 제2차 국공합작 협정안이 발표되었다. 1937년 7월 7, 베이핑의 서남쪽 노구교 근방에서 일본군이 훈련하던 중에 원인 불명의 총성 몇 발이 울린, 이른바 노구교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은 이것을 중국의 공격으로 간주했고, 이로써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그해 8월에 베이징을 점령하고, 10월에는 주요 대도시와 상공업 지대를 거의 장악하였으며 12월에는 난징대학살을 자행하였다. 국공합작에 의해 항일전을 수행하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완전히 결별하여 국공합작은 물거품이 되었고, 중일전쟁은 1945 8월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났다.

 

전후 처리를 둘러싸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자 8월 쟝제스와 마오쩌둥이 내전 회피, 정치 협상 회의 소집을 합의하였으나 1946 7월 국공내전이 본격화되고 제3차 국내 혁명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7년부터는 수세에 있던 홍군이 공세에 나서면서 만주, 동북 등을 차지했으며, 1949 4월에는 난징을 함락했고, 12월에 이르러 국민당은 타이완으로 패주하였다.

 

1949 9 21 베이징에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개최되어 인민정부 조직법·국기·국가 등을 정하였으며, 중앙인민정부위원회의 주석에 마오쩌둥을 선출하였다. 마침내 1949년 10월 1 텐안먼 단상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함으로써 아시아에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환관의 세상이 오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환관의 정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궁의 문에 내신(內臣 : 환관)은 정사에 관여할 수 없다. 정치에 개입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라고 새겼으며, 환관의 숫자를 100명 이하로 제한했다. 승상제를 폐지하고 6부를 직접 관장했으며, 황권에 위협이 되는 세력들은 가차없이 숙청하여 무려 1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모두 황권의 강화를 위해서였다.

 

환관의 정치 참여를 금지하는 정책은 2대 황제인 혜제 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3대 황제 영락제는 즉위 과정에서 환관의 신세를 진 일이 있어 관료보다 환관을 더 신뢰하는 밀실 정치를 폈다. 특히 영락 18(1420)에는 황제 직속의 특무 기관으로 동집사창이 설치되고 환관을 관리하던 사례감의 우두머리 사례태감이 동집사창을 관장하게 되자 각지로 파견되어 감찰과 정보 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집사창 환관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동창에서는 문무 관료는 물론 일반 백성들의 일상생활까지 감시했다. 외국에 파견되는 사절로도 환관을 임명했으며, 외국 무역을 담당하는 시박사(대외무역 항구에 배치된 관청으로 관세의 징수 및 무역품의 검사와 통제를 담당했다)에도 환관이 배치되었다. 이처럼 환관의 정치 활동과 환관 중심의 특무 정치는 영락제로부터 시작되었다.

 

5대 황제 선덕제는 황제 비서로서의 내각대학사의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원래 상주된 문서에 대해 황제의 결제 문안을 준비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이를 표의라 부르는데 선덕제는 사소한 것부터 중요한 사항까지 일체를 내각대학사의 관리들에게 표의시켰다. 그런데 표의를 붙여 내각에서 황제에게 보내진 모든 문서가 사례감에서 정리되었다. 이로써 사례감에 근무하는 환관은 내각의 의견을 감시하고 제지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이러한 구조의 부작용은 6대 황제 정통제가 9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표의를 조작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악용해 함부로 자기 의견을 집어넣는 등 제멋대로 행동하였으며, 인사를 마음대로 처리하기도 했다.

 

명나라 때 환관 횡포의 극단은 위충현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명나라 말년에 환관에 선발되어 궁중에 들어간 위충현은 16대 황제 천계제의 유모 객씨와 대식(환관과 궁중 여자 관리 쌍)이 되어 환관 내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정보 기관 동창을 자신의 지배 하에 두어 전대미문의 공포 정치를 단행했다. 유모 객씨의 치마폭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목공 설계와 같은 어린아이의 놀이에 탐닉한 황제는 위충현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유모 객씨는 황제의 총애가 다른 데로 옮겨가는 것을 막기 위해 황후에서부터 후궁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아이를 임신하기만 하면 연금시키거나 살해해서 그 싹을 도려냈다. 그리고 위충현은 자기 자신을 호위하기 위해 3천 명의 환관 군단을 조직해 그 위세를 과시했다. 하지만 이렇게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던 위충현도 1627년 천계제가 사망하고 숭정제가 즉위하자 유형에 처해져 자살하고 유모 객씨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봉살형에 처해졌다.

 

 

철학

궁하면 통한다는 중국인의 인생관

세상은 한 상태에 머물지 않고 변화한다는 동양의 인생 철학이 담겨 있는 대표적인 철학적 명제로서 궁하면 변화하고, 변화하면 통하게 되고, 통하게 되면 오래 간다(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주역』「계사하전)는 말이 있다. 궁즉통이라 함은 어떤 존재의 발전이 극단에 이르면 변화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은 인생살이에 두 가지 지혜를 가져다 준다. 하나는 잘 나가는 인생에는 반드시 우여곡절이 따르므로 이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꽉 막힌 인생이라도 자기의 부정을 통해 정반대의 길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절대적 행복과 절대적 불행이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늘 겸손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그래서 그런지 중국 사람들은 극단적인 표현을 삼가고 늘 애매한 입장을 취한다. 가령 하오()는 긍정도 부정도 아니다. 다만 이 말이 사용되는 상황이 의미를 결정한다. 그래서 중국어의 의미는 상황에 따라 이렇게 혹은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

 

변즉통은 어떠한 존재든 변화해야만 하고, 막히지 않고 순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통즉구라 함은 어떠한 존재가 정체되어 있지 않고 변화하여 순통해야만 오래도록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통변론은 결론적으로 세상의 삼라만상은 상호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서로를 말살하지 않고, 조화와 평형을 추구하는 변화를 모색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둘러싼 각종 관계에서 비롯되고, 인간의 육체도 서로 다른 기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와 중국인들의 삶은 사뭇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중국인들은 우리와 달리 직장에서는 상사일지라도 밖에서는 동네 이웃이다. 경험적으로 보더라도 중국인들은 우리보다 일하는 시간에 대한 생각도 훨씬 유연해 보인다. 우리는 9 출근 5 퇴근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하는 시간을 중시한다. 그래서 덩샤오핑도 말했듯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것이 아닌가! 사회주의 시장경제도 앞에서 언급한 통변론의 직접적인 예이다. 사회주의라도 시장경제를 운영할 수 없는가? 만약 사회주의이므로 시장경제를 포기해야 한다면 규율에 위배되는 것이고 자연히 오래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중요한 것은 상호 모순된 둘 사이의 팽팽한 평형과 조화이다. 현재 중국은 이것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달마는 중국에서 무엇이 되었을까? - 불교 문화의 유입과 발전

유물론을 따르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종교란 원래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에 가보면 많은 사찰이 있고, 또 향을 피우며 소원을 비는 이들로 북적거린다. 현재 불교는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믿는 종교이다. 불교는 분명 외래 종교인데다 비종교적 성향이 강한 중국 민족이 외래 종교에 환호하는 것을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이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대승·소승의 경전을 변역하며 저변을 확대하다가, 5세기부터 10세기까지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401년 구마라습이 대량의 대승경전을 번역하여 한문 경전에 의한 교리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해 사상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만들어지고 대중에게 전파될 수 있었다. 이어 수·당 시대에는 천태종, 삼론종, 화엄종, 선종, 정토종, 법상종, 밀교 등 경론(經論)에 의한 각종 종파가 확립되어 황금시대를 구가했다. 그러나 수·당 이후에는 몇 차례의 파불(破佛)과 명나라의 통제를 거치면서 미약해지다가 현재는 선종과 정토종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어렵고 복잡한 불교의 교리에 맞서 중국의 불교하면 웅변적으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바로 멋진 쿵푸를 펼쳐 보이는 소림사의 승려들이다. 소림 무술의 원조는 중국에 선()을 전래한 달마이다. 그래서 지금도 소림사에 가면 달마가 참선했던 동굴의 벽에 달마의 모습이 투영되었다는 믿기 어려운 안내를 받게 된다.

 

불교에 대한 탐구는 두 가지 경로가 있는데, 경전을 통한 것과 이심전심의 비전을 통한 것이다. 교종은 전자의 길을 따르며 점진적 깨달음을, 선종은 후자의 길을 따르며 순간적 깨달음을 추구한다. 달마가 전한 도의 핵심은 불립문자(不立文字)였다. , 는 문자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도를 도라 하면 지극한 도가 아니다.라고 했던 노자나, 이치를 얻었으면 언어라는 도구를 잊으라 했던 장자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선종은 중국의 전통적인 도가 사상과 가깝게 만나면서 탄생했고, 달마는 이로부터 인도적인 것에서 중국적인 것으로 변한 것이다.

 

언어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선종의 방법론은 무수지수(無修之修 :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노력), 즉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것을 거부하는 기상천외한 것으로 가득하다. 를 깨우치겠다고 에 골몰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며, 오히려 몽둥이 찜질이나 욕설 한마디가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달리 말하면 그야말로 백정이라도 소가죽을 벗기면서 도를 깨우칠 수 있고, 수레바퀴를 만드는 사람도 그 속에서 도를 깨우칠 수 있다던 장자의 말과 같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아침에는 교회를 가고, 저녁에는 절에 간다고 한다. 인도의 달마는 중국으로 건너와 이렇게 변했다.

 

 

정치·경제

공자를 살려야 중국이 산다

몇 해 전 우리 나라에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어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책이 출간되기 몇 해 전부터 중국에서는 죽였던(?) 공자를 열심히 살리고 있었다. 왜 중국은 이제 와서 공자를 부활시키려는 것일까?

 

중국에서 공자의 사상이 외면당했던 시기는 청나라 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40년 아편 전쟁을 계기로 세계의 중심으로 자부했던 중국이 주변국으로 전락하게 되자 중국인들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을 지배해온 유가 사상으로 눈을 돌려 중국이 낙후하게 된 원인을 유가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러한 인식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 우수한 중국의 전통을 잘 활용하지 못했다는 보수적인 관점과 중국의 전통을 보완하자는 개혁적인 관점, 그리고 중국의 전통을 부정하는 혁명적이 관점이 그것이다.

 

사회주의 국가가 성립된 1949년 이후 중국에서는 과거의 통치 이념이자 사회 지배 질서의 원리였던 유가 사상을 사회주의 이념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반전통반봉건의 구호 아래 유가 사상과 전통 유가 질서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특히 좌경 이념의 영향이 극렬했던 문화대혁명의 시기에는 유가를 논하는 것을 금기시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러나 1978년 개혁개방이 시행되면서 기존의 사회주의 발전관이 수정되고 해외 교류가 빈번해지자 그 동안 타도의 대상이었던 유가 사상에 대한 태도도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중국은 유가 사상을 중심으로 한 전통 문화를 옹호하자는 의견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동양 사회가 서구 사회에 뒤쳐진 원인이 유가 문화라고 주장한 막스 베버의 논리와 달리 유가 문화권의 국가인 일본과 한국 그리고 대만, 싱가포르 등이 고도 성장을 거듭하자 유가 문화도 서구의 기독교 문화처럼 발전의 동인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중국이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은 거국적인 차원에서 전통 유학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여 1990년대 중반,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 근거하여 중국의 전통 문화와 서구의 문화 중에 현실 중국에 유용한 부분은 계승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비판하되, 중국과 서구 문화의 우수한 부분을 종합하여 새롭게 창조하자는 입장을 밝혔다.

 

따라서 중국은 전통 유가 사상에 대해서도 중국의 현실 목표인 경제 발전에 유리하도록 현대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이는 과거 유가를 파괴하던 것과 비교해보면 큰 변화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를 어떻게 현대의 중국에 맞게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는 앞으로 풀어가야 할 장기적인 숙제이다.

 

마오쩌둥 향수

1998년 우리 나라가 IMF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던 시기에 일부층을 중심으로 박정희 대통령 시절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잠시 일어난 적이 있었다. 소위 박정희 향수라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경제가 흔들리는 현실에 대한 불만족의 표현이었다.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마오쩌둥에 대한 향수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중국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혁명가요, 외세에 맞서 싸운 민족주의자이자 건국 이후 1976년 9월 9 사망할 때까지 중국과 중국공산당을 지도한 최고 통치자였다. 반면 잔혹한 정치적 청산의 반복으로 수많은 인명을 살상시켰으며, 급진적이고 무모한 대약진운동을 추진하고 광기에 가까운 문화대혁명을 발동시킴으로써 중국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1989년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열기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당시 중국은 시장경제에 대한 몰이해와 개혁의 부작용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및 실업 등이 사회 문제로 나타났고 게다가 텐안먼 민주화 운동이 겹치면서 체제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체제 수호와 통치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마오쩌둥의 사상을 이용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는 일부 보수적인 지식인들과 일반 인민들로부터 마오쩌둥에 대한 향수가 일기 시작했다. 특히 1998년 국유기업에 대한 개혁이 본격화되면서 국유기업의 하강(정리 해고)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마오쩌둥 시기를 동경하는 정서가 확산되었다. 마오쩌둥 시기 중국은 비록 빈곤했지만 평등하였고, 무엇보다도 국가에서 주택과 직장 등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라 경쟁 원칙이 도입되어 평등은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유지되었던  국유 기업마저 개혁하게 되자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물론 그 동안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부유해진 사람들이 증가한 것은 사실이나 이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사람들 또한 많이 있다.

 

따라서 마오쩌둥 향수의 본질은 현재의 중국에서 과거의 마오쩌둥 시기로 돌아가자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현 체제와 사회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과거의 마오쩌둥 시절을 회상하면서 표출한 일부 국민의 정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 당국의 현 정책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며, 이들의 정서가 생각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언제든지 행동으로 표출될 가능성도 많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노동자들의 시위가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으며, 사회 불안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중국 당국이 언제까지 억누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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