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중국의 강남江南을 봐야 대륙의 얼굴이 보인다
- 대담자 김준엽 : 김준엽(金俊燁·85) 사회과학원 이사장에게는 독립운동가, 역사학자, 교육자 등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어 있다. 일제 때인 1944년 1월 일본 게이오대학 재학중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중국의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일본군을 탈출, 천신만고 끝에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에 투신한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다. 또 김 이사장은 교육자로서 고려대 교수와 총장, 아주대 재단이사장 등 근 반세기를 후진양성에 매진해 왔다. 이 밖에도 김 이사장은 이범석 초대총리와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역대 정권으로부터 장관, 국무총리 등을 거듭 제의받았으나 이를 모두 뿌리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리 선조들이 중국에 와서 남긴 의미 있는 발자취를 찾아내 복원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신데요, 가장 관심이 큰 유적은 어떤 것입니까?]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내 기념관을 만드는 일 다음에 착수한 것이 항저우杭主에 있는 고려사高麗寺 복구였는데,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항저우의 고려사 복구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고려 11대 임금 문종文宗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과 인연이 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절의 원래 이름은 혜인사慧因寺로 당시 유명한 정원淨源대사가 있던 곳이었어요. 의천은 정원의 가르침을 받을 목적으로 모친과 맏형인 12대 임금 순종順宗의 반대를 무릅쓰고 30세의 나이에 밀항하여 자오저우珠江長江三角洲, 카이펑開封을 거쳐 항저우로 찾아가 정원대사에게 사사했어요. 그후 의천은 모친의 독촉으로 중국 체류 1년 4개월만에 돌아와야 했는데, 귀국 후 혜인사에 많은 재물과 불전을 보낸 연유로 혜인사가 고려사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현재 약간의 초석만 남아 있는 고려사는 복원경정이 내려져 2005년 10월경 준공을 목표로 곧 공사에 착수할 예정입니다.”
[고려사는 말하자면 한중 불교 교류의 중요한 사적지인 셈이군요. 대각국사의천이 항저우까지 가서 불교 공부를 한 것을 보면 당시 그 지역과 고려의 왕래가 그만큼 잦았다는 이야기입니까?]
“당·송唐·宋시대에 중국의 대외무역이 매우 활발했어요. 그래서 주요항구에 시박사市舶司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무역업무나 선박의 입출항 및 관세업무 등을 관장하도록 했습니다. 시박사를 설치한 곳은 장쑤성의 양저우揚州, 저장浙江성의 항저우와 닝보寧波, 푸젠福建성의 취안저우泉州 등 장강(양자揚子강) 유역과 남쪽 지역, 즉 강남에 많았고, 강 북쪽으로는 북송 때 산동성 자오저우에만 설치했어요. 그동안 우리는 베이징이나 동북3성에만 많은 관심을 쏟아왔는데, 사실은 이 강남 지역을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지역은 비단 한국과의 교류역사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고, 최근에는 경제발전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어 중국 대륙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느껴볼 수 있는 얼굴과도 같은 곳입니다.”
[한국의 마르코폴로, 최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최부(1454~1504)는 일반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보다 학술적 가치가 더 높다고 평가되는『표해록漂海錄』을 남긴 중요한 인물입니다. 135일 동안 중국에 체류하면서 닝보, 항저우, 양저우 등지를 거쳐 운하를 통해 베이징까지 간 뒤 귀국했는데 이때 거쳐간 거리가 무려 8,000여 리에 달합니다. 귀국 후 성종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바로『표해록』입니다. 당시 중국의 각지에서 목격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사료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표해록』을 보면 최부가 아주 상세하게 기록한 명나라 말기 중국의 지방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최부가 직접 경험한 해안의 경비상황, 즉 해방海防이라든가 지방의 군사제도, 특히 지명을 아주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어 역사지리에 중요한 자료입니다. 또 운하의 상황이라든가 수차水車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했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수차를 만든 사람이 바로 최부입니다.”
[서역으로 통하는 실크로드 외에도 해상 실크로드가 있었다고 합니다. 닝보 등지의 항구와 한반도와의 무역도 따지고 보면 해상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옛날 바닷길의 개척에 따라 무역의 거점에도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요?]
“중국 남방과의 교통로를 학계에서 해상 실크로드라고 부릅니다. 중국은 명나라 때 동아시아뿐 아니라 멀리 아프리카까지 갔을 정도로 해외교류가 활발했습니다. 한국과 중국 사이만 해도 이미 선사시대부터 해상교통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차차 교통이 발달해 황해를 직접 건너 산둥반도로 가게 됐습니다. 그때 출발지가 경기 남양만이었어요. 그러다가 삼국시대 무렵부터는 닝보쪽으로 직접 항해했습니다. 따라서 무역의 거점도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요. 고려시대에 금나라가 생겨 중국 북부를 점령하자 칭다오靑島 남쪽의 자우저우가 대對한반도 무역의 중요한 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산둥성 지역에는 한중교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의 유적이 있지 않습니까?]
“장보고는 산둥성 끄트머리에 있는 스다오石島를 근거지로 무역이나 해상교통을 지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의 상황은 일본인 승려 엔닝円仁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자세히 나옵니다. 이 사람은 중국에 갈 때와 돌아올 때 모두 신라선을 타고 갔었는데, 일본에 귀국해서 이 순례행기를 썼습니다. 이 기록이 없었다면 장보고의 활약상이라든가 당시 신라방의 사정 등등을 알 수 없었을 정도로 중요한 자료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조상들의 발자취와 한중간의 역사에 대해 너무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은 대개 어떤 문헌에 많이 나와 있습니까?]
“한국이나 중국의 역사서에 많이 나오는데 아직 연구가 부족한 실정입니다. 승려들에 관해서는 혜교慧皎의『고승전』, 도선道宣의『속고승전』, 찬녕의『송고승전』등이 대표적인 중국문헌이고, 우리나라 문헌으로는 신라 김대문金大問의『고승전』, 고려 각훈覺訓의『해동고승전』등에서 당시 승려들의 내왕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김대문의『고승전』은 지금 소실돼 없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절에 가서 기록들을 뒤져보면 우리가 잘 몰랐던 여러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중국에 산재해 있는 한국 관련 유적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한국과 중국이 말로만 밀접한 관계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대단히 밀접한 관계였다는 점을 증명해주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조상들의 활약이 대단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비단 무역뿐 아니라 중국의 불교나 유교 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또 지정학적으로 우리와 중국의 관계가 앞으로도 밀접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음을 역사를 통해 깨닫게 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정치 - 인치에서 법치로, 중국공산당 변신의 내막
- 대담자 정종욱 : 정종욱(鄭鐘旭·65) 전 주중대사(현 아주대 교수)는 김영삼 정권 때인 1996년 1월부터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1998년 4월까지 대사직을 역임했다. 중국과 수교 이후 지금까지 중국대사는 현재의 김하중 대사까지 합쳐 모두 6명. 정치인 출신이나 직업외교관이 대부분이었다. 이 가운데 정종욱 전 대사는 중국 정치학을 전공한 교수 출신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는다. 말하자면 이론과 현장경험을 함께 갖춘 경우다.
[2002년 11월 제16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직후 열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가 선출된 데 이어 2003년 봄 국가주석에 취임함으로써 후진타오 체제가 공식출범했습니다. 현재 중국 최고지도부의 내부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후진타오 체제의 등장은 중국 공산당 역사에서 정권교체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경우입니다만, 권력구조 내부는 다소 복잡합니다. 후진타오가 국가주석직과 당 총서기직을 승계하여 국가권력과 당권을 장악하고 이어 군권마저 장악했습니다만 그 승계가 아직도 불완전하다는 설도 있어요. 그러나 권력장악이 다소 불완전하다고 해도 오래 전부터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후진타오가 실제 당과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등장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권력승계가 제도화되는 단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시대가 인치의 시대였다면 후진타오 시대의 개막은 법치의 시대가 열린다는 신호라 할 수 있겠지요. 지금의 중국 권력구도는 대립과 갈등의 관계라기보다 협력과 공조의 관계라고 봅니다.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권력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지요. 권력의 공유는 중국에서 이제 불가피한 추세입니다. 개혁 개방이 진행되면서 국가와 사회의 관계가 복잡해졌고 다원화되었습니다. 국가가 사회를 압도하거나 한 개인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권력의 중심이 개인에서 집단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중국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른바 셔틀외교에 나서는 등 과거에 비해서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데, 어떤 배경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북핵 문제를 더 이상 내버려두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는 위기상황이라고 판단을 했겠죠. 그리고 만약 북한의 핵보유가 공식화되면 한반도에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군사적인 충돌이 일어날 뿐 아니라 일본이나 대만까지도 핵무기를 갖겠다고 나올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한 것 같아요. 그래서 2003년 당중앙에 북핵 문제를 다룰 위기대책반이 가동됐고 후진타오 주석이 직접 책임을 맡았다는 설도 있습니다만, 확인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외교부 내에 북핵대책반이 설치된 것은 확인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국이 북핵 문제가 야기할 사태를 심각하게 본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6자회담 중국 수석대표인 왕이 부부장은,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우회적으로 답변하더군요. ‘한반도가 통일됐을 때 중국군이 미군과 압록강에서 서로 총을 겨누는 사태는 정말 생각하기도 싫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중국의 한반도 정책이 현상유지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렇다면 중국은 내심 한반도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한반도 문제에 관한 중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우선 현상유지죠. 그런데 현상유지가 깨진다는 것은 곧 전쟁이나 한반도 통일을 의미합니다. 중국으로서는 굉장히 걱정스러운 측면이죠. 좌우간 북한 내의 여러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결국은 어떤 형식으로든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정부가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데, 한반도 통일 후 미국과 중국 사이가 나빠지게 되면 한반도 전체가 중국과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미·중관계가 좋고, 당분간 대만 문제라든지 북핵 문제를 둘러싼 큰 변화가 없는 한 양국의 관계가 극적으로 나빠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한국전문가들은 ‘한국이 지금은 우리와 동맹관계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중국하고 더 가까워지지 않겠느냐’는 말들을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거북하고 곤혹스러운 게 사실인데, 과연 이런 말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미리 강구해야 합니다. 그 중 하나로 다자적인 협력체를 구성해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 아시아를 하나의 틀로 묶는 다자적인 무역메커니즘을 추진해야 한다고 봅니다. 새로운 다자적인 조직을 자꾸 만들어서 양자관계에서 나올 수 있는 문제를 희석시키고 걸러줘야지,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우리한테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군사 - 중국군中國軍, 빛을 감추고 어둠을 기르며 미래를 기다린다
- 대담자 황병무 : 황병무(黃炳茂·65)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는 중국의 군사 문제에 관한 국내 최고의 전문가로 꼽히는 중국군사통이다. 30년 이상 중국군사 문제를 연구해 오고 있어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저명하다. 황 교수의 중국 군사 관련 주요저서로는『신중국군사론』,『China Under Threat』,『China's Security』등 다수가 있는데, 일부는 미국에서 교재로 쓰이고 있다. 황 교수는 현재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장, 한국군사학회 부회장 등을 맡고 있고, 중국의 인민해방군 관계자나 군사전문가들과도 폭넓은 교류를 하고 있다.
[현재는 대만이 현상유지 정책을 택할 것으로 보시는데요. 그렇지 않고 적극적인 독립정책으로 나온다면 예상되는 조치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대만이 독립을 하려면 정치적으로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라든가 영토조항을 바꾸기 위한 헌법개정, 국호의 변경 등을 시도하겠지요. 지금 대만 헌법에는 중국 대륙도 영토에 들어가 있는데 독립하려면 먼저 그 부분을 삭제해야 합니다. 또 국호도 변경한다면 ‘대만 민주공화국Republic of Taiwan'으로 해야겠지요. 중국 입장에서는 대만의 이런 행동뿐 아니라 대만사회가 분열상을 보여, 내란 상태로 들어간다든지 혹은 폭동이 일어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대만이 중국 영토의 일부이므로 이 같은 사태를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죠.”
[유사시 양측이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중국이 대만 공격에 사용할 수 있는 지상군은 푸젠福建 지역에 배치된 제31집단군 7만 명을 비롯해 유사시 전략예비부대와 기동부대 약 25만 명을 증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대만은 지상군 약 20만 명과 예비군을 동원하면 40만 명 수준의 침공군을 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항공력 면에서 중국 공군은 수호이-27 100여 대, 수호이-30 58대를 보유한 반면, 대만은 미라지-2000 57대, F-16 146대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주력기 구성으로만 보면 유사시 중국 공군이 대만해협에서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기는 어렵다는 게 일반적 평가입니다. 중국이 확실히 우세를 과시할 수 있는 것은 미사일입니다. 대만을 겨냥한 490여 기의 미사일 이외에도 중·단거리 미사일 110기, 잠수함 발사 미사일 12기 등은 대만에 아주 위협적이에요. 대만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미사일을 가지지 못했거든요.”
[먼저 중국군, 즉 인민해방군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그 성립의 역사를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중국군은 1927년 8월 1일 난창南昌폭동을 계기로 중국공산당의 주더朱德와 마오쩌둥毛澤東의 영도하에 주로 농민들을 조직해 만든 군대였습니다. 당시 중국공산당의 목표는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은 혁명을 수행하는 군대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받는 ‘당의 군대’라는 것이죠. 중국군은 인민을 동원해서 국가를 만들어 낸 군대입니다. 따라서 중국군은 군 본연의 전투대 역할 이외에도 1927년에서 1930년 초에 걸쳐 강서소비에트라고 하는 최초의 해방구를 만들어서 통치행위를 하는 등 정치적 역할도 수행했고, 또 군대의 보급을 자급자족하는 경제적인 역할 등 3가지 역할을 맡아왔다고 하겠습니다.”
[중국군의 기본적인 핵전략은 어떤 것입니까?]
“지금 중국은 기본적인 핵전략을 최소억지전략에서 제한억지전략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있습니다. 제한억지전략이란, 예를 들어 과거 1970년대에 미국과 소련이 가지고 있던 실증 파괴전략과 비슷합니다. 상대에게 어느 정도 얻어맞더라도 나머지 핵을 가지고 보복하겠다는 겁니다. 중국도 그런 전략 개념에 따라 어느 정도의 억지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1964~1965년경 마오쩌둥은 ‘우리는 상징적으로 핵무기 한두 개만 가지면 된다’고 했지만, 1970년대에 계속 양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80년대에 비로소 중국의 핵전략이 본격적으로 나오게 된 것이지요.
[중국의 대미對美 전략기조로 ‘도광양해 유소작위韜光養嗨 有所作爲’라는 말이 유명합니다. 이 말의 뜻과 유례를 설명해 주십시오.]
“뜻을 풀이하면 ‘빛을 감추고 어둠을 기르며 일정한 역할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원래 삼국지에서 유비의 생존전략으로 나온 것입니다. 유비가 조조의 식객노릇을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때 조조의 참모들이 유비가 범상치 않으니 제거하라고 조언하는 것을 눈치 챈 유비가 몸을 낮춰 조조와 참모들의 경계심을 풀도록 한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은 감추고 모호성을 기른다는 의미로, 한마디로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는 철학이라고 하겠습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동북 지역, 특히 북한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어떤 것입니까?]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은 북한을 전략적 주변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완충지대화하는 데 전략적 목적을 둡니다. 그러니까 이 지역을 자신의 영향권에 두지 못하게 된다면 최소한 강대한 세력이 단독 지배하는 것만은 반대한다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2003년 무렵 중국에서는 북핵 문제를 놓고 전략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북한이 중국의 국가이익에 자산이 될 것인가, 아니면 부담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였어요. 진보파는 냉전적인 사고는 그만하고 새롭게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주류는 북한의 지정학적인 위치는 중요하다며 북한의 생존이 중국의 국가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중국은 북한 핵 문제 해결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한반도 문제에 미국과 더불어 ‘공동’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제 - 중국 시장은 경제올림픽, 세계 수준으로 정면승부하라
- 대담자 노용악 : 노용악(盧庸岳·65) LG전자 중국지주회사 고문은 10년째 중국현지에서 사업을 진두지휘해 온 경영인이다. 노 고문은 2002년에〈중국 경제보〉가 뽑은 ‘중국 10대 가전家電인물’, 2003년에는 사스 창궐기간에 보여준 용기와 사업능력을 평가받아〈중국 재경시보〉가 선정한 ‘역경을 이긴 10대 경영인’으로 선정됐고,〈경제참고보〉는 그를 ‘비상인물(非常人物: 대단한 사람)로 꼽는 등 중국 언론매체들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중국 시장은 현지 브랜드의 경쟁력이 유난히 강하다고 하는데, 전자업종의 예를 들어 현지 브랜드의 실태를 설명해 주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중국은 현지 브랜드 파워가 막강합니다. 전자업종을 보면, 지금 미국 같은 곳은 주인은 없고 손님들끼리 싸우는 형국인데 비해 중국 시장은 아주 강한 주인이 여럿 있고 여기에 또 여러 손님이 와서 싸우는 양상이에요. 거의 모든 제품의 50% 이상, 경우에 따라선 80%까지 중국 기업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나머지를 놓고 외국사끼리 경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휴대폰 단말기는 불과 3, 4년 전만 해도 중국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이 모두 합쳐봐야 5%밖에 안 됐어요. 신규제품이어서 현지 브랜드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죠. 나머지 95%는 노키아, 모토로라 등의 제품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닝보 버드나 TCL 같은 중국 기업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니까 금방 현지 브랜드가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해 버렸거든요. 중국기업이 외국기업들을 제치고 1위가 됐어요. 이렇게 된 것은 중국 기업들이 다른 외국기업보다 경쟁력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또 예부터 중국인이 장사를 잘하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중국 기업들을 얕볼 게 아니라 이들을 잘 연구해야 합니다.”
[‘서양시각으로 중국을 보지 말라, 중국을 하나로 보지 말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하나가 아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양의 시각으로 중국을 보니까 선입견이 작용해 결과적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더라는 거죠.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중국 내부를 중국적 시각으로 관찰할 때 중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다르다는 사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유의해야 할 대목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기업인이 베이징에 와서 후진타오 주석이라든가 중앙의 지도자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경우는 후난湖南성에서 성장省長을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때 가령 후난성에 TV 공장이 없다면 후난성장은 TV 공장을 유치하고 싶을 것이므로 투자를 요청할 것입니다. 반면 베이징에서 만난 중앙정부 지도자들은 전국적으로 TV 공장이 포화상태이므로 오히려 줄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서로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예를 들어 2천만 달러 규모 이상의 외자유치는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돼 있지만, 지방정부에서는 1,900만 달러짜리로 꾸며서 자기들 뜻대로 처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하나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기업인의 입장에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입장을 둘 다 이해하고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임금 등 근로조건에 대한 중국근로자들의 의식이나 태도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양면성이 있어요. 사회주의 국가여서 노동자 보호에 대한 의식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는 반면에 하루빨리 경제를 일으켜 인민들의 생활 수준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기업경영에 해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면이 있는데, 현재는 후자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중국근로자들은 평등논리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일 잘하는 사람이 더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2003년 말까지 중국에 대한 외국인투자 누계액이 무려 5천억 달러에 달했고, 중국에 설립된 외국기업이 46만여 개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같은 외국자본의 중국 진출 현상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중국 경제의 응집력이 점점 강해지기 때문에, 이곳에 투자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가고 있거든요. 현재 진행되는 여러 가지 현상으로 보아 상당 기간, 최소한 2008~2010년 정도까지는 무난하게 경제성장을 해나갈 것으로 봅니다. 지금 중국 경제의 형세를 보면 마치 고속으로 달리는 기차가 철로에 놓인 작은 돌멩이같은 장애물을 휩쓸고 지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중국 관리들은 장래를 상당히 낙관적으로 보는 경향인데 비해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비관적인 입장입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국의 존재에 대해 이는 우리에게 위기인 동시에 기회라고 말하는 전문가가 많습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게 위기이며, 어느 경우에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중국이 우리에게 하나의 기회가 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회라는 측면만 보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피나는 노력이 필요해요. 국가경영부터 기업경영이나 개인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려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반면에 이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위기가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중국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과감히 주고, 우리는 시장경제의 노하우, 중국보다 한 발 앞선 서비스 자산 등을 밑천 삼아 새로운 첨단기술을 개발해 그들이 따라오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달아나면 됩니다. 그러나 이 기회도 일반론이나 범용성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각 제품별, 산업별로 차별화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제품의 빛깔, 디자인 등 각 산업별 포인트를 찾아내야 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중국에 대한 총체적인 국가전략을 세워서 하나하나 실천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국이 기회다, 위협이다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린 문제입니다.”
교육 - 중국 대학, 대개혁으로 한국 추월하고 세계로 도약중
- 대담자 구자억 : 구자억(具滋億·50) 박사는 국내에서 거의 독보적인 중국 교육 전문가로 꼽힌다. 영남대와 고려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명문인 베이징사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교육개발원 기획처장으로 재직중이다. 외국인 제1호 교육박사학위 취득자로 베이징TV에 소개됐을 정도로 이 분야의 선구자인 셈이다.
[한국 학생들의 중국 유학 열기가 높아가고 있어 중국 교육 전반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매우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우선 중국 교육의 성격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현재의 중국 교육은 한마디로 ‘우홍우전又紅又專’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홍’과 ‘전’을 아우른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홍은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르크스적인 입장이나 관점, 방법을 견지하는 것을 말하고, 전은 전문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중국의 현대사는 한마디로 ‘홍’과 ‘전’의 싸움의 역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화혁명기에는 ‘홍’의 잣대로 모든 것을 쟀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불순하다고 보는 사람, 예를 들면 교사와 같은 지식인은 모두 제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개혁개방 이후 시장경제의 발전을 추구하면서 ‘전’이 매우 중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교육도 ‘전’에 치우칠 수밖에 없었고, 반면 그런 과정에서 ‘홍’이 약해진 것이지요.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홍’과 ‘전’을 두루 갖춘 인재양성에 목표를 두게 된 것입니다.”
[중국 대학의 수준은 국제적으로 어느 정도 위치에 있습니까?]
“이공계 대학의 학문 수준은 우리보다 당연히 앞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는 우리가 앞서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은 이미 인공위성, 항공기, 원자탄을 다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수학이나 물리 등 기초과학이 발달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하거든요.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이 자체적으로 자동차를 만들지 못한다고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중국의 기초과학 수준은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NASA(항공우주국)에서 중국 연구진이 빠져나가면 운영이 안 된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중국에서도 영재교육을 하고 있습니까? 들리는 이야기로는 덩샤오핑 등장 이후 영재교육을 매우 중시했다고도 하는데요. 실제로 중국에 영재교육이 있다면 어떤 시스템으로 이뤄지고 있습니까?]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 영재교육이 도입됐습니다. 시장경제를 살리고 사회를 발전시키려면 아무래도 최상의 교육을 받은 최고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영재교육을 중국에서는 차오창超常교육이라고 하는데요. 그 시스템을 보면 아주 체계적입니다. 우선 초등학교나 중학교에는 영재반이 있고, 고등학교에는 소년반, 대학교에는 대학소년반이 설치돼 있어요. 그래서 보통 고등학교 때 소년반에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대학소년반에 진학하게 되는데, 이때 나이가 13세쯤 됩니다. 대학소년반에서는 또래들끼리 생활을 하고 대학 3학년이 되면 전공별로 흩어져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 15세에 대학을 졸업한 뒤 20세에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외국으로 나가서 다시 박사학위를 더 받고 국내에 들어와서 전문분야에서 인재로 활동을 하는 겁니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영재교육 시스템이 아주 치밀하게 짜인 나라가 바로 중국입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교육정책이나 입시제도 혹은 교육현장에서 참고할 만하거나,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것이 있다면 어떤 내용일까요?]
“중국도 우리처럼 교육체제개혁에 나서고 있는데요. 중앙에서부터 밑에까지 일사분란하게 이뤄집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한번 만들었다간 몇 년 후에 확 뒤집어버리고 새로 만드는 식이 아니라 계속 내용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입니다. 10년 전에 만든 교육개혁방안이 지금까지도 그 맥을 이어오고 있어요. 중앙에서 거시적인 것을 만들어주면 지방에서는 현지 실정에 맞는 구체적인 정책방안을 만들어서 교육개혁을 합니다. 이런 게 잘 돼 있어요. 결론적으로 중국의 교육은 계획경제의 깊은 잠에서 벗어나 시장경제체제에서 꽃을 피우기 시작했어요. 중국에서 교육개혁이 급속히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시장경제의 개념을 학교현장에 접목시키는 과정이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정부가 취하는 교육정책들이 교육현장에서 비교적 잘 수용되었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중국 교육의 발전이 한국의 장래와도 연관된다고 볼 때 우리가 어떤 자세로 교육개혁에 임해야 할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봅니다.”
문화 - 문화산업에 눈뜬 문화대국, 콘텐츠는 ‘빈약’, 잠재력은 ‘막강’
- 대담자 권기영 : 권기영(權基永·39)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중국사무소장은 우리 문화의 중국 문화산업계 진출과 문화 분야의 한중협력을 위한 실무작업을 총괄하고 있다. 중국 문화산업의 최전선에 파견된 선발대인 셈이다. 베이징대에서 중국문학 박사 과정을 마치고 현재까지 9년째 중국에 체류중인 권 소장은 중국 문화산업의 구석구석을 꿰뚫고 있는 ‘중국 문화통’이다.
[나라가 크기 때문에 지역별로도 문화의 생산과 소비 유형이 다를 것 같은데요. 지역별로 어떤 특징이 있나요?]
“보통 중국 전체를 다섯 개의 문화권역으로 구별합니다. 베이징北京을 중심으로 한 화북 지역, 상하이上海를 중심으로 한 화동 지역, 광저우廣州를 중심으로 한 화남 지역, 청두成都를 중심으로 한 서남 지역, 선양藩陽을 중심으로 한 동북 지역 등인데 시장규모도 크고 각기 특색이 있습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모든 것이 갖춰진 종합도시입니다만, 상하이가 경제중심지로 외래문물이 빨리 들어오고 실험적인 요소가 강하다면 베이징은 중앙정부의 통제가 심하고 문화적 보수성이 강한 편입니다. 상하이에서 애니메이션, 온라인게임, 영화 등이 발전하고 베이징에 각종 공연이 성행하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남부의 경제중심지인 화남 지역은 홍콩의 영향을 받아서 문화적으로도 상당히 개방적입니다. 현재 모바일콘텐츠 시장의 70%를 차지할 정도입니다. 청두는 전통적으로 문화의 고도古都지만, 경제적으로 낙후돼 있다가 최근 서부대개발의 핵심도시로 떠오른 곳인데, 차茶문화가 발달해서인지 이곳 사람들은 참 놀기를 좋아해요. 이런 특성이 문화산업에서는 굉장한 이점이지요. 동북 지역은 전통적으로 중공업지대였는데, 일본의 진출이 굉장히 활발합니다. 다롄大連시에는 일본문화가 상당히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동북 지역은 또 조선족 동포가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방송이나 문화가 가장 먼저 들어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문화의 전파와 교류에 방송매체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도구도 없을 것 같습니다. 또 TV드라마는 문화산업의 중요한 아이템입니다. 중국은 방송업계의 규모 자체가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어느 정도입니까?]
“TV방송국이 368개에 채널만 2,124개입니다. TV 보급률 98%에 3억 600만 가구가 시청하고, 전체 시청자수는 10억 7천만에 달하니까 엄청난 규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2년 TV 방송시간이 총 1,095만 시간이라고 합니다. 얼른 실감나지 않는 숫자라고나 할까요. TV드라마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2002년 중국에서 촬영하여 심의를 통과한 드라마가 313편 2,642회 분에 달합니다. 국영 중앙방송인 CCTV의 8개 채널에서 방송하는 드라마만 연간 1천 회 정도이고, 각 지방의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를 모두 합하면 중국 전역에서 연간 약 8천 회 분량에 달한다는 것입니다. 가히 드라마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문화유산이 풍부한데다가 특히 인구대국이어서 책의 절대 판매량도 많을 것 같습니다. 책을 한 권 내더라도 상당한 양이 팔려나갔을 것 같은데요.]
“개혁 개방 이후 출판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개혁개방원년인 1978년 105개에 불과했던 출판사가 2001년에는 565개로 늘어나는 등 양적인 성장세가 두드러집니다. 책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기본적으로 팔려나가는 부수가 많은 것은 확실합니다. 신간서적의 판매량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5천~1만 부는 나갑니다. 일반도서든 전문도서든 그 정도는 팔려나간다는 얘깁니다. 전국의 도서관에서만 구입해도 꽤 되니까요.”
[중국에서 한류현상이 나타난 배경과 이유를 어떻게 분석하십니까?]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소득이 늘어나면서 문화소비 욕구가 높아졌습니다만, 국내에서 그것을 채워줄 콘텐츠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개혁개방 초기에는 홍콩과 대만문화가 물밀 듯이 몰려왔고, 이후 1980년대 중후반에는 잠시 미국문화가 휩쓸었다가 이어서 일본문화가 들어왔고, 다시 일본문화가 식상할 때쯤 한국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미국문화나 일본문화가 한번씩 휩쓸고 간 기간이 5년 정도니까 한류현상도 한 5년 지나면 자연스럽게 다른 걸로 대체되거나 사라져야 할텐데 꼭 그렇지는 않은 듯합니다. 구체적으로 한국 대중문화의 어떤 점이 중국인에게 호감을 샀느냐가 중요한데요. 드라마의 경우를 예로 들면 우선 배경설정이 진솔하고, 스토리 구성이 탄탄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전통적 가치관과 현대적 가치관의 충돌, 세대간의 충돌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애정관계 같은 것이 복합적으로 전개돼 굉장히 재미있다는 것이 중국인들의 대체적인 평입니다. 또 중국인들이 모두 동의할 정도로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다는 것과 함께 화면처리, 배경음악 등에도 높은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문화가 동양문화와 유럽문화의 융합체라서 흡인력이 크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일본문화가 바로 중국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는 잘 안 먹힌다는 거예요. 거부감이 많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한국이나 대만을 한번 거쳐서 오면 중국에서 잘 먹힌다는 거죠. 미국문화나 유럽문화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외래문화를 동양감각에 맞도록 융합시켜 한 단계 끌어 올려주는 맛이 한국문화에는 있다는 이야기죠. 사실 이런 평가에는 일면 서양문화나 일본문화에 대해선 두려움이 있는 반면 한국문화에 대해서는 크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종의 만만하게 보는 시각도 저변에 깔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중국의 문화교류에 있어 바람직한 방향 그리고 우리 문화의 중국 진출과 관련해 요구되는 전략은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중국 시장을 개척하지 못하고 세계 시장에서 한국문화를 드높이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리고 중국의 문화를 우리 것으로 재창조하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이문열 삼국지』가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이게 중국고전 삼국지냐, 아니면 이문열 혹은 한국 삼국지냐를 따진다면 저는 한국 삼국지라고 봅니다. 기본 스토리는 중국에서 나왔지만 이것을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콘텐츠로 가공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능력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문화도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우리 것을 자꾸 팔아야 한다는 논리에서 벗어나 우리도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문화 소비자들한테 보다 다양한 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우리 문화의 전반적인 수준이 향상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적극성과 개방적인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다만 전략적으로 저는 중국과의 문화교류에서 어깨동무하고 같이 가기보다는 거인의 목마를 탄 난장이가 돼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거인이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면서 그 위에 목마를 탄 난장이가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보는 기회로 만들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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